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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 《난중일기》 1597년 8월 ※
16일. 맑다. 아침에 보성 군수에게 지시하여, 군관들을 굴암으로 보내어 난을 피해 달아난 관리들을 수색하게 하였다. 나주 목사(배응경)와 어사 임몽정에게 답장을 써보냈다. 박사명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더니, 그의 집은 이미 텅 비어 있더라고 하였다. 오후에 궁장(활 만드는 장인) 이지와 태귀생이 찾아왔다. 중 선의, 대남도 들어오고 김희방, 김붕만도 찾아왔다.
17일. 맑다. 아침 식사 후에 장흥 땅 백사정에 이르러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군영구미(강진군 고군면)에 이르니 온 고을이 이미 무인지경이 되어 있었다. 장흥 사람들이 많은 군량을 훔쳐내어 옮겼으므로 잡아다가 곤장을 때렸다. 수사 배설이 배를 보내주지 않았는데, 그가 약속을 위반한 것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18일. 맑다. 회령포로 갔더니 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로 보이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은 만나보았다. 관사에서 잤다.
※ 《이충무공행록》 ※
8월 18일에 회령포에 이르니 전선이라고는 다만 10척뿐인데 공(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전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거북선 모양으로 꾸며서 군사의 위세를 돋우도록 하며…
10척의 판옥선 중 거북선으로 고치게 된 것은 몇 척인지, 또 어떻게 고쳤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관아에서 문짝 등을 떼어다가 판옥선의 옆과 위를 덮고 선수 쪽에 다락방을 만들어 포탑으로 삼으면 거북선의 모습이 된다. 그리고 전선의 수가 12척이라면 학익진도 펼 수 있다.
●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19일 ※
맑다. 여러 장수들이 (임금의)교서에 엄숙히 절하였으나 배설은 교서와 유서에 고개 숙여 예를 다하지 않으니 그 모욕적이고 오만한 태도는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그 영리에게 곤장을 때렸다. 회령 만호 민정봉이 전선에서 쓸 양식을 사사로이 피난민 위덕의 등에게 넘겨주고 술과 음식을 받아먹었기에 곤장 20대를 때렸다.
이순신은 예전(1594)에도 원균이 충청병사로 전출되는 교서를 받고 교유에 절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저 무식한 것이…’ 라면서 그 무례한 처사를 《난중일기》에 기록해 둔 바 있다. 이번에도 그러한 시각에서 배설의 문제점을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조정에 믿는 배경이 있다고 오만방자해진 배설을 경계하기 위해 배설 대신 영리에게 곤장을 때렸다.
이날 내려온 선조의 교서는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힘쓰라’ 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즉각 장계를 올려 《상유12척(尙有十二隻)》 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충무공행록》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 《이충무공행록》 ※
이때에 조정에서는 수군이 무척 약하여 적을 막아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공에게 “육전에 힘쓰라” 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공은 장계를 올렸다.
“저 임진년으로부터 5~6년 동안에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사온데,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는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 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터인데, 신은 그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
20일. 맑다. 앞 포구가 좁기 때문에 진을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겼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신음했다.
21일. 맑다. 새벽에 토사곽란으로 몹시 앓아 인사불성이 되었다. 밤새도록 앉아 있다가 아침을 맞았다.
옛날, 토사곽란은 위험한 병이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
22일. 맑다. 곽란이 점점 심해져서 몸을 움직일 수 없다.
23일. 맑다. 병세가 점점 중해져서 배에서 잠을 자기가 불편했다. 전쟁하는 때도 아닌지라 배에서 내려 육지로 나와서 잤다.
24일. 맑다. 일찍 도괘 땅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하고, 정오에 어란포(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앞바다에 나와서 잤다.
25일. 맑다. 당포 보자기가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냈으나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명을 잡아와 곧 목을 베었더니 군중 안이 안정되었다.
26일. 임준영(탐색인)이 말을 달려와서 “적선이 벌써 이진에 도착했다” 고 전했다. 전라우수사(김억추)가 왔다.
칠천량에서 전사한 이억기의 후임으로 김억추가 부임해 왔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28일 ※
맑다. 묘시(오전 6시경)에 적선 8척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여러 배들은 겁만 내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해서 물러나려고만 하였다. 내가 동요하지 말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라고 명령하자, 적선은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갔다가 돌아와 저녁에는 장도(해남군 장지면)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이후 왜군 선발대와의 첫 교전이었다. 왜군들도 이 무렵에는 이순신의 복직 소식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행방도 파악할 겸 이동해 왔다가 이순신의 선단을 발견했고, 이를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친 패잔 선단쯤으로 생각하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막상 이순신의 깃발을 보고는 줄행랑을 쳤다.
왜군들은 그 길로 기지로 돌아가 바다에 이순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순신 함대의 규모 등을 보고했다.
이 소식은 남해안의 왜군 기동 함대들은 물론 호남 내륙을 타고 북진을 시작하고 있던 왜군 육군들에게도 급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왜군 수뇌진의 입장은 그리 놀랄 게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들에게 이순신이라는 존재는 이제 이빨도 발톱도 다 빠지고 없는 병든 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서진을 위해 선봉 함대와 대규모 수송선단을 이끌고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같은 생각이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최후를 안겨줄 수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때문에 이순신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 와키자카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이순신의 최후를 집행하고 싶었으나, 자신감이 넘쳐 대사를 그르쳤던 한산도에서의 사건을 떠올리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대처하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
29일. 맑다. 벽파진(진도 고군면 벽파리)에 도착했다.
30일. 맑다. 계속 진을 치고 벽파진에 머물러 있었다. 배설은 적이 대거 쳐들어올 것을 겁내어 도망가려고만 했다. 나는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행동이 아니므로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런데 배설이 자기 종을 보내어 청원서를 제출하기를, 병세가 몹시 중하므로 몸조리를 해야겠다고 하였다. 나는 육지로 나가서 조리하라고 하였다. 배설은 우수영에서 육지로 올라갔다.
9월 1일. 맑다. 전세가 탐라(제주)로부터 나왔는데 소 5마리를 특별히 싣고 와서 바쳤다.
2일. 이날 새벽에 배설이 도망을 쳤다.
도망친 배설은 그 후 자기 고향 경북 성주에서 붙들려 처형당한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
3일. 비가 왔다. 밤에는 북풍이 불었다.
4일. 북풍이 크게 불었다. 배들을 겨우 보전하였다.
5일. 북풍이 크게 불었다.
6일. 맑다. 바람은 조금 그쳤으나 물결은 자지 않았다. 추위가 엄습하니 격군들이 크게 걱정되었다.
7일. 맑다. 바람이 비로소 잤다. 탐망 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중에 13척이 벌써 어란포 앞바다에 와 대었는데 아마 그 목적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 고 하므로 각 배에 엄중히 신칙하였다. 오후 4시에 적선 30척이 바로 우리 배를 향해 오기에 우리 배들도 역시 닻을 들어올리고 바다로 나가 맞아 싸우니, 적들은 배를 돌려 분주히 도망갔다.
왜군 탐색대에 의해 이순신 함대의 소재와 규모가 파악되자 오후 4시경 왜군의 선봉 함대가 드디어 싸움을 걸어왔다.
왜군들은 10여 척 규모의 소단위 함대로 전락한 이순신 함대를 보자 ‘이번에는 한 번 해 볼만하다’ 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접전할 듯한 기세로 곧장 돌진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이 몇 척의 거북선(개조형)을 앞세우고 마중을 나가 함포사격을 가하자 왜군들의 사기는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에 왜군들은 급히 노를 저어 외항으로 빠져 나갔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7일 ※
뒤쫓아 먼 바다까지 갔다가 바람과 물이 모두 역류여서 행선할 수가 없어 다시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 틀림없이 무슨 야습이 있을 것만 같아서 각 배에 준비하고 있으라고 명령하였더니, 과연 밤 10시에 적들이 총포를 쏘며 야습해 왔다.
여러 배의 병사들이 겁을 먹은 것 같아서 다시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를 곧장 앞으로 이끌고 나가서 적선을 향해 대포를 쏘자 천지가 진동하였다. 적들은 당해내지 못할 줄 알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갔다 하면서 대포만 쏠 따름이더니, 자정 무렵이 되어서 물러갔다.
오후 교전 후 곧바로 정박지로 도망쳐온 왜군들은 비록 이순신이 소단위 함대를 이끄는 단위 대장 신세로 전락했다고는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시인하면서 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작전을 계획했다.
이들이 계획한 작전은 원균의 조선 함대를 궤멸시켰을 때와 같은 기습전이었다. 왜군들은 칠천량에서와 같이 야간기습으로 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이순신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즉각적으로 응수해오자 왜군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기습을 당한 것처럼 당황했다.
기습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왜군들은 수차례에 걸쳐 ‘사냥개 곰몰이’ 식의 치고 빠지기 전술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소규모의 선단으로도 자신들을 압도했고 자리를 지키며 자신들의 유인전에 내응하지 않았다.
소득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왜장은 문득 ‘지치는 쪽은 우리들이고 오히려 이순신의 꾀에 말려든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햇다. 이에 왜장은 함대를 물려 돌아갔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8일 ※
맑다. 적선은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대책을 의논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기껏해야 일개 만호에 적합한 인물이지 국방의 책임(수사의 직무)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도 좌의정 김응남이 사사로운 정으로 무리하게 임명해 보냈으니, 이러고도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불행한 시국을 탄식할 따름이다. 참으로 통탄스럽다.
김응남은 당쟁의 시각에서 원균을 통제사로 삼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김억추를 추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당쟁의 논리로 부임해 온 배설 경상수사가 도망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 같은 문제들이 자꾸 불거지자 이순신은 ‘불행한 시국을 탄식할 따름’ 이라며 속을 끓였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9일 ※
맑다. 이날은 중양절로서 1년 중 명절이므로 나는 상제의 몸이지만 여러 장병들은 먹이지 않을 수 없어서 제주에서 실어온 소 5마리를 녹도(송여종), 안골포 두 만호에게 주어 장사들을 먹였다. 적선 2척이 어란포로부터 감보도(진도군 고군면)로 바로 들어와서 우리 배의 많고 적음을 정탐하므로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뒤를 추격햇으나 놓치고 말았다. 적들은 황급하여 배에 실었던 물건들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 버리고 달아났다.
소 5마리를 잡아 장병들을 먹여주어 군의 사기를 높였다. 약 3천 명에게 쇠고깃국을 먹인 것이다. 이순신 본인은 상제의 몸이어서 고깃국을 먹지 않았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
10일. 흐리고 비가 왔다. 배 위에 홀로 앉아 그리운 생각에 눈물을 지었다. 천지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회도 내 심정을 알고는 몹시 불안해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칠천량에서 수중 고혼이 된 동지들이 그리웠다. 아들 회가 아버지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가시밭길을 보며 하늘과 세상을 원망했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
12일. 비. 배 뜸 아래 앉아 있으니 마음이 산란하였다.
13일. 맑다. 북풍이 크게 불었다. 꿈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 임진년 대승첩 때의 일과 비슷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며칠 후에 있을 울돌목(명량) 해전을 계시하는 꿈을 꾼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4일 ※
맑다.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진 건너편에 신호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어 실어와 보니 바로 임준영이었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한 후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2백여 척 중에 55척은 벌써 어란포 앞바다로 들어왔다” 고 하였다.
대규모 왜선단의 움직임이 어란포 근처에서 감지되었다. 이순신은 직감적으로 대해전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4일 ※
그리고는 또 하는 말이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사람인 중걸이 말하기를 ‘이달 6일 달마산(해남)으로 피난갔다가 왜적에게 붙잡혀 묶여서 왜선에 실렸는데, 이름을 모르는 어떤 김해 사람이 왜장에게 사정해서 묶은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왜놈들이 깊이 잠든 사이에 김해 사람이 저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말을 들으니,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왜적) 배를 추격하여 혹은 쏘아 죽이고 또 배를 불태우기도 했으니 보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여러 배를 불러 모아서 조선 수군을 다 죽여버린 후에 바로 경강으로 올라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말을 비록 다 믿기는 어려워도 역시 그럴 수도 있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띄워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어서 뭍으로 올라가도록 타이르라고 하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피난민들을 산으로 대피하도록 전령을 띄웠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
맑다. 벽파정 뒤에는 명량(울돌목)이 있는데, 몇 척 안 되는 적은 수의 전선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으므로 조수를 타고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짐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좁은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 명의 적을 두렵게 한다’ 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 결코 살려는 생각을 품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라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거듭 엄격히 다짐해 두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하면 크게 승첩하고,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 고 일러주었다.
‘명량 해협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고 했는데, 등지고 진을 친다면 유속이 12~16km 일 때는 병선들이 떠내려갈 정도가 되므로 진의 대오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의 진도대교가 있는 위치에서 옮겨가서 유속이 비교적 완만한 우수영 앞바다 쪽에다 진을 쳤다. 신인의 말씀이 이튿날 이순신이 울돌목에서 기획 · 연출한 작전계획의 계시몽이었을까.
벽파진에서의 해전 상황을 보고받은 와키자카 등 왜군 함대 수뇌진은 이순신이 거느렸다는 조선 함대의 규모를 확인하자 일단 크게 안도하면서 그토록 고대하던 서해 진출의 날이 다가왔음을 확신했다.
미리부터 서해 진출을 기념하는 자축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함대 수뇌진의 관심사는 자연히 이순신에게 모아졌다. 칠천량에서의 승전으로 지금껏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당한 수모를 되갚았노라고 자위해 왔지만, 원흉이 빠진 반쪽짜리 승리였음을 모두는 아쉽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나머지 반쪽은 응당 이순신으로부터 받아내야 할 몫이었고, 온전한 승리를 갈구하던 왜장들에게 하늘은 뜻하지도 않은 선물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해 진출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할 수 있는 이벤트까지 마련되자 기동 함대 사령관들은 앞 다투어 영광의 순간을 쟁취하고 싶어 했다. 10척에 불과한, 그것도 칠천량에서 도망쳐 왔을 패잔 선단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기에 왜장들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승부였다.
벽파진에서 이순신 함대와 교전을 벌이고 돌아온 왜군들로부터 “이순신은 아직 건재하며 몇 척 되지도 않는 전선을 거느리고서도 결코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는 보고를 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발악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왜장들은 저마다 자신이 이순신의 최후를 집행할 적임자임을 자처하며 출전 의지를 밝히고 나섰다. 그러나 와키자카 등 일부 왜장들의 생각은 달랐다.
서해 보급로 확보의 의미를 이순신이 모를 리 없었고, 자신들이 서해로 순순히 나가도록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이 이순신과 겨루는 마지막 승부가 될 것이다. 와키자카 등은 이 승부로 인해 힘들게 얻은 대세가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어떤 계략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승리를 갈망했다.
왜장들은 대규모 연합함대로써 이순신과 그 휘하 잔당들을 일거에 쓸어버린다는 작전을 구상했다. 대 함대의 위용만으로 적의 항거 의지를 짓밟아놓겠다는 왜장들의 구상은 선봉 함대와 일정 거리를 두고 서진 길에 나선 수군 총사령관 구키 요시다카에게도 전해졌다.
구키는 즉시 선봉 함대의 작전에 동의했다. 그리고는 선봉 함대가 머물고 있던 해남 어란포를 서해 진출을 위한 중간기지로 삼겠다고 전하면서 서진 중인 다른 함대들의 어란포 집결을 명령했다.
9월 중순이 되자 명령을 받고 항진해 온 왜군 함대들이 어란포에 들어와서 닻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히데요시로부터 “함대의 선봉을 맡아 이순신의 수급을 베어 바치라” 는 특명을 받고 달려온 기동 함대 사령관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있었다. 그는 ‘돌격전의 달인’ 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무명(武名)을 떨쳐온 수군 장수였다. 그의 수영(水營)은 왜국의 울돌목으로 일컬어지는 미야쿠보 해안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울돌목에서의 해전을 가상한다면 최고 적임자였고, 더구나 임진년 당항포해전(1595년 6월) 때 ‘검은색 왜군 함대’ 를 지휘하다가 전사한 왜장과는 친형제지간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임하는 각오 또한 남다른 면이 있었다.
이러한 이력이 히데요시가 구루시마를 선봉장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이순신이 제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몇 척의 배만으로는 대규모의 파상 돌격전을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생각이었다. 히데요시는 구루시마를 앞세워 일본 수군의 상징인 돌격전으로 조선 수군의 상징인 이순신을 꺾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명량 대첩
※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군(별도로 조직된 정탐군)이 나와서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들이 명량을 거쳐 우리 배를 향해 들어오고 있다” 고 하였다.
9월 16일, 새벽 4시경. 어란포에 집결해 있던 왜선단이 목표를 향해 기동을 시작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도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 기동 함대 사령관들의 연합으로 편성된 300척이 넘는 초대형 함대였다. 왜선단은 벽파진을 거쳐 곧장 울돌목으로 향했다. 조선 반도의 바다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을 이순신이 제2의 견내량이라 할 수 있는 울돌목을 자신들이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척후선의 보고 역시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 함대가 울돌목에 나타났고, 아마도 우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는 것이었다.
오전 9시경, 왜선단은 울돌목 어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때는 울돌목의 유속이 빨라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왜군들은 진도 해안에서 머물다가 유속이 느려진 12시경에 울돌목으로 진입했다.
선봉 함대를 이끌고 맨 먼저 해협에 진입한 구루시마의 시야에 조선 함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듣던 대로 이순신에게는 병선 10여 척이 전부였고, 이순신의 기함은 거북선이 포함된 5~6척의 호위선단을 거느리고 자신들을 마중하려는 듯 멀리서 노를 저어 오고 있었다.
표적을 확인한 구루시마는 즉각 선봉 함대에 공격대형을 갖추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왜군 돌격대를 실은 돌격선단이 신속하게 전방으로 포진해 나아갔다. 구루시마의 직할 호위선단이 기함을 호위한 채 돌격선단의 뒤를 따르자 후방의 선단들도 진형을 갖추고 항진했다.
전투 진형이 갖춰지자 구루시마는 후방의 중군 및 후군 함대들과 수기를 통해 상호 ‘작전준비 이상무’ 를 교신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하자 구루시마는 지체 없이 돌격선단에 공격을 명령했다.
“속히 돌진하라!”
구루시마가 신속한 공격을 주문한 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머뭇거릴 이유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하루에 4번 바뀌는 울돌목의 조류를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왜군들로서는 물살의 유속이 느려지는 12시에서 2시 사이에 조선 함대를 완전히 궤멸시키고 전 함대가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만약 궤멸시키지 못한다면 이순신이 자신들의 뒤를 따라 항진해 오고 있는 보급 선단들을 차례로 불태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구루시마를 비롯한 왜군 함대 수뇌진의 마음은 울돌목에 진입해 들어온 순간부터 조금해지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내야 한다. 이 점은 조선 함대의 최후를 관장해야 할 구루시마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진해 갈수록 구루시마의 시야에 조선 함대의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들어왔다. 조선 함대 역시 자신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내심으로 ‘이순신이 우리의 위용에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품고 있던 구루시마로서는 운명에 순응하듯 자신들을 마중 나온 이순신의 용기가 그저 고맙고 가상할 따름이었다. 구루시마의 눈에는 이순신의 이 같은 행동이 죽기를 작정하고 덤벼드는 무모하면서도 맹랑한 도전으로 보였다.
함교(층루)에 앉아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구루시마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결전의 순간이 임박했음을 고성으로 알렸다. 그리고 목표와의 거리가 제법 좁혀들자 지휘봉을 잡은 구루시마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적을 포위해서 도선(渡船)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신호를 접수한 돌격선단들은 이내 조선 함대 주위로 모여들어 겹겹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
곧이어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330여 척(초고에는 130척, 또 다른 초고에는 133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는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없다고 낙심하면서 모두 회피할 꾀만 내었다. 그 와중에 우수사 김억추는 벌써 아득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133척은 선두에 선 전투선단이고 330척은 그 뒤를 따르고 있는 후방의 함대를 포함한 것 같다. 어떤 기록에는 6백여 척, 또 어떤 기록에는 1천여 척이라고도 되어 있는데, 이는 서해 진출을 위해 전라도 해상에 머물고 있던 전체 규모의 왜선단으로 보인다.
왜선단이 바다를 뒤덮듯이 몰려오자 조선 함대 수병들은 망연자실했다. 이순신은 이 같은 가능성을 내다보고 9월 15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生卽死 必死卽生)’ 론에 대해 두 번 세 번 거듭 엄격하게 다짐해 두었지만, 후군장 김억추의 기함조차 겁에 질려 노 젓기를 소홀히 하자 약 2마장(800m)이나 멀어져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 바람과 우레같이 터뜨렸다. 군관들도 배 위에 가득 서서 빗발같이 쏘아대니 적도들은 당적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하지만 왜군들은 여러 겹으로 둘러 싼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배 위의 모든 사람들은 형세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서로 돌아다보며 어찌 할 줄 몰랐는데, 모든 사람들의 얼굴빛은 사색(死色)이 되어 있었다.
이순신은 왜군들이 12시경에 총공격으로 나올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또 오후 2시 안에 해협을 통과하려고 시도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자면 왜장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설 것이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선봉 함대를 이끌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선단을 막아섰는데, 이른바 ‘거북선+학익진 공격’ 의 시작이었다.
이순신이 선봉에 선 것은 망연자실해 있던 군사들에게 몸소 ‘필사즉생’ 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왜장과 그 기함에 대한 공격을 위해서였다.
돌격전을 위해 이순신의 선봉 함대를 향해 다가온 왜군 돌격대들은 조총의 밀집사격으로 초전부터 기세를 올리는 듯했다. 그러나 방탄을 대폭 강화하고 출전한 판옥선단에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거북선과 판옥선단의 일시집중타 공격에 왜군 돌격선단에 불이 붙는 등 왜군 측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돌격(포위)→도선→백병전의 순서에 따라 조선 함대 지휘부를 초토화시키겠다던 돌격대 제1진은 돌격은커녕 배에 붙은 불을 끄거나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살탄과 산탄 공격을 피해 몸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코앞까지 접근해 온 거북선들이 대포 사격과 함께 자신들의 배 위로 온갖 투척용 포탄(발화탄, 질려탄, 진천뢰 등)들을 집어 던지자 선두에 선 돌격선단은 아비규환의 대혼란에 빠져버렸다. 절대적 우세 속에서 치르게 될 해전이었기에 이순신의 수급이 돌격대원들에 의해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자신했던 구루시마는 상황이 전혀 이상하게 돌아가자 직접 호위선단을 이끌고 재차 돌격을 독려하고 나섰다.
“물러서지 말고 돌격하라!”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왜군 돌격대들은 다시금 돌격태세를 갖추고 도선을 준비했지만 거북선과 판옥선단이 퍼부어 대는 가공할 화약무기 공격에 선뜻 돌격에 나서지 못했다.
돌격전이 성공하려면 자신들의 앞을 막아선 채 근접 사격을 해대는 거북선의 돌격 저지선을 돌파해야만 했다. 그러나 조총으로는 거북선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왜군들은 조선 함대 주위를 겹겹이 에워싸면서 기회를 엿볼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조선 함대를 에워싼 맨 앞줄의 돌격선단들은 또 다시 거북선과 판옥선단의 시스템 식 공격(협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차례차례 전열에서 이탈해 나갔다.
한편, 조선 함대가 왜선들에 겹겹이 포위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육지의 백성들은 ‘이제 다 죽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
나는 차분히 타이르기를 “적이 비록 1천 척이라 하더라도 우리 배를 쉽게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서 적을 쏘라!” 고 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나 있으면서 바라만 보고 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즉시 배를 돌려 중군장 김응함의 배로 가서 그 목을 베어 효시(梟示)하고도 싶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날 것이고, 그로 인해 적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면 사세가 크게 그르쳐질 것이기에 곧 호각을 불어 중군의 영하기(令下旗)를 세우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다.
그러자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다가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이르렀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부르며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라고 하니,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이번에는 김응함을 부르며 “너는 중군장이면서 멀리 피하기만 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고 하였다. 이에 두 배(안위와 김응함)가 바로 들어가 접전을 벌이자 적장이 그 휘하의 배 3척을 지휘해서(초고에는 적장선과 다른 배 2척과 합하여 3척이라고 되어 있다) 싸움을 독려하자, 왜군들은 한꺼번에 안위의 배에 개미 달라붙듯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기를 맹세하고 싸우는데, 혹은 모난 몽둥이를 쥐고, 혹은 긴 창을 잡고, 또 혹은 큰 자갈 덩어리로 사정없이 치고 때리며 싸우다가 힘이 거의 다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배를 돌려 바로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 적선 3척에 타고 있던 적들을 남김없이 무찔렀는데, 이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연달아 와서 합력하여 적을 쏘았다.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한 놈도 없었다.
이순신으로부터 호통을 들은 안위와 김응함은 애초의 작전대로 왜장선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이에 구루시마의 기함과 3척의 호위선들이 돌진해 들어간 안위의 판옥선에 달려들어 백병전을 위한 도선을 시도했다.
바로 그 순간, 거북선을 포함한 모든 판옥선에서는 구루시마의 기함과 휘하선 3척을 표적으로 삼아 일시집중타를 날렸다. ‘거북선+학익진의 판옥선단’ 에 노출된 구루시마의 기함과 그의 호위선단은 그 순간 ‘거북선+학익진의 판옥선단’ 에 역(逆) 포위되었고, 그것으로 최후를 마쳤다.
조선 함대는 에워싸고 있던 왜선들에게는 최소한의 수비를 위한 공격을 펼치는 대신에 나머지 화력은 왜장이 탄 배에 집중시켰다. 왜선들이 겹겹이 에워쌓으나 뒷줄은 사격에 나서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왜장은 ‘거북선+학익진의 판옥선단’ 에 역 포위되어 최후를 맞았다. 또 일부 왜선들은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해협 서쪽으로 떠내려갔는데, 그 배들은 의병으로 참전한 조선 어선들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깨졌다.
‘그래서 나는…’ 에서 ‘나’ 에는 이순신의 기함과 직할 거북선 및 판옥선들이 포함된 소형의 ‘거북선+학익진 함대’ 로서 모두 5~6척의 선단이었다. 이들 선단은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왜군들을 향해 편전, 장전(보통 화살), 피령전, 산탄 등을 빗발치듯 쏘아 그들을 고슴도치와 같이 만들었다.
이순신의 기함과 직할 선단이 안위의 배를 구하고 있을 때 중군과 후군에 속한 송여종과 정응두의 판옥선도 합세했다. 즉, 13척 모두가 ‘거북선+학익진’ 으로 공격에 나섰고, 때문에 구루시마의 기함과 30여 척의 호위함들은 당포와 당항포에서 궤멸된 왜군 지휘부처럼 해전 초에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
항복해 온 왜인 준사라는 자는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하해 온 자인데, 그가 내 배에 타고 있다가 내려다보며 “저 무늬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구루시마 미치후사)입니다” 고 하였다.
내가 물 긷는 군사인 김석손(초고에는 김돌손으로 되어 있다)을 시켜서 갈고리로 뱃머리 위로 끌어올리게 했더니, 준사가 펄쩍펄쩍 뛰면서 말하기를 “맞다, 마다시다” 고 하였다. 그래서 곧바로 그의 몸을 토막 내어 자르게 하니(그리고는 토막을 장대에 매달아 높이 내거니) 적들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치열한 난타전 속에서 왜장 구루시마는 자신이 앉아 있던 층루가 박살나자 바다에 굴러 떨어졌고, 이순신은 아직 숨이 붙어 있던 구루시마를 건져 올려 갑옷 채 토막 내어 판옥선 장대 높이 내걸게 했다.
‘이순신의 목을 베어 일본 수군의 치욕을 씻겠노라’ 고 호언장담하던 왜군 사령관의 토막 난 주검을 본 왜군들은 그 순간 싸울 마음이 완전히 달아나고 말았다. 사실상 해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멀리서 구루시마의 최후를 지켜본 와키자카 및 왜군 함대 수뇌진도 뜻밖의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봉 함대 사령관과 그 지휘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박살난 것도 놀라웠지만, 이순신이 330:13의 대치 구도를 한 순간에 역전의 대치 구도로 바꿔버렸다는 것은 과연 이순신이 인간인지 신인지를 의심케 하는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조선 함대를 에워쌌던 제1선의 왜선들 외에는 모두가 허수(虛數)의 전력이라는 판단이 서자 와키자카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좌절감을 느꼈다.
이렇게 해전을 계속하다가는 왜장들 모두가 구루시마의 전철을 밟아 차례차례 최후를 맞게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순간 임진년 7월 한산도에서 겪었던 공포가 다시 엄습해 왔다. 장소만 다를 뿐 이순신이 노리는 것이 기함의 지휘부라는 것을 깨닫자 와키자카는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이순신의 계략에 말려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감추고 있을 흉계의 깊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와키자카 등은 더욱 두려웠다.
그 와중에 해협 양 편의 육지에서는 난 데 없이 군악소리와 함께 강강수월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또 해협 저 멀리 실체를 알 수 없는 수백 척의 선단(어선단)에서도 군악이 울렸기 때문에 새가슴이 된 왜장들은 그 진상을 파악할 새도 없이 전 함대에 퇴각령을 내렸다.
왜장들은 뭔지 모르는 흉계의 실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고, 서둘러 해협을 빠져 나가는 것만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물살이 급류로 바뀌면 꼼짝없이 해협에 갇히게 되고, 만약 그때 이순신이 숨겨 놓았을지도 모르는 복병선단이 퇴로를 막고 양 쪽에서 공격해 온다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군들은 퇴각 시점에서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조선 함대의 집중 공격에 불이 붙은 선두의 왜선들이 마침 조수의 흐름이 바뀌자 자신들의 진영 속으로 떠내려 왔고 곧바로 연쇄방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
우리의 여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울리며 나아가 각각 지자, 현자 대포를 쏘고, 또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 적선 30척을 깨뜨렸다. 그러자 적선들은 퇴각해 달아났고 다시는 우리 수군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는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싸움하던 바다에서 그대로 정박해 있고 싶었으나 물결이 아주 험하고, 또 바람조차 역풍인데다가 우리 수군의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웠기 때문에 진을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옮겼다.
‘물결이 아주 험하다’ 고 했는데, 오후 3시경이다. 물결도 빨랐지만 왜군들이 울돌목 해협을 벗어나 넓은 바다로 되돌아 나가고 있었기에 이순신은 함대를 물리어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
13척의 조선 함대로는 왜군들을 쫓아 넓은 바다로 나가서 싸우는 것은 ‘사냥개 곰 몰이 작전’ 에 휘몰릴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초죽음이 될 정도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울돌목에 탐망선을 배치해 두고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울돌목해전에 대해 ‘기적’ 이라거나 ‘천운’ 이라거나 하는 얘기들이 많지만, 그 날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이순신은 필승을 염두해 두고 임한 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울돌목해전을 다음과 같은 8단계로 구분해 볼 때, 왜군들로서는 어느 한 단계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힘든 해전이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20세기의 세계 수군들은 울돌목해전을 가리켜 ‘신산(神算)의 해전’ 이라 불렀다.
첫째, 왜장 구루시마는 거북선의 용머리포, 혹은 일시집중타에 맞아 초전에 바다로 굴러 떨어졌다. 이순신은 구루시마를 건져 올려 토막을 낸 후 뱃전에 걸어 왜군들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도록 했다.
둘째, 잇달아 구루시마의 직할 선단마저 화염에 휩싸이자 거기에 타고 있던 3천여 명의 왜군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해협은 허우적대는 왜군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셋째, 불탄 왜선들은 마치 조류가 바뀌자 후방의 왜선단 속으로 떠내려 갔다. 이는 ‘적의 배를 불 질러 적의 함대를 불태우는 방식’ 인데 그 시점 또한 절묘했다.
넷째, 왜군 측에는 퇴각령이 내려졌다.
다섯째, 반면에 조선 함대에는 공격령이 내려졌으며, 요란한 군악소리에 맞춰 수병들 모두는 신들린 듯 공격하였다.
여섯째, 왜군들은 귀신같은 이순신이 부근 섬 어딘가에 복병 함대를 숨겨놓고 퇴로마저 끊고서 공격해 오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
일곱째, 육지와 진도 양쪽에서 강강술래의 노랫소리와 군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여덟째, 때마침 공포의 조류 유속 16km의 시점의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왜군들은 얼이 빠져서 달아났다.
첫댓글 최근에 알았는데 난중일기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야사들이 많다죠. ^^
명량영화 볼만함
존경합니다.
꿈에 신이 나타나 작전까지 다 알려주었다니... 정말 하늘이 도왔군요~~ 그 전에도 이순신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의로운 사람은 하늘이 돕지 않았나 생각을 가끔했었는데..
꿈이 상스러우면 점을 치기도 하셨죠.
영화가 기대되네요^^ 명량이 이순신장군과 조선의 최대 위기상황을 다룬 얘기죠 군도라는 영화는 민란을 다룬 영화이고. 요즘 이런 영화들이 연달아 나오는거보니 좀 이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