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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27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수도회] 예수님의 영적 가족으로 사는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히브 10,1-10
† 복음 마르 3,31-35
★ 주기적으로 제물을 바치며 올리는 구약의 제사는 종교적 정화 의식이며
스승과 교단에 대한 결사 의식으로 이해하였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 한 번의 결정적인 것임을 설명한다. 이 은총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는 데 근거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한 번의 세례가 종교적 구원 의미를 갖는다면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구원을 완성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수도자와 사제는 출가자이다. 출가자는 저희들끼리 벗으로 삼고 무리 지어
살아가는 전통이 있다. 신앙 안에서 새로운 형제자매의 혈연을 맺는
것이다. 하느님의 혈연은 광야의 악마를 물리치고 당신의 말씀으로 사는
삶으로 엮인다. 생리적인 삶을 선택의 삶으로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사람은 본성과 이성으로 살아간다. 본성이란 먹고, 자고, 짝을 이루고,
위험에서 피하는 욕구와 능력 따위이다. 이성이란 본성에 대한 반성의
의지 능력으로서 절제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이다.
배고파 밥을 챙겨 먹는 것은 본성이지만 곁의 굶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
밥을 나누는 일은 이성의 작용이다. 교육이란 본성의 욕구에 대한 자기
제어력을 학습시키는 것이다. 이성으로 사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으로 자기 삶과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교양과 덕행,
예의염치, 소명과 헌신의 가치를 배우게 된다. 동서고금의 모든 성현은
한결같이 이성이 본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랑의 화신
예수님, 자비심의 석가모니불, 사람의 도리 공자님, 도덕 교사 톨스토이
등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이 곧 그리스도인이다. 출가자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신앙을 완성하고자 본성적 차원을 버리고 신앙과 이성의 바다에
투신한 이들이다. 이성을 따라 살지 않으면 자기가 사는 것을 이성이라고
여기게 된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새 가정 인류 공동체 -하느님의 영원한 꿈-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27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뉴튼수도원 78일째),
히브10,1-10 마르3,31-35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10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5
새 가정 인류 공동체 -하느님의 영원한 꿈-
여기 미국 뉴튼수도원내 호수의 변화가 놀랍습니다. 하느님 주신 선물이자
기적입니다. 과학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또 눈이 되는 과정은 신비의 기적처럼 생각됩니다.
투명하던 얼음의 호수가 눈이 덮이니 드넓은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힘좋은 사륜 오토바이에 아이들을 태운 보트 썰매를 끈에 매달고 신나게
달리는 모습이 너무 좋고 아름다워 연신 핸드폰 셔터를 누르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신나게 달리던 오토바이가 제 앞에 멈추더니
성탄츄리나무를 판매할 때 안면이 있었던 맘씨 좋은 형제가 물었습니다.
"Father, Do you want to go boating?(신부님, 보트를 타고 싶습니까?)“
"Good! Thank you for your kindness.(좋습니다, 당신의 친절에
감사합니다.)“
영어는 복잡한 존대말이 없어 곧장 자유로운 수평적 관계를 이뤄주어
좋습니다. 짧은 영어를 주고 받으며 보트 썰매에 올랐습니다.
모습은 보트나 얼음위를 달리니 보트썰매입니다.
'보트썰매', 이것은 형수와의 카톡을 통해 얻은 단어입니다.
"호수 위 보트(썰매) 타시네. 하느님이 주신 특혜네요.“
하여 드넓은 호수 마당을 두바퀴 돌았습니다.
순간 하느님이 주신 선물, '삶의 기쁨'이란 말마디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난생 처음,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보트 썰매를 탔으니 놀라운 기적의
선물입니다. 문득 한국의 살인적 경쟁풍토 안에서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날 주말, 수도원 곳곳에 아이들을 태운 썰매를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매달아 태우고 운전하는 젊은 아버지들을 보면 삶은
축제처럼 느껴집니다. 행복해하는 젊은 아버지와 아이들을 보면 덩달아
웃음이 나오고 행복해집니다.
과연 한국엔 이런 아이들이, 가정들이 몇이나 될런지요.
평범한 가정들이 누리는 이 행복, '아, 이게 초강대국 미국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나 군인이 되면 나라에 충성할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얼마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발표할 때 받은 깊은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활력과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자신만만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이었습니다. 한시간 내내 그 긴 시간을 원고 한 번 보지 않고 복잡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에 간간이 유머도 섞어가며, 전혀 주눅들거나 지친
모습 없이 조리 정연하고 힘차게 설명하는 모습은 얼마나 부럽던지요.
온통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 자국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신뢰를
북돋워주는 낙관적 긍정적 내용들이었습니다. 무수한 기립 박수와 웃음을
자아내는 상하원 합동의회의 모습은 흡사 행복한 잔치처럼 느껴졌습니다.
국력의 차이를 실감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였습니다.
삶은 축제입니다. 삶은 행복입니다. 삶은 기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삶의 기쁨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디선가 읽다가 메모해둔 글귀도 생각납니다.
'우리 삶에 웃음과 기쁨이 실종되었다.
하지만 나와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기쁨’이 필요하다.
우루과이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는 “참호처럼 기쁨을 방어하라”라고 말한다.‘
가까이 내 몸담고 있는 가정, 수도원, 교회부터
참호처럼 기쁨을 방어하며 행복한 축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주신 축제인생, 삶의 기쁨이란 선물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비로소 기쁨의 축제 인생이요 새 가정의 탄생입니다.
단일 민족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날로 늘어가는 다문화 가정들과
더불어 바로 이 주님 안에서의 새 가정이 장차 우리의 유일한 비전이자
대안임을 깨닫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당신의 새 가정임을
선언하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 탄생한 주님을 중심으로 한
성가정 교회공동체, 성가정 수도공동체의 원형입니다.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새가정 공동체입니다. 혈연을 넘어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 안에서의
새로운 한가정의 공동체는 바로 온 인류의 염원이요 비전입니다.
삶의 진정한 기쁨도 하느님이 주신 이런 선물 공동체 안에서 가능합니다.
카톡을 통해 나누는 무수한 형제자매들 역시 제게는 주님이 주신 새로운
한 가족처럼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원대한 하늘나라의 꿈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이런 주님 안에서 하나의 새 가정 인류 공동체의 출현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 고백한 시편(오늘 화답송 후렴
시편40,8ㄴ과9ㄱ)을 통해서도 분명 이런 새 가족 인류공동체가 하느님의
뜻이자 하느님의 영원한 꿈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과제는 분명해졌습니다.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여 지금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주님 안에서 새가정 공동체로 부단히 업그레이드 시켜 하늘나라 공동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쁨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로 확장(擴張), 심화(深化)
시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새가정 공동체를
탄생시켜주시고, 확장시켜주시며, 견고하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시편27,4).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내 몸담고 있는 지금 여기가 주님의
집이요 주님의 가정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
예수님의 영적 가족으로 사는 길
2015년 나해 1월27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마르 3,31-35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3)
예수님의 영적 가족으로 사는 길
예수님께서 군중에 둘러싸여 앉아 계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서 그분을 불렀다. 그분은 가족들이 당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3) 하고 되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영적 가정’인 제자공동체에서는 혈연관계보다도 ‘당신을 따르려는
지향과 하느님의 사랑을 추구하려는 동일한 목적’ 아래 맺어진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함을 가르쳐주고자 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찾아온 혈연의 가족들을 냉정하게 대하시지
않고 영적 가족의 구성원들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서만 말씀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족들을 멀리하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하셨으며, 아버지 장사를 지내는 것마저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따르라 하셨다(마태 8,21-22). 예수님의 단호한 태도는
혈연의 인연을 끊어버리라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실천’
을 본질로 하는 제자공동체는 하느님을 첫자리에 두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영적 특성이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 드러나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혼을 지니고 하라는 것이리라!
예수님의 영적 가족인 제자공동체는 혈연의 가족과는 달리 ‘아버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기에 삶의 동기와 추구하는 방향 또한 전혀 다르다.
이 영적 가족의 구성원이 되려면 먼저 자기 가족과 해오던 일, 현세적인
목적으로 맺어진 관계, 자기중심주의를 드러내는 애착과 습관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영적 가족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이 ‘떠남’이다. 세례
때에 몇 차례씩이나 ‘끊어버린다’고 고백했고 부활성야 미사때마다 그
약속을 새롭게 하는 우리가 그 약속을 잊어버린 채 하느님과 재물에
양다리를 걸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태도는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그 소외는 필연적으로 영혼의 분열과 어둠을 가져온다. 영적가족과의
분리되는 비참함은 각자의 태도에 달려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의 구성원들은 그 가정의 혼이요 삶의 방향이요 중심인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은 곧, 사랑의 이중계명에
드러난다.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사랑을 영원토록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기 위한 유일한 자격 요건이다. 예수님처럼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미치게 사랑할 때 참된 영적 가족이 될 수
있다. 혈연관계나 그 밖의 현세적인 그 어떤 관계도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실천을 본질로 하는 영적인 관계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영적인 형제, ‘만인의 형제’로 살기
위해 사랑에 미쳐버렸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마치
밖에서 말하는 사람의 소리의 채가 마음 안에 있는 현(弦)을 긁은 듯이 곧
자극을 받아 꿈틀거렸으며 불이 붙었다.”(2첼라노 196) 그는 권고한다.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게 하소서.”(주님의
기도풀이, 5) 우리도 미치도록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참 영적 가족이
되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주님의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는데 최선을
2015년 나해 1월27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10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5
자기 자녀를 자랑하는 부모님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다른 아기보다
‘엄마, 아빠’를 먼저 말하기만 해도 ‘우리 아이가 혹시 천재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다른 아기보다 먼저 걸음마를 떼면 ‘우리 아이가
운동신경이 엄청 좋은 것 같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부모님들의 자녀에
대한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지요. ‘엄마, 아빠’를
조금 일찍 말한다고 해서 천재라고 말하지도, 또 걸음마를 조금 일찍
떼었다고 해서 운동신경 좋은 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자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이 기대감이 깨졌을 때
실망과 부끄러움을 동반하게 됩니다. 어떤 자매가 제게 자신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하더군요.
“신부님, 제 아들 때문에 동네 부끄러워 미치겠어요. 공부도 안 하고 온갖
사고는 다쳐요. 어렸을 때는 너무나 착한 아이였는데 왜 그럴까요? 만약
자식만 아니라면 남남처럼 살고 싶어요.”
자녀가 잘 되길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님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고 사고만 친다면 남 보기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부모이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사고치는 자녀를 원할까요? 아니면 부모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자녀를 원할까요?
당연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뜻에 맞게 살아주는 자녀가
너무나 예쁘고 또한 그렇게 살아줌에 감사할 것입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떤 모습을 원하실 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과연 주님의 뜻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모습에 “그래 예쁘다.”하면서
좋아하실까요? 아닐 것입니다. 주님 역시 당신의 뜻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좋아하시며,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전하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지요. 가족의 인연을 끊기 위해 하신 말씀은
분명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시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쫓아온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단순한 친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무런 친분이 없다 해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주님의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이를 위해 주님의 뜻을 잘 실행하는 참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사람이다. 범인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만을 바라고 있다(로맹롤랑).
어제 동기모임이 있어서 오랜만에 답동 성당에 갔네요.
아버지의 기대('따뜻한 하루' 중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아들이 유독
병약하고 총명하지도 못하여 형제들 속에서조차 주눅 들어 있어 아버지는
늘 가슴 아팠다고 합니다.
어느 하루, 아버지는 다섯 그루의 나무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자식들에게 한 그루씩 나누어 주며 1년이라는 기한을 주었지요. 가장 잘
키운 나무의 주인에게는 무엇이던 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입니다.
약속한 1년이 지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으로 갔습니다. 놀랍게도 유독 한 그루의 나무가 다른 나무들에 비하여
키도 크고 잎도 무성하게 잘 자라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였던 그 아들의 나무였던 게지요.
약속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예상대로 이 아들은
자기가 딱히 무엇을 요구하여야 할지조차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칭찬하기를 이렇게 나무를 잘 키운
것을 보니 분명 훌륭한 식물학자가 될 것이며, 그리 될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모두들 앞에서 공표(公表)하였지요.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 명분 있는 지지와 성원을 한 몸에 받은 이 아들은
성취감이 고조되어 식물학자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얗게 밤을 지낸 새벽 잘 자라준 나무가 고맙고 하도
신통하여 숲으로 갔습니다. 어스름한 안개 속에 움직이는 물체가 그의
나무 주변에서 느껴졌고, 곧 이어 물 조리개를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들의 두 눈에 보였습니다.
아들은 비록 훌륭한 식물학자는 되지 못하였으나 미국 국민들의 가장 많은
지지와 신뢰를 받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응원. 그 응원에 부응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려집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를 응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큰 사랑에 지금의 모습에만 머물러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3주간 화요일
2015년 나해 1월27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10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5
지난 주 2박3일 동안 ME 주말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칼날
같은 침대에서도 단잠을 잘 수 있는 것이 부부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커다란 집도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대화가 아닌 독백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가 틀리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매일
봉사자들의 발표를 듣고, 사랑의 편지를 쓰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대화를 하면서 많은 부부들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에게 용서를 청하는 모습은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같은 집에 살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자녀를 돌보는 것만이 진정한 가족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살지만 몇 번씩 헤어지고 싶어 했고, 몇 번씩 생을
마감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가족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나의 주장과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느낌과 감정을
표현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느낌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다른 세포에게 영양분을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세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양분을 나누지 못하는 세포는
‘암’세포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새해에는 나라는 틀에
갇혀있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의 것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년 나해 1월27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2015년 나해 1월27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우리 어머니는 저와 가까운 요양원에서 지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의 형제들은 서울, 대구, 울산, 안동에서 살고 있구요.
그런데 어머니보다 저는 우리 요양원에 있는 다른 많은 어머니들과
더 자주 만나고 기도하고 미사하고 인사하고 밥을 먹습니다.
누가 진정 나의 어머니신가요?
또 나의 육신의 형제들은 1년에 두어 번 봅니다.
그런데 나의 영신의 형제들은 매일 같이 기도하고 밥먹고 애환을 나눕니다.
누가 더 가까운 나의 형제인가요?
실제로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보다 영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의 삶을 좌우합니다.
여러분의 영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그들에게 감사드리고 고마운 마음을 표해 보면 어떨까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서울] 하느님 중심의 영생이기에 모두 한 가족
2015년 나해 1월27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10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5
하느님중심의 영생이기에 모두 한 가족
한 가족이 알알이 돌며 사는 살벌한 가정들이 많아지는 거 아닌가요?
최초의 보금자리며 최후의 인생 보루인 가정인데 이러면 불행해지지요.
내 가정은 부모님 가정 할아버지 할머니 가정으로 이어 올라갑니다.
계속 올라가면 문서상 조상까지 올라가고 더 이상은 없었단 말인가요?
최초로 올라가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던 유인원 가정, 맞습니다.
내 가정의 최초며 최후에 만날 하느님중심의 영생이기에 모두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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