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탕 이야기
오늘 점심에는 걸쭉한 국물에 푹 익은 감자와 함께 푸짐하게 주는 돼지 뼈를 발라먹는 '감자탕’이 먹고 싶어서 옛날에 자주 가던 감자탕 집을 찾아 갔더니 그사이 망했는가 그 자리에 다른 업소가 들어서 있다.
몇 곳을 더 둘러 겨우 찾아간 감자탕 집 메뉴에는 식사류에 뼈해장국뿐 술안주로 2~3만원 하는 감자탕만이 있을 뿐이다.
'뼈해장국이 옛날의 감자탕'이란 주인의 말을 듣고 시켜서 나온 '뼈해장국'에는 감자가 하나도 없는 뼈다귀탕이었다.
옛날 영등포역 지금의 신세계 건너편에 있던 감자탕 골목이 1912년엔가 없어졌다거나, 원조라는 인천(仁川)의 감자탕집도 보기가 힘든 것을 보니 감자탕도 이제는 사라져 가고 있는 전통음식의 하나가 된 모양이다.
*. 감자탕의 어원(語源)
국어사전에서 ‘감자탕’을 찾아보니 ‘감자탕'은 없고 대신 ’감잣국‘, ’감저탕(甘藷湯)‘이 보인다.
감잣국: 감자를 주된 거리로 하여 끓인 국(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
감저탕(甘藷湯): =감잣국(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
위의 ‘감저’는 '감자'의 원말이고 ‘탕’은 ‘국’의 높임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감자탕은 돼지등뼈가 주된 거리로 거기에 감자를 더한 국이다.
감자라는 말은 옛날에 '감저'라 하였다. 감저라 할 때는 '감자(Potato)’와 ‘고구마(Sweet Potato)를 구별하여 말하지 않고 함께 ‘감저’라 하다가 지금처럼 둘로 분화 된 모양이다.
감자는 우리나라 재래종이 아니요 중국인이나 서양 선교사에 의하여 들여왔다는 수입종이다. 그래서 그 한자가 양저(洋藷) 또는 북저(北藷)인 것 같다.
감자의 원산지는 칠레, 페루 등 남아메리카였다.
감자는 청(靑)나라 채삼자(採蔘者)가 우리나라 국경에 몰래 들어와서 심어 먹던 것이 감자였다고 하고. 1832년 영국 상선(商船)이 전북 해안에 1 개월 동안 머물고 있을 때 선교사가 주민들에게 씨감자를 나누어 주면서 그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문헌의 기록을 보면 감자는 우리나라에 1824년부터 1832년(조선 순조) 사이 들어온 것 같다.
따라서 '감자탕'이란 조선 순조(純祖) 이후에 생긴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감자탕은 돼지등뼈를 푹 곤 국물에 감자를 넣은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돼지는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는가.
돼지는 멧돼지가 가축화(家畜化) 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약 2,000년 전부터 돼지를 사육했다고 한다.
돼지는 교배 후 4개월 임신 기간을 지나 한 배에 보통 6~12 마리 새끼를 낳는다. 새끼 돼지가 젖을 뗀 후 10일 정도 후에는 다시 발정하는 것이 돼지여서 다산형(多産形) 가축으로 농가 소득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다.
그래서 자고로 돼지는 부자를 꿈꾸는 사람들의 행복의 상징이었다. 돼지 '돈(豚)' 자가 '돈(Money)'과 발음이 같아서 그런 것 같다.
이 감자탕은 감자를 넣고 끓여서 감자탕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와 다른 어원(語源)에 대한 이설(異說)이 많다.
-감자(Potato)를 넣어 끓였기 때문에 감자탕이다.
-돼지의 등뼈(脊髓)를 감자라 부르기 때문에 감자탕이라 한다.
-애초에 감자탕의 주재료는 감자였다. 그 감자탕을 맛있게 하기 위해서 탕의 국물을 내는데 사용하는 돼지 등뼈에 든 노란 척수(脊髓, 등골)를 감자라 해서 감자탕이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감자탕에는 돼지 등뼈와 감자는 필수적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위에서 말하는 것 같이 돼지 등뼈에 '감자'라는 이름의 부분이 있는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감자탕의 유래담을 “한국음식의 명칭을 찾아서"(KD출판사 / 김준 저)에 재미있게 소개하는 글이 있다. 이를 필자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조선시대 부산 동래에 천돌 이라는 백정이 살고 있었다. 백정 천돌은 돼지고기를 팔아 생계를 꾸리면서도 정작 자신은 돼지고기 맛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돼지 살을 바른 뒤 남은 뼈를 끓인 물에 무청 말린 것이나 배춧잎 말린 것, 들깨, 깻잎, 파 마늘 등 양념을 함께 넣고 삶아 소금에 찍어 먹었는데 이 국의 맛이 달았다 하여 달 ‘감(甘)’ 자에 돼지 ‘저(猪)’ 자를 써서 ‘감저국’이라고 불렀다.
후대에 와서 그 감저국에 감자를 넣고 감잣국이라고 부르다가 그 높임말인 감자탕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자고(自古)로 감자탕은 서민이 먹던 서민(庶民)의 음식이다.
이 감자탕이 유명해 진 것은 구한 말 1899년 무렵 경인선(京仁線) 철도공사를 하던 노동자들이 돼지 뼈를 우려낸 국물에 감자를 넣어 먹으면서부터 당시 인천의 토종 음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감자탕은 서민들이 즐겨 먹던 서민의 음식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즈음 감자탕은 또 달라져서 식사로 먹는 뼈해장국과 술한주로 먹는 감자탕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 나는 감자가 없는 뼈해장국으로 점심 요기를 했으니 식사로 먹을 수 있는 '원조 감자탕' 먹으러 내 고향 인천(仁川)에 가는 기회를 만들어 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