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려주신 김수영, 정현종, 신대철, 최민, 최영미, 정지용, 윤상규, 김종삼, 김관식, 박용래의 시 잘 읽었습니다. 무지하여 많은 배움이 되었습니다. 박용래에 대해 집요를 떨어 보았습니다. 집요 말고는 달리 아는 것이 없는 관계로다가....
다른 시인들에 대해서도 집요를 떨어 볼까 말까 고려중입니다. 네? 지레 질린다굽쇼? ^^
연시軟枾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강아지풀, 민음사, 1975>
雨 中 行
박용래
비가 오고 있다
안개 속에서
가고 있다
비, 안개, 하루살이가
뒤범벅되어
이내가 되어
덫이 되어
(며칠째)
내 木양말은
젖고 있다.
<현대시학/ 1974.6>< 먼 바다>(1984) 중에서
코스모스
박용래
曲馬團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地域.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緯度
정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一生.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少女의
指紋
* 위도(緯度): 지구 위의 위치를 나타내는, 가로로 된 좌표. 적도와 평행선으로 되어 있으며, 적도를 0°로 하여 남북으로 각 90°로 나눔. 북의 것을 북위, 남의 것을 남위라 함.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저녁눈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담장
오동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친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옆 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泓來)누이 생각도 난다.
오동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원뇌(遠雷).
<담장>전문
막버스
내리는 사람만 있고/ 오르는 이 하나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
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 기러기뗄 보아아
아 어느 강마을 / 잔광(殘光)부신 그곳에/ 떨어지는가.
<막버스>전문
黃山메기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갯벌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혀
목이 메는 白江下流
노을 밴 黃山메기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黃山메기>전문
먼 바다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 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손거울
어머니 젊었을 때
눈썹 그리며 아끼던 달
때까치 사뿐이
배추이랑에 내릴때 ―감 떨어지면
親庭집 달 보러 갈거나
손거울.
탁배기(濁盃器)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굴렁쇠 아이들의 달.
자치기 아이들의 달.
땅뺏기 아이들의 달.
공깃돌 아이들의 달.
개똥벌레 아이들의 달.
갈래머리 아이들의 달.
달아, 달아
어느 덧
반백(半白)이 된 달아.
수염이 까슬한 달아.
탁배기 속 달아.
下棺
볏가리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하관(下棺).
선상(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 떼.
古月
유리병 속으로
파뿌리 내리듯
내리는봄비.
고양이와 바라보며
몇 줄 詩를 위해
젊은 날을 앓다가
하루는 돌 치켜 들고
돌을 치켜 들고
원고지 빈 칸에
갇혀 버렸습니다
古月은.
앞산에 가을 비
뒷산에 가을 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木瓜茶 마시면
가을 빗소리
강아지풀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 구(構)내(內) 모퉁이
어메는 노오란 아베도
노란 화물(貨物)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마른 침묵은 싫어
삐걱 삐걱 여닫는 바람소리 싫어
반딧불 뿌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 간다.
다 두고 이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喪與)소리 들리어라.
녹물이든 오요요 강아지풀
둘레
산은
산빛이 있어 좋다
먼 산 가차운 산
가차운 산에
버들꽃이 흩날린다
먼 산에
저녁해가 부시다
아, 산은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앵두, 살구꽃 피면
앵두꽃 피면
앵두바람
살구꽃 피면
살구바람
보리바람에
고뿔 들릴세라
황새목 둘러주던
외할머니 목수건
월훈(月暈)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너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문학사상}, 1976.3)
* 허방다리 : 함정(陷穽).
*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 월훈 : 달무리.
감새
감새
감꽃 속에 살아라
주렁주렁
감꽃 달고
곤두박질 살아라
동네 아이들
동네서 팽이 치듯
동네 아이들
동네서 구슬 치듯
감꽃
노을 속에 살아라
머뭇머뭇 살아라
감꽃 마슬의
외따른 번지 위해
감꽃 마슬의
조각보 하늘 위해
그림 없는
액자 속에 살아라
감꽃
주렁주렁 달고
감새,
五柳洞의 銅錢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였다가
한때 나는 坐板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中國집 처마밑 鳥籠 속의 새였다가
먼 먼 輪廻 끝
이제는 돌아와
五柳洞의 銅錢.
뻐꾸기 소리
외로운 시간은
밀보리빛
아침 열시
라디오 속
뻐꾸기 소리로 풀리고
아침 열시 반
창 모서리
개오동으로 풀리고
그림 없는 액자 속
풀리고, 풀리고
갇힌 방에서
외로운 시간은
꿈속의 꿈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진달래 철쭉이 한창인데
꿈속의 꿈은
모르는 거리를 가노라
머리칼 날리며
끊어진 현 부여안고
가도 가도 보이잖는 출구
접시물에 빠진 한 마리 파리
파리 한 마리의 나래짓여라
꿈속의 꿈은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살구꽃 오얏꽃 한창인데
陰畵
몽당연필이 촘촘 그리는 낙엽, 서리,
서릿발의 입김. 땅재주 넘는 난장이.
불방망이 돌아 접시의 落下. 말발굽 소
리. 촘촘 창틀에 그리는 새, 홍시, 홍시
의 꼭지. 어려라. 콧등이 하얀 원숭이.
육십의 가을
―거기
그 자리.
봉선화 주먹으로 피는데
피는데
밖에 서서 우는 사람
건듯 갈바람 때문인가,
밖에 서서 우는 사람
스치는 한점 바람 때문인가,
정말?
박용래(1925~1980)는 1925년 충남 강경에서 출생, 1943년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 현대문학 >에 <가을의 노래>, 1956년 <황토길>, <땅>이 추천완료되어 등단했다. 이후 중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평생 시에만 전념하다 1980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는 향토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고독과 비애를 절제된 형식을 통해 형상화하였다. 시집에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궁>(1979), 사후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먼 바다>(1984)가 출간되었다. <저녁눈>으로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 수상, 사후 1980년 <한국문학> 제정 한국문학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