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헬멧까지 갖춰 쓰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다 보니 쉴 새 없이 땀이 줄줄 흐른다. 머리는 물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물통의 물도 금방 미지근해져서 마셔 봐도 갈증 해소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날씨에 한 시간 반 넘게 타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어서, 호수 둘레길 한쪽 끝까지 갔다가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한 병 꺼낸 다음 원두막에 자리 잡고 앉는다. 큰 사발에 막걸리를 한 잔 가득 따르고 천천히 잔을 들어 마신다. 쉬지 않고 그대로 반 잔을 들이켜면, 소스라치게 시원한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바로 이 맛이다. 말 그대로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그런 맛이다. 이것이 요즘 내가 즐겨 찾는 막걸리 한 사발의 행복이라고 할까. 두 번째 잔부터 느끼는 청량감은 급전직하로 하락하기 시작하니, 큰 사발로 들이켜는 첫 번째 한 잔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갈급증을 가시게 하는 최상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 술 마시다가 막걸리와 관련된 옛날 추억이 생각날 때면 반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기도 하면서 미각의 즐거움을 잠시 유보하는 여유까지 부리곤 한다.
최근에 들어와서야 나는 오랫동안 잊었던 막걸리의 미각을 다시 즐기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땐 주로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물론 내 생애 최초로 접한 술은 막걸리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 술 심부름으로 이따금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오곤 했는데, 돌아오는 도중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몰래 한두 모금 마셔 보곤 했다. 그 당시에는 술집이 아니라 동네 가게에서도 막걸리를 항아리에 담아두고 팔았으므로 미성년자들도 어렵지 않게 구해서 먹을 수 있었다. 그런 접근의 용이성 때문에 우리 어린 시절엔 어른들 몰래 막걸리로 술을 시작하긴 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후엔 회식 자리나 사적인 모임에서나 주로 소주나 맥주를 마시는 음주문화가 대세였으므로,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런 술 문화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한동안 막걸리를 많이 마셨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내가 일부러 아껴 마시며 최고의 청량감을 만끽하곤 하는 막걸리 한 사발의 참맛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실로 수십 년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이십 대 초반 군 복무 할 때의 일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전방의 육군 보병부대에 배치된 첫해. 고달픈 이등병 시절 유일한 낙은 일요일 오전 교회로 외출하는 일이었다. 민간인출입통제선 안 우리 부대에는 교회가 없었으므로, 십여 명 정도 되는 기독교 신자들은 주일날 철원 시내 소재의 교회로 예배를 보러 나갔다.
한 시간 반 정도 산길을 걸어가면 검문소가 있었고, 그곳을 통과한 후 오 분쯤 가다가 만나는 첫 번째 가게에 들러서 정해진 순서처럼 으레 막걸리 한잔 걸치고 나오곤 했다. 각자 주머닛돈 몇 백 원씩 갹출해서 일인당 막걸리 한 잔씩 주문하면 김치 한 접시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한 잔 더 청해서 먹은 일도 없었고, 딱 막걸리 한 잔에 김치 한 젓가락뿐이었다. 교회 예배 시간에 맞춰야 했으므로 시간도 촉박했고 다들 금전적 여유 또한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나마 심신의 갈증을 달래준 고마운 막걸리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의 나와 같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아닌 군대 신병들에겐 교회가 목적이 아니었고, 시중에서 파는 진한 막걸리 한 사발과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예배 시간에는 잠시 눈 감고 졸면서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주님의 은총이요 일거양득이었다. 휴일이라도 부대에 남아 있으면 각종 사역에다 선임 사병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쉴 시간이 없었으므로, 당시 이등병 시절의 교회 외출 시간은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지는 행사였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의 막걸리 회식도 내겐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저녁 식사 후 내무반 침상에 정렬해 앉아 있으면 각자 위문편지 한 통과 삼사 명당 종합선물 과자 한 세트가 지급되었다. 그리고 사오십 분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선임 사병들은 따뜻한 페치카 옆에 둘러앉아 양동이에서 PX 막걸리를 연신 떠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 나를 포함한 삼사 명의 이등병들은 반합 뚜껑으로 한잔 밖에 돌아오지 않았던 막걸리는 물론이거니와 선물 세트 과자도 냉큼 다 먹어 치우고 찬바람 새어 들어오는 내무반 한 귀퉁이에 우두커니 모여 앉아 있었다.
이런, 쫄따구들이 군기 빠졌네! 그때 얼굴 벌게진 말년 병장 한 명이 우리를 힐끗 쳐다보며 소리쳤다. 야, 니네들 뭐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 재밌게 놀아야지. 다 일어서서 춤춰. 신나게 흔들어 대란 말이야! 평소 성질 급하고 사사건건 트집 잡아 하급자들을 자주 구타하고 괴롭히던 최 병장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잠시 엉거주춤하다가 일어서서 몸을 마구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고고춤이었다. 나도 덩달아서 거의 반사적으로 춤을 춰 댔지만 멀쩡한 정신에 마음은 오히려 불편하기만 했다. 뭐 좀 얼큰한 취기라도 있어야 흥이 날 텐데 이건 숫제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그때 박 이병의 웃는 듯 찡그린 듯 이상야릇한 표정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린 춤을 추면서도 마음속으론 모두 울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생애주기에 따라 생활양식이나 교우관계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마련인데 음주 습관도 덩달아 그렇게 바뀌는 것 같다. 30여 년간 봉직했던 직장에서 퇴직한 후엔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동안 우리 집 다음으로 근처 농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곳에서 농사일도 하고 틈틈이 유산소 운동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막걸리를 자주 찾게 되었다. 이젠 나도 웬만큼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한가하게 혼자 막걸리를 마시다가, 지난 시절의 웃기고도 슬픈 추억을 상기하면서 아련한 그리움에 젖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현듯 막걸리 주전자와 함께 아버지의 잔상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위로 겹치면서 눈앞을 스쳐 가자 절로 숙연한 기분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지지난해 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서 막걸리를 찾은 건 정말 뜻밖이었다.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던 아버지는 80대 후반까지도 식사 때마다 반주를 한두 잔 즐겨 드셨다. 술은 항상 더덕주나 매실주 같은 담금주나 소주였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땐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링거와 영양제 수액을 맞으며 누워계셨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갑자기 몸을 일으켜달라고 하시더니, 시워언한 막걸리 따악 한 잔만 마셨으면 좋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입원할 때부터 의사가 하룻밤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던 터라, 그 자리에 있던 우리 가족은 모두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버지는 이틀 뒤 아침부터 상태가 급격히 악화하였고, 그날 정오가 되기 전 그예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를 대전 현충원에 모시고 난 다음 해 추석 성묘 갈 때 막걸리 한 병을 챙겨 가지고 갔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제야 아버지도 젊은 날 주전자 막걸리를 종종 드셨다는 생각이 났다. 우리는 묘비 앞에서 아버지께 차례로 막걸리 한 잔씩 올리고 절을 드렸지만, 막상 그 술을 묘소 주변에 뿌리진 못했다. 혹시 냄새를 맡고 산에서 짐승들이 내려오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서 그랬는데, 그 순간 예상치 못했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왈칵 밀려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아버지가, 살아생전 한평생 어머니를 고생시킨 당신에 대한 나의 원망과 미움까지 송두리째 거두어 가신 것은. 그 후론 일부러 아껴 마시며 여유를 부리곤 했던 혼술의 막걸리 한 잔이 마냥 즐겁지만 않을 때가 있다. 내 목이 마르면 언제라도 막걸리 한 사발로 시원하게 해소할 수 있지만,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내 마음속 갈증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로 남아 버렸기 때문이다.
첫댓글 막걸리 한 잔 잘 읽었습니다.
막걸리 한 잔으로 인생의 전반을 반추한 글이네요?
막걸리에는 작가님과 같은 추억을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농사를 도와주던 시절 아버지 막걸리를 주전자 뚜껑에 따라 맛보던 기억이 납니다.
어제 '막걸리 향수'를 읽어보니, 이 작가님은 막걸리에 관련된 많은 지식과 체험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저는 도시에서 살아서 그렇지는 못하지만, 술을 즐기다 보니 막걸리에 얽힌 몇 가지 일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걸리 글 두세 편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막걸리 한 잔 ~
글을 읽으며
저도 많은 추억이 쏟아집니다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께서
동동주를 만드는 과정을
많이 봐서 그런지
작가님의 기억처럼
막걸리 ~
특히 한 모금 마실 때의 그 순간
어린 시절의 잔상이 자주 떠오르곤 합니다
저는 한 모금 두 모금
그 환상의 맛을 사랑합니다.
술을 안 드시는 서림님도 술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담에 만나면 막걸리 반 잔만 같이 하시지요.
제가 막걸리파라서 의미 깊게 잘 읽었습니다.
막걸리에 얽힌 추억의 기승전결을 온통 읊으셨군요.
주전자 심부름 때 막걸리 빨아먹은 기억은 누구나 있군요.ㅎ
문득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회장님은 막걸리에 관련된 소재를 많이 가지고 계실 거라 짐작됩니다.
막걸리 이야기도 언젠가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서 원하시던 막걸리 한 잔 드렸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고지식하게 간호사 말만 듣다 보니,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작은 소망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식구들은 그 일을 다 잊어버린 것 같은데, 술을 즐기는 저로서는 두고두고 후회할 일로 남아 있습니다.
동동주에 설탕 탄 우리 할머니표 동동주!
정월 대보름 밤에 무쟈게 생각났습니다.
전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에 막걸리 한 모금에 입도했습니다.
막걸리 한 잔~~~
다솔 님도 술을 가까이 하시는 분 같군요.
언제 기화가 되면 모임에 참석하셔서 막걸리 한 잔 같이 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화원 안영신 ㅎㅎ제 주량은 딱 한 잔입니다.
것도 세월따라 늘린 양이네요.
막걸리에 대한 추억, 잼있게 읽었습니다.
아버님 마지막 소원이셨을
막걸리 한잔 올리지 못한 갈증은
해소될 수 없겠지만,
그래서 더 깊은 그리움으로
기억되시겠네요.
산은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크고 크고
어디서 외 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저도 막걸리에 대한 추억이 많습니다.
공감하며 배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산마을풍경님의 막걸리 글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랜만에 올린 글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