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오씨 주요인물 프로필
오경리(吳慶履/1813~1893)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 해주. 자 중화(仲和). 호 소포(素圃). 1849년(헌종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假注書)가 되었고, 정자(正字) 등을 거쳐 지평, 헌납이 되었다.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가 70년(고종 7) 집의에 재등용되고 사간에 올라 <진시폐소(陣時弊疏)> <청저양무재소(請儲養武材疏)> 등을 올려 시행하게 하였으며, 공조참판으로 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崔益鉉)을 공박한 권정호(權鼎鎬), 백규섭(白奎燮)의 관직을 삭탈케 하였다. 82년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이듬해 공조참판이 되었다. 성품이 청빈하였으며 이기(理氣) 등의 학문에도 뛰어났다. 문집에 《소포유고》가 있다.
오경원(吳慶元/176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해주(海州). 자 선여(善餘). 호 수양일민(首陽逸民). 1783년(정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영희전(永禧殿)참봉, 연일(延日)현감, 해주판관 등을 지내고 금산(金山) 군수가 되었으나 1829년(순조 29) 불치죄(不治罪)로 몰려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고려, 조선과 명(明)나라와의 외교교섭 사실을 기술한 《소화외사(小華外史)》를 저술하였다.
오국헌(吳國獻/1599~167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해주(海州). 자 중현(仲賢). 호 어은(漁隱). 중추부동지사 오산립(吳山立)의 아들로,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과거를 단념하고 향리인 단성(丹城)에서 처사(處士)로 자임(自任)하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음서로 9품직을 거듭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송시열(宋時烈)이 출사하지 않고 성현(聖賢)의 학문을 배우는 그의 삶을 칭송하여 어은(漁隱) 두 글자를 기증해 주기도 하였다. 경학과 예학에 해박하였으며,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지지하였다. 《사서해의(四書解義)》 《역계해의(易繫解義)》 《유후귀감(遺後龜鑑)》 등을 저술했으나 현존하지는 않고 있다. 문집으로는 《어은유고》가 있으며, 권상하(權尙夏)가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오긍선(吳兢善/1878~1963)
의학자, 교육가, 사회사업가. 본관 해주(海州). 호 해관(海觀). 공주(公州) 출생. 1896년(건양 1) 주사(主事)가 되고 98년 독립협회 간사(幹事)가 되었다. 1900년 세례를 받고 이듬해 배재(培材)학당을 마치자 도미(渡美), 켄터키주 센트럴 대학에서 물리, 화학을 전공, 1909년 루이스빌 의과대학 졸업과 동시에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귀국하여 군산(群山) 야소교(耶蘇敎)병원 원장이 되었다. 군산 영명(永明)중학, 안락(安樂)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고, 광주(光州), 목포(木浦)의 야소교병원장을 거쳐 정명(貞明)여학교 교장을 지냈다. 1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의사로 있다가 16년 도일(渡日), 도쿄[東京]제국대학에서 피부과를 연구하고 돌아와 경성보육원을 설립하였다. 21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거쳐 부교장으로 있으면서 다시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피부학을 연구하였다. 31년 경성양로원을 설립하고, 3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8, 15광복 후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 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 회장으로서 사회사업 분야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교 단체 등에서 많은 공직과 명예직을 역임하였고 62년 대한민국 공익포장(公益褒章) 등의 표창을 받았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오도일(吳道一/1645~170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자 관지(貫之). 호 서파(西坡).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80년(숙종 6) 지평, 부수찬, 83년 지제교(知製敎), 87년 승지가 되어 자파(自派)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7년 뒤에 개성부(開城府)유수로 복관된 뒤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 부제학,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96년 도승지, 대사헌을 지냈다. 이듬해 예문관제학, 사직(司直), 이조참판, 98년 공조참판에서 양양(襄陽)부사로 좌천, 삭출(削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 장성(長城)에 유배되었다. 애주가로 문장에 뛰어났다. 죽은 뒤 복관(復官)되고 울산(蔚山)의 고산(孤山)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 《서파집》이 있다.
오면직(吳冕稙/1894.6.15~1938.4.14)
독립운동가. 본관 해주(海州). 이명 오철(吳哲), 양여주(楊汝舟). 황해 안악(安岳) 출생. 평양 대성(大成)학교를 중퇴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1921년 임정요원 홍완기(洪完基)와 함께 독립의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김구(金九)를 만나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22년 임시정부 비서장 김립(金立)이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운동자금 40만 루블을 횡령하자 그를 사살하고,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 허난성[河南省]에 있는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29년 정화암(鄭華巖) 등과 함께 한인무정부주의자 상하이연맹을 조직하고,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에 가입, 34년부터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군 특무대에서 비서로 활동하다가 35년 맹혈단(猛血團)을 조직, 단장이 되어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을 습격, 공사(公使) 아리요시[有吉明]를 살해하려다가 체포되어 해주(海州) 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명항(吳命恒/1673~17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자 사상(士常). 호 모암(慕菴), 영모당(永慕堂). 시호 충효(忠孝). 1705년(숙종 31) 식년문과에 급제, 1709년 교리를 거쳐 설서(說書), 사서(司書) 등을 역임, 이듬해 부수찬, 13년 필선(弼善)을 겸하고 15년 부응교(副應敎), 이조좌랑을 지냈다. 승지에 이어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 등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사직(司直)으로 있다가 24년(영조 즉위) 소론(少論)이 실각하자 사직하고 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중추부지사에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의금부판사 겸 사도(四道) 도순무사로 이를 토평하여 분무(奮武)공신 1등이 되고 해은(海恩)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올라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파라는 자책감에서 사임을 상소하였으나 도리어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고향에 효자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오상(吳祥/1512~157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자 상지(祥之). 호 부훤당(負暄堂).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지평(持平), 수찬,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사간,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51년(명종 6) 청백리에 녹선되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59년 부제학, 대사헌을 거쳐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선조 초 북변이 소란해지자 평안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어 공을 세우고, 69년(선조 2) 병조판서에 승진, 이어 이조, 예조, 형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다. 문장에도 뛰어나 당시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저서에 《부훤당유고(負暄堂遺稿)》가 있다.
오연총(吳延寵/1055~1116)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시호 문양(文襄). 문과에 급제하고 1096년(숙종 1) 요(遼)나라의 천안절(天安節)에 축하사절로 다녀와서 98년 기거랑(起居郞)에 이어 병부낭중(郞中)이 되었다. 1100년 상서(尙書) 왕하(王")와 함께 송제(宋帝)의 등극 축하사신으로 갔다가 희귀본 《태평어람(太平御覽)》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칭찬을 받고 특별히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외직(外職)을 청하여 전주(全州)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올렸다. 예종 초에 추밀원지사, 어사대부, 한림학사, 승지를 역임하고 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로 나갔다가 검교사공, 행부상서로 전임되었다. 1107년 부원수가 되어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을 소탕하여 협모동 덕치원(協謀同德致遠)공신으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가 되었다. 그 후 웅주성(雄州城)에 침입한 여진을 격퇴하였으나 1109년 길주성(吉州城)에서는 실패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왔다. 이를 재상 최홍사(崔弘嗣) 등이 문제삼아 탄핵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어 10년 수사공(守司空), 중서시랑평장사로 기용, 수사도(守司徒) 수태위(守太尉), 감수국사 상주국(監修國史上柱國)을 거쳐서 이부, 예부, 병부의 판사를 지냈다.
오원(吳瑗/1700~174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자 백옥(伯玉). 호 월곡(月谷). 시호 문목(文穆). 어머니는 현종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 1723년(경종 3) 사마시를 거쳐 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이듬해 정언(正言)으로 왕의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32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교리, 검토관(檢討官)을 지냈다. 34년 이조좌랑, 이듬해 응교를 거쳐 36년 참찬관(參贊官)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신구(伸救)하려다 파직되고 39년 부제학으로 복관, 승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문집 《월곡집(月谷集)》이 있다.
오윤겸(吳允謙/1559~16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자 여익(汝益). 호 추탄(楸灘), 토당(土塘). 시호 충정(忠貞). 성혼(成渾)의 문인.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 영릉(英陵), 봉선전(奉先殿) 참봉을 지냈다. 92년 임진왜란 때는 충청도, 전라도 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 그 뒤 평강(平康)현감으로서 97년 대과에 급제, 이조좌랑, 부교리를 지내고 성혼이 모함을 받자 사직하였다. 1602년 경성(鏡城)판관, 1607년 안주(安州)목사, 1609년(광해군 1)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가 사임, 그 뒤 호조참의, 우부승지, 충청도관찰사,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선현들의 문묘종사 반대를 탄핵하다가 강원도관찰사로 좌천, 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광주(廣州)목사를 자청하였다. 17년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간 150여 명의 포로를 데려왔다. 그 뒤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탄핵을 받았고 22년 중추부동지사로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23년 인조반정 후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고 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하고 돌아와 돈령부지사,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거쳐 26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세자를 배종, 강화(江華)에 피난, 돌아와 좌의정을 거쳐 28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돈령부영사, 31년 중추부판사, 33년 좌의정에 재임명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광주(廣州)의 귀암(龜巖)서원,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추탄집》을 비롯하여 《동사상일록》 《해사조천일록(海朝天日錄)》 등이 있다.
오일영(吳一英/1890~1960)
근대 초기의 화가. 본관 해주. 호 정재(靜齋). 서울 출생. 1911년 서화미술원에 들어가 조석진(趙錫晉)과 안중식(安中植)에게 전통화법을 배웠다. 그리고 1920년에는 서화미술원 동기인 이용우(李用雨)와 함께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제작에 참여하여 《봉황도》를 그리고, 21년부터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가단체로서 발족한 서화협회 정회원이 되어 서화협회전에 출품하였다. 치밀하고 장식적인 복고화풍의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대표작으로는 《봉황도》와 《만장봉(萬丈峰)》 등이 있다.
오재순(吳載純/1727~179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 해주(海州). 자 문경(文卿). 호 순암(醇庵), 우불급재(愚不及齋). 시호 문정(文靖). 음보(蔭補)로 등용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전심하여 1772년(영조 48)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83년(정조 7) 문안부사(問安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규장각(奎章閣) 직제학에 이어 양관(兩館) 대제학을 역임하고 90년 이조판서를 거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가 되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특히 《주역(周易)》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주역회지(周易會旨)》 《완역수언(玩易隨言)》 《독서기의(讀書起疑)》 《성학도(聖學圖)》 《순암집(醇庵集)》이 있다.
[출처] 海州吳門(해주오문) 주요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