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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성 적진포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통영바다가 지나갑니다.
통영은 육지에서 바다로 돌출한 지형이지만 지금은 통영대전고속도로로 교통이 원활합니다.
고성군은 그 돌출한 안쪽 북편에 자리하는 지역으로, 고려시대 후기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유명 가문들의 본향이기도 합니다. 춘천사람들에게는 청평사나 풍양조씨와 연관되어 있는 행촌
이암 선생을 떠올리면 훨씬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행촌이 바로 고성이씨였습니다.
그 동쪽으로 거류면과 동해면이 반도처럼 길게 뻗어 있으면서 그 북쪽에는 동서로 기다란
당항만이 형성되어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만의 입구는 그 동북쪽 끄트머리에 좁다랗게 오무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지금 77번 도로의 다리가 놓였는데, 예로부터 이 좁은 해협을 '당목'이라고
불렀다 하더군요.
적진포는 이 끄트머리쯤 내산리 바다에 있다고 했습니다. 옛 지명이라 현재 여러 곳이 그곳이라
추정되는 전적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앞서도 말했지만 내산리가 유력하다는 설에 따라 이곳을
찾았습니다. 비좁은 지방도로를 대형버스로 달리며 좌우로 펼쳐지는 시골풍경을 구경하는데,
동해면 바닷가 도로에서는 건너편 당항포 일대의 풍경도 보였으련만 버스좌석이 반대편이라 차창
밖을 보면서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한 채 지나쳤습니다.
이 적진포 추정지에는 애초에 전적지와 관련된 유적은 없다고 하므로 내산리 앞바다까지 찾아가
바다만 둘러보기로 한 곳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니 원래 적진포라고 생각되는 곳은 위에 표기한 우리가 찾아간 곳을 가기
전의 포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적진포의 위치를 설명하는 말에 의하자면 위 지도
에서 양촌리 동쪽에서 77번도로와 1010번도로가 합해지는 곳 좌측에 고분군 유적이 있고,
적진포가 그 근처라고 하였기 때문이지요. 네이버지도의 표기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곳을 지나칠 때 마침 창밖으로 찍은 사진이 아래 사진입니다. 하지만 이편은 지형이 저지대라
배가 정박할 시설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멀리 산업단지의
구조물이 보였습니다.
하여간 이 전적지는 해전의 정황으로 보아 임진왜란 당시 마을이 있던 포구가 어디였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데, 좀 더 정확한 연구가 있기를 기대해 봐야 하리라 여겨집니다.
드디어 내산리 마을 앞에 당도하였고, 바닷가 도로변에 내려 주변의 바다와 마을을 둘러보았
습니다.
적진포해전은 옥포해전을 치른 이튿날인 1592년 5월 8일입니다. 합포해전에 이은 연합함대
1차출전의 세 번째 해전으로, 이날 남포(창원군)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왜선이 고리량(古里梁
: 현재 마산 마창대교 윗쪽의 돝섬 부근)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샅샅이 수색하며 돼지섬(猪島)를
지나 적진포 앞바다에 이르러 13척의 왜선이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왜적들은 포구에 배를
매어두고 대부분이 상륙하여 약탈을 일삼고 있다가, 조선수군의 출현에 당황하여 산으로 도망
쳤고, 신호 이순신(李純信, 방답첨사) 한백록 정운 등의 장수들이 13척 모두를(11척을 전라
좌수군이 물리쳤고 2척을 경상우수군 장수들이 물리쳤음) 쳐부수며 승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연합 1차출전의 해전들을 세 차례나 연이어 승전으로 마무리하게 됨으로써 조선수군이
왜적에 대적할 자신감을 확인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 이 해전들을 통해서, 왜선들은 서해바다로 가기는커녕 부산 앞바다를 거의
벗어나지 못할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임진왜란 초기 5월 초순의 해전상황이 이러하였고, 거기에는 충장공께서 분투하신 공이 컸다는
생각을 하며 평화롭게만 보이는 적진포 앞바다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고성 내산산업단지의 삼강엠엔티라는 회사의 거대한 모습입니다.
이제 건너편 회화면의 당항포로 건너갈 차례로 적진포를 떠납니다.
(6) 고성 당항포
내산리에서 77번도로를 따라 당목에 놓인 다리를 건너 창포리로 와서는 다시 지방도로 좌회전하여
당항만을 거슬러 내려갑니다. 다리 위에서 본 당목 입구의 만곡 모습입니다.
당항만 북안을 따라 내려가니 관광단지가 나왔습니다.
공룡세계엑스포니 야영장이니 하여 이름을 '당항포국민관광단지'라고 하였고, 전적지 답사로
왔다고 하니 반대편으로 돌아서 들어가라고 버스를 돌려세웠습니다.
하지만 반대편으로 와보니 여기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충시설만 볼 수는 없고 일단 관광
단지 입장료를 다 내고 들어가라는 말에 기가막혔습니다. 단지 내에 뭐뭐가 있는지 한번 보기나
하길 바랍니다!(아래는 네이버지도임)
현충시설과 위락시설을 묶어서 관광단지로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고성군의 생각이야
뻔히 알 수 있었지만,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성격이 전혀 다른 전적지와 공룡을 함께 보라는
이런 조처는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볼거리 위주로 그저 관광하며 놀이로 오는
관광객들도 물론 없지야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 일행처럼 불원천리 찾아와 선열들의 고귀한
자취를 확인하고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시민의 탐방에 대해서는 왜 배려를 하지 않는 것인지,
고성군의 이런 조처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공룡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닙니다. 이건
고성군에서 전적지조차 상업적인 용도로만 관리한다는 잘못된 판단임에 분명하였습니다.
나중에라도 공식적으로 항의하여 전적지 현충시설을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시정되어야
하리라 여겨졌습니다.
결국 매표를 거부하고 버스를 돌려세운 다음, 일행들은 내려서 당항포를 거닐며 당항만 바다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입구 도로변에서는 공룡발자국화석지 안내판이 보였습니다. 그렇지요,
공룡의 유적! 고생물학 서적을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무한매력의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고 필자도 충분히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번 발길을 공룡이 막을 줄 어찌
예상이나 했을까요!
저편으로 현충탑이 건너다 보였습니다.
그 끄트머리 너머로 당항만 건너편 남안 동해면 쪽의 조선소도 보였습니다.
지금의 당항리 당항포구는 위 로로로 더 내려가서 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임진왜란 당시 노략질을 일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전쟁 중에 왜적들이 하필
이렇듯 자루처럼 출구가 막힌 당항만에 들어왔을까 하고 의아심도 들었습니다. 답사설명문에는
당항포해전 설명이 빠져 있었는데, 이 해전에는 그럴 듯한 전설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지명들에도 임진왜란의 흔적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마 당항포해전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보였습니다. 1592년 6월과 1594년 3월의 해전이지요.
1592년 5월 초순의 1차출전에 이어 처음으로 거북선을 앞세운 연합함대의 제2차출전이 5월
29일 사천해전으로 시작됩니다. 이어서 6월의 당포, 당항포해전으로 이어지는데, 고성군에서
소개하는 6월 5일의 당항포해전 설명은 이렇습니다.
"초5일(양력 7. 13)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서 쫓긴 왜선들이 거제를 지나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선 23척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선 25척,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3척 등 51척의 연합함대가 당항포로 진격해 들어가니 속시개(당항만) 서쪽 기슭에 검은칠을 한 왜선 26척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다. 이에 우리 수군의 연합함대는 당항만 어귀에 4척을 숨겨두고 47척이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해 들어가 왜적의 머리 43급을 베고 왜선 전부를 불태우고 왜적들이 육지로 올라가 민간인들을 해칠 것을 염려하여 왜선 한척은 일부러 남겨두어 그들의 퇴로를 터 두었다. 다음날(초 6일) 남겨두었던 왜선 1척이 왜적 1백여 명을 싣고 만 안쪽에서 나오는 것을 우리 수군이 일제히 돌격하여 적선을 불태우고 왜적을 섬멸하였다."(당항포관광지 사이트의 '충무공당항포대첩지' 항목 설명)
1594년의 당항포해전 역시 당항만 밖에서 왜선 10척을, 안에서 21척을 쳐부순 주도면밀한 지략의
승전이었다고 합니다.
'속시개(속싯개)'란 당항포 일대를 일컫는 말로 적을 속여서 승리를 거뒀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
라고 합니다. 여기에 담긴 전설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고성 무기정(無妓亭)에 월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술취한 왜국 밀정의 보퉁이에서 일대의
지형을 그린 지도가 들어있음을 보고는 붓을 꺼내 당항만 서쪽 끝에서 고성읍 수남리까지를
연결해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류면과 동해면은 물론 통영까지가 모두 섬으로 보이도록
만들어놓은 것이었는데, 몇 년 뒤 왜적들이 이 지도를 보고 당항만으로 들어왔다가 마침내 조선
수군에게 쫓겨 소소포(召所浦:당항만 서남쪽 끝인 현재의 마암면 두호리)까지 갔으나 도주로를
찾지 못하고 전부 몰사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입니다.
이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치밀한 지략이 돋보인 것은 사실일 터이나, 옥포해전처럼 전라도
만이 아니라 경상도의 여러 수군들도 함께 한 연합전이었던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기념공원 안에는 숭충사(崇忠祠)라는 사당이 있다는데, 그 주위(主位)는
역시 충무공입니다. 그래서 사당도 충무공, 기념탑도 충무공, 모두 충무공만 내세우며 기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사당 안에 다른 참전 장수들의 신위가 있는지 없는지는 도무지 확인할 수
조차 없었지만 연합전의 장수들도 함께 기림을 받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정오 무렵 일행은 버스에 올라 관광단지를 떠났습니다.
배둔리 읍내로 나와 남해안대로 길가의 기사식당에서 낙지전골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른
시간부터 거동하여 가득찬 일정으로 다소 힘도 들었던 터였지요. 이제 답사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귀로의 여정만 남았습니다.
여섯 시간 가까이의 버스 안 시간은 우선 진행팀의 무사하게 답사일정을 마무리한 점에 대한
감사의 말에 이어서 군위 휴게소까지는 잠시 쉬는 겸하여 버스기사님의 호의로 영화 <명량>을
방영하여 감상토록 하였습니다.
영화는 감동만큼 논란도 많았지만 이미 본 내용이라선지 금세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깨어 보니 창밖으로는 현풍 들판이 내다보였습니다.
군위에서 쉬고 나머지 두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우선 참가하신 30분 모두의 답사 소감을 돌아
가며 들었고, 사업회가 할 일에 대한 생각도 나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선조의 흔적을 찾는 답사는 문중의 어르신들께도 의미가 깊은 중요한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어 보였지만, 함께한 각 분야의 시민 여러분들에게도 장차 잊히지 않을 기억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옥포 지세포 적진포 당항포 전적지들은 이제 이렇게 춘천시민들에게도 충장공의
이미지와 함께하는 마음속의 연고지가 된 것입니다.
이번 답사를 계기로 특히 충장공의 해전 사실들이 좀 더 밝혀져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까지의 <행장>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적어도 한산도대첩
까지의 행적들이 면밀한 고증과 함께 새로이 연구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이런 점들은
지역사의 입장에서도 과거의 단순한 답습이나 고식적인 해석을 넘어서는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시점에서의 <충장공 연보>가 쓰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사업회에서는 사계의 최고 전문가들로 학술대회를 구성할 수도 있겠고, 또
이번의 답사만이 아니라 다른 전적지들에 대한 관심도 이어가며 시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나가야 하겠지요. 나아가 거제시나 고성군에도 춘천시민들의 이러한 관심을 알게
하는 일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의견을 앞에서 이미 다 말하였지만, 충장공의 근무지였던
지세포는 성곽 유적 말고는 지세포진의 아무런 흔적이 없는 아쉬움이 있었고, 적진포 역시 마찬
가지였습니다. 달라진 모습을 보려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먼저 할 일이
겠지요.
춘천에 도착하니 6시가 안 되었습니다. 퇴계동 '청목'에서 두부찌개로 저녁식사까지 마치고서야
모두 헤어졌습니다.
자기 지역의 선현들을 올바로 기리는 일이야말로 떳떳한 시민이 되는 바탕이란 생각에서 시작한
사업회의 일에서도 이제 1박2일의 답사 내내 더해진 친밀감과 서로 나눈 생각들을 가지고 좀 더
확실한 구상이 서게 될 것이고 추진력을 얻으리라 여겨졌습니다.
첫댓글 간척을 통해 지형이 많이 바뀌었을테니 위치를 비정하는 일은 면밀한 연구가 따라야 할것 같습니다.
재작년인가 당항목을 지난적이 있는데 미리 이런사실을 알았더라면 좀더 주의깊게 보아있을텐데 아쉽네요.
자세한 답사기 감사드립니다.
긴 답사기를 자세하고,현장감있게 올려 주신것에 감사드립니다...
적진포해전의 승전기록을 애초에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항목 설명대로 적었으나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카페지기의 지적에 따라 위와 같이(황토색깔 글씨) 13척 모두 분멸시킨 것으로 고쳤습니다.
정 위원님의 생생한 답사 후기 잘 봤습니다.
저는 답사 내내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전적지가 충무공 일색으로 조성된 것도 아쉬웠지만
고향에서는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었나 생각 하니 그들만 탓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학문적인 것과 그를 토대로 선양해야 할 일들이 많아 실타래 풀듯이 조심스레 진행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앞으로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