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28자에 어떤 이름들을 붙였을까?
훈민정음 제정 당시의 문헌인 〈해례〉에서는 훈민정음 각 글자의 명칭에 대해 명시한 바가 없어 그 당시 각 글자를 어떻게 불렀는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럼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우리한테 주어진 실마리는 《훈민정음》과 《훈몽자회》이므로 먼저 《훈민정음》의 내용으로부터 당시의 이름을 추정해 나갈 수밖에 없다. 세종대왕은 28자에 어떤 이름들을 붙였을까? 지금부터 《훈민정음》의 설명을 살펴보면서 그 이름의 흔적을 찾아보자.
《훈민정음》에서 훈민정음의 자모를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ㄱ 엄쏘리니 君군ㄷ字 처 펴아 나 소리 니'와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이 부분은 'ㄱ'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먼저 'ㄱ'이 발성되는 위치(어금닛소리)를 설명하고, 다음으로 'ㄱ'의 소릿값이 '군(君)'이라는 음절의 처음 소리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ㄱ'의 소리에 대해서는 나와 있어도 'ㄱ'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럼 〈훈민정음 해례〉에서 자모의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그런데 이곳에는 직접 써 있지는 않지만, 'ㄱ'의 이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하나 있다. 그것은 'ㄱ' 뒤에 붙은 조사 ' '이다. 조사는 앞 단어의 소리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사의 모습은 앞의 소리를 유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가 왔다"와 "~이 왔다" 라는 문장에서 앞에 올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무슨 단어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가' 앞에는 모음으로 끝나는 단어가, '이' 앞에는 자음으로 끝나는 단어가 와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 않은가. 양성 모음과 음성 모음이 구분되어 쓰였던 옛말에서는 조사의 형태에 따라(예를 들어 ' '인지 '는'인지에 따라) 앞 단어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이 ' '은 받침이 없는 음절 아래 연결되는 것이며, 또한 모음 연결법칙에 따라 위 음절이 양성 모음일 때 붙는다. 그렇다면 'ㄱ'의 이름은 받침이 없이 양성 모음으로 끝남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일까? 세종 당시에 사람들은 위의 자모 설명을 '가 는 엄쏘리니···'와 같이 읽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바로 앞에서 《훈몽자회》라는 책을 만나 본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100년이 채 못 되는 시점에 나온 책인 《훈몽자회》에 훈민정음 자모의 명칭이 적혀 있지 않았던가. 그것과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다면 세종 당시 자모의 명칭은 '가, 나, 다, 라, 마···'였을 것이다.
그런데 《훈몽자회》 범례에 있는 명칭은 '기역, 니은, 디귿,···, 키, 티, 피, 지, 치,···'이다. 이 명칭을 통해 본다면 '기역'은 '기역 '으로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 훈몽자회의 명칭과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모 명칭이 달랐다는 뜻일까? 그런데 《훈몽자회》에 나타난 명칭 '키, 티, 피, 지, 치'가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이들 명칭은 '키 , 티 ···'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ㅣ'는 중성 모음으로 〈훈민정음 해례〉에서는 모두 ' '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뭔가가 정리된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훈민정음 28자의 이름(추정)
순서는 〈훈민정음 해례〉의 자모 설명 순이다.
기, 키, , 디, 티, 니, 비, 피, 미, 지, 치, 시, , 히, 이, 리,
·, 으, 이, 오, 아, 우, 어, 요, 야, 유, 여
《훈몽자회》에서 초성종성통용팔자는 초성과 종성이 모두 같은 글자로 쓰인다는 것을 알기 쉽게 보이기 위해 두 자의 명칭으로 썼으며(기역, 니은, 디귿···) 초성독용팔자는 받침으로는 쓰이지 못하고 초성으로만 쓰이기 때문에 한 글자로 된 명칭을(키, 티, 피, 지···) 썼다. 반면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초성과 종성의 용례를 모두 보이기 위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차피 모든 자음 자모를 다 합하면 초성에 쓰이는 글자의 합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자음은 '기, 니, 디, 리···키, 티, 피···' 등과 같은 명칭으로 불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