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한 朴正熙 대통령은 1월31일 오후 청와대 국산병기전시실에서 吳源哲(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으로부터 방위산업 건설 및 공업구조 개편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吳수석이 보고하기 전 의전실에 『브리핑에 적어도 네 시간은 걸릴 것 같다』라고 하니 의전실 쪽에서는 『각하의 결정사항이다. 그날 오후 각하 일정은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두 가지 중요한 안건이 동시에 상정되었다. 이날 보고로써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접목이 되어 큰 울타리로 생각한다면 한 가지 사업으로 통합 되는 것이다. 吳수석의 회고에 따르면 이날 브리핑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국가의 命運을 걸기로 결심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朴대통령 이하 金鍾泌 국무총리, 太完善 부총리, 南悳佑 재무, 劉載興 국방, 李洛善 상공, 張禮準 건설, 崔亨變 과기처, 閔寬植 문교, 沈汶澤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청와대에서는 金正濂 비서실장 이하 관계 특별보좌관, 수석비서관이 참석했다. 좁은 방에 큰 의자는 3개만 놓고 나머지는 소형 간이의자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작은 방에서 국무회의격인 회의가 개최된 예는 전무후무했다.
오후 1시가 가까워 오자 각 장관들이 속속 도착했다. 장관들은 장소가 어딘지 몰라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서 들어왔다.
이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진열된 兵器(병기)를 보고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우선 청와대 안에 병기진열실이 있는 것을 보고, 朴대통령의 방위산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부로 느꼈다. 그간 개발된 국산 병기의 종류에 놀라는 듯했고 신기해했다. 朴대통령도 그런 뜻으로 전시실을 만든 것이다.
오후 1시 정각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라고 했지만 吳수석의 브리핑이었다. 吳수석은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에 대해선 그동안 대통령에게는 수시로 보고를 했지만,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朴대통령이 세부계획에까지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은, 중화학공업 육성 내지는 「공업구조 개편」에 대해서 처음으로 설명을 듣는 기회였다. 이 회의에서 반대가 나오면 중화학공업은 출발도 하기 전에 백지화된다. 吳수석으로서는 死活을 거는 중대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방위산업에 관한 보고는 시간 관계상 대폭 줄이고 본론인 「공업구조 개편론」 보고에 들어갔다(이하 吳源哲 비망록).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表裏一體』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表裏一體(표리일체)입니다. 우선 화약공장 문제부터 설명하겠습니다. 화약을 생산하는 기초원료는 질산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비료공장에 사용됩니다만 우리나라는 요소비료만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기초화공약품을 생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중화학공업 계획을 추진하면서 질산을 위시한 無機(무기) 화공약품을 대량 공급할 수 있는 종합화학공장을 건설하겠습니다. 국내 화학공업 발전을 위한 기반도 구축될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비료생산에 더 많은 양이 사용되지만 비상시에는 주로 화약 제조용으로 공급되겠습니다(注: 제7비료, 즉 남해화학 이야기). 그리고 그 공장 근처에 현대적 화약공장을 건설하겠습니다. 새로운 현대식 공장입니다(여천 한국화약 제2공장).
포탄공장은 소구경에서 대구경까지 만들 수 있는 공장을 신설하겠습니다. 위치는 물론 남쪽입니다. 1972년 8월에 정부승인이 나고 9월에 착공해서 현재 건설 중에 있습니다. 포탄을 생산하는 데 화약도 필요하지만 탄피로서 놋쇠가 필요합니다. 소구경 탄에는 납(鉛·연)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금속, 즉 銅(동)과 아연과 鉛의 제련소를 온산공업기지에 건설하게 됩니다.
두 번째가 조선소입니다. 어느 조선소나 민간용 배를 만드는 곳이라면 크기는 다르지만 군함도 건조할 수 있습니다. 이번 중화학공업 계획에서는 어떠한 대형 군함이라도 건조할 수 있는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초대형 항공모함도 건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놓겠습니다. 이 계획에서 새로 건설하는 조선소는 보안상 진해 해군기지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될 것입니다. 해군이 방어를 맡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진해만 안에 건설토록 하겠습니다(注: 진해만 입구에 위치하는 옥포조선소 및 진해만 안에 있는 삼성조선소).
전자병기는 구미공업기지에서 생산하게 됩니다. 기존 공장도 (구미)공업기지로 이전시키며, 신설되는 전자병기 공장은 (구미)공업기지 외에는 건설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기계공업 쪽입니다. 방위산업의 근간은 기계공업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은 아직 유치원 단계입니다. 이번 기회에 국제적 기계공업으로 키워 나가겠습니다. 어떠한 기계제품도 만들 수 있는 기계공업, 즉 정밀기계 제품부터 초대형 제품까지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기계공업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런 기계공장들을 한 곳에 모아서 창원에다 건설하겠습니다.
저는 일본 용역회사에 부탁해서 일본에서 제일 큰 기계공장의 규모를 알아 달라고 했습니다. 2∼3일 전에 들어온 보고는 일본의 제일 큰 기계공장은 히타치라고 합니다. 히타치는 전기제품부터 기계 일체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발전소도 만들고 있고 군함에 쓸 대형 엔진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기차와 병기도 만들고 있습니다. 못 만드는 기계가 없습니다. 소위 종합기계 메이커입니다. 지금 중화학공장을 추진하면서 우리나라는 히타치 기계공장과 똑같은 규모의 공장을 한 세트만이라도 설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원공업기지에 모아서 건설코자 합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오지 않습니다』
『각하! 창원기계공업기지가 완성되면 각종 대구경 포에서부터 탱크·장갑차가 생산되고, 항공기용 제트 엔진에서부터 군함에 쓸 대형 엔진까지도 모두 생산 가능합니다. 방위산업의 기초소재가 되는 특수강 공장도 최신 공장을 건설하겠습니다. 民需用(민수용)으로는 각종 기계뿐 아니라 산업용 기계 및 장치, 선박 또는 자동차 부품, 객차, 기관차, 선박용 초대형 엔진 등이 나오게 됩니다. 화학공장 등 각 플랜트도 생산됩니다. 과거에는 완전히 수입에 의존하던 발전소도 제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계획만 잘 짜면 병기나 민수품이 동일한 기계공장에서 생산이 가능합니다. 바로 창원에 이러한 시설을 갖추고자 합니다.
각하, 중화학공업 육성이나 방위산업 육성이나 똑같은 하나의 사업입니다. 병기란 중화학공업에서 나오는 제품입니다. 중화학공장은, 평화시에는 산업기계를 만드는 곳이고 비상시에는 병기가 나오는 곳입니다. 후진국에서는 중화학공업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에서 병기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후진국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수 없습니다. 돈과 기술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애로점은 수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수요가 생겨난 것입니다. 산업기계 쪽에서도 수요가 생겨났고, 방위산업 쪽에서 수요가 나왔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상부상조하는 역사적인 절호의 기회입니다.
후진국에서 중화학공업, 특히 기계공업을 육성 못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기술부족입니다. 성능이 나쁜 기계는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사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이 병기라는 것은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미군병기와 성능이 똑같은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개발을 끝낸 단계입니다.
고도의 병기도 국산화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국제수준의 병기를 만든다는 것은,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수준을 국제수준까지 일시에 향상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 줍니다. 고쳐 말하면 방위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기계공업의 수준이 향상되어 산업기계의 수출까지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一石二鳥입니다. 검사제도를 확립시키는 것도 똑같습니다. 병기생산을 할 때의 검사방법을 그대로 쓰면, 산업기계도 품질을 보장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능공이나 기술자의 자질향상도 정밀병기를 만들어 봄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공업의 지방분산 문제도 방위산업을 육성할 때 해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있는 어느 기업체가, 만사가 불편한 시골구석에 가겠다고 나서겠습니까? 그러나 방위산업을 하고자 하는 기업에 대해,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면서 방위산업의 보안 때문에 창원으로 가라고 권하면,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즉 공업의 지방분산과 방위산업의 안보문제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만일 지금 안 한다 해도, 어느 때인가 꼭 해야 되는 사업입니다. 방위산업도 똑같은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따로 분리해서 육성하는 것보다는 이 두 사업을 같은 울타리 안에서 생각해서, 즉 한 시스템으로 생각해서 추진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경제적입니다. 우리나라의 現 실정으로 보아서는 방위산업 쪽을 前面에 내세우고 기계공업을 육성해야 출발이 용이하다고 판단됩니다. 이런 의미에선 안보문제가 초긴장에 이르고 있는 최근의 사태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병기생산 쪽에서만 생각해도 세계 최신기계를 설치한 현대식 새 공장에서 대포나 탱크가 쏟아져 나온다면, 국군병사도 그 성능을 믿어 주고 사기가 충천할 것입니다. 어두컴컴한 하코방 공장에서 정밀병기가 나오는 장면이 신문에 공표된다면, 병사들의 사기뿐 아니라 국민들도 실망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화학공장의 웅장한 모습들은 국민의 사기 진작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총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데 비해, 북한은 개인 화기는 물론 대포·탱크·잠수함까지 만들어 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중화학공업 건설로써, 우리나라의 병기생산 능력을 북한이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미국을 위시한 우방국에도 우리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겠다는 계획입니다』
『南장관, 돈을 대시오』
吳수석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말을 끊었다. 朴대통령을 보니 만족해하는 듯했다. 朴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吳 수석! 커피나 한 잔씩 들고 계속하지』라고 했다. 브리핑 시간은 벌써 두 시간을 훨씬 넘어섰다. 장관들이 더 급했던 모양이었다. 생리작용도 필요했고 담배 생각도 났을 것이며, 더구나 딱딱한 소형 의자에 앉아서 두 시간이나 브리핑을 듣자니 피로했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직원들이 커피를 준비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장관들은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도 가고 담배도 피웠다. 신선한 공기를 마신 후 다시 방으로 들어오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재떨이를 갖고 왔다. 커피를 마신 후 브리핑은 다시 시작되었다. 吳수석은 이미 브리핑의 클라이맥스를 넘은지라 여유가 생겼다. 브리핑의 내용은 중화학공업 6개 업종에 대한 세부육성 계획이었다. 그는 요점만 설명하였다. 겨울철이라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 브리핑이 네 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었다. 그는 브리핑 자료의 마지막 장을 들추었다. 여기에는 큰 글씨로 「감사합니다」라는 다섯 자만 써 있었다. 吳수석은 오른쪽 손에 브리핑 棒(봉)을 수직으로 든 정자세로 『이상으로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순간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朴대통령 차례가 된 것이다. 朴대통령은 소파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꼿꼿이 세우고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吳 수석, 돈이 얼마나 들지?』
온화한 표정의 조용한 말투였다.
『내·외자 합쳐 약 100억 달러입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한 번 천천히 상하로 움직이더니, 먼 산을 바라보듯 시선을 위로 옮겼다.
『南재무! 돈을 낼 수 있소?』
대통령은 바로 뒷줄에 있던 南悳祐 재무장관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질문을 했다. 朴대통령의 이 뜻은 『돈을 마련해 보라』는 지시와 같은 내용이다.
南장관은 『액수가 커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朴대통령은 엄숙하나 조용한 말투로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하고는 말을 끊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은 기꺼이 따라주었다』
朴대통령은 말을 또 끊고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지만』
대통령은 여기서 또 말을 끊은 후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나』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金鍾泌 국무총리를 향해 일방적으로 통고하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총리!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구성토록 하시오. 그리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외자도입 조치를 하시오』
유신의 목표가 된 중화학공업 건설
이것으로 역사적인 회의는 끝났다. 이날 朴대통령의 결심에 의해 1972년 10월17일의 유신쿠데타의 목표와 意義(의의)는 중화학공업 건설로 설정된 셈이다. 이날 朴대통령은 유신조치로써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것을 국가목표로 분명히 설정했다. 5·16 군사쿠데타가 근대화 혁명을 목표로 하여 성공시킴으로써 「5·16 군사혁명」이란 호칭을 받아도 손색없게 되었다면, 10·17 유신쿠데타는 중화학공업 혁명을 이룩했으나 아직 쿠데타 대접을 받고 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참모장 역할을 했던 吳源哲씨의 주장을 소개한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중간 목표는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1000달러 국민소득을 1980년대 초에 이룩함으로써 국력 면에서 북한을 압도,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자는 것이었다. 10월 유신은 대통령 간선제 등 체제개혁이었고, 중화학공업은 10월 유신의 혁명과업이었다. 정치적 개혁에만 치중하여 유신 시기를 평가하면 안 된다. 10월 유신이 중화학공업 건설을 만들어 낸 정치적 기반조성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면 역사를 온전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유신독재기로 불리는 1972~1979년의 시기는 중화학공업 건설기와 겹쳐 있다. 이때 건설한 조선·전자·기계·제철·자동차·석유화학·원자력 등 중화학공업이 그 뒤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밀어올렸다. 동시에 1970년대 중반에 가서부터는 北韓을 경제적으로 완전히 압도하게 되었고, 年間 군사비 지출에서도 남한이 앞서게 된다. 1980년대의 민주화도 중화학공업이 뒷받침된 경제성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0년대 10년간 한국은 중화학공업의 가동으로 年평균 10.5%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세계 200여 개국 중 1등이었다.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집약적인 핵심산업을 이렇게 세트로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일본·독일·한국 정도이다. 한국이 자유통일을 넘어 선진국, 그것도 영국·프랑스 수준의 선진 강대국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산업기반 건설이, 1973년 1월31일의 吳源哲 수석 보고와 朴대통령의 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큰 과장은 아닐 듯하다.
문제는 중화학공업 건설에 치명적이 될 만한 사건이 이로부터 9개월 뒤 일어난다는 점이다. 4차 중동전쟁으로 석유값이 4개월 사이 네 배로 뛴다. 朴대통령은 이때도 중화학공업 건설의 결심을 포기하거나 근본적 수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휘관은 한 번 결정하면 불리해도 밀고 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유리하다』는 행동원칙을 견지했다. 버티기로 들어간 朴대통령에게 찾아온 活路(활로)가 중동건설 시장 진출이었다.
金龍煥의 등장
朴대통령식 국정운영의 핵심은 큰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추진력과 일을 야무지게 매듭짓는 능력의 소유자를 찾아서 適所(적소)에 배치한 뒤 전폭적으로 부하들을 밀어 주되 일의 진행과정을 정기적으로 점검 확인한 점이다. 朴대통령은 軍 지휘관 시절부터 『지시는 5%, 확인이 95%이다』는 말을 할 만큼 중간 점검을 중시했다.
<대통령은 직·간접적인 검증을 거친 후에야 행정부에 인재를 등용했다. 정치인이나 軍 출신자들을 입각시킬 경우에도 일단 공기업, 또는 관련 연구기관, 정치권 등에서 행정경험을 쌓는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능력과 적성을 평가한 후, 즉 어느 정도 검증 절차를 거친 후 중용하곤 하였다(金龍煥 당시 재무장관 회고록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吳源哲 제2경제수석이 기획한 중화학·방위산업 동시건설안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 朴대통령은 1973년 5월 金龍煥 재무차관을 대통령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중화학공업 건설의 정책적 뒷받침을 지시했다. 金보좌관은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기획단장도 겸임했다. 金龍煥씨는 金正濂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일하던 그 전해에 「8·3 사채동결 조치」의 비밀 계획을 전담하여 성공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8·3 조치 발표 6일 전에 金龍煥씨를 불러 『발표와 함께 임자를 재무부 차관으로 발령을 낼 테니 사채동결 정책을 반드시 성공시켜 우리 경제를 살리도록 하라』고 말했다. 당시 재무장관 南悳祐씨도 金차관에게 8·3 조치의 집행을 일임하였다. 朴대통령은 국가 중대사에 대해서는 그 분야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앉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을 「민간 주도-정부 뒷받침」의 시스템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나라에서는 무기생산을 국방예산과 직결된 공기업 형태의 국가 주도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방부는 국가 주도형 방위산업 건설을, 청와대와 경제부처는 민간 주도를 주장했는데, 朴대통령은 민간 주도 쪽에 손을 들어 주었다.
국민투자기금으로 財源 확보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과 연계되어 있는데, 무기생산만 전담하는 공기업형으로 육성했다가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면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될 수 있다. 따라서 민간기업이 무기와 일반상품을 함께 생산하도록 해놓아야 불황에 따른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이 업체들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이 된 金龍煥씨는 경제기획원 물가국장 徐錫俊씨(나중에 경제부총리, 아웅산 테러로 사망)를 부단장으로 데리고 왔다. 金龍煥 팀은 첫 작품으로서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1980년대를 복지사회·고도산업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공업구조의 고도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1973년 8월에 金龍煥 특별보좌관을 경제제1수석으로 승진시켰다. 金수석은 화공 엔지니어 출신인 吳源哲 경제제2수석(중화학공업기획단장 겸임)을 도와 중화학공업化의 자금동원과 산업기지 건설을 해냈다.
중화학공업단지의 건설은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설립하여 하기로 했다.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으로서 뛰어난 추진력이 검증된 安京模씨가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4년 4월1일부터 1979년 12월14일까지 창원·여천·온산·안정·구미·포항·북평·아산의 8개 산업기지가 만들어졌다.
중화학공업 건설에는 자금이 많이 들고 투자회수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국내 저축률이 25% 이상 되어야 추진할 수 있는 대사업이었다. 당시 국내 저축률은 15% 정도였다. 吳수석의 비교법에 따르면 수출이 연간 18억 달러 하던 때 중화학공업 건설에 100억 달러를 넣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는 7000억 달러를 조달하는 것과 같은 자원 집중이었다. 金龍煥 경제제1수석은 중화학공업 자원확보를 위해 국민투자기금을 만들기로 했다. 1973년 12월14일에 국민투자기금법이 제정되었다.
이 기금의 대부분은 국민투자채권을 금융기관이 매입하는 방법으로 출연했다. 기금설립 초기엔 은행의 경우 예금증가액의 10~39%, 보험회사의 경우 수입보험료의 40~50%, 공공기금의 경우 여유자금의 약 90%를 이 기금에 출연했다. 시중은행의 예금까지 국민투자기금에 편입시킴으로써 1978년 무렵부터 중화학공업 중복투자 및 과잉투자의 부담이 금융부문에 전가되자 제5공화국 출범 직후 중화학투자 조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사령관인 朴대통령은 기술에 밝고 창조적 발상을 많이 하는 吳源哲 경제제2수석을 참모장으로 쓰되, 재정에 밝고 꼼꼼한 金龍煥 경제제1수석을 통해서 보완과 견제를 해가면서 그의 마지막 대도박을 밀고 나간다. 吳·金 두 수석 다 패기만만한 40代였다.
『이 정도 공해는 참아야』
朴正熙 대통령은 현장시찰을 아주 입체적으로 했다. 육로로, 해로로, 그리고 하늘에서 국토의 변화와 개발을 확인했다. 포병 장교 시절부터 지도 읽기에 도통했고, 사물을 시각적으로 인식하고 상상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그는 현장 시찰 도중 『이제는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1973년 6월1~2일의 朴대통령 영동지방 시찰길을 따라 가보자.
朴대통령은 6월1일 오전 11시 청와대 헬기장에서 강릉으로 출발했다. 대관령 상공이 짙은 안개로 뒤덮여 헬기가 뜰 수 없게 되자 평창군의 하진부리에 착륙했다. 朴대통령은 민간용 코로나 승용차를 수배하여 대관령 고개를 넘었다. 그는 대관령국민학교 앞에 차를 멈추게 하더니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산줄기를 가리키면서 항공사진을 찍어 두고 山地개간을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오후 2시20분에 강릉 비치호텔에 도착한 대통령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음날(6월2일) 대통령 일행은 승용차편으로 강릉을 출발하여 묵호에 도착했다. 묵호항 확장계획을 보고받은 그는 다시 북평의 쌍용시멘트 공장을 찾았다. 이 공장에서 점심을 먹던 朴대통령은 우리나라의 환경정책에 영향을 줄 중대 발언을 했다.
陳鳳鉉 쌍용사장이 『공장 주변의 주민들이 공해를 걱정한다』고 하자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어느 학자는 「공해문제를 너무 걱정하면 공업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어요. 이 정도를 가지고서는 아직 공해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으니 지나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朴대통령은 오후에 다시 헬기를 타고 속초지역을 시찰한 뒤 경포대 헬기장에 착륙했다.
6월11일 경제기획원이 주관한 월간경제동향보고에서 관례대로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발표가 있었다. 朴대통령은 충북괴산군에서 온 朴周植 새마을지도자와 함께 점심을 먹다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을 끝내 놓고 점심을 같이 드는 기분이 어떻더냐』고 묻기도 했다.
朴씨가 『옆마을에서 먼저 새마을운동을 벌여 달라지는 것을 보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마을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던 朴대통령은 옆자리에 있던 金玄玉 내무장관에게 지시했다.
『金장관, 朴지도자 말을 잘 들었지요. 우수부락 우선지원의 원칙은 절대 수정하지 말고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이즈음 전국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에서 朴대통령이 중시한 것은 지도자 양성 교육이었다. 1971년 말에 朴대통령은 농림부 장관에게 새마을 교육의 지침을 내렸다.
『1년에 3만5000명의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식의 조잡한 계획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농촌개발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을 잘 선발하여 한 번에 20~30명이라도 좋으니 2~3주 동안 오직 정신계발에만 치중하는 교육계획을 세워 보라. 그와 같은 교육 분위기는 마치 참선하는 것과 같아야 할 것이다』
농림부는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담당할 강사진의 명단을 대통령에게 올렸다. 종교인들과 저명인사들이 많았다. 강사진의 명단을 훑어보던 朴대통령은 직접 종교인과 저명인사들의 이름을 지웠다.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발굴하여 새마을지도자로 하여금 발표하게 하고 그에 관한 토론을 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을 거요』
朴대통령은 지식인의 공허한 관념론보다는 새마을운동 현장의 경험에서 배울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農協대학 교수로 있던 金準씨가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의 원장으로 발탁되었다. 1972년 1월부터 시작된 새마을 교육은 1973년부터는 수원의 농민회관을 교육장으로 빌려 쓰게 되었다. 朴대통령은 새마을 교육을 위해서 법을 새로 만들거나 건물을 짓지 않고, 있는 건물과 인력을 이용하게 했다. 朴대통령이 지시한 성공사례 발표와 이에 대한 분임토의는 가장 선진된 실무교육이었다. 분임토의의 주제를 보면 「어떻게 하면 주민들을 새마을운동에 참여시킬 것인가」가 압도적으로 많아다.
새마을운동에 소극적인 사람들은 너무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 그리고 노년층과 나이 어린 사람들이었다. 참여도가 높은 쪽은 마을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중년층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많은 여성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인습의 굴레를 벗어난 여성들의 열정적인 참여가 새마을운동을 全국민운동으로 확산시켰다.
고위공무원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새마을 교육을 받게 되었고 농촌 새마을운동이 도시·공장 새마을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이런 확산은 朴대통령이 나서서 마을마다 경쟁을 붙이고 교육으로써 지도자群을 양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여성들의 참여를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浦鐵 준공식
1973년 7월3일 오후 2시 포항종합제철 1기 설비종합준공식이 현장에서 있었다. 朴대통령이 國運을 걸고 추진하던 중화학공업 건설의 첫 물증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朴대통령은 국내외의 반대를 꺾어 가면서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세계개발은행(IBRD)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등 차관을 대야 할 외국기관들이 한국의 실력으로는 종합제철공장 건설이 어림도 없다는 평가를 하고 있었다. 朴忠勳 경제부총리도 소극적이었다.
無望해 보이던 상황을 타개한 것은 朴대통령의 집념과 의지였다. 최근 발간된 「포스코35年史」는 1969년 5월22일의 朴대통령 지시를 「자주적 103만t 사업계획수립」 지시라고 표현했다. 이날 朴대통령은 朴경제부총리, 金正濂 상공부 장관, 朴泰俊 포철 사장 등에게 『세계개발은행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주적 판단下에서 계획을 추진하되 정부는 이를 강력히 지원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규모와 경제성, 그리고 차관선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6월2일 朴대통령은 미온적이던 朴부총리를 경질하고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金鶴烈씨를 부총리로 임명했다.
우리가 주체가 된 계획을 짜보자고 하니 규모도 외국기관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했던 租鋼 年産 60만t의 거의 두 배인 103만t으로 늘었고, 그것도 200만t으로 즉시 증설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차관선도 歐美 루트를 포기하고 對日청구권 자금에서 조달하기로 계획하고 일본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본통인 朴泰俊 회장은 일본의 政財界 사람들을 만나 청구권 자금을 쓸 수 있도록 호소하고 철강 3社로부터는 기술제공에 협력한다는 각서를 받아내는 등 포철 건설의 主役이 되었다.
1970년 4월1일부터 외자 711억원(1억7800만 달러), 내자 493억원 합계 1204억원을 투자하여 건설한 103만t짜리 포철 준공식 치사에서 朴대통령은 1980년대를 향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 공장은 금년부터 계속해서 260만t으로 확장 공사를 하고, 또 계속해서 1979년 말까지는 700만t 규모까지 확장할 계획을 지금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1980년대에 가면 우리나라의 철강 수요가 국내만 하더라도 약 1200만t 내지 1300만t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下에 포항종합제철의 1차, 2차 확장 공사와는 별도로 이와 병행하여 年産 약 1000만t 규모의 제2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지금 추진 중에 있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을 할 때가 되면 총수출량에 있어서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약 60%를 넘게 될 것입니다. 100억 달러 수출에서 약 60억 달러 이상은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朴대통령의 예측이 수학적으로 적중했다는 점이다. 포항제철은 1978년 12월8일 제3기 증설로 年産 550만t 규모를 갖추었다. 이어서 1981년 2월18일엔 제4기 증설로 850만t 규모로 커졌다. 朴대통령이 예언했던 대로 全斗煥 정부는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여 1990년대에는 年産 20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朴대통령의 위대성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시킨 점이다.
대통령이 써준 「종이마패」
「포철 神話」의 연출자는 朴正熙, 주연배우는 朴泰俊이었다.
1969년 12월 포항종합제철 공사현장에서 朴泰俊 사장은 황량한 모래벌판에 사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외쳤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이대환 지음, 현암사 발간 「박태준」에서 인용)
朴泰俊 사장은 포철을 지을 때부터 정치적 압력이나 관료적 행정처리, 그리고 인사청탁을 배제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우선 일본에서 설비를 구매할 때 포철이 공급업자의 선정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정부기관을 통해서 해야 하는 것을 시정해야겠다고 별렀다. 문제는 朴대통령에게 直訴(직소)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일이었다.
1970년 2월3일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한다고 비서실에서 朴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위에 인용한 책에 따르면 朴사장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브리핑을 하려고 하니 대통령은 배석 비서관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말했다.
『완벽주의자인 임자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텐데, 보고는 무슨 보고. 그래 일은 순조롭게 되어 가나?』
『구매절차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건가』
朴대통령은 설비구매 과정에서 포철이 당면한 어려움과 시정건의를 朴사장으로부터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 봐』
朴사장이 메모지에 쓴 것을 읽어본 朴대통령은 메모지의 상단 좌측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한 뒤 도로 내밀었다.
『내 생각에 임자에게는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어려울 때마다 나를 만나러 오기 거북할 것 같아서 아예 서명해 주는 거야. 고생이 많을 텐데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포철 역사에서 「종이마패」로 불리는 이 메모지를 朴사장은 한 번도 써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등뒤에 있다는 확신이 朴사장으로 하여금 포철을 정치와 행정의 견제나 간여로부터 지켜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공기업 사장 중 朴泰俊 사장만 청와대에서 獨對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어떤 면에선 기업인들의 조련사이기도 했다. 鄭周永 같은 야성의 인물도 朴대통령 앞에서는 유순해졌다. 대통령의 私心 없는 독려가 기업인들을 마음에서부터 움직였다.
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에게 조선업을 권유했던 이는 金鶴烈 당시 경제부총리였다. 鄭회장은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도입하기 위하여 일본·미국을 돌아다녔다. 鄭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신 나간 사람」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鄭회장은 金부총리를 찾아가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기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鄭周永을 몰아세우다
金부총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鄭周永 회장이 나서서 하겠다고 했으니 조선소가 꼭 되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金부총리는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보고를 올릴 수 없으니 함께 들어가서 직접 대통령한테 말하라』고 했다. 며칠 후 金부총리, 鄭회장, 朴대통령이 한 자리에 앉았다. 鄭회장이 말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쫓아다녀 봤지만 일본도 미국도 아예 상대를 안 해줍니다. 「아직 초보적인 기술단계에 있는 너희가 무슨 조선이며 몇십만t이냐」는 식이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朴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金부총리, 앞으로는 鄭회장이 어떤 사업을 한다고 해도 전부 거절하시오. 정부가 상대도 하지 말란 말이오』
그러고는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鄭회장한테도 권했다. 鄭회장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 대통령이 불을 붙여 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울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래, 그거 하나 못 하겠다고 鄭회장이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해요? 처음에 하겠다고 할 때는 일이 쉽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것 알았을 거 아뇨? 그러면서도 나선 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그저 한 번 해보고는 안 되니까 못 하겠다, 그러는 게 있을 수 있소?』
鄭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이건 꼭 해야만 하오. 鄭회장! 일본·미국으로 다녔다니, 그럼 이번에는 구라파로 나가 찾아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빨리 구라파로 뛰어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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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학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는 소중한 내용입니다 [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 정권 사람들 이런 고민 한번만이라도 했을까하는 의구심이 가는군요 [ 씹장생 같은놈들 ]
빨간색 좋아하는 놈들 언젠가는 하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