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4일 對이집트전과 9일 쿠웨이트전. 상당수 팬들은 아직도 의문이 다 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른 게 아니라 두 경기에서 드러난 한국의 전투력, 그 뚜렷한 간극의 원인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집트전이 끝난 후 여론은 요동쳤다. 한 마디로 한국 전력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충분히 가능한 반응이다. 뒤에 다시 집중 언급하겠지만 4일 한국은 이론의 여지없이 무기력했다.
개개 플레이어들은 5분이 멀다 실수를 연발했고 전체적 호흡은 엉켰으며, 전술은 실종 상태였다. 아쉽게 석패했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동의하기는 힘들다. 완패라고 인정하는 게 차라리 떳떳하다. 졸전 후 본프레레 감독은 크게 성냈고 A팀 멤버들은 저마다 자존심 회복 의지를 강하게 비쳤다. 동기부여가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한차례 쓰라린 실패가 더할 수 없는 약이 된 셈이다. 다만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 의혹이 하나 있다. 과연 이같은 결과, 즉 이집트전 패배 후 나타난 기대 이상의 결집력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치밀하게 계산된 지휘관의 의도인지 하는 것이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라면 본프레레를 가리켜 '3류 감독'이라 했던 얀 룰프스의 혹평은 힘을 잃는다. 또 후자가 정답일 가망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 근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2월초 소집 훈련 당시로 시계를 돌려본다.
20여 일의 미국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본프레레 사단은 2월1일 파주NFC에서 훈련을 재개했다. 때와 장소는 사뭇 달라졌으나 큰 틀은 변함없었다. 평가와 테스트에 재차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요컨대 최종예선 1차전 엔트리 18명 선발을 위한 막판 저울질 과정으로 해석해도 딱히 무리 없다. 당시 선수단 내부 공기는 긴장과 초조의 연속으로 요약된다. 조재진은 2일 "내심 불안한 게 사실"이라며 "감독 눈에 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장미마저 묻어난다. 정경호 역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 오직 사력을 다하는 것 뿐"이라고 밝혔다. 실상 훈련은 간단했다.
눈 씻고 찾아봐도 특별할 게 없었다. 팀 전술 훈련은 11-11 모의경기를 치르는 게 전부였고, 부분전술 훈련은 5-5 미니게임 정도로 대신했다. 횡패스를 지양하고, 종패스를 지향하라는 주문 외에는 이렇다할 지시사항도 없었다. 그런데 특이할 점은 개인전술 훈련은 꽤나 강도 높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올바른 드리블 자세와 그른 자세를 감독이 직접 비교해 선보였고, 상체를 적극 활용할 것을 목청 터져라 외쳐댔다.
본프레레 감독은 또 볼을 컨트롤하고 통제하는 요령에 대해서도 수차례 반복 설명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집트전을 불과 하루 앞두고도 세부전술 숙지훈련은 이뤄지지 않았다. 기자출입이 통제된 브리핑 룸에서 모종의 지시가 있었을지언정 잔디 위에서 손발을 맞추는 일은 없었다. 예서 하나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본프레레 감독은 이집트전 조차 플레이어의 장단을 점검하는 연습 경기쯤으로 여겼을 소지를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이집트전 하나 만으로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짚을 것 같으면 도통 끝이 없을지 모를 일이다. 몇몇 선수들은 볼 컨트롤에 치명적 허점을 드러냈고, 패스는 5차례 이상 연결되는 일이 드물었다. 공간은 거저 헌납하기 일쑤였던 데다 위험지역 내에서 근접 방어조차 않는 우까지 거듭 범했다. 기본 4-4-2에서 공세시 2-4-4로 전환하는 이집트의 변칙 대형에 수비수들은 어쩔 줄을 몰랐으며 MF-DF 사이의 간격조절 실패로 압박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감독이 그토록 역설하던 침투 종패스는 온데간데없고 횡 또는 백패스만 지겹도록 남발했다. 이기기 위한 방법, 다시 말해 전술의 실체 또한 파악 불가했다. 측면을 우선 공략해 상대 방어선을 와해시키려는 전법도 아니었고, 중앙교란 작전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돌발 전진 패스로 배후 침략을 노리겠다는 수도 아니었다. 요사이 유행하는 개그처럼 그때그때 달랐다. 문제는 일정한 규칙, 정해진 약속이 없었다는 점이다. 얼마나 답답했던지 기자석 곳곳에선 "큰일났다" "한국축구, 총체적 위기"라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일면 예견된 일이다. 특출한 스타가 없는 한국축구의 저력은 조직력에 기인한다. 부정할 수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다르지 않다. 한데 조직을 정비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으니 성과가 있을 리 없다. 때문에 이집트전의 결과는 다른 각도에서, 또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로 팀 전술 실험이 아닌 선수 능력치 테스트의 연장 무대로 이해하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이다. 용병술만 해도 그렇다. 0-1로 지고 있던 차에 감독은 돌연 수문장을 NO.3 김용대로 교체했고,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황태자'이동국까지 벤치에 앉혔다.
이기려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그림이다. 이날 선발 출격한 베스트11 가운데 쿠웨이트전에도 변함없이 스타팅으로 출장한 선수는 7명이다. 정경호는 그나마 백업으로라도 나섰지만 김상식 박규선 유상철은 끝내 생존 경쟁에서 패배했다.
이집트전을 치른 후 본프레레 감독은 일거에 대략 3가지의 득을 취했다. 첫째, 위기감을 부추겨 내부 결속을 다졌고 둘째, 옥석 가리기 작업을 마무리했으며 셋째, 쿠웨이트 벤치를 흔들었다. 2월5일 파주NFC에는 서슬 퍼런 칼바람이 몰아쳤다.
물론 진원은 사령탑이다. 본프레레 감독은 이날 회복훈련 직전 선수단을 집합시켜 놓고 이집트전 패인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월드컵 예선에서 쉬운 경기란 없다"며 "매 순간 정신을 집중하라"는 게 요지였다. 김동진 또한 "정신적인 부분을 특히 많이 지적 받았다"고 털어놨다. 다소 산만하던 분위기는 그렇게 진정됐다. 안팎에서 대두된 위기 의식은 선수들의 자성을 끌어냈고, 승부욕 고취의 일대 전기로 작용했다. 더불어 옥석 선별 작업도 가속화했다. 같은날 오후 본프레레 감독은 최성국 김동현 김치곤 오범석 김용대를 과감히 돌려보냈다. 당초 예상보다 이틀 앞당겨 단행한 결정이다. 내친 김에 한층 바짝 고삐를 당긴다는 복안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이로써 감독의 조직 장악 심도는 더욱 깊어졌다. 그야말로 손쉽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 것이라고 평할 만 하다. 서둘러 입국,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아 한국-이집트 경기를 직접 관전한 S.파브코비치 감독은 "역시 한국은 공격이 강한 팀으로서 포워드진의 기술이 매우 인상적"이라며 엄살을 떨었다. 하나 과연 속내도 같았을 지는 의문이다. 파브코비치 감독은 또 "숙소로 돌아간 후 베스트11을 구성하고 팀 전술의 방향도 확정지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차가 발생한다. 닷새 후 쿠웨이트전을 통해 극명히 드러났듯 한국은 이집트를 상대로 전력의 100%를 노출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60% 가량 될까말까 했다. 파브코비치 감독이 한국-이집트 경기를 토대로 전술운용을 고민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실제 그랬을 것으로 가정한다면 지략 대결의 승자는 재론할 필요 없이 본프레레 감독이다.
속칭 '포커 페이스'로 일관하던 본프레레 감독은 2월6일 드디어 핵심 필승 카드를 슬며시 꺼냈다. 해외파가 전원 합류하는 시기를 기점으로 전술 훈련을 본격화한 것이다. 승부수는 측면에 걸었다. 왼 라인의 설기현-김동진, 오른 편의 이천수-이영표를 균등 활용해 공격력을 극대화한다는 방안. 비책은 2대1 패스와 크로스로 압축됐다.
①라이트윙미드 역할의 김동진 이영표가 설기현 이천수와 짝을 이뤄 월패스를 주고받은 후 측면을 파고들어 크로스를 올리거나, ②윙미드의 지원을 받은 윙포워드 설기현 이천수가 직접 터치라인을 타고 침투해 크로스를 띄우는 형태이다. 호흡, 커버 플레이, 볼 컨트롤, 패스워크 등 4박자가 고루 맞아떨어져야 효험을 볼 수 있는 병법이기도 하다. 크로스를 받는 전방 킬러 이동국(혹은 조재진)의 움직임 역시 관건. 훈련은 지속 반복됐다. 설기현 이천수가 중앙돌파를 시도, 슈팅을 날리는 등 역공 루트 다양화를 좇는 연습도 병행했다.
수비수와 미드필더들은 프레싱 강화 및 조직력 향상을 꾀한 부분전술 훈련을 중점 지도 받았다. 볼 가진 상대를 효율적으로 에워싸는 압박, 프레싱 가담자의 공백을 적절히 메우는 커버 플레이 숙달이 주요 목표였다. 이동국 이천수는 세트 피스에 대비한 프리킥과 PK 훈련을 별도로 받았다. 7일 실시된 연습도 바탕은 유사했다. 왼 라인의 협력 체계 완성도 고양 차원에서 설기현-김동진이 포커스 전면에 내세워졌다는 점만 달랐을 뿐이다. 본프레레 감독은 특히 설기현을 집중 조련했다.
최선의 패스 타이밍과 효과적인 드리블 요령을 구체적으로 짚어 줬을 뿐 더러 찬스메이커로서의 책임을 강조했다. 주목할 점은 전날에는 보이지 않던 공격 전술 실험이 하나 추가됐다는 것이다. 박지성 쮝 이동국으로 연결된 볼을 이천수가 되받아 중앙으로 파고든 설기현 이동국의 머리에 얹어 주는 방식이다. 쿠웨이트 수비 진영 한복판을 먼저 허물어뜨린 후 측면으로 시선을 분산, 크로스 쮝 헤딩으로 골을 노리는 게릴라 전법이다.
미드필드라인에서는 드센 압박으로 볼 탈취 후 롱패스를 이용, 곧장 역습하는 연습이 전개됐다. 수비라인은 전날과 다름없이 호흡 맞추기에 분주했다. 부분전술 훈련을 끝낸 후에는 9-9 미니게임을 통해 정밀도를 높이는 동시 팀 전술을 가다듬었다. 이집트전 준비 단계엔 보이지 않던 개인-부분-팀 전술에 이르는 총체적 점검이 현실화한 것이다. 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실시된 60여 분간의 마지막 담금질 중 45분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대신 본프레레 감독은 "소집기간 공격진에게 몇 가지 훈련 패턴을 반복케 했고, 수시로 조직력을 역설했다. 선수들도 자신에 차 있는 만큼 어이없는 결과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쿠웨이트전이 열린 9일 최종엔트리 18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유상철 김정우 남궁도는 막판 짐을 쌌다.
결전의 날 본프레레호는 비상했다. 단언해 이집트와 맞붙었을 때 보인 전투력과는 여실히 달랐다. 질적으로 몇 단계 숙성된 게 확연했다. 응당 비결이 있다. 팀원 11명이 유기적으로 뭉친 까닭이다. 언론에서 곧잘 사용하는 '유기적 호흡'이란 실상 거창한 표현이 아니다.
팀원 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협조시스템이 튼실하다는 뜻이다. 더 간명히 말하면 멤버 모두가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의미. 전반전 한국의 모습을 연상, 대입해도 무방하다. 공격수-미드필더-수비수들의 상하 포진 간격이 좁아 압박 전술을 펴기 수월했고, 패스 성공률도 높았던 게 그 적절한 방증이다. 미리 짜놓은 각본, 다시 설명해 사전 약속한 플레이가 술술 먹혀들었다는 점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훈련과 실전은 다르다.
실전에선 훈련 때 나타나지 않던 변수가 곳곳에서 여럿 등장한다. 결국 훈련이란 수없는 반복을 통해 실전 적응력을 높여가는 과정이다. 한국은 훈련 재미를 톡톡히 봤다. 측면이 살아났고, 중앙 침투가 효력을 발했으며 공격 차단 후 되받아치는 카운터어택도 빛났다. 요는 연습의 결실이다. 전술의 승리이기도 하다. 갈래갈래 침공 루트를 분산하고 순간순간 스타일을 변화시킨 덕분이다. 반면 쿠웨이트는 예상대로 '선수비 후역습' 작전을 들고 나왔으나 종국에는 역습에서 실패했다.
수비는 무난했다. 이동국의 발리포나 이영표의 엇박자 슛은 도리 없는 일이다. 역습 실패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압박대결에서 졌기 때문이며 둘째, 패스가 단조로웠던 탓이다. 뒤집어 해석하면 좁게는 김남일과 박지성의 공이며 넓게는 공간을 점령한 전체 11명의 수훈이다. 2004아시안컵 8강전 이후 근 반 년 만에 재가동된 김남일-박지성 조합은 확실히 위력이 있었다. '아시아 싸움닭'김남일은 특유의 육체적 강인함에 컨트롤, 시야, 패싱력을 한결 업그레이드 했다.
또 속도와 센스를 겸비한 '체력왕'박지성은 경기를 읽는 눈, 전술을 실행하는 힘이 월등해졌다. 부분 압박 능력과 공간 커버 실력은 둘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김남일은 아직 체력이 완전치 않다.
상대 의표를 찌르던 돌발 전진패스가 후반 들어서는 잦아들었고, 집중력 감소 현상까지 노출했다. 부상 여파 탓에 풀타임을 소화하기는 무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팀 전반적으로도 후반전은 아쉽다. 볼 처리에 세밀함이 떨어졌고 응집력도 무뎌졌다. 이렇다할 위기는 없었지만 심각한 실수는 더러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비-미드필드라인의 간격이 점차 넓어진 데서 비롯된 문제들이다.
승리를 목전에 둔만큼 위험지역을 보다 안전하게 사수하겠다는 감독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수비수들의 자체 판단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점이 경기력 저하에 적잖은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MF-FW라인이 적정 틈을 유지하며 1차 봉쇄선을 능률적으로 막지 못했다면 위험천만할 뻔했다. 수비력은 호평받을 만 하다. 스리백 요원을 칭찬하는 게 아니다.
11명의 방어가 좋았다는 뜻이다. 전문가 집단의 중론대로 플랫3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는 게 현명하다. 평가할 만한 잣대가 없었다. 결승골의 주인공 이동국은 다름없이 뻣뻣했다. 몸놀림은 비교적 부지런했으나 효율성이 떨어진다. 해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설기현은 지나치게 능동적이었던 반해 김동진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둘이 조화로웠다면 다행이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천수 이영표는 동선이 빈번히 겹쳤다. 이로 인해 공간이 손실됐다. 다들 확인했겠지만 이천수는 트레이드마크인 자신감마저 증발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말미에 몇가지 흠을 끄집어봤다. 손보면 된다. 다들 잘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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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프레레 무섭넹ㅋ
졸리 길다...글읽기 너무 싫은데...
솔직히 평가전 가지고 오버하는 나라도 흔하지 않죠...다른 나라들은 평가전도 연습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데..우리나라는 평가전 삽질하면 언론들 '끝장났다, 큰일났다' 면서 씹어대기 바쁘고...
잘썼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