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는 세례자 성 요한의 수난을 기념합니다.
수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떠오릅니다.
실제로 교회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때에 주님수난성지주일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그저 세상적인 차원에서 보는 의미없는 자기비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묵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 또한 의미없이 사라져 버리는 수난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처럼 기억해야만 하는 기쁨의 수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성찬의 전례의 ‘감사송’에는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감사송, 선구자의 사명-
세례자 요한의 수난이 복된 수난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기 때문’이라고 교회는 기도문에 직접적으로 넣어두었습니다.
사랑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하죠.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는 남녀간의 이성적인 사랑, 필로스는 형제적인 사랑(형제애)이며
아가페는 자신을 비우는 희생의 사랑으로 아가페가 두 사랑을 아우르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역사의 모든 철학자와 신학자들을 말했습니다.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위하는 그 사랑이 최고의 사랑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례자 요한의 수난이 역설적이게도 기쁨의 수난인 것은,
아가페적 사랑으로 하느님을 증거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이 빛나는 이유는,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을 내 삶의 소중한 친구로 모시면서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오늘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소개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또한 하느님을 내 삶의 멘토로 모시면서
친구스러운 하느님을 위하여 나를 내어놓으라는 부르심이 아니겠습니까?
이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요한의 수난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저 오래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여기에서 새롭게 재현되는 하느님의 신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