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龍仁).,한국민속촌 & 전설의 고향.
.
.
반만년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세계 역사 상에서, 유래가 없는., 전설의 고향.
그러나, 그러한 전설을 전시할 공간이 마땅히 없다.
전설은 유형문화제가 아닌.,무형문화제.
한국민속촌은.,한반도 민속박물관 같은 곳.
'한반도 '전설의 고향' 종합전시장이 아닐까?'
초가집 지붕은 농경시대 주로 볏짚을 사용.
그러나, 억새· 새풀· 띠풀 등을 쓰기도 했다.
새로 지붕을 이으면 샛집, 띠로 이으면 띠집.
초가는 신석기시대 움집 주거공간 형태에서 시작.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일자형.
초가삼간 일자집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초가지붕은 지방에 따라 약간씩 차이
우진각지붕· 맞배지붕 등이 일반적이나
똬리집· 까치구멍집 특수한 형태도 있다.
초가 지붕은 재료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불에 약하고 썩기 쉬워 매년 교체하는 단점
그러나, 짚은 단열성이 뛰어나므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주로 도끼를 사용해 도끼집이라고도 한다.
기와집은 기와로 지붕을 이은 집이다.
보통 찰흙으로 빚은 검은 기와를 썼으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청기와.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기와 지붕을 올린다.
기와는 값이 비싸 양반들만 기와집에서 살았고
일반 농민들이 짓고 살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지배 계층의 상징.
고래잡이 저지대민족 지배자 무덤이 고인돌.
왕릉에는 고인돌 형태 혼유석, 칠성판 등이 있다.
혼유석 & 칠성판.
고인돌 별자리 암각.
기와집은 조선시대의 유교의 영향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철저히 구분
기와집의 구조에는 안채,사랑채 등이 있는데
사랑채는 외부에서 온 손님들에게 숙박을 대접
또는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기와는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동양에서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이미 쓰였다.
우리나라 기와집은 삼국시대 철기문명 소산물.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기와집은 숯을 사용.
철 제련용 숯이라 연기 그을음 없는 기와집.
기와는 찰흙을 이겨 암키와 수키와 내림새 ·
막새 망와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든 다음에,
가마에 넣고 800~1,000℃ 불에 여러번 굽는다.
우리나라 옛 기와에는 꽃 글씨 사람 도깨비 무늬
고려시대 기와에 유약을 바르고, 청기와를 구웠다.
요즘은 시멘트로 만든 기와가 널리 쓰이는데,
금속판을 가공하여 만든 금속기와도 사용한다.
우리나라 초가집은 백성들의 집이며 민초의 상징.
예전에 화장지가 없어 호박잎을 따서 밑을 씻었는데
그것도 아까워 며느리에게는 쓰지 못하게 한 시어머니.
"너는 저걸로 닦아라" 해서.,며느리밑씻개풀.
시어머니의 가시 돋친 구박을 받아야만 했던
그 고된 시집살이를 대변하는.,며느리밑씻개풀.
며느리밑씻개풀(가시덩쿨 여뀌).
자신이 젖을 물려 고이 키운 아들의 사랑을
갓 시집온 며느리 거시기에 빼앗긴 '분풀이'이리라.
며느리밑씻개풀 이름에는 모정(母情)의 서운함도 있다.
시어머니가 갓 시집온 며느리를 골탕 먹이려고
가시가 돋은 들풀을 뒷간에 잔뜩 쌓아 두었단다.
일본에서는 '의붓자식의 밑씻개풀'이라고 부른다.
예쁜 며느리 배꼽에 시샘이 나서,
언제든 할퀼 듯이 돋친 가시를 보고
'며느리배꼽풀' 이름도 붙인.,시어머니.
밥풀 두어개 물고 있는듯한.,며느리밥풀꽃.
가난한 집에서 부잣집으로 갓 시집 온 며느리가
제삿밥 뜸이 들었나 맛보다 시어머니에게 들켰다.
시어머니는 젯밥을 넘봤다며 때려서 며느리를 쫓아내
갈 곳 없는 며느리는 굶어죽어 뒤늦게 묻어준 묏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며느리가 밥풀을 물고있는 듯 하여.,며느리밥풀꽃.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고
쫓겨난 후 굶어죽은 며느리 혼이
"꽃으로 환생했다."하여.,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밥풀꽃은 한해살이풀로
볕잘 드는 숲 가장자리에서 자라며
7~8월에 붉은 꽃이 피고 가지 끝에는
벼이삭 매달리듯 꽃술이 두어개 달렸다.
변종으로 털며느리밥풀 따위가 있는데,
털며느리밥풀은 꽃받침에 긴 털이 있고
포에 가시모양의 톱니가 많은 것이 특징.
해마다 봄이면, 오랑캐가 처들어오듯
무리지어 피었다가 사라지고 마는.,오랑캐꽃.
강남으로 떠난 제비가 돌아올 무렵에 피어.,제비꽃.
우리나라 들과 야산에 피는 풀꽃마다
그 나름대로 애틋한 사연이 담겨져있다.
마치, 풀꽃에 민족 애환이 담겨있는듯 하다.
.................................
.................................
고조선에서 시작되는 우리나라 역사.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BC 2333년 단군왕검이 세웠다는 단군조선 신화.
BC 108년 한나라에 의해 멸망된 위만조선을 함께
포함해 말하는 고조선 영역은 고인돌 분포도와 일치.
'고조선은 지구온난화 대홍수 시절에
저지대 민족들이 뭍으로 대이동하면서
고지대 유목민들과 맞서 싸우기 위하여
고인돌 민족들이 연합한 고대국가 아닐까?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 조선 역사를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고조선 단군의 역사는
아시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찾이하고 있는데 한국의 사학자들은
어째서 그 사실을 부정하는지 알 수 없다.
일본이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데
한국의 사학자들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부정하는지 모르겠으며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 러시아 고대사 세미나에서 -
사학자.,유리 미하일로비치 부찐.
세계의 모든 해안 지방이 지진해일에 노출될 수 있지만,
파괴력이 거대한 것 대부분은 태평양 해역에서 발생한다.
지진해일에 관한 세계정보센터(WDC)가 2005년 펴낸 자료
1106건의 지진해일 중에서 82%가 태평양 지역에서 발생했다.
10%가 지중해, 흑해, 홍해 및 대서양 북동부이고 5%가 카리브해
및 대서양 남서부, 1%가 인도양, 다른 1%가 대서양 남동부였다.
거의 모든 메가 지진과 지진해일은
‘불의 고리’ 환태평양 지진대에서 발생.
지구온난화 대홍수시절 저지대민족들의 대이동.
고인돌은 '신석기~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동북아시아와 서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고조선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있는 고인돌.
고인돌과 더불어.,'청동비파검'과 '토기'
비파청동검 & 토기
한반도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고인돌이 많은데 약 4만 기 정도로 추정된다.
특히, 전북 고창은 '100기 이상' 고인돌 군락지.
고인돌의 판석 무게는 10톤에서부터 많게는 300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내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인돌을 세운
고대 문명은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陽)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1개,
받침돌은 음(陰)으로 땅(어머니)를 상징하여.,2개.
고인돌 & 별자리 암각.
고인돌에 새겨진 북두칠성 등 별자리들는
저지대 고인돌 민족들이 뭍으로 탈출 할때
그당시 고대 천문지리학 길잡이 역활을 한듯.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三才) 사상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장례 하관식때 관위에 덮는.,칠성판.
조선 왕릉, 일반 묘를 조성할때.,혼유석 & 석물.
고인돌에서부터 유래된 우리 민족의 전통장례 방식.
정몽주 선생.,묘.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무덤뿐 아니라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무대였던 만주와 요서의 고인돌도
그 형성 연대가 오래되었겠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연대가 BC 2000년 이전 것으로 측정된다.
하지만 국내 학자들은
방사능탄소 연대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있으며 이런 태도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신화 관점과 직결된다.
아울러,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보다
더 많고 다양한.,서안(西安) 피라미드.
고조선 피라미드 & 고구려 귀족 무덤군.
서안 피라미드는 기자 피라미드보다
규모가 두배 정도나 큰 것들도 있으며
거석 또는 적벽돌로 만들어진 것들이며
'고조선 또는 고구려' 유물인듯 추정된다.
고구려 영역의 피라미드 군락.
함양 지역 (중국 성서성)
'고구려, 고조선' 피라미드
피라미드 내 발굴된.,벽화들은
고구려 유물일까? 돌궐 유물일까?
조선시대 '일월오봉도'와
유사한., 고구려 고분 벽화.
고구려 고분 벽화 & 조선시대 일월오봉도.
.............................
.............................
국제적으로 'Korea'란 명칭이 통용되고 있는 한국.
10세기 이전 한반도, 요동, 만주를 포괄한 우리나라.
수많은 외침을 받은 후 지금의 영역으로 한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언어·풍습·문자를 유지하는
끈질긴 민족성으로 고유한 민족문화를 창조· 계승해왔다.
1910년 일본에 점령되었으며 1945년 남북으로 분단되어
1948년 남쪽에 대한민국,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50년 6·25전쟁이 휴선 중이나, 1970년 이후 다각적인 접촉.
1990년 남북한이 국제연합에 동시 가입
화해·공존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옛부터 농업이 주산업으로
노동집약적인 형태를 보이며,
담배·인삼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국을 일컫는 다른 명칭으로는
계림(鷄林)·고려(高麗)·근역(槿域)·
동국(東國)·동이(東夷)·부여(夫餘)·
조선(朝鮮)·진국(震國)·진역(震域)·
청구(靑丘)·해동(海東) 등이 있다.
한국을 상징하는 국화(國花)는 무궁화(無窮花)로,
단군시대부터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숭상되었다.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흰옷을 즐겨 입고
가무를 즐기고, 수많은 외침에도 굴하지 않으며,
끈질긴 민족성으로 고유한 민족문화를 창조· 계승.
고조선 건국연대인 BC 2333년을 기점으로 삼는.,한국.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이 시대를 거쳐 BC 6000년경부터 한반도에 신석기시대
고조선은 전설 상 인물인 단군(檀君)을 시조로 하고 있다.
BC 194년 위만 왕조로 이어진 고조선
BC 108년에 한(漢) 무제에게 멸망했다.
이어 북쪽에는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
남쪽에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삼한지역에서는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
낙동강 유역의 사로국(斯盧國) 및 구야국(狗邪國).
우리나라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각각 출현했다.
그러나, 부여를 비롯한 북쪽의 부족국가는 고구려에 병합
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어, 결국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시대.
고구려는 중국 세력을 몰아낸 후 국제관계의 안정구축과 내치.
그리하여 광개토대왕 때는 요동을 확보하고 요서지방까지 진출.
신라는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여 고구려·백제가 다투던 한강유역 점령
중국과 교통 해로를 확보했으며, 삼국은 치열한 세력다툼을 거듭했다.
이후 당과 연합하여 나당연합군을 결성한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무너뜨린 다음
한반도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3국을 통일.
후삼국시대 이후 왕건(王建)에 의해 고려시대.
935, 936년에 신라와 후백제가 각각 고려에 복속.
고려사 일대 전환점이 된 무인란으로 확립된 최씨정권
1231~59년에 6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아 많은 시련.
약 100년 무인정권은 원나라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면서 종식.
그러나, 고려 말 성리학을 바탕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인세력은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조선왕조를 개창.
조선은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새 왕조 면모를 일신
국왕 중심 집권체제를 확립해, 유교정치 이념을 구현.
특히 조선 초기에는 민족의식과 부국강병을 강조,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 4군6진을 설치하여 영토 확장
훈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한 민족문화의 발현을 보았다.
개혁정치로 인해 정치참여의 폭이 확대되고
개인능력 존중, 정치체제 사회제도 합리적 개편.
그러나, 양반·중인·천민으로 구별되는 엄격한 신분제도.
조선왕조 국가이념으로 향촌사회까지 뿌리를 내린.,성리학.
15세기 말부터는 지방의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중앙정계 진출.
조선건국 이래 중앙을 지배하던 훈구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야기.
결국 사림들이 중앙정부에서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그들 사이에서도 권력투쟁이 일어나 붕당정치가 전개.
한편, 2차례 전란(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었는데,
전쟁피해 복구과정을 통해 농업생산력, 상공업 발전.
또한 지식인층 사이에서 일어난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의 각종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의지와 민족의식 성장.
18세기 후반에 도입된 그리스도교는 평등사상을 고취했다.
19세기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민중세력이 성장하고, 서구 열강의 세력이 밀려왔다.
친일·친러 정책의 혼동 속에서 대한제국이 탄생 후,
1910년 마침내 한국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했다.
일제에 의한 35년 동안의 식민지 통치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말과 함께 끝났고
한국은 38선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을 맞았다.
용인 한국민속촌.
한국(韓國)의 문화(文化)와 전통 예술, 의식주 형태 및
전통 생활 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는.,용인 한국민속촌.
TV 드라마 사극, 영화 촬영장으로 낯익게 알려진 곳이다.
해마다 톡톡 튀는 참신한 발상 등으로
'구태의연, 고리타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조선시대 전통문화를 되살리려 애쓰는.,한국민속촌.
용인 한국민속촌 꿀 알바.
구미호., 알바 생
한국민속촌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민속촌로 90에 위치한 테마파크.
1973년 8월 5일 착공하여 1974년 10월에 준공.
한국민속촌은 총면적 54만 5,490㎡ 기와집 132개동,
초가집 143개동, 2만 1,150 점 민속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보라리.,한국민속촌.
'TV 드라마, 사극, 영화' 촬영장으로도낯익은 민속촌.
조선시대 전통 민속 공연장 등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는 곳.
한국의 민속적인 삶을 실제로
재현하고 있는 흥미로운 곳이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에버랜드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한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관광지.
울창한 나무들과 맑은 시내가 굽이쳐 흐르는
아늑한 분지에 조선시대 500년의 생활상을 재현
다양한 아르바이트생을 선발하여 재미를 주고있다.
온라인 화제가된 거지알바
사약 마시기 체험, 관상알바. 등.
그리고, 한국민속촌 54만여평의 부지에
북부지방, 중부지방, 남부지방, 제주지방,
울릉도 지방까지 각 도의 270여 동의 각종
농가(초가집과 기와집)와 그 생활 양식,
당시 관가 등을 비롯하여 대장간, 도요굴,
글방, 떡전, 한약방, 관상소, 99칸 양반집,
유기공방, 도자기 가마 등의 생산공장,
각종 민속음식과 생활용품 민속 장터 등
옛 모습을 구경할 수 있으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선정된
농악놀이와 전통혼례 및 마상무예
공연을 볼 수 있으며 놀이동산 및
도깨비 집, 시장, 박물관 등도 있다.
1974년 창립 이래 현재까지 생생한 문화체험이 가능한
아름다운 자연속의 전통문화 관광지로서 사랑받고 있고
조선시대 각 지방의 실물가옥을 이건 복원해 촌락을 재현.
40만평 부지로 이뤄진 차별화된 조선시대 공간을 보유,
전통 공간 재현에서 나아가 놀이공간 조성을 통한 관광지.
대한민국 유일의 전통문화 테마파크로서
전통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세시풍속행사,
현대 감성으로 재창조한 신감각 전통문화축제,
내외적 인프라 확장 및 다양한 프로모션 활동으로
꾸준한 내방객의 방문이 해마다 성장을 이루고 있다.
한해 소원을 버선모양 소원지에 담아
나무에 매다는., ‘동지헌말 쓰기’ 행사.
한국민속촌에서 특별 제작한 2016년 달력을
선착순 50명에게 나눠주는 ‘동지책력 나누기’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은
전염병을 막는 상징인 설화 속
'처용전' 주인공 처용에서 나왔다.
전염병이나 액운을 막기 위해
처용의 얼굴 같이 붉은 팥으로
팥죽을 쑤어 먹거나 초상화를
문 밖에 붙여 놓고는 했던.,풍습.
설화 속 처용을 만나고,
액운을 막는 이색 귀신 쫓기
프로젝트.,‘전설의 고향’, ‘귀신전’
전설의 고향과 귀신전은 처용을 비롯해
한국설화와 전설 속 귀신을 모두 볼 수 있는
동지야(冬至夜) 공포체험이자 귀신쫓기 프로젝트.
아울러, ‘동지부적 나누기’ 체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한국민속촌을 여러차례 찾는 방문객들에게
늘 새로운 프로그램을 보여주려는.,프로젝트.
.......................서낭당................................
마을 어귀,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은 돌무더기,
그 곁에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장승이 있다.
돌무더기에 돌 세 개 얹고 세번 절하는 액땜 풍습도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민간신앙 신역의 장소이다.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갔다.
신역의 물건은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졌다.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농후하다.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 성황사(城隍祠)가
우리나라에서는 '서낭'의 시초라고도 전해져온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다.
조선시대 서낭은 국행(國行)서낭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누어진다.
국행서낭은 호국(護國) 글자를 붙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지냈고
태종은 백악(白岳) 송악(松岳)을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다.
그 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괴산·
현풍·양산·신성(新城)·밀양·전주·고성서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
서낭당의 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서낭나무에 잡석을 난적(亂積)한 누석단이 있고,
이 신수에 청·홍·백·황·녹색 오색 비단 헝겊을 맨 형태,
② 잡석을 난적한 누석단 형태,
③ 서낭나무에 5색 헝겊을 맨 형태,
④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형태,
⑤ 입석(立石) 형태 등이다.
⑤는 높이 120∼200㎝ , 폭 90∼120㎝ 자연석
‘수구매기(水口막이)’·‘돌서낭’·‘선돌’으로 부른다,
이 입석 형태는 중부, 남부 지역에서 간간이 발견된다.
신수에 당집이 복합된 ④의 형태는
중부 내륙 산간지역과 태백산백 동쪽의
영동지역에 있는 서낭당에 분포되어 있다.
........................................................
민간신앙 형태는 지역에 따라 또는 집안에 따라
전국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자식 얻기를
기원하는 주체자의 행위에 따라 크게 다섯가지 분류.
첫째, 초월적 존재나 또는 영험이 있다고 믿는
기자신앙 자연물에 치성을 드리는 유형이 있다.
기원대상은 산신· 용신(용왕)·삼신·칠성·부처(미륵)
암석· 나무(당나무) 등 자연물이며, 그밖에 특정 신.
비는 곳은 산·내·바위 아래·나무 밑· 절· 삼신당· 용왕당·
칠성각 등이며, 혹은 집안의 특정한 어느 곳일 수도 있다.
의례방법은 촛불을 켜놓고 제수와 함께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비손 형식이나 불공
또는 영험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한다.
비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정월대보름 또는 그 전날,
삼월삼짇날, 사월초파일, 오월단오, 유월유두, 칠월칠석, 10월 3일,
매월 초사흘, 그리고 추석과 같은 명절을 전후하여 비는 경우가 많다.
자식 없는 집안에서 아들낳기를 기원하는 기자신앙.
주로 부녀자가 중심이 되어 신앙행위가 이루어지며,
그 형태는 지역과 집안의 전통에 따라 다양하지만,
민간신앙과 무속신앙 산속(産俗)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아들을 얻어 그 아들이 무병장수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기를 기원하는.,기자신앙
조선시대 아들을 중요하게 여겨 기자신앙이 성행.
엄격한 가부장제 (家父長制) 유교 가문에서는
아들이 없으면 대(代)가 끊어진다 하여 아들을 선호.
여자가 아들을 못 낳으면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쫓겨나는 관습에서 기자신앙이 발달하였는데 그 형태는
크게 치성(致誠), 적덕(積德), 주술(呪術) 등으로 나눠진다.
치성은 명산대천의 산신당이나
용왕당 또는 효험 있다는 기도처.
그리하여, 전설의 고향이 성행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이.,당나귀.
,
귀신은 사람이 죽어서 된 그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행복한 삶을 살고 편안한 죽음을 겪은 사람은 좋은 귀신
그 반대 경우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귀신이 될 수 있다.
불행한 삶을 살고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을
객사· 횡사· 급사· 아사· 익사· 참사 등 경우에는
나쁜 귀신이 될 수 있으며 무속에서는 무녀귀신·
손각시·몽달귀신 등 여러 종류의 귀신 관념이 있다.
귀신을 막거나 내보내기 위한 여러 방책이 있는데,
귀신이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사물로 위해를 막는 행위.
귀신은 붉은색을 꺼린다 하여 황토를 뿌리거나 팥죽 쑤기.
귀신을 위협하여 쫓아내려는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특히, 무속에서 발달하였으며 귀신을 환대하고 공경
또는 귀신의 혼백이나 영을 잘 달래 떠나게 하는 행위.
우리 겨레는 귀신신앙과 많은 관련을 맺으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해 흔히 "귀신도 곡할 노릇이다",
"귀신도 속이겠다", "귀신같이 잘한다",는 말을 한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귀신은 경문에 막히고 사람은 경우에 막힌다",
"귀신 듣는 데서는 떡 소리도 못한다", "귀신도 모르는 제사"
"살아 있을 때에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죽어서는 귀신이라 부른다"는 말도 있다.
귀신은 사람과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다만 사람이 죽어서 된 그 어떤 상태가 귀신.
그런데 산 사람도 저마다 성품과 능력이 다르듯
귀신의 성품과 능력도 각각 서로 다르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좋은 귀신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지만,
특히 불행한 삶을 살고 비정상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억울하고 갑작스럽게 잘못된 죽음을 맞이한 경우일 때
느닷없이 닥칠 화를 피하기 위해서 나쁜 귀신의 피해를
어떻게 막아내는가에 더욱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객사(客死), 횡사(橫死), 급사(急死), 동사(凍死), 몰사(沒死),
분사(憤死), 아사(餓死), 압사(壓死), 오사(誤死), 요사(夭死),
액사(縊死), 익사(溺死), 분사(焚死), 참사(慘死), 그리고 또한
미혼남녀의 죽음 등의 경우에 나쁜 귀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밖에도 무속에서는 무당 귀신 무녀귀신,
처녀귀신인 손각시, 총각귀신인 몽달귀신,
간사한 여자귀신 하리가망, 비명횡사한 영산,
죽어서도 떠도는 남녀노소 귀신 상문,
의지없이 구천을 떠도는 여자귀신 말명,
악귀를 따라온 귀신 수비 등 여러 종류 귀신.
결국, 이런 귀신들이
산 사람과 관계를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불행이 초래된다는
믿음에서 무속신앙이 성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귀신이 나쁜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행복한 삶과 올바른 죽음을 겪은 귀신은 특히
후손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과 정상적 관계를 지닌다.
이들 귀신은 진작 저승으로 무사히 잘 갔고,
기회가 있으면 사람들과 제사나 기타의 방법으로
정기적 또는 비정기적으로 후손들과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올바른 의미에서 어엿한 조상이 된 것이다.
귀신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령(死靈)을 뜻하지만,
더 넓게는 하늘·땅·산·물·바위 등의 자연이나, 호랑이·
소· 개· 여우· 닭 등의 동물이나, 둥구나무 등의 식물, 그리고
어떤 사물이나 질병조차도 상황에 따라서는 귀신이 될 수 있다.
,
또한 귀신이 그것에 붙을 수 있다고도 믿는데
예를 들면 마을 수호신, 산신, 마을 입구의 장승,
솟대, 탑, 수구막이 선돌, 둥구나무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집안의 귀신인
성주 조왕 터주 삼신 축신
등도 민속상의 중요한 귀신들.
또한 어떠한 일을 할 때에
귀신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길(吉)한 시간과 공간을 찾는다.
사령의 귀신이든, 어떤 사물과 자연의 귀신이든,
그들이 사람을 괴롭힌다고 판단되면 이를 막거나
내보내기 위한 여러 방책이 강구되는데, 민속상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액땜 방법들('뱅이')이 전해져 온다.
귀신은 붉은색을 꺼린다 하여 황토를 뿌리고
팥죽을 쑤기도 하며, 가축의 피를 바르기도 한다.
디딜방아.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우고 여기에
월경혈이 묻은 여자 속곳을 씌우면
돌림병이 달아나고, 개피와 닭피도
귀신을 쫓는 데 효험이 있다고 한다.
또한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나
가시가 많은 엄나루 가지 등을 사용한다.
그외 귀신을 위협하여 쫓아내려는 방법을 쓴다.
이 때문에 귀신을 위협하여 구축하는 방법은,
무당이 삼지창으로 병자 환부를 찌르며
"썩 빨리 나가라!"라고 협박을 한다든지,
바가지에 여러 음식을 조금씩 담고 그것을
환자 머리 위로 빙빙 돌리면서 외치기도 한다.
"무엇을 먹고 싶은 귀신인지,
이것이라도 빨리 먹고 물러가라!"
귀신을 환대하고 공경하여
잘 달래서 떠나게 하기도 한다.
.
요컨대 사람들은 그들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귀신들과 정상적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인간의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했고, 바로 이점 때문에
다양한 귀신관념과 관계설정에 대한 방법들도 전한다.
귀신의 집.
귀신의 집에서는.,전설의 고향, 귀신전을 비롯
공포체험 프로그램 등으로., 전통문화를 알린다.
저승사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다양한 귀신이 등장.
겨울에는., 동지야(冬至夜) 공포체험 이벤트.
여름에는.,남량특집 전설의 고향.,공포 이벤트.
병자호란 & 홍제천 환향녀.
'전설의 고향'이 안방극장에 처음 등장한 70~80년대.
TV에서 '전설의 고향'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 등장하면
많은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이야기에 몰입하곤 했다.
원래 '전설의 고향'은 8도에 설화들을 재구성.
해가 거듭될수록 조선시대 납량 형태를 띠었다.
구미호를 비롯한 처녀귀신들은 신인 연기자 등용문.
'전설의 고향'은 '권선징악' 큰 뿌리 위로 설화들을 전개.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다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당시 사회가 구성원들을 억압하던 것들로 인해 생겨났다.
성차별, 남아선호, 재가금지 등 결국 결과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억울함을 해결한다.
그 과정에서 공포 못지않게 진한 감동을 남겼다.
'전설의 고향' 남량특집 드라마의 계절은.,여름.
한 여름이 오면, 왠지 무서운 이야기가 생각나고,
처녀귀신, 구미호, 저승사자, 원귀 등이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귀신, 무속, 서낭당, 문화는
무당과 불교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되기 훨씬 이전까지는
무당, 신녀, 천관녀 등이 국가 제례를 주관했고
삼국시대 유입된 불교과 무속과 결합하면서부터
백성들에게는 무속과 융합된 불교가 정착되기 시작.
불교가 국교로 정착되면서부터는
불교가 무속을 포용하여 수용하면서
그 흔적이 사찰에 있는 칠성각 등이다.
불교는 기원전 '인도 왕자' 석가모니로부터 유래.
환태평양 지진대 저지대민족의 공통적인 종교이며
불교의 사후 세계로는 극락과 지옥이 공존하고 있다.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우리나라.
삼국시대 공통적인 종교는 불교였다.
아직도, 한반도에서 가장 유서깊은 종교.
사천왕은 불교를 수호하는 선신 또는 호법선신.
금강역사, 사천왕, 팔방천, 십이신장, 십육선신,
이십팔부중 등 불법을 존중하고 옹호하는 모든
천인, 귀신, 용왕을 사천왕(四天王)이라고 한다.
불교에서의 사후세계 지옥 탱화들을 살펴보면
빙하기, 화산폭팔, 대기근, 대홍수 시대를 거치며
인간이 겪었을 극한상황 역경을 표현한듯한.,탱화.
이는 이미 불교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인류가 겪은.,제4빙하기 말에 혹독한 추위.
화산폭팔, 대기근, 대홍수로 인한 민족대이동.
기원전 인류가 겪은 재앙을 탱화로 표현.
불교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지옥으로 표현.
무사히 살아남은 사실을 극락으로 표현한듯.
화산폭팔한 활화산 온천지대에서
제4빙하기 혹한에도 극적으로 생존.
그러다가 화산이 다시 터지면.,불지옥.
대홍수로 인한 민족대이동 당시
저지대민족들은 뱀떼들과도 공존.
뱀떼와 함께 생존을 위해 뭍으로 탈출.
인류는 아비규환 지옥 체험을 겪었을듯.
아울러, 저지대민족들의 고대국가 출현 후
각종 형벌을 지옥으로 표현한 그림도 있다.
아울러, 각종 귀신, 악귀를 제압하는.,사천왕.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저승사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참 많다.
저승사자가 날 데릴러 오거든?
아울러, 염라대왕 옥황상제 선녀
지옥과 천당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또한, 산신령 귀신에 관한 전설도 많다
옥황상제 탱화
옥황상제 탱화
우리나라의 판소리 등 전통문화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지정.
강릉단오제, 영산제, 강강술레, 남사당.
앞으로도 유네스코 무형 유산으로
지정될 가치 있는 전통 문화가 많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때 한국민속촌은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살리는
역활을 톡톡히 하는 민속박물관 같은 곳.
한국민속촌은 '세계5대 박물관'에 못지 않게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잠재가치가 있는 전시장.
장차, 8도의 전설 설화 등 무형문화제를 소개 할 명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