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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봄호 반경환 명시감상
---천양희, 문정희, 이병률, 이돈형, 김윤옥의 시
마들에서 광화문까지
천양희
광화문에 가려면 마들에서
노원을 지나 중계 지나 하계 지나
공릉 지나 태릉 지나 먹골 지나 중화 지나
상봉 지나 면목 지나 사가정 지나
용마산 지나 면목 지나 중곡 지나
군자에서 5호선 갈아타야 한다
왕십리 지나 행당 지나 청구 지나
동대문 지나 을지로 지나 종로를 지나가야 한다
입문入門하는 기리 이렇게 멀다
--천양희 시집 {너에게 쓴다}(창비)에서
그 옛날 뉴욕에 살던 친구가 해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던 끝에, “사람의 목숨이 이렇게 질길 수도 있을까”라고 탄식을 한 적이 있었다. 인간의 목숨은 참으로 그 무엇보다도 질길 수도 있지만, 인간의 삶 자체가 단 한번뿐인 천하제일의 예술작품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다. 차마고도의 절벽과 티벳지방의 사람들, 힌두쿠시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의 오지마을과 북극지방의 원주민들, 남태평양의 오지마을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삶이 너무나도 놀랍고 경이로울 뿐이었던 것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삶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며, 어느 누구도 이 줄타기의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차마고도와 티벳, 혹은 힌두쿠시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 속의 오지마을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구도 대자연의 폭풍과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또한 그 모든 문화인들이 대자연의 산불과 권고사직, 또는 흑자부도와 신용불량자의 삶을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삶은 사생결단식의 생존경쟁의 삶이고, 그토록 두렵고 무서운 극한직업, 즉,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극한직업,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삶----. “광화문에 가려면 마들에서/ 노원을 지나 중계 지나 하계 지나/ 공릉 지나 태릉 지나 먹골 지나 중화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상봉 지나 면목 지나 사가정 지나/ 용마산 지나 중곡 지나/ 군자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하여 “왕십리 지나 행당 지나 청구 지나/ 동대문 지나 을지로 지나 종로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산다는 것은 생존의 벼랑끝의 삶이고,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가 되고 연극이 되고 소설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구조’ 속에서 ‘내집 마련의 꿈’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거꾸로 서울 사람들이 이 세계의 모든 극한지방의 삶보다도 못하고, 그 행복지수가 낮다는 것을 뜻한다. 서울시의 대동맥과도 같은 지하철은 지옥철이 된 지도 오래되었고, 이 지하철 출근길은 그 어느 누구도 구원받기 힘든 고행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천양희 시인의 [마들에서 광화문까지]는 극한직업의 고행길이자 입신入神의 경지로 가는 입문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틈
문정희
너와 나 사이
비밀통로
소소리바람 드나드는
틈을 사랑해
틈으로 지은 집을 사랑해
틈이 있어야 쓰러지지 않아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그 중 질기고 굵은
가령 결혼 같은 것도 그래
최근에는 플라스틱 같은 것에 밀려나
조금 쓰다가 중간에 버리기도 하지만
틈과 틈을 꼬아 만든
미흡하고 엉성한 밧줄
사뭇 눈물겹기까지 해
끝내 주름투성이 손으로 붙잡고 있는
이 밧줄 ....후회 거짓 절망 희생 실패 계산
..한데 꼬아 만든 이 질긴 틈과 틈 사이
소름 돋을 만큼 괜찮아 보여
어딘가 억지스럽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수레바퀴를 돌게 하는
상처투성이 저 허공 좀 봐
너와 나 사이
비밀통로
틈과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늦가을 익어가는 저 햇살 아래 출렁이는 주름
언제 무대에서 퇴장 당할지 모르지만
애송이들에게 공짜로 보여주긴 참 아까워
--애지 2025년 겨울호에서
오늘날의 슈퍼 컴퓨터로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걸려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단 몇 초만에 해치울 수 있는 양자 컴퓨터와 양자 인공지능이 곧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가히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 것만큼이나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양자 컴퓨터와 양자 인공지능이 그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양자 컴퓨터와 양자 인공지능이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민주주의의 정치를 완성하고, 그 모든 다툼과 분열과 전쟁을 종식시키고, 이 지구와 이 우주에다가 곧 바로 이상낙원을 건설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자 컴퓨터와 양자 인공지능은 단순한 기계 장치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의 고통과 불행을 다 몰아내고 진정으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구세주도 아닌 것이다.
양자 컴퓨터와 양자 인공지능도 헛점(허점) 투성이이고, 이 헛점 투성이의 기계 장치를 통하여 자기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대사기꾼들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헛점은 양자 컴퓨터와 양자 인공지능의 틈이고, 대 사기꾼들은 성인군자의 탈을 쓴 우리 인간들의 틈이다. 틈은 벽을 싫어하고, 벽은 틈을 싫어한다. 틈과 벽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존재하며, 이 적대적 공생관계로 사랑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다. 전쟁과 평화가 악수를 하고, 적과 동지가 자기 자신의 마음과 몸을 장악한다. 선이 악의 유방을 더듬고, 악이 선의 입술에 키스를 한다. 양자와 양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양자와 양자가 만나 서로간의 멱살을 움켜쥐고 싸운다.
문정희 시인의 [틈]은 “너와 나 사이”의 “비밀통로”이고, [틈]은 적과 적들 사이의 비밀통로이다. 틈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비밀통로이고, 틈은 아내와 아내의 애인 사이의 비밀통로이다. 틈은 모든 사물의 기원이자 숨구멍이고, 틈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이다. 틈은 틈을 사랑하고, 우리는 그 “틈으로 지은 집을” 무한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틈이 있어야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이 없는 삶이 존재할 수가 없듯이, 병이 없는 건강은 생각할 수도 없다. 또한, 이별이 없는 만남이 없듯이, 이혼이 없는 결혼제도는 생각할 수도 없다. “틈과 틈을 꼬아 만든/ 미흡하고 엉성한 밧줄”이 “사뭇 눈물겹기까지” 하지만, 그 불완전성, 그 틈을 메워버린 플라스틱의 등장으로 오늘날의 지구촌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끝내 주름투성이 손으로 붙잡고 있는/ 이 밧줄”이 진정한 밧줄이고, 우리는 이 밧줄로 “후회와 거짓과 절망과 희생과 실패와 계산” 등을 건져 올린다. “후회와 거짓과 절망과 희생과 실패와 계산” 등은 “소름 돋을 만큼 괜찮아 보”이는 틈이고, 이 세상의 그 모든 헛점이자 숨구멍이다.
우주도, 하늘도, 천의무봉이 아닌 상처투성이이고, 그토록 사나운 비바람과 눈보라의 수레바퀴를 돌게 하는 너무나도 무섭고 끔찍한 폭력의 무대일 뿐인 것이다. “너와 나 사이/ 비밀통로”, “틈과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늦가을 익어가는 저 햇살 아래 출렁이는 주름”이 너무나도 거룩하고, “언제 무대에서 퇴장당할 지 모르지만/ 애송이들에게 공짜로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것이다.
문정희 시인의 [틈]은 만물의 기원이자 숨구멍이고, 또한, 만물의 주름(허점)이자 죽음의 구멍이다. 대자연은 만물의 터전이고, 양자역학의 활화산이다. 양자역학은 힘이고 틈이고, 양자역학은 그 힘(에너지)만 있을 뿐, 고정불변한 형체가 없다.
양자는 빛이고 파동이고,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의 통로이다.
철학은 학문 중의 학문이고, 철학을 공부해야 전인류의 스승이 될 수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사람은 누구인가? 공자, 맹자, 플라톤, 칸트, 마르크스, 니체 같은 전인류의 스승들이다. 하루바삐 철학을 가르치고 우리의 아이들을 입시지옥과 학원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제식 암기교육은 철학과 독서와는 무관하고, 자연의 학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표절과 뇌물과 부패의 잔치판이라고 할 수가 있다.
금을 찾아서
이병률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발을 담글까 하는데 발치에서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자잘한 돌 틈 사이, 숟가락 하나였다
손잡이 쪽을 뒤집어보니 영어로 무슨무슨 골드라고 상표가 새겨져 있다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태어나 처음 금을 발굴한 것이다
발을 담그려다 그만두고 돌과 돌 사이를 디디며 물 흐르는 반대로 거슬러오르며 걸었다
이제는 완전히 발치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다
그러는 중에 그만 바위의 이끼를 보지 못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통증 탓이기도 했으나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아 그렇게 잠시 누워 있었다
금은 하나 밖에 주지 않는구나
애써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올려다보게 되어 있는 자세로 그렇게 누워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손 꼭 쥔 금붙이를 만지작거렸다
--2025년 애지 겨울호에서
금이란 무엇인가? 금은 원소기호 AU로서 구리족에 속하는 황색의 금속이며, 산화작용을 받지 않는 금속으로서 광택이 찬란하고 예로부터 가장 훌륭한 귀금속으로 취급을 받아왔다고 할 수가 있다. 특히 전성과 연성이 좋아 수많은 공예품의 재료로 사랑을 받았고, 순금 100%는 24K, 순금 60%는 14K라고 부른다.
금은 보석 중의 보석이며, 모든 사원이나 신전들은 황금색 장식으로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왕관과 목걸이와 반지와 황금의자와 황금도포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금은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공예품의 재료이지만, 그러나 금은 귀금속으로서의 사용가치보다는 만고불변의 축재의 수단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세계적인 경제 위기 때마다 금은 달러와 유로화와 엔화와 파운드화 등을 제치고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때마다 금값이 폭등을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금은 만인들이 선망하는 보석이지만, 그러나 이 금이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 즉, 축재의 수단이 된 순간, 이 지구촌의 모든 재앙들이 다 나타났다고 할 수가 있다.
속된 말로 ‘노다지’는 골드러시, 즉, 이병률 시인의 [금을 찾아서]의 다른 말이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만지는 모든 것마다 황금이 되게 해달라’는 미다스 왕의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금이 공예품이 아닌 축재의 수단이 된 순간, 이 금에 의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 또는 귀족과 천민의 신분제도가 나타나고, 이 금을 둘러싸고 수많은 자리다툼과 소유권 분쟁과 그토록 잔인하고 무자비한 전쟁이 발생했던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금수저/ 흙수저’ 따위의 말들과 함께, 수많은 특전과 특혜도 금에 의하여 발생하고, 소위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던 현자마저도 그 마음 속에서는 황금옥좌를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병률 시인의 [황금을 찾아서]는 꿈인지, 현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고, 시간과 장소와 연기의 무대가 다만 환상(몽상)의 세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발치에서 반짝이는” 금수저를 발견했다는 것은 거의 100% 거짓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어느 개울가에서 금수저를 발견했다는 것은 흥부의 박 속에서 온갖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다는 설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가 금수저를 발견한 것은 기껏해야 도금을 한 짝퉁 금수저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무슨무슨 골드”라는 상표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살다보니 “처음 금을 발굴한 것”이고, 이런 횡재를 얻을 때도 있었던 것이다. 비몽사몽 간에, “발을 담그려다 그만두고 돌과 돌 사이를 디디며 물 흐르는 반대로 거슬러오르다”가 “그만 바위의 이끼를 보지 못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통증 탓이기도 했으나” “그렇게 누워” “금은 하나 밖에 주지 않는구나”라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애써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올려다보게 되어 있는 자세로 그렇게 누워/놓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손 꼭 쥔 금붙이를 만지작거렸”던 것이다.
어느날 우연히 금수저의 획득은 대단한 횡재이지만, “금은 하나 밖에 주지 않는구나”는 전혀 터무니 없는 과대망상의 환상일 수도 있다.
욕망이 욕망을 낳고, 우리 인간들의 욕망은 황금 앞에서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모든 행복도 금을 찾아가는 것이고, 모든 불행도 금을 찾아가는 것이다.
금은 황금이고 재화 중의 재화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금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재앙덩어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금은 쌀도 아니고, 빵도 아니며, 다만 사치와 허영과 축재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대 제국인 미국과 중국과 인도와 러시아가 동서남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인종과 종교와 민족의 분열을 겪고 있단 말인가? 이 세계적인 대 제국들은 오히려, 거꾸로 민심과 국력을 결집시켜 좀 더 거대한 제국을 만들지 못해서 환장을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남북통일처럼 쉽고 간단한 문제도 없다. 전 인류를 감동시키고 모든 국가들이 대한민국을 존경하고 찬양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모든 싸움은 영토싸움이며, 민심과 국력을 결집시키지 못하면 영원히 탈락하게 된다.
삼탄역
이돈형
충주에 가면 애기 손만 한 삼탄역이 있다
마음의 바깥이 그리워지는 날 있으면 삼탄역에 가보시라 털레털레 빈손을 흔들며 삼탄역에 가보시라
몰려왔다 몰려가는 것들이 없으니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가며 새소리에 옮겨 다니는 나무그림자를 봐가며
가보시라
말 못할 말이 있거든 슬금슬금 흘려가며 망할 것이 있거든 슬금슬금 버려가며 사람의 뒤편이 일거든 그건 슬금슬금 주워가며
도착하면
사람이나 기차는 기다리시지 마시라
역 앞에 놓인 간이의자에 앉아 햇빛에 글이나 써보시라
노란 우체통은 빠른우편이니 천등산 도깨비에게 보낼 글을 써보시고 빨간 우체통은 느린우편이니 받으면 눈물부터 흘릴 사람에게 써보시라
무얼 먼저 부쳐야 할지는 그대의 선택이니 나에게 물어보지 마시라
나는 여기서 도깨비랑 며칠 더 놀다 갈 테니
--{나의 태몽은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요}에서
1958년 충주와 봉양간의 충북선이 개통되면서 탄생한 삼탄역, 그토록 오랫동안 충주와 제천을 통학하던 학생들과 충주와 제천의 오일장을 오가던 사람들이 이용했던 삼탄역, 2032년 충북선 고속화 사업이 완성되면 폐지될 예정인 삼탄역,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의 촬영지가 인근에 있는 삼탄역, 관청 소여울과 소나무 여울, 따개비 여울에서 유래한 삼탄역----, 삼탄역은 비록 산 좋고 물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지역 소멸의 쓰나미를 피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정적이고 오래 살고,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즐겁게 산다. [삼탄역]은 어진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다같이 살기 좋은 곳이며, 그러니까 [박하사탕]의 주인공인 설경구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쳤던 곳인지도 모른다.
이돈형 시인의 [삼탄역]은 어진 자와 지혜로운 자가 손을 맞잡고, 즐겁고 기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삶의 찬가’라고 할 수가 있다. “충주에 가면 애기 손만 한 삼탄역이 있”고, “마음의 바깥이 그리워지는 날 있으면 삼탄역에 가보시라”고 그는 권한다. 빈손을 털레털레 흔들며 삼탄역에 가보시면, “몰려왔다 몰려가는 것들이 없으니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가며 새소리에 옮겨 다니는 나무그림자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대도시는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한 곳인데, 왜냐하면 수많은 탐욕과 이전투구와 어리석음이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도시를 떠나 ‘마음의 바깥’, 즉, 대자연의 세계로 나오면 산새가 울고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가며, 이 세상에서 지치고 힘든 마음을 치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말 못할 말이 있거든 슬금슬금 흘려가”고, “망할 것이 있거든 슬금슬금 버려가며 사람의 뒤편이 일거든 그건 슬금슬금 주워가며/ 도착하면// 사람이나 기차는 기다리시지 마시라”고 그는 권한다. 말 못할 것이 있으면 다 말하고 망할 것이 있으면 다 버리고, 사람의 뒤편이 일거든 그건 슬금슬금 주워간다는 것은 이돈형 시인의 [삼탄역]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지상낙원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이면서도 수많은 나이고, [삼탄역]의 연출자이자 그 주연배우인 이돈형이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기차도 없으니, 누구, 누구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기다릴 필요도 없고, “역 앞에 놓인 간이의자에 앉아 햇빛에 글이나 써보시라”고 권한다. 대도시, 즉, 군중 속의 고독과 외로움을 치유하고 대자연의 아름다운 품에 안기면 누구나 산새와 물소리와 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벗 삼아 “햇빛에 글”을 쓰는 시인이 된다. 햇빛은 입자와 파동이 아니라 시인의 말과 꿈이 되고, 어느 누구도 오고가는 사람이 없는 [삼탄역]은 대자연의 백지가 된다.
“노란 우체통은 빠른우편이니 천등산 도깨비에게 보낼 글을 써보시고” “빨간 우체통은 느린우편이니 받으면 눈물부터 흘릴 사람에게 써보시라”고 한다. 노란 우체통의 ‘노란’은 꿈과 환상의 세계이고, 빨간 우체통의 ‘빨간’은 현실이고 피붙이의 세계이다. 한 이불, 한 지붕 속에 사는 피붙이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왔으니, 그 ‘느린우편’을 받으면 눈물부터 흘릴 것이지만, 그러나 [삼탄역]은 내 마음 바깥의 고향, 즉, 나는 천등산 도깨비와 만나 한시바삐 살고 싶은 것이다.
“무얼 먼저 부쳐야 할지는 그대의 선택이니 나에게 물어보지 마시라/ 나는 여기서 도깨비랑 며칠 더 놀다 갈 테니”
도깨비는 우리나라의 민간 전설에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잡귀신 중의 하나이지만, 그러나 이 도깨비 전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도 가깝고 친숙한 얘기라고 할 수가 있다. 도깨비는 변화무쌍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체가 될 수도 있고, 신통력이 있어서 초인간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도깨비는 한국인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살아 있어서 물질적 욕망과 함께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도깨비는 귀신처럼 악독하게 인간을 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우리 인간들이 도깨비를 이용하여 수많은 소원을 성취하면서 살아간다. 남녀간의 사랑, 산해진미의 음식, 좋은 집과 넓고 비옥한 텃밭, 가정의 행복과 평화가 그것이다.
삼탄역, 자유자재로운 인간이 되어 도깨비와 살고 싶고, 산소리와 물소리를 벗 삼아 햇빛에 글을 쓰고, 너무나도 그립고 정다운 피붙이에게 편지를 써보내며 살고 싶은 삼탄역----
오늘도, 내일도 어진 자와 지혜로운 자가 손에 손을 맞잡고 살고 싶은 삼탄역----.
엄마의 반지
김윤옥
그곳은 평안해?
대답 대신 깊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엄마 손을 지키고 있던 가락지
긁힌 자국에서 고단했던 삶이 보이는데
닦을수록 선명해지는 흔적,
그 상처가
가시처럼 아팠다
동그란 반지에 엄마 얼굴을 담아
서랍장에 넣으며 떨어진 눈물 한 방울,
끝내
강이 되고 말았다
--애지 봄호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소중하고 성스러운 말은 엄마일 것이다. 아버지는 그 비옥한 텃밭에 씨앗을 뿌려준 사람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엄마와 자식은 ‘일체동심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 있는 사랑’이며, 아주 엄격한 상과 벌의 채찍으로 그의 자식들을 가르치고 사회성을 다져 넣는다. 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무섭고 거리가 먼 존재인데 반하여, 엄마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며, 그 자비롭고 인자한 마음으
로 모든 자식들을 다 보살피고 감싸준다. 자식들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무한한 사랑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만인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언제, 어느 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하고 용서를 해준다.
엄마는 우주이고 조국이고, 엄마는 종교이고 영원한 고향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나쁜 스탈린과 히틀러마저도 자기 자신의 엄마 앞에서 한없이 무릎을 꿇고 울었을 것이고, 언제, 어느 때나 반대파의 목을 따거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조직 폭력배들마저도 자기 자신의 엄마를 생각하며 더없이 순한 양이 되어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
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성스러운 엄마----. 엄마는 수많은 종교이고 경전이며, 엄마는 수많은 고전이고 대중음악(대중예술)이다. 이 세계는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창조한 것이고, 모든 인간들은 늘, 항상, 엄마에 대한 존경과 찬양의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른다고 할 수가 있다.
김윤옥 시인의 [엄마의 반지]는 이 세상에서의 엄마의 삶의 기록이자 그 경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더없이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도 그토록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일을 했던 엄마, “엄마 손을 지키고 있던 가락지”, “닦을수록 선명해지는 흔적/ 그 상처가/ 가시처럼 아팠”던 것이다.
엄마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 세상은 엄마의 사랑으로 열리고, 엄마의 죽음으로 끝난다. 우리 인간들은 ‘엄마의 이름’ 앞에서는 모두가 다같이 효자와 효녀가 되고, 이 ‘엄마의 힘’으로 살아간다. “동그란 반지에 엄마 얼굴을 담아/ 서랍장에 넣으며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끝내/ 강이” 된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엄마의 이름으로 해와 달이 뜨고, 모든 만물들이 엄마의 이름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