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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31일
말씀 : 고전2:12
제목 : 영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부활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부활에서 보는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십자가가 아니면 부활을 이야기할 수 없고, 부활은 십자가가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에서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몸, 연합 등을 설명하면서 영적인 면이 혼적인 면, 육적인 면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안에는 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고전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표현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 속사정을 알 수 있듯이 성령께서 하나님을 우리 안에 드러내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설명하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깊은 속사정을 알듯이 사람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이 그 사람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영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일들, 곧 성령의 가르치심 없이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신령한 일들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을 주관하사 성령으로 생각, 판단, 이해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가르치시는 일이 없이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신령한 일들을 알게 하십니다.
분명히 영은 실재하는 하나의 기관입니다. 고전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여기서 바울은 모여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자신의 판단이 독단적이거나 편협하지 않음을 증거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모여 그들의 판단에 의하여 음행한 자들을 징계할 것을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나 바울이나 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예수의 이름과 능력이 함께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판단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설명하고 음행한 자에 대한 징계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자신의 영이 그들과 하나 되어 이미 그가 판단한 것과 같은 판단을 내려줄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인간의 영은 동일하게 실재하는 한 기관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여기서 영과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별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이 전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영 안에서 기도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육신의 목소리나 감정, 생각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방언 기도를 체험하신 분들은 분명히 알 것이라 생각됩니다.
원래 방언은 각 나라말로 복음 전파에 사용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이 밖으로 뛰쳐나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할 때 디아스포라 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그들의 나라말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각 나라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 사람으로서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고학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깡촌의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각 나라말을 했다는 것은 분명히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님의 언어, 즉 하나님만이 이해하실 수 있는 언어로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순절 방언은 자기도 모르게 기도가 나오는 경우이기 때문에 바울은 반드시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13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방언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래서 찬양도 방언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들의 모임 속 대표기도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하다고 바울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게 무슨 말을 하든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그래서 많은 회중이 모인 집회에서는 영의 기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에 나오는 열심의 영은 혼적인 열심 또는 열정이나 뜨거움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영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열심과 노력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근거로 한 삶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통해 나타나는 위선적인 모습이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식적, 형식적, 교리적이며 진정성이나 진솔한 마음, 또는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것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재수없다’고 반응합니다. 이런 행동은 우리의 봉사와 행동에서뿐만 아니라 인사와 같은 작은 일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악수를 할 때도, 말 한마디 건낼 때도 열심 있는 영이 우리의 삶을 통해 표현될 때에 우리의 주변이 변화되는 은혜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진실하고 열심 있는 영입니다.
고후7: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디도의 영이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어 그가 고린도의 성도들로 인해 새 힘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성령께서 인간의 영을 주장하셔서 어떤 행동을 이끄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고 있고 그 주장에 맡기면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고 성령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저로서는 이런 부분을 체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교 준비는 했지만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이상한 것은 내가 열심히 준비해서 멋지게 설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설교하면 죽을 쓰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할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여지없이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는 경우를 체험합니다. 목사에게 영적인 복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설교할 때 성령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크나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한 후 내 안에 감격과 감사가 있는 까닭은 모든 성도들이 말씀에 감격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말씀이 한 사람, 아니 몇 사람의 마음에 도전이 되고 위로와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해를 감사로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일 년 동안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면서 저 자신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은혜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이단으로 넘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실천이 아직 따라오고 있지는 않지만 신앙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또한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지를 알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사실 주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계신 분들이나 영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분들은 충만한 성령의 역사를 느낄 때 부담감과 더불어 가슴 벅찬 떨림을 체험합니다. 뿐만 아니라 천사를 가장한 사탄이 가져다주는 요란하고 거짓된 유혹들도 나타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도 주십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의 제자들과 빌립의 네 딸, 그리고 아가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하며 바울을 말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제자들, 빌립의 딸들, 아가보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고 있고, 바울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누가 진짜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까? 제자들과 빌립의 딸들과 아가보는 분명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결박당하고 고난을 당한다고 하니 만류한 것입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런데 바울은 고난과 결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결박당하는 것과 고난당하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으로 받은 감동이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바울에게는 그분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인간의 영은 함께 동역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인간의 영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하고 역사하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성령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령과 우리의 영은 함께 동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적인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어떤 일을 추구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성령의 감동과 지시가 있었는가?를 우리의 영적인 기관을 통해서 깨닫는 것과 혼과 육을 통해 깨닫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욕심으로 계획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것을 사탄의 흉계에 넘어간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역사가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을 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요. 영광이요, 사명이면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롬1:9을 보면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영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된 지식과 체험을 통해 인간의 영적인 기관을 통한 영적생활은 성령께서 주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 생활, 예배 생활, 봉사와 섬김의 생활은 영적인 기관을 통한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말입니다.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서 ‘영의 새로운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는 신약이 아니라 구약에서 받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중생은 영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인간의 영은 더러워질 수 있으며 범죄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영적인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질러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십자가는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적인 부분을 정결하고 깨끗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자로 이 땅에 오사 스스로 인간의 죄로 인한 대속의 형벌을 받으시고 타락한 옛 아담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이제 옛 아담은 주님 안에서 죽었습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역사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시고 또 타락의 결과를 역전시키십니다. 그 후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한 인간의 영은 다시 지배하는 능력으로 혼과 지정의와 육신을 다스려 몸의 지체들을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의의 병기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고후10: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는 새 삶은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아도 ‘육체 가운데’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체 가운데서 산다 할지라도 ‘육체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육의 지배를 받거나 육에게 굴복당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영을 쫓아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을 보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여기의 영, 혼, 육의 순서를 한번 보십시오. 영으로 혼과 육을 지배하며, 영적인 삶을 혼과 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하게 하시고’는 하나님 앞에 흠 없이 구별되어 보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영의 거룩함으로 혼과 육의 거룩을 지켜내며 영의 통솔 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마음으로 이해하거나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직접 우리 영 안에서 증거하실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믿는다’가 아니라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엡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여기서 ‘속사람’은 성령께서 인간의 영 안에 거하시고 그곳에서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소요, 성령이 거주하시는 처소입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속사람 안에 깊이 침투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 안에서 인간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결합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최종목표는 우리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과 결합시켜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이 좀 어렵고 까다롭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를 좀 하자면 결국 우리는 구원받은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영적인 사람의 삶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올 한 해, 또한 내년에도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쫓아 살아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의 삶, 그 나라를 소망하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 이웃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으로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