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서하
헐렁한 나를 불러 세운 건
바람에 온몸으로 엎드렸다가 일어나는 귀 밝은 갈대들,
속이 텅 빈 햇살도 옆구리마다 뚫린 구멍 어쩌지 못하고
일 배, 일 배 지극정성이다
세월없는 일 배, 일 배는 참 잘 드는 가위, 저 가위질로
세상 변두리 웃자란 근심들 싹둑싹둑 잘라 화병에다 꽂아두면
바윗덩이 같은 내 마음도 갈대꽃처럼 가벼워질까?
잘라 낸 그림자에서 먹구름 함께 자란다
지평선 위에 덩그러니 걸린 낮달에서도
째깍째깍 자라는 갈대,
때맞추어 갈 데, 어디일까?
바람 부는 언덕에 발 올리고
느슨한 신발 끈 서걱서걱 고쳐 맨다
밤이 꾸욱 눌러 짜낸 아침처럼
서 하
참, 묵직한 발원이다
둥글 넙적한 돌로 누런 메주를 누른다
저 보름달이 못물을 지긋이 누르듯
오래 눌러야 흥건해진다
무덤이 산을 누르듯이,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누르듯이,
눌린 만큼 모양새가 반듯해지는 삶은 돼지고기마냥,
냇물도 돌멩이들이 군데군데 눌러앉았기 때문에 칭얼칭얼 흐른다
하얀 건반을 누르면 하얗게,
까만 건반을 누르면 까맣게,
한숨을 쏟아내는 피아노에 내 엉덩이를 붙인다
거실의 까만 밤을 뭉그적 눌러앉아 하얗게 샌다
밤이 꾸욱 눌러 짜낸 아침처럼,
참꽃이 딸꾹
서하
비슬산이 비실거리지 않는 것은
참꽃의 딸꾹질 덕분입니다
남자들이여! 아무리 추워도
아내에게서 어머니를 기대하지 마세요
잘 알겠지만 그건 가짜예요
불쑥, 그런 생각 들 때마다 숨을 꾸욱, 참아 보세요?
딸꾹! 딸꾹! 딸꾹!
숨이 막힌 가짜들 다 달아날 테니까요
가짜는 그늘도 가짜지만
참꽃은 그늘도 참꽃이거든요
우리는 누구나 늙는다는 리듬에 묶인 포로들
참꽃은 현실보다 더 확고해요
진짜 방부제라니까요? 딸꾹!
사과꽃
서하
할아버지 제삿날 삼촌이 사과를 깎는다
동짓달 긴긴 밤의 테두리 살살 돌려 깎을 때
삼촌 턱 밑에서 길게 목 빼고 앉아
칼이 밀어낸 사과껍질 입으로 빨아들이면
입 안 가득 사과꽃이 몽글몽글 피어났지
바람에 꽁지 드는 새처럼 입꼬리 쫑긋 올라가고
텅 빈 뱃구레 돌아나오는 종소리 댕댕댕
일생 이렇게 새콤달콤한 날, 며칠이나 될까?
끈질기게 잡아당긴 것이 명줄이었나
삼촌 거친 숨소리 따라 밤공기 휘청 휘어지고
별빛이 내 이마 때릴 때
누군가에게 그늘지고 있다는 것 왜 몰랐을까?
알러지성 발진처럼 돋아난 마흔 살 그늘 밟으며
풋사과처럼 툭 떨어진 삼촌
올봄에도 사과밭 근처 도롱골 돌려 깎는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바람 한 줄기
길게 목 빼고 앉은 샛길의 입술 파고든다
새우
서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잠수해버리겠다던
그가 정말 사라졌다
세상을 안으로만 껴안은 탓인지
저 허리 펴지 못한 저녁놀
몸이 굽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마을 앞길도
굽을 데가 아닌 곳에서 굽었다
생의 마디마디 펴지지 않는 토막들을 쓸어보는지
파도소리가 부르르르 마당에 깔린다
서이말 등대
서하
쥐의 귀에서 살고 있는 등대가 있다
밤에 더 설치는 치통과 복통이 그러하듯
그렇다, 쥐는 밤이 낮이다
막배 놓친 노을의 눈자위 젖을 때
태양이 안고 있던 바다를 슬며시 내려놓으면
긴 손을 뻗어 쓰다듬으며
-내손은 약손, 내손은 약손......
몇 번을 쓰다듬었는지 기억조차 없는,
수천 번의 손길이 고마운 지
바다는 뜬눈으로 바다바다 철썩인다
오래 쓰다듬다 보면 아픈 것 다 나아
바다는 얼마나 건강해지는 지
등 근육이 실한 등대지기 옥근씨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해피견은 알까?
알약처럼 피어 있던 동백이 모가지 툭 꺾는 이유를,
누구에게도 등 기댄 적 없는 서이말에는,
쥐의 눈빛 닮은 응급실도,
찍찍 소리 내는 의사선생님도 없다
끗발
-건빵
서하
닳은 고무신 뒤축 끌면서 아버지 데리러 간다
주막집 불빛이 밤길 어둠을 끌어안는다
방문에 비친 훌쭉한 아버지 그림자
-아부지 지베 손님 왔서예, 빨리 가입시더
오지도 않은 손님 왔다는 말은
문지방에서 걸려 넘어진다
-쪼매마 있다가 간다 캐라
툭 던져주시는 건빵 한 봉지
화투판 냄새 가득 밴 건빵 위로 달이 뜬다
걸신들린 것처럼
아버지 한 봉지 다 털어 먹는다
빈 봉지 같은 아버지 주막집에 두고
건빵만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
짧은 그림자 길게 널며 가는
아홉 살 겨울이 사무치다
울긋불긋한 화투판보다
더 마른 침 도는 기억 한 봉지
애기똥풀꽃
서하
살얼음이 끼어있는 개울가,
일곱 살짜리가 아픈 엄마 대신해 동생의 똥 기저귀를 바락바락 문질러
물속에서 굽혔다 폈다 헹굴 동안 개울물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
오늘은 뭘 해 먹을까? 그런 고민 따위는 아예 접어둔,
똥이 밥이고 밥이 똥인 기저귀의 굴신(屈伸),
산책 나온 개 목줄 풀어준 듯 쏟아지는 물컹한 애기똥,
오랜 친구처럼 물과 함께 배밀이를 한다
노란 봄도 동동동 함께 뛴다
꼬리 흔들며 바람을 쥐락펴락 문지르는,
옆에 앉아 무시로 졸고 있는 강아지 때문인지
발그레 아려오는 손도 그대로 꽃이 된다
빨랫줄에 널다 보니 조금 남아있는 애기똥,
꽃이 똥인지, 똥이 꽃인지 헷갈린다며
살래살래 고개 흔드는 노란 뒷담화다
어제도, 오늘도, 아이는 태어나고
오늘은 어제가 눈 똥,
저 산도 결국은 푸른 똥 무더기,
샛노란 애기똥풀꽃 하늘을 쥐었다 폈다 한다
지심도에서 울다
서 하
13월이었나?
장승포에서 뱃길 20여분, 섬은 바다의 눈망울처럼 글썽였다
한걸음 내딛으니 ‘전망 좋은 집’ 주인이 객지 나갔던 자식 반기듯 울컥 매달린다 누워 있던 길이 잠시 꿈틀 한다 구겨진 길에도 꽃은 피는가? 꽃 피면 겨울도 봄, 화문(花紋)이 흐릿하게 아른거린다 장지문 침 발라 뚫은 구멍처럼, 12월과 15월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동백 터널 지날 동안, 융단 같은 꽃길에선 흠, 흠, 발이 코다 향기에 취한 코가 우는지 콧물이 났다
울음도 나이를 먹는지, 남의 허물 뒤집어쓰고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 귓속말처럼 들리는 곳에서 애써 허허 웃었다 그 때마다 울음 새는 소리, 성냥불 꺼지듯 피식거렸다
속울음 꾹꾹 참던 겨울씨, 눈물이 난다는 건 비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
제 덩치보다 굵은 고드름 처마 끝에 내어걸며
- 내캉 한 번 꺼이꺼이 울어볼래?
전날 쓴 거짓 일기를 꺼이꺼이, 지운다, 운다, 운다,
꺼이꺼이 울다보면 ‘운다’가 ‘웃다’로 고쳐지기 좋은 곳,
‘전망 좋은 집’을 ‘울기 좋은 집’으로 고치고 바다위에 다시 쓴다
‘하늘과 바다 사이 지심도 끼워 넣고, 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같은
13월의 동백은, 괭이 갈매기 깃털처럼 푸르렀노라‘고
침묵은 입이 크다
서하
폐교된 사일국민학교는 그렇게 홀로 남았다
한 때 젊은 화가가 날아들어 작업실로 썼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화가는 보이지 않고 뿔뿔이 고요하다
침묵은 입이 참 크다
양철도시락을 먹고, 그네를 먹고,
측백나무를 먹고, 운동장을 먹고,
아작아작 깨물어 먹고, 굴려가며 빨아먹고,
모서리마다 묻어나오는 뻐근함은 후식으로 찍어먹고,
불룩 나온 배 쓰다듬는 학교가 하마다
하마의 허기는 시들지 않는다?
버려진 삼다수 빈병이 움찔한다
묵언은 뱃속이 저토록 환한가?
이런저런 생각할 동안 토실한 햇살이
플라타너스나뭇가지에 사뿐 숟가락을 얹는다, 휘청!
입이 큰 하마 슬슬 돌아다니는
사일국민학교는 현재시각 사일런트*다
*사일런트 : 말을 안 하는, 침묵을 지키는
포장 이사
서 하
나무의 이파리들 새집으로 입주할 무렵, 좋은 집 지어 이사 가는 꿈 자주 꾸었다지요 낡은 잎들 미련 없이 버린 뒤 새잎 장만해서 이사 가듯 해진 기억들 모두 벗어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당신이 이사하던 날, 흰 장갑 낀 이사꾼들 굳게 잠긴 박카스 목 비틀어 마신 뒤 유리그릇 싸듯이 몇 겹으로 쌌지요 결 고운 나무상자에 못질하고 굵은 새끼줄로 꽁꽁 묶었지요 포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내용물 또한 예사롭지 않다는 뜻 인가요 이삿짐 실은 차는 골목 벗어나 냇물 옆구리 끼고 언덕으로 가는 길 낯설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내려달라고 소리치지 않은 당신, 참으며 사신 성품 그대로였습니다 비 갠 뒤의 산빛은 더욱 새로웠고 미리 정착해 사는 이웃들 목 내밀어 내다보는지 희미하게 안겨 오는 무게감, 손 맞잡아 가볍게 눈인사라도 나누었나요
밋밋한 산허리, 새로이 부풀어 오른 봉분 하나 햇살 잘 드는 새집으로 드신 뒤, 구름처럼 둥둥 뜨기만 하던 욕망 벗어 두고 너절한 생각들 정리중이겠지요.
첫댓글 조ㅠ아요.
올려놓고 다시 수정 들어가 불필요한 거 지우면 되는데....
감사합니다!
팍팍한 세상에~~
졸시를 너끈히 받아주는 너른 품이 있어서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