제가 너무 아프게 감상했던 영화.. 빨간구두...
굵은 빗방울이 무겁게 내려앉는 거리.
무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아무렇게 내동댕이쳐져 나뒹굴어져있는 빠알간 헬멧.
이탈리아 출신의 세르지오 카스텔리토 감독이 주연까지 겸한 영화 '빨간 구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 영화의 원제는 '빨간 구두'가 아니라 'Non Ti Muovere'. 영어로는 'Don't Move', 즉
'움직이지 마'이다. 영화 속 에서 '움직이지 마'라는 대사가 딱 세번 나온다...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채 응급실로 실려온 한 소녀.
신원확인을 위해 무심코 소녀의 수첩을 뒤지던 여의사는 크게 당황한채 어느 수술실로 급하게 달려간다.
응급실의 소녀는 바로 그 병원 외과의사 디모테오(세르지오 카스텔리토 분)의 딸이었다.
밖엔 마치 무언가에 화가 나기라도 한 듯한 거센 빗줄기가 계속해서 쏟아져내리고 있다.
차마 딸의 수술을 직접 집도하지 못하고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만을
기다려야하는 디모테오.
그는 여느 환자가족들처럼 수술실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딸과의 옛추억들을 떠올린다.
그러던 중 날이 개자 무심코 창문을 연 디모테오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병원앞 통로에 빨간 구두를 신은 한 여인이 팔자걸음을 걸어오더니 가지고 온 의자를 통로중앙에 내려놓코는
거기에 걸터 앉는다.
그런데 디모테오는 마치 귀신을 봤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창문을 덜컥 닫아버린채 주저 앉고 만다.
이때부터 그는 15년동안 잊고싶었던 가슴아픈 과거의 기억을 추스려낸다.
때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세미나 참석차 외딴 시골마을을 지나던중 차가 고장나자 도로변에 차를 버려둔채 정비소를 찾아 무작정 걸어온 곳에서
디모테오는 한 여인을 만난다.
가는길에 정비사에게 안내해주겠다는 그녀를 쫓아가보지만, 정비사는 자리를 비운 상태이다.
여인의 집에까지 들려 부인에게 전화통화도 시도해 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술집에서 보드카를 들이켜 겨우 갈증을 달래던 중 정비사를 만나 차는 수리에 들어가가되지만,
이래저래 시간이 걸릴것은 뻔한 일.
디모테오는 전화를 쓰기 위해 다시 여인의 집에 들렸다가 그만 여인을 겁탈하고 만다.
늦게 귀가한 디모테오는 죄책감으로 가슴한켠이 답답하다.
디모테에게는 우아한 부인 엘자가 있다.
하지만 엘자는 여느 부인들처럼 가정을위해 헌신을 하는 여성은 아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디모테오는 아이도 갖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지만, 아내 엘자는 그런것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
그저 우아하게 파티나 참석하고, 자신의 일을 즐길뿐이다. 그러다보니 집을 비우고 몇 달씩 해외에 나가있는 건 기본이다.
완벽해 보이지만, 자신이 소유한 건 아무것도 없는 디모테오는 그런 아내에게 더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사랑하지만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해 보이는 것 같아 지쳐버린 상태이다.
디모테오는 여인을 다시 찾아와 용서를 구한다.
여인의 이름을 물어본 디모테오는 자신의 이름이 이탈리아라는 여인의 말을 듣고 피식 웃어버린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이탈리아(페넬로페 크루즈 분)와 정사를 나눈다.
이때부터 디모테오는 아내가 출장을 가거나, 시간만 나면 이탈리아를 찾게된다.
그러면서 아내와의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에 더욱 실증을 느껴간다.
장모가 키우는 강아지도 못마땅하고,
아이를 갖자는 자신의 말에 건성인 아내에게도 지친 그는 이탈리아를 만날 때만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사실 아내는 부족한 것 없이자라 부족한 것 없이 생활하고 있으니
디모테오의 남편으로서의 역할은 아내가 쇼핑하면 계산하는 것 외엔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다르다.
이탈리아라는 강하고 거대한 나라의 이름을 가지긴했지만, 어딘가 부족해보이고 한없이 가녀린 이탈리아 앞에선
자신의 존재가 아니 자신의 역할이 한없이 크게 느껴지니까 말이다.
그렇게 디모테오는 이탈리아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이윽고 이탈리아는 디모테오의 아기를 갖게되고, 디모테오는 아내와의 이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고백과 이혼을 청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뜻밖에도 아내의 임신소식을 전해듣고는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연락이 끊기고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안 이탈리아는 크게 실망하여, 임신중절 수술을 받고 자취를 감춘다.
얼마 후, 만삭인 아내와 쇼핑을 하고 귀가하려던 중 얼핏 이탈리아를 보게된 디모테오는 다시금 이탈리아와 만나게 된다.
고향에 방문한 후 캐나다에 갈거라는 말과함께 이탈리아는 그렇게 도망쳐간다.
아내는 건강한 딸을 출산했지만, 디모테오는 이탈리아가 계속해서 마음에 밟힌다.
아내가 머물고있는 병원에서 빠져나와 이탈리아를 찾아간 디모테오는 말한다.
"난 당신없인 못 살아"
그러자 이탈리아가 대답한다.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고말구"
떠나는 이탈리아는 자신이 아끼던 이웃집 개에게, 또 자신이 살던 누추한 집을 향해 마치 정을
떼내려는 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래고래 소리친다...꼭 돌아올거라고 디모테오는 이탈리아의 고향방문에 동행한다.
아니 모든걸 버리고 그녀와 함께하기로 한 것일까.
열이있는 이탈리아를 위해 작은 마을에서 쉬어가는 날 밤,
디모테오는 식당에서 이탈리아와 음식과 포크를 든 채 혼인서약을한다.
그날 밤, 이탈리아는 오한에 떨며 통증을 호소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그제서야 깨달은 디모테오는 그녀를 동네병원으로 옮기고 자신이 직접 수술을 시도한다.
사인은 무허가 임신중절 수술로인한 2차 감염으로 골반복막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것 같았지만, 이탈리아는 통증을 호소하고 디모테오가 피곤에 지쳐 잠든
사이 그만 숨을 거두고만다.
미처 자신이 선물 해 준 빨간구두 한 짝을 챙기치 못한 채 그 작은 체구로 유아용관에 실려
장지로 이동하는 이탈리아를 바라보며, 디모테오는 오열한다.
그 때, 디모테오의 회상을 깨며 딸의 수술실에서 동료 의사가 나온다. 결과는 대성공.
순간, 병원앞 통로에 앉아있던 빨간 구두를 신은 여인이 살짝 미소짓는다.
미소의 끝에 슬픔이 오버랩되 살짜기 떨리는 입술.
디모테오는 창문을 열어 통로를 보지만, 의자만 있을 뿐 이탈리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딸의 무사를 아내와함께 확인 한 디모테오는 자신의 라커룸에서 무언가를 찾아, 무덤덤하게 병원 앞 통로로 온다.
그리곤 빨간 구두 한 짝을 꺼내 감사하다는 듯 키스한 후,
병원 십자통로에 내려놓콘 가볍게 뒤돌아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딸의 생사를 건 수술과함께 마치 속죄하듯 죄책감 속의 여인을 떠올리는 한 의사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가슴아픈 장면장면들과 함께 펼쳐진다.
특히나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제대로 망가져준 외모와 몸매, 이상한 팔자걸음걸이... 그 모든 것에서 슬픔이 절절히 베어나온다.
불륜을 주제로 한 영화여서 였을까. 영화에선 십자가가 상당히 중요한 미장센으로 등장한다.
처음 디모테오가 이탈리아의 집에 갔을 때, 벽에 삐딱하니 걸려있는 십자가를 디모테오가 올바르게 세워놓는다.
이윽고 그들은 삐딱한 그들의 삶이 온전해 진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영화는 디모테오에게 상당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도덕적으로도 정당화 될 순 없다.
디모테오는 불운했던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처지로 볼 멘 소리를 하고 있지만, 정작 가정적이지 못한 아내의 내면엔
그 역시 관심조차 없는건 매한가지 였으니 말이다.
그가 이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친한 동료의사와
정기총회를 빼먹으려고 비행기에서 난동을 피우고 내려버리듯, 일탈을 꿈꾸며 시작된 것만은 틀림없다.
자신은 벽에 비뚤어져 걸린 십자가를 바로 세우듯, 일탈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그만이지만,
피해자이기도 한 이탈리아에겐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내몰고가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비록 남성(디모테오)의 시선에서 그려져 있지만,
영화 '빨간 구두'를 보는 내내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아름다운 사랑의 본질에 대해 논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갖고 있을 사랑의 비겁한 면을 너무나도 아련하고 가슴 아프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영화 속 카리스마 강한 악역배우가 잘생긴 미남 스타보다 더 매력있어 보이는 것처럼
이 영화는 악한 사랑의 카리스마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빠알간 장밋빛 카리스마를...
<기억에 남는 대사>
-날 떠나지마요. 한 달에 한번이든 일 년에 한번이든 당신이 원할 때 오기만해요
-잡초는 절대 안없어지지 / 사랑해, 잡초
-당신을 위해 죽을 순 있지만, 저기에 같이 가줄 순 없어
-움직이지 마, 내가 여전히 가치가 있다는걸 느끼게 해 줘
-당신은 날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
-그녀가 죽으면 나무,강물이 다 함께 죽을테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거기 있을꺼야...당신을 만나기 이전서부터말야
우리 모두가 잔인해...좀 더하거나 덜 할 뿐이지...
첫댓글 고마워요. 물프레님!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지금 라디오에서 조수미의 광란의 아리아가 나오네요.) 이 글을 읽노라니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가 마음에 담기네요. 배우들의 연기는 볼 수없지만, 극의 전개는 진한 감동을 전하기에 충분해요.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또 기대 할께요.
기회가 되시면 꼭 보세요~ 전 영화 무지 좋아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함께 영화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