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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예배
출 10: 21-29
심방을 하면서 깊이 생각을 하는 면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가정들이 참으로 많은 사단의 세력들 앞에 노출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가정들이 사단의 집중공격으로 아픔을 당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치료 중에 있는 가정들을 보면서 크리스챤들은 더 많은 가정치료와 온전한 가정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의 많은 결손의 가정들을 보면서 어떤 방법으로 가정들이 회복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노력으로도 하여야 하겠고 지식적으로 교육을 통하여 발전을 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방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형태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완전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틀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좀더 나은 예배의 모양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하여 보면서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예배의 자리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오늘날에는 참으로 진정한 예배를 드리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환경과 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것으로 인하여 예배를 온전히 드리도록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들이 예배를 진정으로 드리도록 만들어 주지를 않습니다.
이런 가장 어려운 위기에서 우리들은 어떤 예배-형태만이 아니라 내용의 부분까지도 온전한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모양을 보게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를 못하고 계속적으로 재앙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를 고난 당하게 하심이 아니라 속히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예배의 자리에 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며 막아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더 열정으로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려는 의도를 모세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이 바로를 향한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짐승에 대한 구제역같은 악질의 재앙에도, 그리고 독종의 재앙에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보내려는 계획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우박 재앙을 통하여 전멸되지않고 남아있는 것들을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견디다못한 애굽의 정치인들이 바로를 찾아가서 고난 당하고 있는 백성과 기대할 수 없는 산천초목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보내자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자 하나님은 메뚜기 재앙으로 우박을 피하여 남아있는 모든 것들을 갉아먹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도대체 누구가 예배에 참여하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출10:9절을 보면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킬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라고 예배에 참여 할 자를 말을 합니다.
그러자 바로는 출10:11절을 보면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라고 바로는 외칩니다.
가정의 대표로 남자만 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의 선언은 언뜻 보기에는 맞는 말일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남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예배에 참여 할 자를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온 가족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만을 대표하고 있지 않습니다.
출애굽기20장의 십계명의 4번째 계명을 하나님은 모세에게 정확히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킬 것이니라 여샛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네 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을 하지 말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안식일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여야 할 의무가 잇는 것입니다. 이날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남자만 대표하여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정만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영역안에 들어와 있는 종이라도 그리고 손님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함을 원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생각은 남자만을 신성시하는 것입니다. 남자만이 문제가 없으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가정의 가장만이 모든 것을 다스리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남자들만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가정 온 전체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온 가정이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고 계심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남자들만을 보내기 위하여 바로는 어린것들을 함께 보내는 것이 악하다고 모세를 책망을 합니다. 우리의 생각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오직 종교적인 영역으로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종교적인 영역으로만 볼 것인가?
취미란에 [교회가기]라는 이야기를 하는 정도의 종교생활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처럼 말을 할 것입니다. 어린이가 함께 가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른만 가면 되지.
광야 길을 가는 자리에는 많은 일들이 그들을 맞이할 채비를 가지고 잇습니다. 곳곳에 전갈이 있습니다. 많은 맹수들이 순간적으로 그들을 낚아채어 갑니다. 무덥습니다. 그리고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어른들만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부모들이 갖는 이야기중의 하나입니다.
사실은 우리들의 자녀들이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교육정책의 문제가 우리들을 자녀들이 신앙적인 자리에 서도록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만 대표하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부모들이 신앙적인 자세가 다시 한번 바로의 틀에서 깨어져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엡6:4절에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우리 부모들의 관심은 어떠한가?
이스라엘의 가장 영적으로 어려운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의 한 가정의 쓰라린 경험을 말씀을 하십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하여야 할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무시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노년에 그의 왕의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을 하였던 동기는 그의 아들 중에 아도니아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로부터 왕상1:6절에 보면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일이 없었더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늙은 모양을 보여주자 그는 구테타를 일으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는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며 한 때의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아들을 한번도 섭섭하게 한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삼상2장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가정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 불량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않으면서 와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드려야할 예배를 무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삼상2:17절을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엘리는 그 아들들을 간곡하게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자들만, 어른들만 하나님 앞에서는 것이 거리낌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섭섭한 책망이 왜 없습니까? 말씀의 책망을 들어야만 합니다. 말씀의 지시를 받아야만 합니다.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들의 신앙의 현장을 주시합시다. 나의 자녀에 대한 신앙적인 자리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을 나온 후에 간수에게 전한 말씀이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그는 남자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언을 합니다.
온 식구가 함께 구원을 얻는 복 있는 가정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바로는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말을 합니다. 남자만 가도 상관은 없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구원의 자리에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어떤 분은 이런 선언을 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안식구가 믿음의 생활을 잘하기 때문에 천국에 갈 때에 아내의 치마 자락만 붙잡으면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원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자녀들이나 식구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남자의 자리만을, 우리들만의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려는 습성의 소유자인 바로의 외침을 단호히 거절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권고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가차없이 흑암의 재앙을 만드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남자들만의 구원의 반열에 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흑암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삼일 동안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하늘이 캄캄케 되었을 때에도, 우박이 내리는 지역은 하늘이 보이지 않았어도 그 재앙만 지나면 숨을 통할 수 있긴 하였지만 흑암의 재앙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장자의 재앙의 전주곡인지도 모릅니다. 캄캄한 흑암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장자의 재앙을 하나님은 예시하시는 역사였습니다.
애굽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신은 늘 떠오르는 신입니다. 한번도 늦추어지거나 모양이 바꾸어지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사람들은 그 태양신을 [라(Ra) 혹은 Amon Re]라고 불렀습니다.
그 태양신에게 감히 접근 할 수 없는 대단히 위대한 신이었습니다. 열과 빛과 창조력의 근원으로 우주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신중의 최고의 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자신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일컷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태양신이 사흘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을 하여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참으로 곤고한 일이요 결국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그 백성들에게서 생명이 끊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흑암의 재앙이 그들을 엄습하게 되면서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싹트게 됩니다.
두려움은 많은 것들에 대하여 얼마나 절망을 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 그 동안의 재물들은 태양처럼 우리들을 비쳐주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의 상황들은 얼마나 많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그 태양같은 재물이 우리들의 주변에서 떠나간다는 것 때문에 우리들의 심정도 바로의 심정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걱정에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전체가 어둡다는 것은 애굽의 태양신이 죽었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곧 바로의 생명이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사흘간의 연속된 흑암은 결국 바로가 모세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24절의 말씀을 보면 "바로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협상을 합니다.
이것은 바로의 최종적인 흥정이었습니다. 모세의 요청에 한발을 양보 한듯한 제시였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최상의 제안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아가는데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채워주고 인도하여 주실 텐데 그런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뜻보면 참으로 좋은 제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참으로 섬뜻한 사단의 덫이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과 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물질은 물질이고 신앙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자리는 지켜라 그러나 물질적인 것들은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에게 너희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 는 것은 그의 재산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재산을 나에게 줄 수 있는가?
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가? 하는 주님의 요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물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협상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의 자리를 확인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의 첫째는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가 하나님에게 속해있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전폭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가? 이것은 사실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체가(여기에는 나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주님께 속하여있다는 신앙의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
나님은 학개서 2:8절에 말씀을 하십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께 속해있지 않고 정신적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기뻐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단적인 행동입니다.
이단은 신앙과 물질을 별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바르면 생활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명목으로 때로는 가정을 무시하고 물질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초월하여 사는 듯한 모양을 가짐으로 가정이 파탄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나의 삶 전체가 생활전체가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서 은혜를 경험하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다른 한 면에서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다른 한 어느것- 즉 또 다른 한 신을 잡으려는 모양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교회에서 헌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한다던지 그런 이유를 이야기를 하면 대단히 기분 나빠합니다.
신앙의 자리에는 희생을 상징하는 헌금의 자세를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6:21)"
그러므로 만약 자신이 자기 소유를 마음대로 쓰면서 교회에서 은혜를 받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안 순간부터 나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욥은 말하기를 욥기서1: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말을 합니다.
물질은 나에게 맡겨준 주인은 있고 그 물질을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쓸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의 말씀의 묵상은 예배의 온전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 앞에 보일 때마다 빈손으로 보이지 말라]고 명령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빈손으로 내 앞에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가족이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라 그 대신 양과 소는 머물러두라]는 것입니다. 이 제안에 모세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26절을 보면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이며"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그의 가족이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 드릴 희생의 제물을 함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 그리고 온전한 예배의 바탕에는 희생제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희생이 들어가지 않고, 희생이 바탕이 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은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희생 제물에 있어서도 온전한, 가장 흠이 없는 예물을 드리기를 원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드리면서도 책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통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억지로 의미 없는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책망을 하십니다.
말라기서 1:7-8절을 보시면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우리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을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는 희생의 제물을 준비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온 식구가 함께 드리는 복된 예배자와 희생을 함께 드림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더불어 드리는 자들이 되어 주님 앞에 드리는 예배마다 날마다 열납 되어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홉째 재앙 - 흑암
출 10: 21-29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들을 내리실 때는 대부분 미리 예고하고 내리셨는데, 오늘은 바로에게 경고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하셨고, 다음절에서 모세가 즉시 그렇게 시행하여 애굽 땅이 사흘 동안 완전히 깜깜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의 귀띰이나 여유도 주지 않고 갑자기 아홉 번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에 관한 내용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열 번의 재앙 중에서 매 세 번째 재앙을 내리실 때 마다 아무 예고 없이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이 재앙과, 여섯 번째의 티끌재앙과 아홉 번째의 흑암재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런 예고가 없이 내리는 재앙은, 지금까지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완악한 사람에 대한 징계임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심판이 그러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에서 불순종하는 것과, 이미 여러 차례 들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늘 듣는 말씀이라’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말씀을 들은 사람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1. 빛을 제하신 하나님
아홉 번째 재앙은 사흘 동안 태양이 완벽하게 가려져서 빛을 전혀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인데, 이것은 장차 그들에게 임할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예고 적 성격이 있습니다.
사흘 동안 햇빛을 볼 수 없게 되는 이 재앙은, 우박이나 메뚜기나 강물이 피가 되는 재앙보다 한결 가볍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흑암 재앙은 단순히 햇빛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동안 내리셨던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표시입니다.
세상이 있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태양이 비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사흘이나 태양이 안 보이고 온 천지가 깜깜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가 심했을까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태양을 ‘라’ 라고 불렀고, 가장 큰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는 그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흘 동안 태양이 비취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최고의 태양신이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태양신이 죽었다면 바로도 국가도 끝장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고 더듬어서 움직여야 했으며,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라 오늘은 해도 뜨지 않으니 실컷 잠이나 자자’ 하고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태양신이 죽어버린 세상이니 그들도 이제 곧 죽을 것이고, 살아야할 의미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극심한 죽음의 공포 속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사흘 동안 햇빛을 주지 않으신 것은, 그들에게서 평안과 희망을 빼앗아버리신 것으로서, 참을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떨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흑암 재앙은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요? 평안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고, 꿈을 접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숨어버리고 비정상적인 사람들, 극성스럽게 악한 사람들이 고개를 드는 세상이 왔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상식을 뒤집는 사람을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시대를 맞았으니,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습니까? 정치에 희망이 있습니까? 통일에 대한 바람이 있습니까? 과학 문명은 엄청나게 발전하여 살기는 참 편해졌지만 마음의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행복한 가정이 몇이나 됩니까? 요즈음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교만한 애굽 왕에게 흑암재앙을 내리신 것처럼, 교만한 현대인들에게 어두움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빛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가장 무서운 재앙은 심리적인 재앙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넓고 편한 집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날마다 마음속에 불안이 엄습해 온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오늘날은 전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밤에도 대낮같이 생활하고 있긴 하지만, 마음으로는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평안과 희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의 빛을 우리 사회에서 거두신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 흑암 재앙을 내리셨을까요?
1) 반역하는 자들에게는 은혜를 거두시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리시는 은혜 중에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내리시는 은혜를 일반은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 빛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비춰주시고, 맑은 공기도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으며, 비와 바람도 누구에게나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는 햇빛을 가리신 것은, 너희들에게는 더 이상 은혜를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주시던 은혜를 거두어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만드신 것이 빛입니다. 빛은 모든 은혜의 근원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그 빛 아래서 모든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도록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빛이 없이는 어떤 동물도 식물도 살지 못합니다. 자연의 빛을 빼앗는 것도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빛을 잃으면 희망만 잃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잃습니다. 세상에 동물이고 식물이고 사람이고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빛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 그 빛을 주시던 은혜를 잠시 거두셨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그동안 주시던 일반은혜 마저도 거두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절하는 자에게는 자연의 빛만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빛, 진리의 빛을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거두시면 우리는 대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 주셨던 건강을 거두시면 우리가 건강을 만들 수 있나요?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 주셨던 맑은 정신을 거두시면 우리가 정신을 차릴 수가 있나요?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섬기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일반은혜를 빼앗기며, 진리의 빛을 거두어 버리실 것입니다.
2) 애굽의 신을 심판하신 증거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개구리, 파리 등의 곤충을 신으로 섬겼고, 애굽을 관통하는 나일 강을 신으로 섬겼으나 태양신을 가장 높이 섬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자연 만물 중에 태양처럼 위대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태양을 자연스럽게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주신 자연 선물에 불과했습니다. 선물을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느라고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으로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건강이라는 선물, 직장이라는 선물, 자식이라는 선물, 자연이라는 선물들을 섬기느라고,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비웃으며 사는 현대인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가 이렇게 깜깜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시고 계신 징조인지도 모릅니다.
2. 이스라엘에게는 빛을 주심.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땅에는 광명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아홉 번째 재앙을 내리셔서 모든 애굽 사람들은 흑암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까? 진리의 태양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거기는 어두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흑암이 없었더라." 고 하지 않고 ‘광명이 있었더라.’고 말씀합니다. 흑암이 없었다는 말은 소극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없었다는 말에 불과하지만, 광명이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그들 가운데 머무르고 있었다는 적극적인 말입니다.
아무리 깜깜한 시대, 아무리 절망스럽고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어둠이 없을 것을 예고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아무 재산이 없어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내안에 비췬다면, 우리에게는 불안이 없으며 주님의 인도와 천국에 대한 밝은 확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같은 땅인데도 어디에는 흑암이 지배하고 어디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도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한사람에게는 일이 되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길이 막히는 섭리가 있습니다. 똑같이 공부 했는데도 한사람은 그길로 성공하고, 한사람은 그 길에서 실패하는 사람을 우리는 늘 만납니다. 왜 그럴까요? 변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셨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느냐, 이것이 성패를 가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입어서 그분의 은혜를 받을 사람으로 정해진 사람, 그래서 그분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순종할 마음과 헌신할 마음까지 얻은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빛을 비취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며,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사람에게는 절대자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혜와, 미래의 소망과 평안과 축복의 빛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헌신하는 성도는 복된 사람입니다. 그들의 장래는 든든합니다. 결코 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합시다.
오늘 잠깐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장해물은 도리어 훌륭한 기회가 되고 축복의 밑천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고, 현재 고난이 있거든 눈물로라도 찬양을 드리며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고, 그들 앞을 어둡게 하실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며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흑암이 아니라 광명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세상의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빛이실까요? 진리의 빛이고 구원의 빛이며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며 진리를 알고 따를 수 있습니다. 빛이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듯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도, 세상의 원리도, 인간이 가야할 길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서 모든 것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바로 보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잠을 못 주무시는 분은 혹 없습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며칠씩 뜬눈으로 지샌 적은 없습니까? 평안이 없고 소망이 없으면 마음이 깜깜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치료 받을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 빛이요 구원이십니다. 그분에게로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합니다. 자기 고집이나 짐작으로 가지 말고 말씀이 비춰주는 대로 걸어가면 됩니다. 말씀이 하라는대로 하고 가라는 데까지만 가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만 따르면 광명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어느 가정이나 어느 사회라도, 참 빛이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말씀을 받드는 곳에는 어두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재물이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이웃에게 그 빛을 전할 수 있도록 빛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동네의 등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 깜깜해질수록, 우리의 사명은 더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빛 가운데 살면서, 이렇게 살면 된다고 빛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소유는 어떻게 할 것인가?
흑암재앙을 견딜 수 없게 된 왕 바로가 모세를 불렀습니다.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가서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여덟 번째 재앙을 당할 때는 어린것들도 데려갈 수 없다고 하더니(10,11) 이제는 어린것들은 데려가도 좋으나 다만, 짐승들은 놔두고 가라고 합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제사를 하러 가기는 가되, 가지고 있던 재산은 포기하고 사람만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성도에게 하는 것과 같은 간교한 제안입니다.
출애굽기는 옛날이야기 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현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억압의 땅 애굽에서 탈출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신행동, 불신사상, 불신습관에서 탈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스라엘을 그렇게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오늘 사단도 우리를 세상에 묶어 두고 호락호락 놔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가기는 가되 물질은 가져가지 말고 네 마음만 가라’고 속삭입니다. 교회에서 헌금에 관하여 설교하면 매우 기분 나빠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제 물질은 간섭하지 마세요. 오직 마음만 바칠께요.”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반쪽 신앙도 못됩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소유를 내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쓰게 되며, 그렇게 쓰는 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의를 이루지도 못하며 도리어 악을 행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은 절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짐승은 놓고 가라는 바로의 제안에 모세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지 일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진 물질 중에서 제물을 받으셨으며, 십일조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느 것을 제물로 바치라 하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세는 양 한 마리도 놓고 갈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더러 제물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로는 그동안 이스라엘을 부려먹은 품삯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역시 하나님께 생명을 받아 살았으니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주신 물질도 함께 가지고 가야 한다는 원칙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제물이 없다면 왕이라도 우리가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것 가지고 간다는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우리의 생축은 우리들과 함께 가야하며, 한 마리도 남기고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 까지는 거기서 어떤 것으로 섬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분이 언제든지 요구하시면 그분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요 내 시간, 내가 가진 재능, 자식, 재물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분께서 무엇을 요구하신다면 나는 그 무엇이라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것을 세상에 소속 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렵니다. 그런 말입니다. 그렇게 선언하고 그렇게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모세를 향하여 막말을 했습니다.
"당장 꺼져라. 네가 내 얼굴을 다시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제 더 이상 타협하지 않겠으며, 절대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모세도 맞받았습니다. “옳습니다. 나도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왕이 우리의 제사할 짐승을 내라고 요청하고 있고, 이제는 나도 더 이상 왕을 보지 않을 것이요’ 라고 막말을 하고 나왔습니다.
바로는 여전히 강퍅했지만, 모세는 점점 담대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강경함의 근원은 다릅니다. 바로의 막말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고, 모세의 담대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 담대함입니다. 누가 승리할까요?
바로가 얼굴을 붉히면서 ‘너 다시 한 번만 내 앞에 나타나면 죽을 줄 알라’고 소리치며 모세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상대는 애굽의 절대군주 바로입니다. 이쯤 되었으면 ‘아, 우리가 해방되기는 글렀구나.’ 하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앞도 뒤도 옆도 다 막힌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전혀 기죽지 않고 도리어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깜깜한 바로는 무지 때문에 막말을 하고, 모세는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과 장차 하실 일을 알기 때문에 담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막말을 할지라도 우리에게 길이 막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은 진리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의 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모세처럼 진리의 빛 아래서 그분을 바로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담대하게 세상에 진리를 선포하며 살아갑시다.
여러분은 힘들고 어려움에 닥칠 때, 무엇에 마음을 기대어 살고 있습니까? 바로처럼 무식한 고집으로 밀고 나갑니까?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못합니까? 도대체 모르겠으니까 점쟁이한테 한번 가서 물어봅니까? 아니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을 따라서 가십니까?
결국은 한 사람은 망하고 한 사람은 승리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말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넘어질 리가 없으며 약해지지도 않습니다. 어두워가는 세상에서도 세상의 빛 되신 주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서 세상에 빛을 비추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