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241GP 3번 벙커에서 한 청년 장교가 의문의 시체로 발견됐다. 국방부는 사건 발생 2시간 만에 서둘러 ‘자살’이라 발표했고, 유족과 인권운동가들의 끊임없는 의혹과 증거제시에도 불구하고 13년간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게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김훈 중위(요한 비안네)의 유골은 13년째 안식을 찾지 못하고 군부대 영현실 창고 안에서 한서린 세월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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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김훈 중위의 영정. |
1998년 사건이 일어난 직후 인권운동가로서 ‘판문점 김훈 중위 사건 진상규명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던 고상만 씨(스테파노)가 <그날 공동경비구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책으로 여는 세상, 2011)라는 책을 통해 ‘죽어도 놓을 수 없었던 의혹’에 대해 다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 책을 통해 국방부의 조사결과가 어떻게 조작됐고 은폐됐는지 조목조목 폭로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내가 반드시 국방부로부터 고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내용이 거짓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그동안 국방부는 철저하게 외면당한 은폐된 역사이고 시간입니다. 국방부는 무시하고 외면하면 시간이 가면서 잊혀지고, 그러면 끝이라는 생각이겠지요. 책을 다 쓴 후 내린 결론은 ‘우리가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김훈 중위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알리고 더 많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알리고 싶었습니다. 모쪼록 국방부가 이 책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을 해주기를, 그들이 맞다면 그들의 발표를 거짓이라고 비판한 나를 꼭 고발하기를 바랍니다”
고상만 씨는 지금껏 유족과 인권단체는 대한민국에서 진상규명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 모든 일에 대해 일방적인 무시로 일관하는 국방부의 태도 앞에 절망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 책을 낸 것도 여전히 지치지 않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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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공동경비구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책으로 여는 세상, 2011) |
고상만 씨는 김훈 중위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는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오히려 증거가 많아서 논쟁의 중심이 흔들리고 혼란을 초래하는 것 같아 결정적 의혹 두 가지를 정리했다. ‘화약흔과 철모’였다. 고상만씨는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를 국방부가 설명한다면 김훈 중위의 자살을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국방부는 왜 총기 실험 결과를 속였나?
총기 사망의 원인을 밝히는 핵심 사항중의 하나는 사망자의 권총을 누가 발사했는지 규명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화약흔’이 결정적 증거가 된다.
자살을 했다면 반드시 총을 쏜 손에 화약흔이 있어야 한다. 당시 국방부는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을 확률이 38%’라고 밝힌 논문을 들어 김훈 중위의 손에서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 타살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당시 제시했던 논문은 총기에 구분을 두지 않은 것이었고 김훈 중위가 사용했던 M9베레타는 화약흔이 100% 발견되는 총이다.
김훈 중위 사건 수사 과정에서 군은 1998년 10월2일, 1999년 2월6일, 2000년 1월28일 총 3차례 총기 시험발사를 실시했다. 3차례에 걸쳐 김 중위 사망현장과 비슷한 상황에서 발사자 7명이 M9베레타로 시험 발사했고 시료를 국과수에 보내 검사했다.
그러나 이 총기 시험은 애초 특별조사단과 국방부가 함께 실시하기로 되어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시험 당일, 국방부 내부적으로 처리했으며 실험 결과 국방부의 처음 주장대로 ‘화약흔이 나올 수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6년 후,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씨(라우렌시오, 전직 육군장성)가 받아낸 당시 결과 기록은 ‘모든 실험에서 화약흔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국방부가 검사 기록을 속이고 은폐하려 한 것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철모는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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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관 도착 2시간전 찍은 현장사진. |
두 번째 의혹은 ‘현장에서 발견된 철모가 누구의 것인가’라는 것이다. 고상만 씨는 이 철모에 얽힌 의혹을 밝히는 것이 진실 규명의 핵심이라고 여긴다.
“무엇보다 이 철모를 두고 지난 13년간 너무 많이 고민했습니다. 내가 이 사건을 덮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철모 문제에 대한 국방부의 태도를 도저히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저는 국방부에게 공식적으로 묻습니다. ‘그 철모는 누구의 것이며, 국방부는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했는가' 꼭 밝혀주기를 바랍니다”
국방부가 특조단과 국회의 요청에 따라 나중에 제출한 200장의 현장사진 중에 철모가 찍힌 8장의 사진이 있었다. 현장에 있던 철모는 정황상 타살자의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한 것이었으며,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법의학자 노여수 박사도 “현장에서 철모가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살인자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회신해왔다.
발견된 철모는 내피가 찢어지고, 턱 끈이 말려있었으며 녹색 위장 크림이 묻어있었다. 국방부는 그것이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미군 군의관 아레스 대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 군의관의 철모가 손상될 이유가 없었던 데다가 김훈 중위 소대원도 ‘이 철모는 경비소대의 것’이라고 증언했다.
국회, 사법부도 김훈 중위 타살 의혹에 무게 실어 객관적인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만들어 재조사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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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공동경비구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의 저자 고상만씨. |
국방부 특조단이 김훈 중위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결론짓자 국회는 이듬해인 1999년 5월 31일 부실 수사에 대한 의문 15가지를 제기하면서 ‘김훈 중위는 타살당했다’는 요지로 활동보고서를 펴냈고, 2000년 5월 2차 보고서를 통해 총기 발사 실험 결과를 중심으로 자살이 아니라는 점을 재확인,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또 김훈 중위 유족이 2000년 군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2004년 2월 서울고법은 “이 사건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결론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들고, 유족들에게 은폐 조작 의혹을 갖도록 만든 책임은 군 사법경찰관에게 있다”고 판시하며 12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역시 2006년 12월 원심을 확정하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이어 대통령 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11월2일 김훈 중위 사건 조사 결과에 대해 “군 수사당국의 자살 결론을 수용할 수 없지만, 타살 범인을 잡아내기도 어렵다”면서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의문사위가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고상만 씨는 의문사위가 국방부의 인력과 재정으로 운영됐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확정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핵심적 의혹을 부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라면서 결과적으로는 국방부의 주장이 틀렸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독립적 상설기구로 재가동 해야 다음 총선에서 각 당 인권공약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활동할 것
"진상규명이 된다고 해서 죽은 김훈 중위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족도,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땅의 또 다른 제2, 제3의 김훈이 생겨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이 모질고 괴로운 싸움을 악착같이 해나갈 것입니다."
고상만 씨는 국방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적 기구로 자유롭고 객관적으로 재조사한다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는 비단 김훈 중위 사건뿐만이 아니라 아직도 규명되지 못한 여러 의문사 사건을 재조사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유족들에게 신뢰도 있는 조사 결과를 보여주고 은폐된 진실을 밝힐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재가동’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각 당의 인권공약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고상만 씨는 인권단체 연석회의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계획이다.
고상만씨는 “징병제로 국방의 의무를 지우는 나라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진상규명위원회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간 군대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있다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국민은 알 권리가 있고, 정부는 이를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 책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고, 다만 김훈 중위라는 상징적 인물을 통해 말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투쟁 잊지 않았고, 잊지 않을 것이며, 잊어서는 안된다
고상만 씨는 지난 13년은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씨의 ‘끝나지 않은 투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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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김훈 중위 13주기 추도식에서 아버지 김척 씨가 아들의 영정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
또 그동안 아주 다양한 싸움을 겪으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지만, 국방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면서, “국방부는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와 의혹에 대해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면서 시간을 흘려버리고 있다. 아주 오만하고 무례하다”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고 앞으로 김훈 중위 사건의 시효는 2년이 채 남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고상만 씨는 공소시효에 상관 없이 끝까지 진실 규명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진실에는 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결코 이 사건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이 일은 김훈 중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억울한 죽음을 위한 것이며, 우리 사회의 인권에 대한 문제다. 특별한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며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군의문사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상징적 사건이 된 김훈 중위의 죽음. 수긍할 수 없는 수많은 의혹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은폐하려는 이상 국방부는 더 이상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안보를 위한 조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전 국방부는 ‘장병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절한 서적’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다음 리스트에 이 책이 포함될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무대응으로 일관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국방부는 진정한 군의 위상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며, 이 일이 ‘우리의 일’임을 인식하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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