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한글날 바로 다음날인 10월 10일, 한강이라는 작가가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놀라운 뉴스가 전해졌다. 우리 국가와 국민의 큰 자랑이자 경사가 아닐 수 없으며, 도하 각 언론과 정쟁을 일삼던 정치권도 함께 축하의 감격을 나누고 있다. 서점가에서는 한국인 특유의 냄비 근성이 발동되어 한강의 소설은 줄을 서서 구입하고 매진되는 한강 열풍이 휩쓸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런 한편에서는 작가의 편향된 역사의식과 우리 나라의 정통성과 역사의 발전에 부정적인 사고에 대하여 비판과 우려를 표하는 작은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이유도 2000년에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탓일 것이다. 당시 경쟁자였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축하를 보냈지만, ‘영원한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김영삼 전대통령으로부터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는 혹평을 들었다. 당시 독설이라고 비하를 했지만,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이 200만 불의 공작금으로 노벨상을 획득할려고 한 사실과 그후의 북핵의 지원과 확장과정 또 해외비자금의 축재 등을 되돌아보면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노벨재단이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이다. 이후 등장한 노무현 정부는 고은 시인을 노벨문학상 수상후보로 만들려고 맹렬한 로비를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는 한강의 수상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의표를 찌르는 망외의 소득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시적 산문으로 표현한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바로 이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것이 대한민국이 직면한 현실이다.
김대중은 여러 차례 정치적 고비와 탄압을 받으며, ‘호남인의 恨’을 강조하며 천신만고 끝에 집권을 하였다. 한강 작가도 광주에서 태어나 10살 때 5.18 소동을 겪으며, 호남인 특유의 동질감을 공유하며 4.3 사태와 광주사태, 노근리 사건, 한국전쟁에 대한 좌파적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이러한 이유로 우파적 진영에서는 부정적 시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본다.
소설은 허구적 사실이며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흔히 ‘소설 쓴다.’는 표현대로 사실이 아닌 거짓을 주장할 때 하는 관용구이며,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신념, 정확한 사실과 문학작품의 전개는 분리해서 생각하며 어느 정도 관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노벨 평화상을 탄 이스라엘이나 아랍의 지도자들이 많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월남전 휴전을 했던 키신저와 레둑토는 역사적 사기꾼이 되었다. 김대중도 마찬가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윈스턴 처칠의 ‘2차대전 회고록’은 문학적 가치는 별로 없는 방대한 영국의 공문서와 자신의 경험, 기록 등을 집대성한 공로로 정치적인 동기에서 수상을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도 노벨문학상에 지명됐지만, 알베르 카뮈에 비해 훨씬 늦게 수상된 자존심 때문인지 그는 거부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한 얼간이였다. 문학적 철학적 소신과 주장이 역사적 사실과 괴리가 있다는 증거다.
우리 나라는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을 본받아 ‘한강의 기적’을 이룬 세계사적 쾌거를 이루었다. 한강은 서울을 관통하는 교통의 수단이자 방어벽이기도 하였다. 민요의 노들강변이나 한강수 타령, 심연옥 가수의 ‘한강’이라는 ‘한많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는.....떠나간 우리 님은 언제 오려나’라는 가사는 우리 서민의 애환과 고달픔을 담은 노래이다.
한강 작가도 자폐적이고 소극적 恨에서 벗어난 당당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셰계적 문인으로 등극한 만큼 속좁은 자기 부정에서 벗어나 더욱 비상하기를 바라며, 특히 노벨문학상은 다른 분야와는 달리 달러박스를 안겨주는 행운의 열쇠라는 점에서 모둔 문화계와 문학인의 정진을 바라며 국운상승으로 승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