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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의도가 서울의 섬인가.
황하가 수천 년 새 경로가 바뀌어 시대마다 삶이 달라진 것에 비하면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한강에는 조선시대까지 물의 수량에 따라 면적이 변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백사장이 있었다고 전했다. 홍수 때 이 넓은 백사장은 사라졌지만, 두 개의 섬만은 침수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오늘날의 밤섬과 여의섬이 그것이다. 그런 여의섬이 본격적으로 세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비행장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간이비행장으로 쓰이던 작은 공항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여객기까지 뜨고 내리며 명색이 서울의 국제공항으로 발돋움한다. 해방 후에는 한국 공군의 발상지로 항공부대가 창설된 의미 있는 장소였으며, 김포국제공항과 서울공항으로 기능이 이전되면서 비행기와의 인연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개발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의도 개발은 한강 종합개발의 신호탄이었다.
1967년 말 시작된 여의도 개발은 한강 종합개발의 신호탄이었다. 김현옥 시장이 추진한 여의도 개발의 도시설계는 당시 가장 유력한 건축가였던 김수근에게 맡겨졌다.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이던 김수근은 후배인 윤승중, 김원, 김석철 등에게 이 일을 맡겼다.
68~69년에 걸쳐 이뤄진 이 계획의 핵심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여의도를 서울 도심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선형 도심 가운데 놓는다 △한강 다리와 남북 강변도로를 설치해 서울 강남북의 중심 거리가 되게 한다 △여의도 서쪽 끝에 국회, 동쪽 끝에 서울시청을 배치하고 이 사이의 가로를 여의도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여의도 지상에는 차가 다니고 보행자를 위해 2층 데크(보행공간)를 설치한다.
그러나 이런 도시설계는 너무 이상적이었고, 천문학적 비용(20년 동안 1천억원)이 요구됐기 때문에 상당 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이 계획 가운데 현실에 근접한 것은 한강에 다리와 도시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국회를 서쪽에 배치한 것 정도였다. 국회와 시청 사이를 중심 거리로 한다는 핵심 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이 여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이 1350m, 너비 300m의 䞌광장’ 조성을 지시함으로써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이 도시설계의 실무책임자였던 윤승중은 “도시계획을 건축적 관점에서 봤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였다”며 “방사선 구조의 서울 도심을 인천까지 이어지는 선형 구조로 바꾸려 했으나, 도심 수요가 적었던 데다 잠실 쪽이 개발되면서 주거공간이 많이 들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홍수에 대비하여 기초부터 다지기 위해 제방을 쌓았는데 이렇게 하천 한가운데 있는 섬 둘레에 제방을 두르는 것을 윤중제라 한다. 김 시장은 68년 밤섬의 돌과 흙, 여의도 모래톱의 모래를 가져다 높이 16m, 둘레 7.6㎞의 둑을 쌓고 110일 만에 그 안쪽에 87만여평의 ‘새 여의도’를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섬 둘레를 순환하는 도로를 윤중로라 부르고 있다. 문제는 여의도의 개발로 섬이 커지니 장마철 홍수에 대비하여 한강의 흐름에 지장이 없도록 또 다른 섬인 밤섬을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폭파시킨 밤섬의 잡석은 여의도에 채워졌다.
이 과정에서 여의도 주민 1200여명(200여 가구로 추정됨)은 봉천동과 신정동으로 강제 이주됐다. 봉천동에서는 한 가구당 8~10평 정도의 땅을 제공했으나, 소유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봉천동·신정동으로 옮아갔던 사람들은 그 뒤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개발이 이뤄지기 전까지만 해도 현재의 여의도 일대는 65만 여평의 비행장과, 30만여평의 밭, 100만평 가량의 모래톱 등 모두 200만평(현재는 87만평)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밤섬과 서강 사이에는 너비 200~300m(현재 한강 너비는 1000m 가량)의 한강이 흘렀고, 비행장·양말산과 영등포 사이에는 너비 50m 정도의 낮은 샛강이 흘렀다.
그러나 모래톱의 모양과 넓이는 한강의 흐름을 따라 격변했다. 큰물이 지면 양말산과 밤섬 정도만 강물 위로 머리를 들었지만, 가물 때는 영등포에서 밤섬까지, 한강철교에서 양화대교까지가 온통 모래벌판이었다. 조선 시대 이후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해방 뒤의 일이다. 해방 전에는 일본군 비행장이 있던 탓에 주변에 민간인들의 주거가 금지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45년 해방 직후 미 군정은 양말산 기슭에 20평 남짓한 살림집 50채를 지어 만주·일본에서 귀국한 50가구를 살게 했다. 이들이 여의도의 첫 정착자들이었다.
여의도 1세대 주민 가운데 일부는 군용지나 공유수면 등 60만~70만평을 빌려 땅콩과 옥수수 농사를 지었고, 대다수 가구들은 영등포 쪽으로 막노동을 나갔다. 46년부터 여의도에서 살았다는 박재희씨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사방에 밭이 많아서 땅콩·옥수수·파 농사를 많이 지었고, 먹는 데 구애받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김옥인씨는 “여의도 백사장에서 민들레, 냉이를 캐서 나물을 무쳐먹고, 밤섬과 서강 사이를 흐르던 한강가에서 소쿠리로 재첩과 조개를 잡아 끓여먹기도 했다”며 “비가 오고 나면 한강철교 아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팔뚝만한 잉어도 자주 잡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1세대 주민들의 여의도 생활은 20년 정도밖에 가지 못했다. 여의도는 홍수에 휩쓸릴 때 양말산 만이 물 속에 잠기지 않아 ‘나의섬’ ‘너의섬’이라 지칭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했다. 나의주 · 잉화도라고도 하였다. 한강 하류 용산 · 마포나루터에서 당인리 앞까지, 남쪽으로는 노량진에서 양화동까지, 한강 흐름의 한복판에 넓게 펴진 백사장 섬. 섬의 초석을 다지고 제일 처음 들어선 건물은 다름 아닌 아파트였다.
근사한 여의도 개발 마스터플랜까지 만들었지만 선뜻 땅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이름도 맨션아파트니 고급아파트와 같은 것들을 제치고 ‘시범아파트’로 결정되었다. 앞으로 서울에 세워질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의 시범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그 포부는 정확히 들어맞아 오늘날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아파트가 가장 일반적인 주거 형태가 되어버렸다.
시범아파트는 이름에 걸맞게 국내 아파트 역사의 신기록들을 세웠다. 국내 최초의 중앙공급식 난방과 최초의 공동구, 엘리베이터가 달린 최초의 고층 아파트 등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들이 최초이자 최대였다. 그만큼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입주민들 또한 고학력자에, 전문직 종사자가 많았다. 입주자 어머니들의 70% 이상이 대학 졸업자였다는 사실은 그 시절을 감안하고 보면 놀랍기만 하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동장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사업가들에게 ‘여의도 거주’라는 모양새는 사업에도 도움을 주었기에 자영업자들도 꽤 많이 찾았다. 이런저런 선점의 효과로 최초분양가는 가장 큰 40평형이 571만2,000원이었는데, 그해 말에만1,000만 원을 가볍게 넘어서며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 이후에도 한동안 여의도 아파트의 가격은 전국 최고치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이어졌다. 이런 ‘집값 상승은 곧 성공적인 사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서울시내에 고층 아파트의 붐을 일으키게도 된다.
이후 양말산 일대에는 국회가 자리 잡았다. 여의도가 홍수에 휩쓸릴 때 제일 높은 곳인 지금 국회의사당이 자리 잡은 양말산 만이 물속에 잠기지 않았다 했는데 덕분에 지금은 비행장과 땅콩밭에는 방송사와 증권거래소, 증권사들, 63빌딩 등이 들어섰다. 당시 인구가 1천명 남짓이었던 여의도에는 2004년 말 기준으로 1만165가구 2만9591명이 살고 있고, 낮에는 6610개 법인의 4만245명이 일한다. 활동인구는 1일 평균 50만명 이상으로 주거인구의 10배 이상이며, 세금수입은 1년에 3천 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삶의 가치를 어디 돈 가치로만 흥정을 할까.
양말산과 샛강 그리고 밤섬, 육지 한가운데 그것도 수도 서울의 한강위에 떠있는 섬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생태적 문화적 가치는 충분한 것이 아닌가. 빨리빨리 문화가 빚은 그릇된 풍조, 바로 보여주기식 얕은 행정은 이 세상 삭막한 괴물들을 너무도 많이 양산했다. 땅콩 서리를 하고 헤엄쳐 영등포로 도망쳐 나왔다는 그 시절의 어린 정서가 단순한 옛그리움만은 아니다. 나는 그간 여의도에 한국산업기계진흥회란 곳을 수십 번 들락 거렸지만 담배를 피러 건물 밖으로 나온 젊은 친구들 넥타이가 무기력감을 더할 뿐 사무공간이란 생각말고는 별 의미를 갖지 않았다. 국민 우롱하는 국회에 증권이 떠오르는 삭막함, 과연 이곳이 수도 서울 한강에 어우러진 섬이란 말인가.
나는 진등포라는 영등포가 그냥 비오듯 추레해 좋고 김승옥의 무진기행 같은 마포종점이 애가 타면서도 은은해 그저 좋다. 이는 순전히 엄마 덕이다. 내 가슴 속에는 지금도 그 언저리에 닿으면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당인리가 보이고 여의도 비행장이 가물가물 되살아난다.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은 어린 나도 외울 정도였으니 두 말하여 무엇 하나. 이는 천만금의 감성과도 같고 열편의 영화보다 나은 것이다. 한때의 우수 낭만 사랑 이별은 그 누구에게는 의미를 낳고 쌓이고 쌓여 뭇 사람들의 감성어린 깊이로써 결국 문화가 되고 전설이 되고 이는 훗날 또 다른 융성한 문물로서 두고두고 회자된다는 것을 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아픈 기억도 슬픈 악연마저도 생각을 낳는 문화로써 달리 또 창달된다는 것을 어찌 도외시하는 것일까. 숨통트이는 문화의식과 생각공간의 소중함, 나는 이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9. 마포 종점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 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은방울자매의 노래 '마포종점'. 이노래는 떠나간 님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그런 사연의 노래는 많다. 그런데 이 노래에 유독 끌리는 것은 왜일까. 이 노래는 애절함을 더하는 몇가지 소도구가 들어있다.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 당인리 발전소, 영등포, 비에 젖은 전차.... 마포종점은 지금은 사라진 전차의 종착지이며 전차자체도 없어진지 오래된 긴 세월이다. 모두 추억의 장소에 걸맞는 서글픔과 애틋함을 지니고 있다.
밤이 되어 이 종점에 비가 내린다. 누군가가 왜인지 모르지만 늦은 시각 그곳을 찾아왔다. 그가 비를 맞고 서 있고 전차 또한 비를 맞고 서 있다. 갈 곳이 없는 데다가 가련하게 비를 맞고 서있는 둘은 똑같은 처량한 처지다. 그러기에 가사에 비에 젖어 너도 섰고 나도 섰다고 표현했다.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흡신 맞이하는 서글픔이다. 흘러간 지명들도 한 몫을 한다. 한창 개발중인 영등포는 불빛이 아련히 비추고 명을 다한 당인리 발전소는 고요하게 숨을 죽이며 밤을 겨우 넘기고 있다. 여의도 비행장은 또 어떠한가.
탁월한 감정이입이라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다 되어 이별을 해야 하는 처지로 비를 맞으며 저 너머 새희망이라 할 영등포를 쳐다보는 풍경이 아른거린다. 지금은 마포에 다리가 놓여 있는데 아마 그시절에는 다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높은 빌딩들이 없었기에 당인리 발전소가 마포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실제 작사가 정두수는 1968년 11월 전차가 사라진다는 뉴스를 듣고 전차와의 영원한 송별을 기려 그 쓸쓸함과 연인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빌려 이 노래를 적었다고 했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 박춘석이 곡을 붙여 최고의 히트곡 '마포종점'을 만든 것이다. 2절에 등장하는 당시의 여의도 비행장. 지금은 상상조차 안되는 장소다. 국회의사당에 금융빌딩이 찌들듯 들어선 여의도에 땅콩 밭에 비행장이라니. 누구는 땅콩을 서리하고서는 헤엄쳐 영등포로 기어나왔다고 했다. 온 나라가 잿빛으로 칙칙했던 그 무렵부터 이전의 대중가요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색채감이 뚜렷한 팝 계열의 노래들이 속속 등장했다.
한명숙의 '노란 사쓰의 사나이'와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는 남성들에게는 노란 사쓰를 여성들에게는 빨간 구두를 대유행시키며 우울한 사회분위기를 뒤엎고 온 나라를 원색으로 화사하게 채색시켰다. 밝은 미래를 계몽적으로 강조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서울에 대한 로망이 극심했던 시골 처녀 총각들의 이농현상은 사회적 큰 이슈였다. 60년대 고향을 떠나온 이들이 거주했던 곳은 서울의 도심에서 떨어진 변두리, 그러니까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던 마포와 한강 넘어 영등포였다.
영등포지역에 위치한 공장에서 일하면서 몸과 마음이 고단하고 지칠 때 그들은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난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은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슬픈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 마포종점은 그 같은 당대 변두리거주 서민들의 애틋한 삶의 정서를 가득 담아낸 명곡이다. 당시는 땅콩밭이었다는 여의도를 지나 배를 타야 했지만 지금은 마포대교를 지나면 금세 영등포이고 지금의 마포는 땅값이 비싼 서울의 중요 도심으로 환골탈태하여 옛정은커녕 무미건조 그 자체로 우뚝서 있으니 감개무량이라 표현할 처신도 마포종점은 모두 잃었다.
작사가 정두수는 그런 애닯음을 고스란히 글로 남겨 놓았다. 1960년대 초, 서울의 마포는 시골 냄새가 물씬 났다. 강에는 갈대숲이 우거졌고 나룻배도 있었다. 황량한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나 남새밭이 널려 있던 말죽거리로 가려면 강에서 나룻배로 건너 가야 했다. 한강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을 빼곤 마포나루에는 장어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마포는 또한 '땡! 땡! 땡!'을 출발음과 도착음으로 하는 전차의 종점으로도 유명했다. 고즈넉이 눈 내리는 겨울밤이나 궂은비가 쏟아지는 여름밤, 더욱이 밤이 늦어 오가는 사람이 없어 적막감마저 감돌 때면 마지막 전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귀갓길의 남편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전차는 그야말로 그리움 자체였다.
종점에서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대학생 연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 빈곤하고 궁핍했던 시절, 당시 가정교사는 대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부업이었다. 그들은 공원 벤치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다가 짜장면 한 그릇을 외식으로 먹으면 그날 데이트는 괜찮은 날로 여기던, 그런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가 아는 두 연인은 대학을 졸업하기가 무섭게 마포종점 부근 허름한 집에 사글셋방을 얻었다. 남자는 다시 박사 코스를 밟으려 밤잠을 설쳤다. 그는 대학 연구실이나 대학 강사로, 더러는 다시 가정교사 부업도 하며 악착같이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여자도 남편 뒷바라지는 물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얼마간 집안 살림을 벌어 썼다. 신혼은 소꿉살림처럼 아기자기했다. 여자는 밥을 지어 밥그릇에 담아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두고 이제나 저제나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이내 남편 마중을 위해 마포종점으로 나갔다.
남편이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둘은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꼭 손을 잡고 인근 당인리로 이어지는 긴 둑을 걸었다. 원효로 전차종점에 이를 때까지 거닐다 보면 불빛이 깜빡거리는 당인리 풍경이 들어온다. 어릴 적 고향의 반딧불이를 연상시키는 반가운 풍경이었다. 당시 그는 마포종점 부근에 살면서 작곡가 박춘석 씨와 함께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가수들의 노래 작품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밤새 작업을 하다가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마포 설렁탕집을 찾았다. 당시 마포종점에는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그 집의 시원한 국물 맛은 야근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의 출출한 속을 푸는 데 그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녹음실의 성우는 물론 배우와 스태프들이 새벽마다 모여드는 단골집이었다.
어느 날, 설렁탕 주인이 마포종점에 살던 두 연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편은 미국으로 유학 가 있던 중 너무 과로한 나머지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만 짧은 생을 마감한다.남편을 졸지에 잃은 여인은 늦은 밤이면 신혼 초 사글셋방 시절을 떠올리며 마포종점에 나가 그곳을 미친 듯 배회하고 다녔다. 남편을 기다렸지만 한 번 간 남편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여인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언젠가부터 마포종점에서도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1966년 그해 여름, 그날도 궂은비를 맞으면서 마포 전차종점에 나가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땡! 땡! 땡!' 도착음을 내면서 밤늦은 시간에 전차는 들어오고 있었다. 궂은비를 맞으면서... 밤잠을 설치며 써내려간 <마포종점> 그날 밤, 그는 밤잠을 설치면서 애절한 두 연인의 사랑을 담은 <마포종점> 노래시를 썼다. 두 연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애틋한 애가였다.
우리나라에 전차가 처음 생긴 것은 1899년 광무 3년의 일이다. 미국인 콜브란이 당시 황실에 건의하면서였다. 고종은 당시 청량리에 있던 민비의 능인 홍릉에 자주 행차했다 .많은 신하와 수행원들을 동원하여 한 번에 드는 경비가 10만원 안팎이 되었다. 당시의 화폐가치를 보면 1902년 덕수궁의 중화전의 중건을 위한 예산이 30여 만원이었다. 그렇게 보면 한번 행차에 10만원은 엄청나게 큰 돈 이었다.
초기에는 40인 승차 8대와 황실 전용 귀빈차 1대가 운행되었다. 당시엔 전차 운전사들이 모두 일본인이었고 차장은 한국인이었다. 첫 개통되던 날 ‘거대한 쇳덩어리’가 저절로 굴러간다는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기 위하여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너도나도 조금 더 가까이서 보자고 몰려드는 바람에 전차는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를 여러 번 반복했다. 승차 운임은 상등이 3전 5푼, 하등이 1전 5푼이었다.
어디서나 손을 들면 태우고 승객이 요구하면 내려줬다. 심지어는 술이 취한 승객들이 소변을 보겠다고 하면 못이기는 척하고 세웠다가 다시 태워 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신기한 괴물을 한번쯤은 타보겠다고 장안의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하루종일 기다려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타려는 사람들이 넘쳐 나다보니 정원 80명에 평균 150명이 넘는 인원을 태우고 다녀야 할 정도로 전차는 늘 초만원이었다.
해방 전 까지 전차는 서민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승객이 많아지면서 전차 노선은 대도시로 확대되었다. 광복 뒤 자동차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전차는 속도 등 모든 면에서 자동차에 밀려 오히려 한물간 퇴물이 되었다. 1969년 마침내 선로가 철거되면서 70년의 짧은 생 동안 수많은 서민들의 애환을 실은 체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나는 그런 전차를 보기라도 했던가. 엄마도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남대문 근처에서 봤다는 것이 사실인지 단지 상상인지 구분이 안 선다. 암만해도 안양에서 먼 발걸음으로 창경원 들러 엄마와 내가 그 시대 한 자국을 만든것 같은 데 너무도 흐릿하여 확정지어 말하지는 못하겠다. 창경원의 회전목마가 자꾸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자식이라면 무엇이든 앞장을 선 엄마이기 때문 필시 그 기억의 한줌이 남겨진 것이 아닐까.
마포종점 노랫말의 최고조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떠나간 첫사랑을 찾는 마음과 더 이상 막혀 갈 수 없다는 끝이라는 뉴앙스를 빗물에 섞어 극적으로 대비시켜 이루어 낸 데 있다. 종점.. 말 그대로 끝점이다. 유사한 느낌을 자아내는 노랫말 생각나는 게 또 하나 있다.
손석우 시, 곡의 이별의 종착역.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
안개 깊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사람들은 오가는데 그이만은 왜 못 오나
푸른 달빛 아래 나는 눈물 진다 이별의 종착역
'종’이란 단어를 묶어 생각해보니 묘한 느낌이 든다. 실제 끝났다 란 의미의 한자로 終을 사용하는데 우리 흔희 쓰는 ‘鐘치다.’란 말의 의미 또한 '끝이 났다' 로 쉽게 인식되어진다. 더더욱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종점이란 표현이다. 종착역이나 종점은 더 이상 가지 않는다는 끝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출발을 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점 종착역이란 표현은 즐겨 써도 시점 시발역이란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더 이상 갈 수 없다 라든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라든지 더 이상 떠올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 남는 미련에 대해서 애착이 강한 속성을 지녔다. 시작점에서 비를 맞으며 옛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된다하는 표현이라면 다가서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종점에서 눈물바람으로 서 있어야 기다리는 마음이 절실히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언제쯤일지는 모르지만 종착지를 향해 가고 있다. 마포종점이 여의도 비행장과 전차를 소유한 것처럼 나도 내 인생의 중요한 마스코트 한 둘은 챙겨두고 싶다. 과연 무엇이 좋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 ... 이 노래는 걸쭉하니 운치 있는 것이 처량한듯 푸념조 타령에 내 나이에 꽤 걸맞다싶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이 노래를 창밖 빗속 리듬에 맞춰 우수에 차 흥얼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