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시골에서 살 때는 마당가에 감나무 엉개나무 대추나무가 군데 군데 서 있는
생울타리로 돼 있었고 다른 한쪽은 6.25사변 때 몸채가 불 타버리고 난 뒤론 터밭으로 가꾸어
나무새를 심어먹었다. 초여름 하늘에 구름이 끼어 비가 올려고 하면 나뭇잎 뒤에 숨은 청개구리들이
'개골개골' 목청을 돋우어 힘차게 울어됐다.
'동으로 가라면 서로 가고, 서로 가라고 하면 동으로 가는 놈'이 청개구리였나?
사춘기때는 누구나 반항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부모의 보호막을 벗어나 스스로 자립해 보려는 시도가 아닌가?.
공자맹자와 같이 성인 군자나 되면 부모 말씀을 잘 듣고 따라 하겠지만 장삼이사 아이들은 천방지축 말 안듣기 마련이다.
부모 말씀마다 반대로 한다고 청개구리 아들에게 자신의 주검을 도랑가에 묻어라고 할 필요까지야 있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재벌을 일으켜 세운 이병철도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자식농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2남2녀를 두었는데 위로 둘이 딸이고 아래 둘이 사내아이로, 위에 셋은 다 결혼을 하였다.
막내는 어릴 때부터 개구쟁이로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여학생들 책상 아래로 개구리를 살짝 풀어놓아 여자 아이들이
기겁을 하도록 만들기도 하여 같은 학교에 다니던 형이 담임선생님한테 불려가 대신 야단을 맞았고 영국에 잠시 나갔을 때는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초등 1학년때쯤인가 혼자 방에서 911에 전화를 걸어 전화기를 입에 대고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Fire! Fire!'를 살짝 외쳤던 것이다. 소방서에서는 어린애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불난 것으로 알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쫒아왔던
것이다. 집에 있던 에미와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 할머니까지도 혼이 나갔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또 고등학교시절에는 친구들과 몰래 뻐져나가 당구를 치기도 한 모양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것저것 해 보다가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세월만 자꾸 흘러가니 그냥 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전화기를 잡고 몇군데 전화를 해 샀더니 D데이를 정해 준비물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막상 떠나 보낸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밥이라도 한끼 해서 먹여 보내야지 싶어서 에미가 출근하고 없는 빈자리에 서서
고기를 굽고 된장도 새로 끓여 식탁에 같이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먼 길이라 바로 출발한다고 하길래 아파트 현관까지
내려갔더니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가 도로 내려서 애비한테 달려와 포옹을 하는 것이었다. 등더리를 토닥이며 '단디해라!"고
타일러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