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반!
어둠은 독차지했던 사물들을 다시 하나씩 되돌려주기 위해 내리친 장막을 들어올리기 시작하고 자지러진 매미 울음이 또 하루의 빗장을 열고 있다.
-지금쯤일까?
늘 이 맘 때면 시간을 확인한다. 무엇이 아직까지 뇌리를 떠나지 않고 내 사고를 점령하고 있단 말인가? 우선 꼭두새벽 달려온 운전사가 중년 여인이라는 것과 그 차에 내가 동승했다는 것이 시발이다. 여인의 모습과 직업이 몽유병 환자처럼 누워있는 내 영혼을 부추겨, 어느새 그에게로 뚜벅뚜벅 마치 태엽감은 오뚜기처럼 새벽마다 달려가게 하고 있었다.
한 달 전이었다.
강원수필 문인들의 연수가 해마다 지역을 달리하며 열리고 있는데, 올해는 정선, 철원에 이어 인제에서 상상력과 수필이란 주제로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열렸다. 1박2일간 도내 수필가들이 저명한 인사를 초빙해 수필작법을 터득하고 새로운 기법을 메모하며 더 좋은 글을 잉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모임 첫날은 인제 산촌 민속박물관에서 연수를 받고 공통과제 특집 인제를 쓰기위해 군 문화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보았다.
일정이 첫날이라 저녁이 좀 지나서 리빙스턴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백악관 가든에서 1박을 했다. 문학이란 자양분으로 저마다 영혼을 잠재우며 일박을 하면서 문학의 토론과 삶의 양면성을 심도 깊게 논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빗소리 깬 시간은 새벽 4시-.나이가 드니 새벽잠마저 곁을 떠나는 모양이다.
그래! 가야지-. 곯아떨어진 문우 곁을 까치발로 빠져 나오면서 순간, 어제 연수회장에 두고온 애마를 데려 오자고 숙소를 빠져 나왔으나 아뿔싸! 새벽이라 이용할 대중교통이 없어 난감했다.
이슬비가 간간이 대지를 적시고 게다가 안개까지 층을 이루어 어둠이 퇴각하지 않은 한적한 교외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화물차만 무섭게 질주하고 있는 52번 국도에 서서 시골 촌로처럼 수없이 손을 들었으나 허사였다. 그 때였다.
-끼--익!!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네-. 인제 시내까지만 가면 됩니다.
학수고대하던 차라 감지덕지하며 얼겹결에 올라탔다. 회심곡이 요란했고 40대 후반의 여인이 혼자 운전대를 잡고 있음을 한참 후에 알았다. 이른 새벽, 전혀 모르는 분의 도움을 받다니 -.
비까지 내리고 있는 새벽. 사위는 아직 어둠이 머무르고 있는 산하였다. 밝지 못한 무채색 도로를 질주하면서 운전자는 첫인상이 여간 상냥스럽지 않았다. 늘 그렇지 않은가! 승차를 하면 고객은 운전자에게 항상 저자세이기 마련이다.
더구나 꼭두새벽에 황량한 교외를 질주하다가 급제동함이 얼마나 인위적인 배려인가?
뒷좌석을 둘러보았다. 악세사리들이 저마다 자랑을 하고 있었다. 어떤 직업의 소유자일까? 회심곡이 계속 차안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해 준다.
일반 가정주부와는 다르다. 붉은 브라우스가 사치해 보인다기 보다 오히려 고결해 보이고 흘러나오는 음악 또한 범상치만은 안았다. 진부령 알프스 리조트에 어제 갔다 오는 중이라고 짧게 멘트를 한다. 그렇다면 모임의 성격은? 학술 세미나나 예술가들의 민족 예술 동아리? 아니면 얼굴이 화사한걸 보면 전국 요식업 협회나 국악인 모임은 어떨까?
단아하고 언행을 아낀다. 오노 드라이버-.장거리 운전을 능숙히 구가할 정도면 상류층에 더 급접해 있으리라. 그렇다면 전국 여성 지도자 세미나에 발표자인가? 며칠 전 계속 뉴스를 봐도 진부령 리조트에서 어떤 전국적인 모임이 소개된 적이 없지 않은가!
이른 새벽에 타인을 위해 브레이크를 힘주어 밟은 여인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차창 밖의 새벽 안개는 서서히 걷히는데 좀처럼 여인의 정체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 아닐 수 없다.
- 여기가 인제라고요?
벌판을 지나며 여인은 상냥하게 돌아보며 묻는다.
-네! 그렇지요. 군사지역이죠. 시간이 일러 식사도 대접 못하고 -.
-네 - 됐습니다. 복잡한 일이 있어서-
복잡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중년 여인의 새벽잠을 설치고 운전대를 잡아야했단 말인가? 간밤에 대구에서 왔다가 1박을 하고 부리나케 돌리는 발걸음이 신비스러웠다.
-고통이야 우리 중생들에게 늘 가로놓여 있는데, 마치 나에게만 다가온 것처럼 서두르며 아우성이니 참….
산사태를 방지하는 위험 표시판을 무겁게 유턴하면서 묻지도 않는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아미를 좁혀 안됐다는 듯이 가늘게 실눈을 뜨기도 하고, 긴 한숨을 몰아쉬며 많은 사연을 암시하기라도 해 의구심은 점점 더 꼬리를 물었다.
어떤 문제의 실마리가 안 풀리나보다. 극단적인 이기심에 찌든 인간들을 탓하는 당신은 진정 누구인가?
- 음악이 참 편안하네요.
소양강 상류인 내린천과 서화천 물과 한계천 물이 원통에서 합류하여 다시 내린천과 합친다는 합강정을 지날 때 불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마디 불쑥 던졌다.
-종교가 있으시나요?
-아! 천주교를 나가지만 열정이 미흡하지요.
-그래도 종교가 있으시니 이 새벽에 제 차를 보내셨지요.
-세상 모든 게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게 어디 하나나 있습니까? 미련한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마치 자신이 최고인양-. 한심할 뿐이지요.
모처럼 아꼈던 말이 봇물처럼 터지면서 나약한 인간의 오만함을 개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음악과 종교를 연관시키는 여인-. 청초한 한송이 도라지꽃이었다.
어떤 초인을 말하는 걸까? 인간은 나약하다. 오죽하면 하찮은 갈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슨 위대한 힘이 그 위에 부가된단 말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지에 상흔을 남기는 것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모두의 오만불손한 태도는 사실 신 앞에 서 보면 얼마나 가증스러울까? 쉽게 그녀의 주장에 동감을 표하면서 어떤 전문인일까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황실처럼 울긋불긋한 차내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 중년 여인의 정체는 알 수가 없다.
나를 태운 차는 어느새 산촌 민속 박물관 앞에 정차했다. 부스스 눈을 비비고 주인을 바라보는 내 애마-, 30분간의 짧은 만남이지만 특수한 시간대에 도움을 준 것이 고마와 내릴 때 명함을 건너며 예를 표했다.
-수필가시네!
의아한 듯이 다시 확인한 여인은 명함의 숲에서 선뜻 한 장을 뽑아준다. 아까보다 더욱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응시하는 눈길이 평화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어떤 카리스마가 한줄기 스친다. 그저 신세도 못 갚고 보내는 부담스러움 속에 어느새 차의 뒷모습은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고마워 손에 든 명함을 그제서야 보는 순간 갑자기 소름이 오싹 돋았다.
-월화보살
명함을 받으면서 한없이 작아만 지는 인간의 존재와 신의 섭리가 내 뇌리에 계속 교차되었다. 인간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첫출발부터 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임에도 마치 전지전능 한 것처럼 오만하다는 무속인이 던진 한마디가 유년기에 굳어진 선입견으로 오싹해진 의식을 타파하고 철인이 갈파한 명언처럼 내 마음을 온통 나꿔채고 있었다. 그날 아침 모든 고통을 이겨내던 무속인이 밤새도록 토론한 진부령 끝자락이 안개와 범벅이 된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끝)
그야말로 수필가십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비범을 걷어올리는 맑은 영혼과 왕성한 창작력이 훌륭합니다. 옛 고향마을 앞집 친구네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자그마치 9남매의 3째가 내친구였는데, 자고나면 하나씩 낳고는 밭에나가 일하다가 또하나 쑥... 왕성한 생산력이었습니다. 좋은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그 새벽길은 산안개가 자욱했을테지요! 그리고 가끔은 곁눈질로 여인을 보았을테고, 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팔장을 끼곤 회심곡에 빠져들은척 했을테지요/ 소설이네요, 아침일찍 조조 영화한번 본 기분입니다.
읽기는 읽었는데..... 덕전선생님! 이제 추리소설쪽을 들려다 보심은 어떨지요? 아주 잘 읽었습니다. 그날 아침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한편의 글로 승화되어 우리곁으로 돌아와 있씀이 감격스럽습니다. 서양화가:정정신
덕전님 복도 많으셔요. 더군다나 보실님과 함께 작은 공간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바이~바이
빠하하- 모란님, 직접 들으신 강아지님, 시우님 이끝에 나뭇군과 선녀를 첨가했는데 워낙 문량이 많아서요. 꼭 쓰고 싶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덕전님 애마를 거기 두고 오신 것부터 인연은 시작되었군요. 덕전님의 상상력을 부추기는 하나의 사건이 드디어 완성되었으니 얼마나 뿌듯하십니까. 그날 직접 듣고 다시 글로 읽어도 몸태짓의 생명력이 펄떡입니다.
어쩐지 수상타 했더니 기여히 별난 여인이였네요. 이런 사람 앞에선 나 검은 마음 흰마음 모두 들키는 것 같아 오금이 저리답니다. 죄가 많아서 나만 그런가. 스릴이 있어서 읽는 재미가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요. 수국님-. 모두 훤히 알고 묻는 것 같더군요. 검은마음, 흰마음이 마음에 드네요.그러나 요즘은 무속인도 이해가 되지요. 자주 오시어 카페를 빛내주시어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요.
좀 늦게 읽었습니다. 백악관 한 방에 동숙한 인연으로 들었던 묘한 인연의 전개가 다시 신선한 느낌입니다. 월화보살님과의 후일담은?
빠하하-.후일담이라!!
그야말로 수필가십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비범을 걷어올리는 맑은 영혼과 왕성한 창작력이 훌륭합니다. 옛 고향마을 앞집 친구네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자그마치 9남매의 3째가 내친구였는데, 자고나면 하나씩 낳고는 밭에나가 일하다가 또하나 쑥... 왕성한 생산력이었습니다. 좋은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뜸하시어 해외를 거닐고 계신가 했는데요. 수일내로 만나 상면하겠나이다. 건강하시길
생산력하니 웃음이 절로 나네요. 자연님-. 우리 멈니도 구남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