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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혼(결혼, 이혼, 재혼)의 아픔을 딛고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한 인생의 삶이 결혼으로 인해 생기는 삶의 굴곡을 도 돌아 본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때 옆자리 친구로 인해 한 여인 지향(芝香)이를 알게 된 것이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충남 화양에서 한의사를 아버지로 둔 친구였는데 어느 토요일에 집에 같이 가자고 하여 처음으로 친구 집에
갔고 ,그 후 주말이면 가끔 가면서,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같은 고 1이었던 당고모를 소개 받았고,
그로 인해 몇 차례 더 만나면서 점점 더 가까워져 갔습니다.
그런데 지 향이의 부모님이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시면서 가정이 급격히 어려워져 지 향이는 더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고 집에 있어야 했기에, 내가 친구 집에 가는 날에만 만날 수 있어 주말이면 그녀를 만
나기 위해 더욱 자주 가며 인연을 이어 갔습니다.
그런데 나 또한 고 3을 마치고 가난으로 대학을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이면서 심한 우울증에 걸려 결국 극단
적 선택을 했고, 다행히(?) 생명을 건지고 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 지 향이가 보고 싶다는 말에, 아버지는
단숨에 그 먼 곳까지 가셔서 내 아들이 지금 이런 형편인데 너를 보고 싶다 하니 살린다는 마음으로 나와 같이
가주지 않겠니 사정 하였지만 거절을 당하시고 오셨습니다.
나중에 안 일인데 지 향이는 부모님이 별세하신 후 어려운 가정을 살리기 위해 어느 부잣집 며느리로 시집을
가기로 정혼(定婚)한 사이였고, 나는 나대로 무작정 상경하여 하늘의 도움으로 기적처럼 바라던 대학을 다니
게 되면서 지 향이와의 인연도 멀어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군 근무 중 상병 때 휴가를 나와 맨 먼저 친구 정원 이를 마나면서 들은 소식이 나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생길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지 향이가 이혼을 전제로 집에 와 있다는 소식에 나는
지나간 사정은 모두 잊고 내일 만나게 해 달라 하였습니다. 결혼 6년 만에 이혼이라니 더구나 5살 먹은 아이도
있으면서 말입니다.
다음 날 나는 지 향이를 만나다는 마음에 죽어있던 사랑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군산에서 지 향이를 만나는 순간 모든 일이 믿어지지 안 했습니다. 지향이 나이 26세이었고 부잣집의
아들, 초등학교 선생님과 결혼했다 하지 안 했는가? 그런데 지향이는 중년 여인이 되어 있었고 꼭 어느 시골
아줌마나 입을 옷을 입고 나왔더군요. 마주 앉아 사정을 들으면서 그간의 삶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나 싶으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향은 지향이 대로 나를 버리고 부잣집으로 시집을 간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얼마나 미안해 할까 하는 마음이 드니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동종 선근 설(同種善根 說)에 의하면 부부의 연은 8000 겁(劫)<1>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버리고 떠난 지 향이를 다시 만나 아내로 맞이한다면 나와 지 향이는 이미 8000 겁의 연
이 있었던 것일까요?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는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내 가슴은 타 들어 가기 시작했습니
다. 그러나 내 마음은 부모님에 대한 죄는 용서 받을 수 없겠지만 지향이 만 정리가 되면 아내로 맞을 결심을
하고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친구는 나의 결심을 듣고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너를 버리고 떠난 여인을 다시 아내로 맞이한단 말이냐 하며
극구 말렸습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이 강함을 알고 친구는 전전긍긍하였습니다.
부대로 복귀한 나는 그간 숨겨둔 사랑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지향이 생각에 군 복무가 제대로 돼질
안 했습니다. 매일 지 향이를 그리는 일기를 쓰며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랬습니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했
다면 연락하면서 진행할 수 있었겠지만 최전방 북한과 마주 한 곳에 근무하는 나는 마음만 애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상병이었던 1966년 4월 10일. 임무가 있어 연대에 다녀오는데 초소에서 ‘최 상병 님! 누가 면회를
와서 여관에 계십니다. 아기랑 같이 왔던데요.’하지 않는가? 나는 직감적으로 지향이가 왔나 보다 하고 가보니
역시 지향이었습니다. 깜짝 놀랄 일이었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걱정이 엄습
했고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그로부터 우리의 결혼생활은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제대하려면 8개월이 남았고 겨우 육군 상병이 규정에도 어긋
나는 신혼 살림은 어떻게 견디며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부모님을 어떻게 이해 시켜 드려야 하는 걱정이 나를 힘들
게 하는 하루하루였습니다.
로마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결혼을 하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마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는
"인간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결혼이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하라" 는 경구가 있습니다.
결혼은 인륜지사라 했고 존 헤이워드는 “인생의 행복도 불행도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이다” 고 했습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철학 교수 님이셨던 이 상은 교수 님께서 강의 중 결론이란 말씀을 쓰시는데 앞 뒤 문맥으로
보아 결론이라는 말씀이 맞지 않아 무슨 말씀인가 의아하고 있는데 계속 듣다 보니 결혼이란 말씀을 그렇게 결
론이라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먼 훗날 결혼이 인생의 행과 불행의 결론이란 말씀이 크게 느껴지면서 그때는 몰랐
던 것을 후회하게도 되었습니다.
하여튼 1966년 12월 말 일 제대하기 앞서 지향 이는 1주일 먼저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과거에 아버지와 그런
일도 있었던 여인이, 첫 아기까지 임신하여 배는 불룩하고 5살 난 딸마저 함께 도착했으니, 조그만 시골 동네가
발칵 뒤집히는 소란이 벌어졌고 부모님은 또 얼마나 기가 차고 섭섭하셨을까 생각하면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부모님께 저지른 큰 불효였습니다. 첫 딸을 낳고 5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안 된 지향 이가 나를 만나자 마자 임신
이듬해 첫 딸을 낳은 것은 정녕 운명인가 싶습니다.
이듬해 직장을 구해서 1년을 넘게 부모님 밑에서 어렵게 지낸 아내와 딸을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살기 시작 했습니다.
겨우 6만 원으로 전세 집을 얻어 시작한 신혼 살림은 직장마저 탐탁하지 않아 삶 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참으로 힘든
삶이었지요. 직장이 주인이 5번 바뀌면서 그때마다 점령 군들에게 좌천을 반복 당하였고, 전세 집도 7번이나 옮기는
동안 아이도 3명이나 낳았고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뒤에, 내 집 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아내가
겪은 고생은 옛말 그대로 조강지처의 삶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의 운명을 산산히 찢어 놓은 것은 마지막 사주였던 동아 그룹에서 인수하면서 생겼습니다. 7 년 넘게
기획부장으로 있던 나를 인수할 때 협조 안 했다는 핑계로 광주로 좌천 시켰는데, 1년 후 전국 영업국 성적 1위를
하여 다시 영업부장이 되고, 1년 뒤에는 영업본부장이 되어 전국을 다니며 영업 독려를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국장 1년에 본부장 5년을 합해 6년 여를 월요일에 집에서 출발하여 금요일에 올라오는 업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삶을 폐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또한 사람이 변하면 얼마나
무섭게 딴 사람이 된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루는 어느 지인이 나를 보자더니 “진이 아빠, 지금 진이 아빠가 그럴 때가 아니야. 진이 엄마 잘 살펴봐요." 해서
자세히 알려고 하였지만 '나는 거기까지 얘기 했으니 이제 알아서 챙겨요' 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를 만나 온갖 고생 다하며 내 집까지 마련하고 이제 살만한 처지가 되었는데
조강지처 지향 이가 변하다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합니까? 5년을 지방으로 다니면서 살피기 시작했고
모든 정신이 온통 집에 쏠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갔습니다.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집으로 와야 하나 고민도 했지
만, 나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집에 전화했고 낮에도 수없이 전화로 확인했지만 한 번 나간 사람이 결코 돌아서지 안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참고 견디며 버티면서 어떻게 하든 지 결혼을 파탄 내지 않고 참고 살려 했던 것,은 부모님에게 두 번
다시 불효를 안겨드리지 않으려 그랬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남들에게 인정 받으며 남 부럽지 않게 키운
자식이 결혼도 그랬는데 이혼마저 한다면 부모님께 그보다 큰 죄는 없다는 생각에 사정도 했고 애원도 했습니다.
부모님 생각에 결코 이혼은 안 하겠다는 마음으로 부적을 받아 팬티 밑에 부치고 다니면서 견디기까지 했습니다.
심부름 센터에 의뢰해 추적도 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을 유지하려는 마음이었지만 지향 이는 나하고 살면서
독산 동에 방을 얻어 낮에는 거기에 나가 살기까지 한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이 절망 배신 감은 어디
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변하면 어디까지 딴 사람이 되는 것일까 하는 절망감이 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어도 이혼 만은 하지 않아야겠다는 나의 생각이 헛된 바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현장에서 잡힌 후 결국 두 사람은 경찰서에 고소가 되었는데 "한번만 용서해 주면 다시는 그러지 않고 집으로 돌아
오겠다는 말을 믿은 것이 잘못이요, 얼마 지나니 장모님과 함께 살 터이니 당분 간 떨어져 살자 하며 셋방을 얻어
별거 시작한 것이 잘못이요, 셋방을 얻어 준 후 가끔 들려 보니 집에 안 들어 온다 길래 장모님께 어떻게 된 것이냐
여쭈니 병원에서 밥을 해 주는 이로 그러니 참아 달라 믿은 게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던 지향 이는 며칠 후부터 매일 사무실로 찾아와 이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까맸습니다. 회사 체면도
있고 해서 당장 큰 일을 내고도 싶었지만 .부모님이 그리고 세 자식이 있지 않은가? 결국 법정으로 해결하기 위해
협의 이혼으로 결정키로 했는데 판사 님이 묻더군요. 이혼을 하겠느냐고. 나는 아니라 했더니 그럼 이혼이 되지 않으
니 나가서 합의를 본 후 오라 하더군요. 나와서 울면서 사정 했지만 끝까지 고집을 하는 바람에 1990년 2월 23일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에게 지은 죄, 아이들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마음에 화장실에 가서 통곡하던 눈물은
내 생애 가장 뜨거운 눈물이었을 겁니다. 그 나이에 단발머리에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그녀는 가더군요.
인생의 3 가지 불행으로 1. 초년 출세(出世 ) 2. 중년 상처(喪妻)( 또는 이혼) 3. 노년 빈곤(貧困)이란 말이 있더군요.
초년 출세는 고사하고 그처럼 어렵게 보낸 내가 중년 이혼을 하게 되다니 그것 하나로 내 삶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모든 절망에서 벗어나기 참 힘들었습니다. 어찌 나에게만 이런 삶이 이어지는 가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몇 번이나 삶을 포기 하고픈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 자식들 만은 결코 내가 살아온 삶을 이어주고
싶지 안 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버티고 이겨가며 살아온 이유입니다.
미국 현 대통령이신 바이든 대통령 집무실에는 만화 액자 하나가 있다지요. 만화는 딕 브라운이 그린 삶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만화로 바이킹 해이가르 가 항해 중 배가 침몰하여 갈아 앉자 하느님을 원망하며 하늘을 향해
“Why me?(왜 하필 나입니까?) 하고 외치니,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Why not?(왜 너는 안 되지?) 하셨다는 이야기
가 담긴 만화라지요.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이 29세로 상원의원이셨던 크리스마스 때 교통사고로 아내와 장녀를 잃고 두 아들마저 크게
다쳐 절망하고 있을 때, 아버님이 ‘위로 겸 격려 차원’에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준 것인데,그 후 바이든 대통령은 두
컷짜리 만화로 된 액자의 힘으로 견뎌 오늘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하느님께 “왜 하필 나 만입니까?” 하고 얼마나 외치고 싶었겠습니까?
프랑스 사상가인 몽테뉴의 ‘수상록’에 결혼(Marriage)이란
Marriage is like a mousetrap. Those that are out try to get in, and those that are in try to get out.
참으로 그렀습니다. 결혼이 무엇일까요?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안 해도 후회하는 일인가요?,
부처님 말씀에
불요상납 주금거적 여인 (不要想拉 住禽去的 女人) 조주실거적 자기 (抓住失去的 自己)란 말이 있습니다.
“즉 떠나가 버린 여자를 찾으려(잡으려) 하지 말고 잃어버린 자신이나 찾아라.“는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돌아오지 않을 사람인 걸 알았으면 진즉 버려버리고 찾지 말걸 그 세월 7년 참으며 견딘 삶이 부끄
럽고 너무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힘든 삶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얘기를 못 하고 혼자 견뎌낸 것은 더욱 슬픕
니다.
알망드 클루 라는 분이
결혼은 판단력의 부족으로 하는 것이고, 이혼은 또 이해력의 부족 때문에 하는 것이고, 재혼은 기억력이 없어서
하게 된다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인 듯합니다.
운명을 믿으세요? 운명 사주 팔자가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삶이란 오묘한 것입니다. 그처럼 어려운 결혼을 했고 믿었던 그녀로부터 이혼까지 당했던 제가 결혼은
다시는 꿈꾸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운명처럼 재혼을 하게 됩니다.
1990년 2월 23일 이혼을 했습니다. 하루하루 삶도 아닌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소천 하신 후 어머님을
모셔와 살려고 찾아가 말씀 드리니 그냥 고향에서 사시겠다 해서 동네 어른들 하고 미리 짜기도 했습니다.
“이제 어머님은 장영 이가 잘 되어 사니 따라가셔서 사세요.”하고 동네 어른들이 권유하였지만 극구 거절하시던
어머님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님이 자식이 혼자 되다 보니 두 말없이 상경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먼저 떠난 며느리
한테 따뜻한 밥 한 끼 잡수시지 못하고 보낸 어머님이십니다.
그런데 운명이었나요? 첫 아내도 휴가 나와 운명처럼 연이 이루어졌는데, 두 번째 맞은 아내도 운명처럼 이루어
졌기 때문입니다.
1990년 8월 14일. 내가 광주에 내려가 있을 때 소장으로 있던 소장 님이 평소 전화도 없던 분이셨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교육 담당 임원으로 있을 때였지요. 그 소장 님은 내가 전국을 순회하던 본부장 시절 가끔 뵙던
소장 님이었는데. 8월 15일이 국경일이라 쉬는 날임에도 울린 그 전날 전화 한번의 인연이 재혼하게 된 사람이
니 말입니다.
터미널에서 만나 리베라 호텔로 옮겨 점심을 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인사였습니다. ‘사모님, 잘 계시지요?‘ 하고
묻는데 저는 그만 이혼했다는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남편의 안부를 물었지요. 그냥 인사 치례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14년 전에 이혼했다고 하더군요. 아니 남편이 외항 선을 타기에 1년에 한두 번 집에
들르는 것으로 알고 있던 저였습니다. 그러면서 "이혼이 무슨 자랑이냐고 그래서 거짓말 하고 직장에 다녔다"고요.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7년 여 혼자 그 마음 고생 다 하고 살아온 제가 그 말 한마디에 ‘그럼 이 소장, 우리
결혼합시다.’ 하였지요. 그러나 재혼이 그리 쉽습니까? 더구나 혼자 14년을 살아온 사람인데 말입니다.
1년을 꼬박 정성을 드려 1991년 9월 14일 재혼을 했습니다. 세상에 첫 결혼에 그러한 아픔을 견딘 제가 이미 이혼
해서 14년이나 살아온 사람에게 아무것도 살피지 않고 결혼이라니 앞에서 그랬잖아요. ‘재혼은 기억력이 없어서
하게 된다“고요. 왜 그리 모든 판단을 살핌도 없이 선택하는 것이었을까요? 결혼을 하고 살다 보니 저에게 세 자녀
그녀에게도 세 자녀 합이 여섯이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삶이 제 어깨에 짊어지게 된 것일까요?
재혼한 아내는 어머님을 14년 모셨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부모님께 제 집을 장만했을 때 올라오셔 3일 모신 것이
전부인데 반해, 재혼한 아내는 14년을 모시는 동안 어머님이 7년이나 치매로 고생하실 때 극진히 모셨던 아내입니
다. 참으로 감사하고 그 은혜를 생각해서 잘 해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4년 10월 31일. 제 아들이 결혼했고 12월 6일 어머님이 소천 하셨고, 2005년 1월 23일 재혼한 아내의 딸이
결혼하였습니다. 3개월에 집안에 큰일을 세 번이나 겪는 일이 생겼습니다.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재혼한 아내와
34년이 지난 지금 6 명의 자녀 다 결혼 시켰고 어머님도 그 사이 가셨습니다. 결혼은' 인륜 지 대사' 라 했는데
그렇게 해냈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티베트 속담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는 하루를 더하는 날이지만 우리가 살아갈 삶에서는 하루를 빼는 날입니다.
또한 오늘은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는 마지막 날인 동시에 우리가 살아갈 삶에서는 첫째 날이기도 합니다.
그처럼 오늘이 중요한 날입니다.
가족은 그 오늘에서 가장 먼저 만나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고 우리가 가장 늦게 까지 함께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족은 오늘 우리가 함께할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소중히 함께하며 살려고 합니다.
스위스의 교육 학자 이신 페스탈로치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기쁨은 가정의 웃음이다.” 고 했고
그 다음의 기쁨은 어린이를 보는 부모들의 즐거움인데 이 두 가지의 기쁨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고
하였습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니체는
“결혼은 인생의 긴 여행이다.
서로 참아야 하고, 서로 이해해야 하고, 서로 타협 협동해야 한다.
부단히 애정의 햇빛을 주고, 신뢰의 물을 주고, 이기심의 잡초를 뽑고
독선의 벌레를 잡아주어야 한다. “ 고 했습니다.
오륜가에서는
“남으로 생긴 것이 부부같이 소중할 건가?
사람의 백복이 부부에 갖췄으니 이리 중한 사이에 아니 화(和)코 어찌 하리“ 하였고
송강 정 철은
“한 몸 둘에 나눠 부부를 만드시니 있을 제 함께 늙고, 죽으면 같이 간다.
어디서 망령의 것이 눈 흘기려 하느뇨? “ 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나온 삶 어떻게 살았건 살았습니다. 또 남은 삶 어떻게 살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어제보다 오늘이 나의 몸은 무거워지고 정신은 조금씩 가물가물해 집니다. 그렇다고 나의 삶
결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처칠이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에 가서 하신 말씀대로
“Never give up. Never never give up”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한 가지 여쭤보려 합니다.
내가 가난해서 나를 버리고 심지어 내가 죽음 앞에서 찾을 때도 이미 결혼한다는 말도 없이 그 먼 곳까지 찾아간
아버님마저 그냥 돌려보낸 여인 지향,
그럼에도 아기까지 딸렸지만 다시 받아주고 세 자식까지 둔 후 떠나간 여인 지향.
전 남편에게서 낳은 딸 란(蘭) 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저에게 와서 제가 키우다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 갔고,
저에게서 낳은 세 자식들은 하나도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모두 네 자식을 버리고 떠난 여인 지향.
그 여인을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엔 이런 어머니도 있습니다. 끝
#겁은 ‘사방 길이와 높이가 약 10여 킬로미터인 바위를 100년에 한 번씩 고운 비단 천이 스쳐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겁(kalpa)이라 한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