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동환은 한국 역사의 주변자적 체험을 철학적으로 이론화하는 데서 시작하여 인류의 존재양식과 생명의 역사를 포괄하는 존재론의 보편적 바탕을 찾고자 한 철학자이다.『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동서양의 전통 철학들이 우리 시대에 일으킨 사회철학적 문제에 대한 반성을 담은 책이다.
출판사 서평
여기, 한국에서 탄생한 철학이 있다!
한국에서 어떤 철학이 탄생할 수 있을까?
- 역사의 변두리, 철학의 주변부에서 바라본 인류와 세계의 존재양식
‘한국에는 철학이 없다’고 말한다.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의 수용자였을 뿐 스스로 내세울 만한 논리나 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동서양의 기존 철학들로는 주변부 한국이 겪은 역사적 체험들을 해명할 수 없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과연 어떤 철학이 이 땅의 사건들을 해명할 수 있을까? 식민지 경험과 전쟁, 급격한 산업화, 민주화의 경험을 단 한 세기에 겪은 이 나라에서 가능한 보편의 틀은 무엇일까? 나아가 그 틀을 인류 보편, 생명 일반의 논리로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박동환(1936~,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은 한국 역사의 주변자적 체험을 철학적으로 이론화하는 데서 시작하여 인류의 존재양식과 생명의 역사를 포괄하는 존재론의 보편적 바탕을 찾고자 한 철학자이다. 지난 40여 년간 그는 타자 또는 주변자의 관점에서만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우연’ ‘차이’ ‘다양성’ 등의 지평을 통해 존재의 보편적 논리를 해명하는 데 몰두해 왔으며, 서구철학과 중국철학이 지닌 근본적 한계를 지적하고 그 허구성을 끊임없이 비판해온 철학비판가이기도 하다.
저자는 전작 『안티호모에렉투스』(2001)에서 이미 기존의 ‘인문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 철학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고, 역사의 변두리와 철학의 주변부를 대변하는 철학적 문명론을 ‘3表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번 신작 『x의 존재론』(2017)을 통해서는 이 프로젝트를 생명과 존재의 보편적 논리를 세우는 데까지 밀고 나가고 있다. 「박동환 철학선집」 1권인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1987)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주로 동서양 논리의 차원에서 검토하고 밑그림을 그린 그만의 ‘철학개론’이라 한다면, 2권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1993)는 그 관점을 지식사회학의 방법으로 우리 사회에 투영해본 ‘사회철학’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박동환은 누구인가?
- 주변자로부터 찾는 보편의 논리
박동환은 칸트 철학으로 공부를 시작했다가 미국 유학 당시의 학생운동, 반문화운동 등의 영향으로 사회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의 사회철학이 한국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과연 한국사람 같은 주변자들을 설명할 수 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한국 사람은 다만 관망하고 모방할 뿐인 그래서 만들지 못하는 주변의 제삼자다. 오늘 벌어지는 현대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변에 놓인 자에게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의 허구를 선전하는 패권의 철학은 주변자에게서 거부될 수밖에 없다. 주변에 놓인 자는 일시적으로 실현된 패권의 진리가 아니라 그것이 모두 무너져 흩어진 다음에도 남아 있을 원자의 진리를 구한다.” 『안티호모에렉투스』, 60쪽.
박동환에 따르면 우리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불교, 조선시대의 유학, 20세기 들어서는 서양철학으로 그저 철학을 갈아탔을 뿐이다. 과거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지배하는 문명의 주류를 중국에서 서양으로 바꾼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한국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세계에서 추방당한 고아”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 진단을 통해 오히려 박동환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넘어서는 또 다른 철학의 가능성을 끄집어낸다. 한국의 이런 경험으로 인해 외래의 철학을 어떤 절대적 진리로도 수용하지 않는 물러섬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만의 독자적 성향이 아니라 문명의 ‘주변자’이자 ‘타자’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생명이 공유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주변자가 겪는 격변과 좌절의 체험은 진리니 이념이니 하는 동일성의 세계를 근본적 차원에서 의문에 붙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사상이 교차하는 주변부(한반도)는 모든 이념과 논리의 무덤이며, 패권의 철학이 선전하는 보편의 허구가 드러나고 그 진정성이 의심받는 위기의 문턱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변자들에게 어떠한 철학이 있을 수 있는가? 패권의 문명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주변인에게 남아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
“왜 내가 읽고 가르치는 철학사가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주(周)의 역(易)이나 예악(禮樂)으로부터 뿌리를 찾아야 하는가? 왜 그리스민족과 중화민족만이 인류 사색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으며 그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적수공권으로 시작한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철학사를 새로이 이해해야 한다. …
인간만이 이해하는 차원의 논리, 인간만이 빼어나게 갖는 인식능력, 인간만이 참여하는 존재와 자연의 영역이란 없다. 모든 존재하는 것이, 모든 생명이, 그리고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가 모두 참여하며 공유하는 그런 세계관과 논리학 말이다.”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81, 86쪽.
박동환은 중심부와 주변부, 근대와 전근대, 문명과 야만, 서양과 동양, 인간과 비인간, 무식한 자와 유식한 자 사이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철학사가 자민족, 자문화중심주의를 보편주의로 포장해온 것임을 폭로한다.
오히려 보편의 논리는 그러한 중심부의 바깥에 있는 주변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이처럼 박동환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모두의 전통을 깊이 있게 탐색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서 있는 역사와 현실 위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물음을 일관되게 따라간 철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서양철학이나 동양철학을 한국화하여 ‘한국’ 철학을 만들어내려는 민족주의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유한한 존재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타자적이고 주변자적인 체험이고, 이 주변자의 삶과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 추구하는 일관된 과제다.
“철학자는 세상사람들에게 허구의 전문(專問)을 가르치기 전에 그들이 숨긴 원시의 삶과 논리를 대변해야 한다.”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87쪽.
“지금 철학사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민족은 지구상에서 분포를 보면 그 비율이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나머지 사람들의 생활권에 속한 철학자들의 책임 망각입니다.” 『안티호모에렉투스』, 214쪽.
문명의 시원에서 본 인류의 존재양식
- ‘도시의 논리’에 매몰된 인문주의 철학 비판
박동환은 초기 저작에 속하는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1987)과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1993)에서 동서양 철학사에 의해 은폐되어온 주변자적 삶의 논리를 탐구하는 것이 앞으로의 철학의 과제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연’과 ‘다름’과 ‘파국’이야말로 오히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보편적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후기 저작인 『안티호모에렉투스』(2001)에서는 기존의 동서양 철학이 주변자의 삶과 역사, 자연의 생태와 ‘붙음살이’(parasitism)를 체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성립된 ‘도시체제의 철학’이라고 규정한다. 도시와 중심의 논리에 속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더 보편적인 존재 실상을 철학이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은 인간 이성의 개명(開明)이라는 이념 아래 도시의 철학으로 이어져 왔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불가해(不可解) 아니면 초월의 타자에 의해 결정되는 생사와 운명의 한계 안에 있고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이 자연에 소속한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생태로서 그들은 도시 밖의 철학을 지닌다.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그리고 도시문명 전통 밖에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다른 생명 가진 것들과 함께 지니는 자연생태로서의 철학이다.” 『안티호모에렉투스』, 123쪽.
요컨대 한편으로 이제까지의 동서양 철학은 “인류의 문명이 이룬 정신적 업적의 으뜸”으로 여겨지며 사람과 사람 간의 수평적 관계 형성에 규범적으로 기여해왔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문명구축 원리로서의 철학은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맺음(도시 안의 질서 확립)에만 몰두함으로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초월적 타자의 수직적 관계맺음(도시 밖의 우연과 운명)을 망각하고 배제해왔다는 것이다.
『안티호모에렉투스』는 특히 중국 고대의 갑골문과 고대 그리스 철학 등 동서양 철학 문헌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증명해낸다.
이것을 통해 그가 도출한 결론은 매우 놀랍다. 저자에 따르면 동서양의 여러 철학들은 그것들을 만들어낸 문명과 도시적 삶의 양식을 반영하는 ‘모순해법’에 다름 아니다. 도시 혹은 국가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미지의 절대 타자와 담을 쌓게 되었고, 오직 그 성곽 안에서 완벽한 지배질서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거기서 사회정치적 모순과 대립을 해결하는 모순해법으로서 서양에서는 삼단논법 같은 ‘논리’와 ‘법’이 발명되었고, 중국에서는 예(禮)와 인문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서구 문명권과 중국 문명권에 두드러진 모순해법의 이념을 각각 ‘1표(表)’와 ‘2표’로 유형화한다.
서구 문명권의 삶의 준거인 1표는 개별자들의 사회정치적 갈등을 유(類)가 지닌 보편적 성향에 호소해 해소하고자 한다. 그래서 정당화 또는 근거 제시를 통한 쟁론이 중요해진다. 정체쟁의(正體爭議)를 통해 모든 개별자를 포섭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정점으로 무모순 곧 동일성의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지적 전통을 세운 것이다.
반면 2표는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모순해법으로서, 무모순적 체제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모순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대립하는 것들이 각기 그 정체성을 유지하며 하나의 집체질서 속에서 화해하도록 이끄는 집체부쟁(集體不爭)의 관념을 내면화했고, 모순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의지해 자리를 찾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논리를 모순해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표와 2표에 의한 모순해법은 보편적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해법들은 오직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에 대한 ‘인문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을 뿐, 도시 밖에 있는 자연과 생태, 우연과 운명의 실존적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삶의 중심에 두고 자기실현을 역사의 과제로 천명하든(1표), 하나의 천하 가운데서 상호 맞춤하는 모순해법을 찾든(2표), 그 어느 것도 미지의 세계와 대면하며 그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주변자적 삶의 체험(3표)을 해명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호모에렉투스로부터 현대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하나의 긴요한 생명행태로서 탐구행위가 ‘해답의 논리’로 간추려져 있다. 그 해답의 논리에 따라 희랍의 도시문명 가운데서 1표의 세계 인식과 모임형식이, 선진(先秦) 도시문명 가운데서 2표의 세계 인식과 모임형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태고로부터 변함없이 펼쳐져 왔을 생명행태로서 탐구행위 가운데 해답의 논리 밖에 ‘물음의 논리’로 대표되는 3표의 세계 인식과 모임형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물음의 논리는 도시문명 가운데서 완성된 해답의 논리보다 원시적이지만 오히려 영원한 생명의 탐구행위로 이어져 온 것이다.” 『안티호모에렉투스』, 9쪽.
이러한 ‘3표의 논리’ 또는 ‘물음의 논리’는 ‘해답의 논리’를 추구하는 기존 동서양 철학사와는 전혀 다른 존재 이해를 갖는다. 우리는 언제나 미지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동시에 우리 자신이 미지의 부분으로서 미지의 존재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모든 생명은 그 자체 안에 기원과 근거를 갖지 않은 “절대 의존의 존재”이자 주변자라 할 수 있다. 추상적 논리나 법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 ]에 대하여 우리들은 다만 주변자로서 기생하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지팡이로 길을 두드리는 것처럼 끝없는 탐구 과정 속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주변자적 삶의 논리는 마이너리티의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더 보편적이고 일상적이며 근본적인 삶의 형태이다. 박동환 철학은 도시문명의 근거 짓기에 매달려 왔던 동서양 철학자들이 간과해 왔던, 우리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는 철학이다.
|
첫댓글 가을이 되니 독서를 이 책으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읽다가 공유하고픈 글귀는 올려두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