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왕조에 대한 약속받다
■ 영원한 왕조
다윗의 공적 중 하나는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옮긴 일이었다. 통일왕국을 건립한 직후 다윗은 아직 여부스족들이 버티고 있던 예루살렘 시온 성을 점령하여, 이를 다윗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곧바로 조공 재목과 목수들을 총동원하여 왕궁을 세우는 등 기본적인 통치기반을 다졌다.
다윗은 유다 바알라에 임시 안치되어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결코 뒷전으로 미루지 않았다.
법궤를 옮기면서 인간적인 실수를 범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다윗은 레위인의 역할과 거룩함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다. 이제 법궤는 미리 성막을 쳐서 마련해 놓은 자리에 옮겨졌다. 이리하여 그곳은 장막성소가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다윗의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왕궁에 비할 때 야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장막성소가 초라하게만 보였던 것. 고민 끝에 예언자 나탄에게 성전 건립의 뜻을 비쳤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2사무 7,2).
나탄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다윗을 위한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내가…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2사무 7,5-7)
가슴 뭉클하게 하는 말씀이다. 웅장한 성전 대신에 천막 성전에 머무시기를 더 즐기시는 하느님! 의식주 생계 문제로 신음하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려는 연민이 물씬 느껴져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순수한 의중을 보셨다. 그 지극정성이 갸륵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약속 말씀을 내려 주셨다.
메시아의 성경적 전거(典據)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유명한 말씀이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2-13.16).
다윗은 즉시 깨달았을 것이다. 아하, 성전을 짓는 것은 솔로몬의 몫이로구나! 마치 모세의 몫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코앞까지 영도하는 것이었고,
요르단 강을 건너 정착하는 리더십은 여호수아에게 맡겨졌듯이, 하느님의 지혜는 그렇게 높고 길게 내다보시는구나!
그런데 단 한 단어 ‘영원히’가 그의 이해력으로는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영원히’라, 자고로 역사 이래 어느 위대한 왕조도 길게 가야 고작 몇 백 년인데, 영원히?
이러함에, 다윗은 묵상과 관상기도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곰곰 그 말뜻을 주님께 묻지 않았을까. 물론, 성령의 자상하신 화답이 함께 했을 터이고.
영원히?
청춘남녀가 벅찬 사랑의 약동에
거침없이 나눈 약속, 그 ‘영원히’는
정녕 아닐 테지요.
영원히?
‘오래도록’, ‘길게’, ‘대대로’를
흥껏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과장법 언사(言辭)쯤으로만
알아들어도
제 복심은 환장할 기쁨에 혼절할 지경.
불초소생 다윗 왕조가 영원히 간다고요?
은혜가 망극하여이다.
그 진상(眞相)이 3일 천하건, 일장춘몽이건, 천년왕국이건,
‘영원히’는 제 흥분, 제 감사, 제 기도, 제 희망,
….
너희는
‘영원히’를 얼마나 남발했더냐.
허투루 내뱉고 스리슬쩍 뭉갠 적이 얼마나 많더냐.
하지만 내 ‘영원히’는 다르다.
내 ‘영원히’는 변덕을 모른다.
구차한 변명도, 사과도 모른다.
내 ‘영원히’는 신기루가 아니라 실체다.
너는 모른다,
영원을.
영원은 지상에 깃들어 있지만
물질계가 담지 못하는 무한 길이.
그것은 양(量)의 세계에 삼투해 있되
오로지 질(質)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무한 자체.
네가 알아듣건 말건,
네 왕조가 영원히 존속할 것은 내 약속!
네 혈통에서 영원한 왕, 메시아가 나리라.
네 나라에서 영원한 나라, 킹덤 오브 갓(Kingdom of God),
하느님 나라가 움트리라.
짐작건대 그날 밤 다윗은 이 알동말동한 ‘영원히’로 밤새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지 않았을까.
■ 성왕 다윗의 유언
다윗 왕은 성자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한낱 죄짓는 인간이었다.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와 관련된 죄만해도 십계명 중 두 가지를 거스르는 가중죄(加重罪)였다.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주님의 허락 없이 호구조사를 결행한 것 역시 공인이 만백성 앞에 지은 죄였기에 주님의 큰 진노를 샀었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성왕(聖王)으로 부른다. 왜? 그의 통회가 하늘에 통했기 때문이다. 그는 뼈를 에이는 통회로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얻어냈다(시편 51,3-5 등 참조).
오늘날 시편을 읽는 이들이 곳곳에 눈물 자욱을 남긴 그의 통회기도를 통해 스스로가 성화되는 체험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허물 있는 성왕 다윗! 그도 주님 품으로 갈 때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대를 이을 솔로몬을 불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1열왕 2,2-4).
자신의 전 인생을 청산하며 이런 유언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늘 길로 오르는 심정에 평화가 깃들어 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로 마감되는 훈시는, 본인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당당한 고백에 다름없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영원한 왕조에 대한 약속을 솔로몬에게 대물림시켜주는 유훈으로 유언은 절정에 이른다. 바로 이 대목에서 다윗이 저 약속 말씀을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 고이 간직해 왔는지가 큰 울림으로 드러난다.
이제 이 유언의 수취인은 더 이상 솔로몬이 아니다. 이 유언의 효력은 그대로 지상의 영원한 하느님 왕국인 교회에 대물림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 유언 안에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대대로 은총 충만하게 살길이 제시되어 있음을 놓치지 말 일이다.
차동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