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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과 미국을 강타한 1차 대부흥, 혹은 1차 대각성 때 교회는 점차 '규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메가 처치 현상이 2000년 기독교 역사상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 이 글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다. 메가 처치는 20세기의 산물이며, 그 현상은 대단히 최근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메가 처치의 뿌리는 상당히 깊다. 오래 전부터 교회는 ‘크기’에 눈을 뜨고,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가능케 한 교회 내부의 동인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교회가 크기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추적해보고자 한다.
1. 규모에 대한 무관심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야만인들의 개종이 있은 후, 1000년이 넘도록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었기에 교회의 규모가 역동적으로 증가하는 현상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초대 교회 때부터 시행한 것으로 보이는 교구제 덕분에 개교회가 갑작스럽게 비범한 성장을 보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또 많은 목회자들은 숫자나 규모의 지나친 관심을 세속적 허영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체로 규모는 진리에 비해서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2. 18세기 대부흥운동: 규모에 눈을 뜨다
그러다가 18세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대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을 강타한 1차 대부흥, 혹은 1차 대각성 때 교회는 점차 ‘규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여러 가지의 개혁과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숫자’와 ‘규모’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영국 국교회 내에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두게 했다.
메마른 설교와 교리 교육, 형식적인 예배에 지쳐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던 대다수 교인들이 어스킨(Erskine) 형제로부터 시작하여, 휫필드(Whitefield), 웨슬리 형제(Westley)로 이어지는 위대한 부흥 설교가들의 설교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이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교회당은 이들을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최초로 야외에서 집회를 열게 된다. 한번 상상해보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와서 야외에서 집회를 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하늘로부터 무한한 성령의 은혜의 소낙비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아직까지 이런 역사는 한 번도 없었다. 놀라운 흥분과 감격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교회는 처음으로 숫자와 규모에 눈을 뜨게 된다.
3. 조지 휫필드의 착각: 규모를 하나님의 역사로 혼돈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꼽히는 휫필드의 미국에서의 사역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회의주의자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마저 그의 설교를 듣고는 고아원을 위해서 전액을 헌금하고 말았다니 말이다. 프랭클린이 참석했던 집회에 모였던 청중의 숫자는 자그마치 3만 명이나 되었다. 규모면에서 1차 대각성운동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으라면 휫필드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 휫필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숫자와 규모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휫필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숫자와 규모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와 신념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그는 ‘숫자’와 ‘규모’에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또 자신의 집회에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한 기술적 방법을 적극 개발했다.
이안 머레이나 마이클 호튼 같은 이들은 참 부흥(revival)이 거짓된 부흥주의(revivalism)로 타락하게 된 것은 알미니우스의 신학 때문이라고 하지만 최초로 숫자를 통한 부흥을 추구했던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신학적으로 휫필드는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복음 전도의 ‘효과’(effect)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첫 번째 대표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주로 야외에서 이동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교회로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 가운데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구도자 중심의 집회’를 한 것이다. 그는 집회를 열기 며칠 전에 스태프들을 미리 보내서 장소를 확보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분위기를 조성하며, 신문 광고, 설교문 배포, 풍문 조성 등을 통해 휫필드 집회에 기대심을 높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휫필드의 영웅적 면모는 각별히 부각되었다. 전형적인 스타 시스템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휫필드는 집회와 예배에 광고와 선전을 활용했다.
집회의 방식도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동시대의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방식은 이미 쓰인 설교문을 설교단에서 읽는 원고 설교였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반응은 에드워즈의 관심의 초점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선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달랐다. 그는 배우 출신으로서, 자신의 말과 억양·얼굴 표정·몸짓을 적절하게 연출할 줄 알았다.
거대한 군중 앞에서 원고 없이 즉석으로 자유 설교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ex tempore) 설교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들고, 발을 구르고, 성서의 이야기를 몸으로 극화하고, 큰 소리로 우는 등 온 몸으로 설교했다. 또 그는 사람들의 양심을 향해 직접 공격했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에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말만해도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휫필드가 ‘숫자’와 ‘규모’를 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휫필드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 휫필드가 이렇게 ‘규모’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선한 목적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모든 메가 처치의 목사들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사역했던 대중 운동가다. 대중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알았던 휫필드는 근대 거인주의의 시조로서, 카리스마적 종교 지도자의 모범이요, 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원천이다.
4. 노천 캠프 집회와 시장 상황의 개막
휫필드와 웨슬리의 야외 집회는 무엇보다 교구제의 파괴를 가져왔다. 야외 집회를 소개받았을 때 웨슬리는 처음에 주저했으나 ‘영혼 구령’이라는 지상 과제 앞에서 결국 마지못해 수용하고 만다. 그리고 웨슬리는 말했다. “전 세계가 나의 교구다!” 이제 기성 교회가 임의로 잘라 놓은 교구는 새 시대에 새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져야 하는 낡은 장벽이었다. 교회의 질서는 새로운 운동에 의해서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 이때부터 교구제는 급속히 무너져갔다.
미국의 부흥운동가들은 노골적으로 견고한 교구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19세기 이후 미국에서 노천 캠프 집회는 상당히 대중화되었는데, 캠프 집회가 교회당이 아니라 야외에서 열렸기 때문에 부흥운동은 기존의 지역 교회 구도를 벗어나 있었다. 캠프 집회에는 불신자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부흥사들은 이들의 마음을 도둑질했다.
솔직히, 신자들이 볼 때에도 기존 교회 목사들은 교구제의 보호 아래 안일하고 나태하며 영적으로 무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부흥운동가들은 뜨겁고 능력이 충만하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만 들고 전진하는 하나님의 참 종처럼 보였던 것이다. 때문에 집회에 참석했던 신자들은 참 지도자를 찾아 교회를 옮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소위 ‘수평 이동 현상’이 이때 이미 발생한다.
대다수 부흥사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조장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 목사들을 비판하며, 회심조차 체험하지 못한 목사를 과감히 떠나라고 했다. 은혜가 없고 메마르고 능력이 없는 목사를 떠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부흥 설교가들에게 가라고 신자들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부흥운동에 소극적이었던 회중 교회·성공회·장로교는 교세가 추락하고, 운동을 주도했던 감리교와 침례교는 급성장했다.
이로써 바야흐로 능력과 실력 위주의 목회 시장이 열린 것이다. 부흥운동은 새로운 교단을 출현케 했으며, 수많은 기존 교회와 교단을 갈가리 쪼개놓았다. 교단이 많아지면서 신자들의 교회 선택의 폭은 점점 더 넓어졌다. 선택권은 점차 교회에서 신자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야흐로 시장 상황이 열리고 있었다. 부흥사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장 상황 속에서 신자들은 점차 고객이 되어가고, 교회는 기업이 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 챨스 피니는 교회가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획기적이고도 정교한 방법론까지 교회에 제공했다.
5. 챨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
► 새로운 방법(new measure)
19세기 2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교회가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획기적이고도 정교한 방법론까지 교회에 제공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을 ‘새로운 방법’(new measure)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방법이란 부흥을 이루는 방법을 말한다.
부흥이란 크고 놀라운 역사로서 규모가 비범하게 크다는 것이 핵심이다. 죄인들의 회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회심이 ‘많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부흥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은 언제든지 적절한 수단과 방법만으로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피니의 부흥론의 핵심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죄인을 회심시키기 위한 부흥의 방법이 새로운 방법인데, 새로운 방법은 무엇보다 대중 집회가 필수적이다. 큰 교회 건물이 없으면 시청이나 학교 강당을 찾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노천 캠프 집회를 열었다. 이곳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다음,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즉시’ 회개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위해서 피니는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들을 동원하였는데, 환풍기를 조절하고, 음악을 신중하게 활용했으며, 그 외에도 예배의 순서를 갑자기 바꾸기, 예배를 연장하기, 거칠고 통속적인 말을 사용하기, 기도와 설교에서 개인의 이름을 거명하기, 예배 시 설교단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질문하기 등이 그 예다.
무엇보다 피니는 집회의 효과를 구체적인 척도로 측정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전부터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했던 ‘제단 초청’(altar call) 방식을 적절히 변형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도 좌석’이다. 집회가 끝날 때쯤 피니는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맨 앞에 비워둔 의자, 곧 구도 좌석에 앉게 했는데, 이것으로 그는 회심자의 숫자를 계산할 수 있었고, 집회의 효과를 숫자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집회의 목표는 구도 좌석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수의 사람들을 앉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강렬하고 응시하는 듯하며 짜릿한 느낌을 주는, 미친 듯한 예언자의 눈으로 청중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이름까지 호명하며 회개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지금 즉시!” 회심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소리쳤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고 협박했다. 청중들 사이사이에 앉은 회개를 돕는 스태프들은 죄인들이 결단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그들이 결단하고자 일어설 때 즉시 그들을 구도 좌석으로 인도했다. 이러한 방식은 직업적 부흥사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어떤 목사는 시계를 꺼내들고 “15분 안에 회개하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 오직 부흥으로
피니에 와서 부흥은 이제 절대적인 것이 된다. 부흥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피니의 주장이었다. 피니는 자주 신자들에게 이렇게 위협하곤 했다. “지금 당신이 그를 돕는다면 그가 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영혼의 피 값을 누구에게 찾겠는가?”
수많은 영혼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구하는 것, 이로써 거두어지는 부흥, 이것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말하는 부흥이 ‘숫자’와 ‘규모’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라는 데 있었다. 결국 그는 숫자와 규모가 전부라고 말한 셈이었다. 이로써 피니는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향한 제한 속도가 없는 고속도로를 닦아 놓았다.
► 부흥 테크니션, 찰스 피니?
“부흥을 일으키고 싶어도 안 되는 걸 어떡하냐?”라고 피니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부흥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아니면 부흥을 원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피니는 최초로 방법만 올바르면 결과는 자동으로 얻을 수 있다는 테크놀로지의 원리를 복음 전도에 적용한 사람이다. 피니의 부흥론은 사실 테크놀로지다.
피니에 의하면 신앙이나 회심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부흥은 ‘기적’이 아니라 정확한 ‘과학’이다. 부흥이란 ‘자연의 힘을 옳게 사용’하면 언제나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그는 말한다. “부흥은 결코 기적도 아니며 또 기적에 의존한 것도 아니다. 부흥은 당면한 수단을 옳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농사 수단을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농부는 풍작을 거둘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방법이 옳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부흥만 이루면 과정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오늘날 대다수 메가 처치 목사들의 전형적인 목회 철학이다.
► 표지로서의 부흥
부흥이 만일 과학이고 테크놀로지라고 하면 이제 누구라도 부흥을 이룰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그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자나 교회가 문제라는 말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데도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나 신자가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나 교회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흥은 신자나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표지가 된다. 부흥을 일으키는 신자나 교회는 건강하지만,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신자나 교회는 병들었거나 죽었다. 부흥은 신자나 교회, 특히 목사의 책임이다. 부흥을 일으킬 줄 모르는 목사는 무지하거나 나태한 목사다. 피니와 함께 부흥, 곧 규모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5. 무디와 이벤트의 시작
19세기 말, 또 한 명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나타났다. 드와이트 무디(Moody)다. 무디는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수십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쓰임을 받았다. 무디는 새로운 복음주의자의 모습을 창조했는데, 그것은 ‘오직 열정만으로’ 영혼 살리는 일에 올인(All-in)하는 전도자의 모습이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영혼 살리는 그 한 가지 일에 자신의 전 인생을 기꺼이 헌신했다.
▲ 피니처럼 무디에게도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이렇게 해서 무디식 이벤트 전도 집회가 탄생한다. (출처 : Moody Ministry)
무디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신학이 약했고 지식이나 논리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했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열정만 있으면 되고, 지식이나 학문은 필요 없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신학과 현대 과학을 불신앙으로 비난했으며, 축자영감설과 같은 근본주의 신앙에만 헌신하도록 촉구했다. 오직 열정만 강조하는 무디와 함께 사고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점차 만들어졌다.
무디의 열정주의는 더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도를 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그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이것은 정확히 피니의 정신과 일치한다. 그러나 무디는 피니보다 훨씬 덜 지성적이고, 대신에 더 감성적이라는 점이 달랐다. 피니처럼 무디에게도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이렇게 해서 무디식 이벤트 전도 집회가 탄생한다.
무디는 논란이 많은 피니식 ‘구도 좌석’은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심한 영혼들을 초청하는 방식을 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고 세련된 이벤트로 만들었다. 무디는 호통을 치거나 꾸짖는 대신 솔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을 내보이며,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메시지가 끝나면 모두 조용히 기도하게 했다. 그러면 파이프 오르간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기 시작한다. 음악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잠시 뒤 집회 전문 가수인 아이라 생키(Ira Sankey)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라, 지치고 상한 자여, 집으로 오라.”
생키의 노래할 때 잘 준비된 백 코러스가 중간 중간 화음을 넣어준다. 속삭이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코러스는 “집으로 돌아로라, 오라, 오! 집으로 오라”를 반복한다. 집회장은 숙연해지고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회심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면 스태프들은 그들을 준비된 장소로 인도한다. 이러한 무디의 전도 집회는 정확히 오늘날 메가 처치의 이벤트성 집회의 원형이다.
▲ 빌리 그래함과 함께 모든 '규모의 장벽'이 무너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디서나 복음전도자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기독교 하이퍼 리얼리티가 완성되었다. (출처 : Billy Graham Evagelistic Association)
6. 빌리 그래함과 테크노 복음주의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부흥 설교자 빌리 그래함은 LA의 천막 집회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도 휫필드 이후의 복음주의자의 계보를 잇는다. 그는 선조들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20세기의 테크놀로지와 잘 버무려 테크노 복음주의(Techno Evangelism)를 완성한 사람이다. 애초에 3주를 계획했다가 극적인 성공으로 9주까지 연장된 천막 집회에 빌리 그래함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 회심한 조직 폭력배 등을 게스트로 참석시켜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후 빌리 그래함의 전도 집회는 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피니의 3만 명 집회도 1974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엑스폴로74대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주최 측은 이때 158만 명이 모였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러한 대형 집회가 가능한 것은 전자 테크놀로지 덕분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대중 매체의 위력을 잘 알고 그것을 적극 활용한 미디어 복음주의자다.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 <불타는 세계> 등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했으며,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결단>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영향력을 배가했다. 또 ‘결단의 시간’ 등과 같은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인도해서 전 세계 2,500만 명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또 영화를 제작하고, TV에 출연했으며, 다양한 영상물을 사역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위성중계를 통해 전 세계 수억 명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빌리 그래함과 함께 모든 ‘규모의 장벽’이 무너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디서나 복음전도자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기독교 하이퍼 리얼리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법과 기술은 모든 메가 처치의 모범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