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에 내린 서설
11월에 든 24절기로는 입동과 소설이 지났다. 비가 내릴 상황에서 대기권 기온이 빙점 아래로 내려가면 눈이 되어 내린다. 겨울철엔 기압골 형성이 드물어 강수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말이 소설이지 소설 절기에 눈을 보기란 쉽지 않다. 더더구나 따뜻한 남녘은 비가 왔으면 왔지 눈이 귀하다. 12월 절기로는 대설과 동지가 있다. 눈이 펄펄 내린다는 대설이지만 역시 눈은 귀하다.
12월 초순 주중 금요일은 대설 절기였다. 학교에선 정기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학생들은 시험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전에 하교했다. 학생들이 교문을 빠져나갈 즈음 흰 눈이 펄펄 날렸다. 아스팔트 도로에는 내린 눈이 금방 녹았지만 나뭇가지나 지붕 위엔 눈이 쌓여갔다. 나는 내리는 눈송이를 맞으며 걸어서 집으로 왔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굵은 눈송이가 펄펄 날렸다.
대설 절기에 딱 들어맞는 서설(瑞雪)이었다. 눈이 드문 남녘이라 많은 사람들이 설레는 마음이었으리라. 전방의 국군 장병이나 자동차를 운전하며 생업을 잇는 사람은 눈이 많이 내리면 여간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눈 구경이 힘든 지역 사람들에겐 순백으로 세상을 덮어주는 눈이 내리면 누구나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다. 베란다 창밖으로 비친 세상은 온통 은세계였다.
나도 방안에만 머물 수 없어 바깥으로 나갔다. 아파트단지 앞 메타스퀘어는 높다란 원추형 가지 끝까지 눈꽃을 피워냈다. 용추계곡으로 들거나 안민고개를 올라도 좋지 싶었다. 산길을 오르다 미끄러져 낙상이라도 당할까 봐 염려되었다. 그래서 시내버스를 타고 동정동으로 가 녹색버스를 갈아탔다. 차내 자동방송은 “이번 정류장은 천주암입니다. 다음은 굴현고개입니다.”로 나왔다.
나는 천주암을 지나 굴현고개에서 내렸다. 구룡산을 오르기 위해 가끔 내린 적 있다. 천주산을 오르는 기점이 되기도 한다. 제법 많이 내리던 눈발은 그쳐갔다만 등산로가 미끄럽지 싶어 산행은 마음을 접었다. 대신 담쟁이넝쿨이 흙담을 감싸 안은 골목길 비달을 내려갔다. 등산화 바닥에는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디딜 때마다 폭신폭신한 촉감이 와 닿았다.
터널을 빠져나온 남해고속도로 지선이 지났다. 고속도로 노면으로는 차량바퀴 구르는 소리가 붕붕거렸다. 지하통로를 빠져나가니 지개리가 나왔다. 마을 앞은 구부정한 논두렁이 이어진 들판이었다. 벼를 벤 그루터기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이 덮인 들판인데도 비들기가 무지 지어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들은 하늘로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을 앞을 흐르는 실개천에는 얼지 않은 도랑물이 졸졸 흘렀다. 대한마을 앞에는 시청에서 분양한 주말 농장 텃밭이 있었다. 아직 수확을 덜 끝낸 푸성귀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농로를 따라 발걸음 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눈을 밟는 소리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왔다. 대한마을을 지나서부터는 자동찻길로 오라 걸었다. 아스팔트바닥은 자동차가 지나 눈은 모두 녹아 사라졌다.
구룡산 기슭 단감과수원이 있는 곳은 고암마을이었다. 마을 앞을 지키는 아름드리 소나무도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승산마을을 앞두고는 다시 눈이 쌓인 논길로 접어들었다. 승산마을을 지나 갈전마을 들머리에서 한 할머니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굴현고개부터 걷기 시작한지 두 시간 남짓 동안 사람이라곤 처음 만났다. 멀리 인가에선 개 짓는 소리가 들려오고 수탉이 홰를 쳤다.
화천리를 향해 갈 즈음 개를 끌고 나온 사내를 만났다. 근처 텃밭에서 소나무를 키우는 안면이 익은 지인이었다. 눈이 내린 김에 묶어두고 키우던 진돗개와 삽사리를 운동시켜준다고 들판으로 데려나왔다고 했다. 지인과 들길을 걸으면서 안부를 나누고 화천리로 빠졌다.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더랬다. 우린 상남동 막걸리 집에서 명태전을 놓고 마주앉았다. 12.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