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당선작
* 최지안 (수필가)
대학에서 행정행과 국문학 전공. 2016년 용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16년 수필집 『행복해지고 싶은 날 팬케이크를 굽는다』 출간. 동일 저서로 2027년 매원수필문학상 수상. 2019년 용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19년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 출간. 동일 저서로 한국문학예술위원회 우수나눔도서 선정
2019-2020 경기신문 오피니언 <수필의 향기> 연재
2020년 경북일보 주최 흑구문학상 은상(수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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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 최지안
가난한 나의 말들은 금세 해졌습니다
낡은 소맷부리처럼, 당신에게 닿으면 올이 풀리는 날개들
시린 발 비비며 겨울을 읽는 동안
통장 잔고가 줄듯 심장의 말도 줄어갔습니다
당신에게 빌린 언어들은 붉은 딱지가 붙어 쓸 수 없습니다
뒤꼍에서 곱은 손으로 보낼 깃을 짰으나
늦가을 기러기처럼 떠나는 것을 시라고 한번 불러보아도 되겠습니까
끊긴 안부들이 그렁그렁 내려앉은 꿈결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우체통들
밤새워 계절을 건너간 꿈은 또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오고 돌아오고야 말고
나는 서랍 속에 얼음장 같은 종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겨울 처마 밑에 쩔쩔 매던 그런 문장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 끝에서 가끔 똑똑 햇볕이 떨어지기도 하는
꽃의 지문 / 최지안
넘어질 때마다 무늬가 생겼어
물결이 굽이칠 때마다 결 따라 남긴
소용돌이치고 모아지고 만나서 몸에 남은 무늬
그 골을 따라가면 전생을 꿈꾸듯 어딘가에 도착하곤 했어
언니가 나를 업고 가던 그 저녁 신작로
등에서 수박 냄새가 났지
우물에 떨어진 달을 아무리 길어 올려도 두레박엔 아무것도 없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하루는 흔적도 없었지
물일을 많이 해서 닳아버린 지문처럼
꽃잎에 남은 잎맥들은 해독 못한 과거로 남았어
이불 뒤집어쓰고 울던 밤이거나
해고 통지를 받은 봄이거나
구급차를 타던 날이거나
생채기 하나 없이 오는 아침은 없어서 말이지
물결무늬로 말라버린 압화를
갈비뼈 어디쯤 숨겨 놓은 기억처럼
책 읽던 중간에 끼워 놓았지
어쩌면 가슴에 눌러 찍은 지문 같아서
꽃의 마지막 말 같아서
납작하게 기억에 눌러놓고 간 누군가의 무늬 같아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같은 날 / 최지안
당신을 만날 때 이 멜로디를 가지고 가야지 스카프를 풀듯 목덜미 뒤쪽에서 스르륵 풀어 놓을 테야 바람의 온도가 20℃는 넘어야겠지
당신의 온도는 어떤지 말해줘. 겉옷을 준비해야할지 몰라서 꽃들은 한껏 부풀어 있어야 해 라일락도 피어야 하고 모란도 피어야 해 날짜를 밟지 말아줘
당신은 이번 31일까지만 존재해 서른한 개를 써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지만 당신을 다시 만나려면 태양을 한 바퀴 돌아야 하거든 서둘러야 해 6월이 오기 전에
금을 넘어버린 것은 되감기할 수 없어 실타래는 다시 감을 수 있지만 당신이 당긴 지금은 다시 감기지 않지 엉킨 실타래는 풀기 힘들잖아
어쩌면 당신은 지금까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네 당신이 피워낸 모란은 시들어가고 있는데 웃음이 나려고 해 풍선이 입가에서 툭툭 터지는 것 같아 눈부신 오늘, 하늘은 이렇게 파란데 나갈 일이 없네
미개봉 / 최지안
딩동
누군가 한마디 던져놓고 간 모양입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는 쥐죽은 듯 잠잠합니다
문 앞에 배달된 택배상자처럼
오늘 온 안부는 오늘의 문턱에서 나가지 못한 채
읽지 않은 신문처럼 그대로 입니다
보지 않은 문자는 파란 점으로 싱싱합니다
그 점을 건너뛰고 다른 상자를 엽니다
백화점에서 봄을 세일한다고 합니다
가운데 손가락이 다른 창도 열어젖힙니다
미래를 담보로 알 수없는 현재가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지나쳐버린 문자는 쥐죽은 듯 꼼짝 못합니다
당신에게 들어가지 못하고 쩔쩔매던 세 번째 손가락처럼
이 안부를 우리는 언제까지 유통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서 열면 상할 대로 상한 당신의 마음이 들어있을까요
열고 보니 꽝이었던 것도 가끔 있었지요
어떤 선택들은 열지 않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배롱꽃 / 최지안
비는 이틀 내내 머문다 차 유리에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졌다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하다 모로 누워 비스듬히 나를 보는 얼굴은 홀쭉하고 연하다 꽃잎을 떨군 나무는 남은 것들을 간수하느라 비에 집중하고 나는 유리에 떨어진 시선을 모은다 한 방울 한 방울 꽃은 지쳐보인다 나도 젖어 모로 눕는다
비의 소리를 듣는다 유리창에 내딛는 동그란 비의 발자국 닿으면 맥없이 미끄러져 오는 발걸음 비에 젖은 가을이 온다 나뭇잎처럼 젖은 머리칼로 당신은 방울져 떨어지던 빗물을 툭툭 털었다 그때 모서리 해진 빗방울이 튀었다
가을이 비와 섞인다 배롱꽃 향기는 내 몸에 가만히 머물다 간다 사랑하는 사이는 상대의 냄새가 강해도 맡지 못한다고 했던가 당신에게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여름이 자꾸 뒤돌아본다 엔딩 크레딧처럼 올렸다 지워지는 당신 이름을 불러 세워 셔츠 깃을 올린다 월세가 밀린 꽃이 아픈 허리로 비를 밟고 야근을 간다
시작인지 끝인지 알지 못하는 날들이다 가을을 가불한 여름의 끝 그 경계에 비가 줄을 긋는다 오늘은 여름이지만 내일은 가을이 되겠습니다 비옷을 입은 아나운서가 말한다 인연 하나가 끊어지면 어느 마디에선가 툭하고 새로운 가지가 튀어나오겠지 당신과 나의 경계는 어디쯤에서 선명해졌을까
9월은 비가 오듯 왔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비처럼 물러갈 것이다 비가 그치면 배롱꽃 향기도 계절 따라 흩어진다
비의 각도 / 최지안
비를 보려고 자동차를 탄다 달린다 비는 몰려온다 산이 곤두박질 친다 비의 뒤로 물러난다.
생각의 끝에 도달하지 않은 것도.
나선형이나 곡선으로 올수 없을까.
비는 달리는 유리창에 허리를 굽힌다 삶은 저 비처럼 사선이었는지 모른다 불행은 휴일을 골라 들이닥쳤다 사건들은 ‘하필이면’을 애인처럼 끼고 들어왔다 읽던 책 귀퉁이를 접어놓듯 비가 비스듬히 열어보고 간 일상은 사선으로 접히곤 했다.
비는 떨어지고 싶은 곳으로 떨어진다 아니 떨어지고 싶지 않은 곳으로도 떨어진다 자신도 그런 각도로 구부리고 싶진 않았다고 말하는 듯.
왜 구부려야 하는 거지?
자동차는 깊은 시골길로 들어선다 한참을 구불구불 들어간 마을은 흙탕물이 튄다 구불거리는 도로를 한참 올라가도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공기 좋은 곳에 살려면 자동차가 꼭 있어야겠네.
한참 기웃거리고 찾아들어간 동네의 끄트머리에 카페가 있다 커피를 받아들고 앉는다 비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수직으로 떨어진다 때에 따라 각도를 달리하는 비가 얼마나 자주 때에 따라 바뀌는지 내게 묻는다.
왜 나는 비가 흔드는 깃발을 따라다녔을까?
조금은 풀죽고 지친 비를 남겨두고 산골 오지를 빠져나온다 펼쳤던 각을 접는다
나는 내 방식으로 차를 몬다 각도가 조금 기울어 있을 것이고 비와 포개지면 어느 쪽은 보이지 않겠지만
각은 뒤로 갈수록 영역을 넓힌다
왕년 / 최지안
소줏병들이 얼근해졌어요
일렬로 세운 그들의 레퍼터리는 늘 왕년이지요
애인은 왕년에 다리 좀 떨었지요
어깨에 용 두 마리가 가끔 위협하지만 물거나 하지는 않더군요
친구는 왕년에 엄마 치맛바람으로 학교에 다녔어요
학교 앞에서 차를 대기해놓고 친구를 기다렸지요
아버지는 왕년에 여자 좀 울렸지요
애인들은 예뻤고 누구보다 많이 운 건 엄마였지요
나는 왕년이 없어요 저마다 근사한 왕년을 한 자락씩 걸쳤지만
이렇다 할 왕년도 없이 허겁지겁 살았어요
왕년을 갖고 싶어요 어디 싸고 반지르르한 왕년 없나요 창고정리 떨이처럼
만 원에 두 장인 왕년 없나요
왕년 하나 걸치고 어깨 좀 떨어보고 싶은데
오늘도 삼겹살집에 매여 있네요
왕년이 있던 사람들은 어찌 지내냐구요?
애인은 늘 다리에 쥐가 나서 애를 먹고요
친구는 엄마의 치매에 생을 붙잡혔지요
아버지는 푸들처럼 꼬랑지 말며 지낸답니다
그래도 한 잔 하면 다들 두툼한 왕년을 어깨에 두르더군요
꼬부라진 혀가 퇴장할 시간이에요
휘청휘청 사람들 사라지면
패잔병처럼 남아있는 식탁 위 술병이며 안주들
기름때처럼 찐득거리는 왕년을 행주로 싹싹 닦아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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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여기, 발화점
발꿈치 들어 살살 걸어봅니다. 지상으로부터 한 뼘 떨어져 걷는 사람이 시인이라지요. 휴대폰으로 건너온 당선이라는 말이 그 저녁을 휘저었습니다. 이름표 받아든 일학년처럼 이래도 되는 것인지, 내가 가져도 되는지 만져도 보고 기울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꿈과 잠 사이가 멀었습니다.
문턱을 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얄팍한 발목으로 넘겨다 본 까마득한 저쪽. 물렁한 턱이란 없었지요. 한 생을 시만 먹으며 무명으로 소비해도 괜찮겠다 싶었으나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은 파일 안에서 허옇게 낡아갔습니다.
끝동을 만지작거린 9월. 몇 편의 깃을 골라 저쪽 문턱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기회를 주신 김윤배, 이경철, 안도현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 알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특히 열렬한 지지자인 두 딸과 축하 케이크를 먹고 싶습니다. 마경덕, 박지웅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공부했던 수원 AK 시창작반과 시담 동지들의 응원 고맙습니다. 수필 스승이신 손광성 선생님 휘하 아가위회원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아마도 여기가 제 시의 발화점이 되겠지요. 이제부터 뜨거워지겠습니다. 40년을 디디고 살다가 얼마 전 떠나온 용인에게 안부 전합니다. 용인을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