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선생님이 받고 있는 법적 처분은 어떤 것입니까? 두 가지 처분을 받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석방 처분입니다. 가석방자가 가석방 기간 중에 이런 일을 하면, 가석방 처분이 취소되고 즉시 잔형이 집행됩니다. 예를 들면 감호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지 않고 주거지를 이전하거나 10일 이상 여행을 한 때,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나 시위 기타 파괴활동에 참가하거나 이를 지지·성원하는 따위의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한 때 등 10여 가지입니다. 제 경우 가석방 기간은 2000년 5월 5일까지 입니다.
―세기가 바뀐다는 말이군요. 그 동안 무슨 감형이나 사면 조치가 없다면 그렇게 되는 셈입니다. 둘째는 보안관찰 처분입니다. 보안관찰법에 관하여는 최근 그 내용의 일부가 알려졌습니다만 3개월마다 주요활동 사항, 통신·회합한 다른 보안 관찰처분 대상자의 인적 상항과 그 일시 장소 및 내용, 그리고 여행에 관한 사항도 파출소장을 거쳐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하여야 합니다.
―오늘 이 대담이 그 '주요활동'의 하나가 된다면 신고의 대상이 되겠군요. 선생님이 아직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정을 감안하여, 이 대담은 그 가석방 조건에 저촉되지 않는 아주 '부드러운' 내용으로 한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하하.
―출생 당시의 집안 환경부터 좀 들려주시지요. 아버님은 자작농의 맏이로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였고, 어머님은 봉건지주의 막내 외동딸이었습니다. 저는 1940년 10월 태어서 1941년 8월에 났습니다. 고향은 경남 밀양입니다만 아버님의 임지인 경남 의령군 유곡국민학교의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습니다. 위로 누님 두 분과 형님, 그리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출생 배경이나 성장의 환경이 뒷날의 삶에 미친 어떤 영향 같은 것이 있습니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장 사택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까지 거의 전 기간을 계속 사택에서 생활했습니다. 학교 사택에서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이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저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됩니다. 대학 및 대학원 시절도 대부분 학교 연구실에서 살았고, 그 후 대학 강단에 섰다가 20년 동안 감옥이라는 ‘인생 대학’에서 살게 되었으니까요. 성장 환경이 주로 학교였습니다만 그 '학교'가 차츰 넓어져, 결국은 인생 대학이라는 굉장히 넓은 학교로 진학한 셈이지요.
―청소년기에 학교는 어디서 다녔습니까?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고향인 밀양에서 마쳤습니다. 고등학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이 학교를 1959년에 졸업했습니다.
―그 시절의 사건으로 특히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습니까? 기억에 남는 일보다는 저의 정서와 성격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일을 이야기하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그 당시에는 물론 느끼지 못했고 훨씬 후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선 해방 당일의, 그러니까 1945년 8월 15일 밤이라고 생각됩니다. 밀양의 면소재지 국민학교의 일본인 교장 사택을 제가 점령했습니다.
―점령이요? 예, 그렇습니다. 아버님은 일제 때 일본인 교장배척운동에 가담하고 한글연구 비밀서클에 관계했다는 이유로 해직 당했기 때문에-얼마 뒤 복직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해방 당일 마을의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 모였고, 그 젊은이들로부터 교장이 도망가고 비어 있는 집을 가서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비 오고 바람 부는 그 밤을 꺼질듯 까무라치는 접시불 하나를 밝혀놓고, 제법 무서운 다다미방을 지킨 것입니다. 제가 41년생이니까 다섯 살 때의 일이지요. 밤중에 횃불을 든 동네 청년들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는 보급품(?)으로 자두 몇 개를 주고 갔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친구들께 그 분들이 시키는 대로, 물론 아이들 상대의 농담이지만, 나중에 커서는 ‘일본 총독’이 되겠다는 대답을 곧이곧대로 하고 있었던 터라 그날 밤이 어린 저로서는 굉장히 감격적이었습니다.
―점령군 사령관에서 주일본한국총독에 이르기까지 어려서부터 ‘의식화 교육’을 단단히 받은 셈이군요. 해방에 이어 6·25가 선생님의 소년기를 지배하게 되는데요. 그렇지요. 해방과 6·25를 뜻도 모르고 겪었지요. 저에게 자주 팽이도 깎아주고 개천이나 들에서 곧잘 동무해 주던 청년이 있었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그 청년이 당당하게 횃불을 들고 마을을 돌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습니다. 해방 당시의 일이었지요. 그러나 얼마 후로는 그를 영영 볼 수 없었는데, 주변의 누구로부터도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국민학교 4학년 때 6·25를 맞았습니다. 하루는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하교길에 참으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남천교의 난간 양쪽으로 사람의 머리를 잘라서 달아놓았는데, 하도 무서워서 그 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어요. 아마 10개가 넘었다고 기억됩니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은 남천교를 건너지 못한 채 울고 서 있었습니다. 양쪽 귀를 관통해서 철사로 꿰어 달아놓은 머리도 있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잘린 목통 속이 보이는 것도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헝클어져 얼굴을 덮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핏기가 가셔서 종이장처럼 새하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나마 덜 무서웠습니다. 그 달아놓은 머리의 뺨을 때리며 욕하는 노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우는 가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끔찍한 일이 있은 후부터 저는 무슨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해방 당시의 그 청년의 머리가 그 속에 있었다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청준의 어느 작품으로 기억되는데, 그런 연상 심리가 삶의 중요한 고비 고비에 하나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강박관념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그 후 현대사와 관련된 문제를 독서하거나 토론할 때, 자주 그에 대한 추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이것도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하교 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학년 말 성적표, 당시에는 통지표라고 했습니다만, 그 성적표를 받아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같은 반의 이선동이란 친구가 길을 막고 제게 따갑게 쏘아부쳤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1등이라는 것이었지요. 너는 교장 아들이기 때문에 담임선생에게 잘 보여서 1등이 되었지만 사실은 자기가 1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들보다 두세 살 나이가 많은 귀환동포로서, 해방 후 일본에서 귀환했는데, 우리 또래보다는 여러 면으로 조숙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아버님은 우리 학교의 교장이 아니셨고, 나 자신은 물론이고 함께 그 말을 들은 친구들도 그 아이의 말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 그 친구의 집에 자주 가게 되었는데 집이랄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길가로 달아낸 방 한 칸과 먼지 자욱한 좁은 툇마루가 전부일 만큼 무척 가난했습니다. 한번도 그의 부모를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거의 굶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것은 처음보다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일이지만 무척 당황하셨겠습니다. 예,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고 난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학교에서 거의 고의적으로 일을 저질러 벌을 자초하는 여러 가지 개구진 장난을 줄곧 하게 되었습니다. 복도에 꿇어 앉아있는 정도는 가장 경미한 벌에 속하고 어떤 때는 전교생이 볼 수 있도록 운동장 한가운데 꿇어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이 훈시하고 있는 동안 운동장을 뛰어 돌아야 하는 벌을 받았는데, 조회 분위기가 산만해지자 교장선생님이 훈시를 잠시 멈추고 벌을 중지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소행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5학년 때부터 일약 응원단장으로 발탁되었지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응원단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응원단장만 계속했더라면 편안히 살 수 있었을 텐데, 괜히 선수로 나섰다가 그만……. 글쎄, 선수랄 수도 없습니다만……. 다 팔자지요. 공교롭게도 제게는 저보다 공부는 잘하면서도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는 친구가 꼭 한두 명씩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생에는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함께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은행 본점의 부장으로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의 친구는 제가 대학 다닐 때 고향에서 이발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방학 때 고향에 가면 저는 일부러라도 그 친구의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했습니다. 국민학교 적의 친구는 영영 소식을 모릅니다.
―청소년기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한 마디로 어떤 분위기를 띠리라고 생각하십니까? 3형제 중 둘째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집에서보다는 바깥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형과 다투면 동생이 형한테 대든다고 야단맞고, 동생과 다투면 동생 하나 거두지 못한다고 야단맞는 게 둘째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별로 주목 받지 못하고 바깥에 친구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장서를 읽는 누님들과 형님을 따라 그 뜻도 모르면서 비교적 조숙한 독서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의 장서와 그 ‘조숙한 독서’의 내용을 좀 공개하시지요. 박계주의 『순애보』, 이광수의 『흙』이나 『유정』같은 소설을 국민학교 때 읽었습니다. 아버님 서가에는 유학(儒學) 관계 서적이나 동양고전이 많았습니다만, 이시첸코의 『철학사전』, 보차로프의 『세계사 교정』, 전석담·허동 등이 번역한『자본』1권도 있었습니다.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특별한 이유나 동기가 있습니까? 실업계인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저의 자형이 그 학교의 교사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모님께서 둘째까지 서울 보내서 유학시킬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어가 되고 싶다거나 무슨 일을 하겠다는 특별한 포부는 없었습니다. 주산과 부기 과목에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 없었고, 좀더 본질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생각했던 ‘본질적인 공부’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렇게 물으니 제가 ‘본질적’이란 말을 잘못 사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본질이란 것이 뭐 대단한 것일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사르트르의 책을 학교에 가지고 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그렇듯이, 저도 막연한 희망이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요.
―벌써 문학적 재질이 상당했던 듯한데, 혹시 백일장 같은 데 참가하여 입상한 경력이나 작품 내용에 관하여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장원은 한번도 못했습니다만 입상은 빠지지 않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의 백일장에서 느낀 점인데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상당히 두툼한 시작(詩作) 노트를 한 권씩 들고 와서는, 출제된 시제와 비슷한 것들을 골라서 그것을 다듬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문예반도 아니었을 뿐더러 시작 노트 따위가 있을 리 없었지요. 입상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시상식 때까지 남아 있던 친구들이 상장과 상품을 받아서 학교에 갖다 주었습니다. 한글날 부산시 백일장에서 출제된 시제가 ‘지도(地圖)’였는데 제가 장원은 못했지만 분단의 아픔을 썼다고 칭찬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는데, 그에 관해 들려줄 얘기가 있습니까? 고교시절에는 시인이던 국어선생님의 영향이 상당히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선생님은 4·19 뒤의 교원노조 활동으로 인해 5·16이 나자 구속되기도 하신 분입니다. 생각하면 그 선생님의 과분한 애정을 받았습니다. 친구분들의 술자리에 끼어 앉히기도 해주시고, 선생님이 관여하던 주간 신문의 일을 돕게도 해주시고, 문예반 소속이 아닌데도 저를 부산 마산 진주 등 문화제 행사의 백일장에 출전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경제학과 진학을 강력하게 주장하신 분입니다. ‘강력하게’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 입행 시험을 치르고 온 저를 불러서 이튿날의 면접을 포기하도록 저를 설득하셨기 때문입니다.
―배치고사 성적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학과를 지정하는 요즘의 진학 지도와는 달리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지도는, 특히 그 분이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넓고 깊은 안목을 틔워 준 ‘존경하는’ 선생님일 경우에는, 학생들의 장래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필 경제학과를 권유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그 선생님은 설명이 많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그냥 ‘가라’는 것이었어요. 경제학은 돈 벌어서 자기 혼자 잘 살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미국이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사실은 원조가 아니라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주로 경제적 빈곤의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경제제도나 체제의 문제에 대한 말씀은 없었습니다. 저의 자형이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었는데, 그 쪽의 영향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 대학시절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
―60년대라면 전쟁과 기아의 연대인 50년대와, 본격적 개발의 연대인 70년대를 이어주는 가교가 되는 시기입니다. 물질적인 빈곤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척 황폐한 시대였지요. 혁명은 군부쿠데타로 좌절되었고, 반공과 북진통일 틈바구니에서 자유로운 사고는 숨쉴 틈이 없었고, 일본과의 국교 재개 및 월남 파병 등으로 국내외가 무척 소란했습니다. 대학 시절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대학에 다닌 시기가 1959년에서 1963년까지입니다. 4·19와 5·16을 재학 중에 겪었습니다. 저희들의 대학 시절은 한마디로 ‘혁명과 반혁명’ 시절이었습니다. 해방 정국의 열기가 6·25 전쟁 기간 동안 완벽하게 초토화되고, 이후 매카시적 반공 이데올로기의 중압 밑에 모든 진보적 역량이 봉쇄되어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4·19를 계기로 이러한 역량의 일부가 표면으로 분출됩니다. 4·19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라는 형태로 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19 뒤 상황의 진전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의 지배정권이 어떠한 세력이었으며 또 그 세력이 어떠한 계층을 억압하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지요. 다시 말하면 지배-피지배라는 사회의 계급적 구조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 부문 운동들은 해방 직후 좌절의 경험이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상태였고, 더구나 전쟁 동안의 초토화로 말미암아 그런 좌절을 극복할 토대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좀 전에 “역량의 일부가 표면화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이 점은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5·16은 4·19를 계기로 진전된 일정한 혁명적 성과를 궤멸시키면서, 그 좌절의 분위기를 신속하게 친미·반공을 기조로 한 ‘조국 근대화’의 이데올로기로 포섭해 내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저희들의 대학시절은 이를테면 ‘미완의’ 혁명과 ‘미완의’ 좌절을 함께 겪은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회 상황에서 대학의 교과내용이나 연구 풍토는 어떠했습니까? 경제학과의 경우는 케인즈로 대표되는 근대경제학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자본축적론과 같이 마르크스 모형에 의해서 축적구조를 설명하는 강의도 일부 있었지만, 전반적인 풍토는 근대 경제학적 관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성장론 완전고용정책 화폐금융론 등이 기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서클 중심의 학회에서는 슘페터, 돕, 로빈슨, 후버만 등의 이론들이 논의되었습니다. 4·19 직후에는 한동안 『자본』원강이 선택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하고, 세미나 서클에서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들이 교재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연구 분위기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근대경제학 일색이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 관련 서적은 도서관의 분류카드에도 없었지요. 한마디로 당시 대학의 연구 풍토는 기존의 지배이념을 비판하고 대항하기 위한 변혁이론의 산실로서는 여러 면에서 부족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로는 그 이론들이 그래도 가장 ‘급진적’이었을 텐데요. 모리스 돕조차도 처방이 약하다고 해서 학생들이 외면했던 80년대 중후반의 상황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없지 않습니다. 계급이나 민족의 문제에 대해 당시의 학생들 사이에서 첨예하게 논의된 관심사가 있다면, 그 주제와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당시는 1차 산업의 비중이 인구 구성에 있어서나 국민총생산 구성에 있어서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농업 문제, 농민 문제에 관한 논의가 상당히 활발하였습니다. 4·19 이후 민족문제를 통일운동의 형태로 학생운동의 장으로 이끌어내기는 했습니다만, 5·16 이후 거의 일상화되다시피 한 극우적인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뛰어넘기가 어려웠습니다.
―비록 농민문제가 중심이 되었던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그 계급적인 관점과 민족적인 관점이 서로 대립했던 계기나, 혹은 그들을 통일시키려는 시도 같은 것은 없습니까?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반제통일과 반파쇼민주의 대립구도는 물론 있었습니다. 쟁점 자체는 지금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놓고 열띤 논의들을 했었지요. 이러한 대립구도를 지양하기 위해서 사회계급 분석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대개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해방 전후의 사회변동 과정을 계급의 관점에서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4·19 당시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당시 저는 대학 2학년이었습니다. 4·19 데모는 주로 문리대 쪽에서 조직했고, 상과대학에서는 사전 조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저학년인데다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시위에는 물론 참가했지요.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청와대로 이름을 고쳤지만 당시의 경무대 앞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는 이미 발포가 시작되어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등학생 한명이 달려와서 피 묻은 러닝셔츠를 펼쳐 보이며 울면서 외쳤습니다. 텅 빈 국회의사당 앞에 앉아서 뭘 하느냐는 거였어요.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경무대로 밀고 가자느니, 가서 개죽음 당할 필요가 없다느니 설왕설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저게(피 묻은 셔츠) 어째서 개죽음이냐”는 고함소리가 났어요. 돌아다보았더니 의외에도 가까운 친구였어요. 그래서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경무대 쪽으로 달려갔어요. 저도 종암동의 학교에서부터 줄곧 저와 함께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참가했던 친구를 따라 경무대로 향했습니다. 그때 그의 애인이 달려와서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저는 붙잡는 애인이 없어서 그냥 경무대로 갔었어요. 저희 선배 한 분이 그 곳에서 숨졌습니다.
―붙잡는 애인이 없었다는 것은 유감입니다만, 아마 붙잡는 애인이 있었어도 경무대로 달려갔으리란 생각이 드는데요. 학과 공부 이외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서클운동에 열심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클에서 논의한 주제들은 분단문제, 미국의 한반도 전략과 신식민지지배, 매판자본 등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제3세계, 세계사, 한국근대사 등 잡다할 정도로 광범한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전위운동에 필요한 의식을 공유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의 은사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하는 분이 있습니까? 저는 특별한 한 사람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받았다기보다는 여러 선생님들의 영향와 애정을 고루 받았습니다. 후에 서울대 총장이 되신 최문환 선생님, 충남대 총장을 역임한 이현재 선생님, 나중에 기업으로 나가신 홍성유 교수님, 사회대 학장을 지낸 임종철 교수님 등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강사로 철학을 가르친 권세원 교수님도 책을 많이 주셨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줄곧 느끼는 일입니다만 인간적인 면에서 늘 과분한 애정을 받아 항상 빚진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실을 사용하기도 하고, 선생님 댁에서 밥도 먹고 심지어 잠도 잤습니다. 지금의 학생들로서는 누리기 어려운 일들이지요. 그러나 당시 제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사람은 선생님들보다는 오히려 선배들과 후배들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연구실을 이웃해 있던 안병직 선배와 신용하 선배, 신문편집을 맡았던 장종록 선배, 그리고 연구실과 세미나 서클을 통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던 후배들이었습니다. 부담 없는 토론은 그 과정을 통하여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고 사고의 폭도 넓혀준다고 믿습니다.
―은사나 선후배 이외에 달리 기억할 만한 분은 없습니까?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한 분 계시는데, 학교의 수위인 유씨 아저씨입니다. 제가 대학 3~4학년과 대학원 2년을 줄곧 학교 연구실에서 기거하다시피 생활했기 때문에 매우 가까워진 분입니다. 밤중에 유씨 아저씨 대신 수위 모자를 쓰고 손전등을 들고, 교정에 들어와 있는 아베크족(주로 후배들이지만)을 쫓아내는 장난을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유씨 아저씨는 고상(高商) 시절인 일제 때부터 학교에 계신 분으로 국대안 반대운동이나 6·25 당시의 학교 이야기도 들려 주시고, 당시 교수들의 이야기며 심지어는 그 교수들의 학생 시절의 면모까지 소상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옛날에는 대단한 학생들이 참 많았는데, 그런 학생들은 거의가 죽거나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지금도 학생들을 보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알 수 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예언했습니까? 저의 장래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학회, 연구회, 과외활동 등 선생님이 참여했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시지요. 말씀을 드리고 보니 어째 말투가 꼭 조서받는 식이 되어버렸는데, 이거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하도 많이 당해봐서……. 상과대학 내에서는 경우회 회원이었고, 교지인 『상대평론』의 편집위원, 그리고 단과대학 신문인 『상대신문』의 기자였습니다. 당시 대학의 분위기는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 정도의 이념성을 가진 학회 및 학생활동은 4·19 이후인 3학년 때부터 학회와 서클활동에 참여했는데, 자연히 후배들의 세미나를 지도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상과대학 이외에는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의 세미나 서클에 참여하거나 그를 지도했으며 농촌학원, 대학생 종교단체, 공장 야학에도 직접·간접으로 관계하였습니다.
―말씀 마지막 부분의 공장야학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관여하고 있던 기독교학생 서클에서 공장야학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중소 섬유업체였는데 노동야학은 아니고 학원야학의 성격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생활과 정서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시도에 불과했습니다. 70년대의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징역 속에서 들었는데, 매우 부럽고 반가웠습니다.
―후일 문제가 되기도 했던 경우회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요. 경우회는 상과대학 경제학과의 비교적 진보적 성향의 학생서클입니다. 회원 상호간의 토론과 연구는 물론, 총회 및 연구발표회를 통해 선배들과 연계되고 또 그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경우회에 가입한 것은 3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4기 회원이었습니다만 당시 4기 회원의 모임은 거의 없었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1~2학년의 세미나를 지도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제가 1961년에 입회하여 1968년 구속될 당시까지 관여하였기 때문에 저의 구속과 함께 연루되어 구속된 회원도 있었고, 다른 많은 회원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의 학번 계산방식으로 하면 제가 59학번인데, 언젠가 89~90학번의 경제학과 학생들이 집으로 놀러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경제학과 노래’가 그때의 경우회회가(會歌)입니다. 1기 회원의 음대 출신 부인이 곡을 붙이고 노랫말은 제가 지은 것입니다.
―그 작사 솜씨를 한번 공개하시지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아마 ‘찬 이성’과 ‘더운 가슴’이란 말이 들어 있었을 겁니다. 경제학자 마샬의 한 구절을 번역한 것이지요. 기회가 닿으면 저도 그 가사를 한번 다시 보고 싶습니다만, 지금 그 가사를 대하면 무척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수준이 그랬습니다. 자기의 글이나 글씨는 그 장점보다는 결함이 먼저 눈에 뜨이는 법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습니까?
―60년대의 서울상대 출신 가운데 지금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혹시 김근태나 장명국에 대해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김근태와 장명국은 65학번으로 동기였다고 기억됩니다. 장명국은 1~2학년 때부터 자신의 이념적 입장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구속되면서 조사를 받는 등 고생도 하고, 그 후로도 그 일 때문에 여러 가지 애로가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김근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빌려 읽을 정도로 매우 학구적이었고,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는 능력이 돋보였지요. 제가 세미나를 지도하던 당시는 두 사람 모두 1~2학년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활동을 개시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때의 세미나는 근대경제사, 즉 자본주의 성립사를 주제로 하였습니다만 토론과정에서는 헤겔을 비롯하여 고리끼에서부터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대담자인 정운영 교수도 학번은 다르지만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는 경우회 회원이 아니었고, 그제나 이제나 철이 안 들어서……. 아무튼 선생님이 중심이 되었던 당시의 그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제법 출세를 했을 텐데요. 하하, 이걸 어쩌지요.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팔자 때문입니다. 개인의 팔자만이 아니라 민족의 팔자도 그 속에 들어있기는 하지만…….
―60년대 후반에는 한국사회연구회를 중심으로 김승호나 김병곤 같은 출중한 후배들이 나왔습니다. 한 캠퍼스에서 책상을 나란히 놓고 공부한 이들이 지금은 상당히 다른 정치적 견해를 지니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변혁운동에 헌신한 후배들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는 이를테면 서울 상대 출신 전체의 사회적 입장이나 견해 차이에 비하면 거의 문제가 안 될 정도라고 보아야겠지요. 물론 변혁운동에 뛰어든 경제학과 출신들의 자세가 동년배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다소 비타협적인 면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차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방법상의 문제이고 전술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차이’가 ‘다양성’이라는 형태로 유연하게 연대되지 못하는 것은 변혁운동의 전체 역량이 미숙하고 취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말하자면 그 운동의 현상 형태에 불과한 것이지요. 정파 중심의 단계는 다른 나라의 운동사에도 나타났었습니다. 어쨌든 변혁 역량이 확실한 지도구심을 구축할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 단일한 본질에도 불구하고 현상적으로는 다양한 측면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견해나 입장 차이는 그것이 적대적인 것이 아닌 한, 길게 보아서 그것이 오히려 풍부하고 유연한 대응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차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러한 차이들 간의 관계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그런 ‘희망사항’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 원칙이나 자세에 대한 충고를 한마디 해 주시지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관계설정’을 해야지요. 여러 가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관계만이라도 유보해 두어야 합니다. 인간적 관계마저 상처내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것은 논의를 조기에 종결시키거나 논의를 밖으로 갖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논의를 조기에 종결시킨다는 것은 관계설정을 하지 않은 채 끝낸다는 의미이고, 바깥으로 갖고나간다는 것은 그 갈등을 대중적으로 확대한다는 뜻이지요. 통전 전술에서 이른바 “주도권을 장악하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독자성을 견지하라.”는 원칙이 있는데, 이것은 자칫 잘못 해석될 수 있는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부연하시겠습니까? 이를테면 가장 ‘과학적’인 등산 코스가 이론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 ‘과학적’이란 용어에 담긴 교조성입니다. 오늘 등산의 목적과 성격이라든가, 함께 산을 오르는 일행의 성별, 연령, 체력 등에 따라 그 과학성이 얼마든지 재규정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좀 부드러운 얘기로, 대학 시절의 로맨스가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범위 내에서 한번 공개하십시요. 징역사는 동안 연애라도 했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한 적도 없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진전될 수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함께 옥살이하는 사람 가운데는 젊은 아내를 바깥에 둔 사람도 있고, 약혼녀나 애인이 접견오고 편지 보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러울 때도 있었습니다만, 막상 그 사람들이 애태우는 심정은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럴 상대가 없어서 서운하기는 해도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도 그렇고 선후배들도 어쩐 일인지 저한테 애인이 있는 것으로 지레짐작들을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학교의 유씨 아저씨와 가끔 극장구경을 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애인과 함께 구경 온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극장에 갈 때면 으레 또 누구 아는 학생이 오지 않았나 하고 목을 뽑고 두리번거리며 찾아내는 버릇이 생겼는데, 정작 발각(?)된 학생들은 매우 부끄러워하고 어색해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걸 보고, 저렇게 부끄럽고 어색한 일을 내가 쉽사리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이왕 내친 김에 선생님의 여성관을 한번 들려주시지요. 계수로 표현하는 것이 무리이긴 합니다만 저는 ‘여성관’이라고 할 때, 물론 ‘남성관’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관’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10%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90%는 남성과 여성에 공통되는 인격 일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조시대에는 물론 그 비율이 지금과는 달랐겠지요. 이 10%에 대한‘관’이 흡사 전체에 대한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편의상 10%라고 밝혀두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관이라고 할 때 지금까지는 그 바탕에 전근대적 사회관, 전통적 여성관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제되어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여성관을 펴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90년대의 소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전통적 가치기준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남아선호 경향만 하더라도 지금은 전혀 다른 동기에서 추구됩니다. 여아에 비하여 남아가 이윤율이 높은 투자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미라고 할 경우 물론 그것이 전인격의 10%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것의 실체가 사용가치와 미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와 미의 결합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교환가치와 미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를 규정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남성보다는 여성의 경우에 더 신속하고, 나이 많은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의 경우가 더 신속합니다.
― 아주 재미있고 중요한 지적입니다. 사회변혁을 소위 이미지의 변화로써 대체해버리는, 그래서 사회의 모순을 은폐해 가는 상품생산사회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노동력의 경우는 남자 쪽의 상품화률이 높지만, 인격적인 면에서는 여자 쪽의 상품화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상이 인격을 대체하지요. 이야기의 방향이 질문의 의도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물신성, 상품성에 대한 비판이 여성관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대학원에 진학한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대학 시절의 얘기는 이쯤으로 끝내고, 다시 딱딱한 얘기로 돌리겠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한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대학원 진학은 제게 상당히 중요한 기로였습니다. 저의 동기들은 현재 대개 기업, 은행, 관공서 등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습니다. 졸업 후 사회에 나간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대체로 그러한 코스를 밟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길을 걷게 되면 아무래도 양심의 문제에 걸릴 것 같았어요.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 물론 국민학교 시절의 자의식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처지였습니다. 역전된 처지는 제게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나 자신이 살아가야 할 진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에서의 위치 설정에 대하여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의 또 한 가지의 이유는 읽고 싶은 책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청년학생운동과 기층민중운동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는데, 그 논의에 대한 나 자신의 결론에 의하더라도 학교에 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원 재학 시절에는 주로 어떤 공부를 어떻게 했습니까? 경제사, 이론경제, 경제정책의 순서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책은 주로 선생님들한테서 갖다 보았습니다만 학교도서관의 서고에 있는 마르크스-레닌 전집류와 고려대학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장서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석사학위 논문으로는 어떤 주제를 잡았습니까? 제목은『봉건제 사회의 해체에 관한 연구』입니다만,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을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딸려 있습니다. 처음에는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에 관한 연구 : 봉건제 사회의 해체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제출했습니다만, 지도교수인 최문환 학장이 난색을 표해서 제목도 바꾸고, 내용도 일부 삭제하고, 주(註)도 다시 정리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도교수도 박희범 교수로 바뀌었습니다. 주를 다시 정리한 것은 제가 간접 인용한 부분도 있고, 당시로서는 출처를 표시하기가 곤란한 책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봉건제는 분석하지 못하고 서양경제사를 중심으로 주로 스위지, 돕, 다카하시, 스즈끼 등의 연구논문들을 기초로 하여 봉건제의 해체과정을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할 때, 그 논문이 함축하는 결론 가운데 혹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적용되거나 접맥될 만한 부분이 있습니까? 별로 없을 듯합니다. 이건 본문과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잘 아다시피 소위 사회성격 논쟁에서 주된 시각이 ‘자본의 성격’에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물론 자본의 성격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이나 봉건제 사회의 성격과 그 해체과정이 유럽과 판이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노동력이라는 관점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성격,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이라는 시각은 자본주의를 역사적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분석이 경제주의에 빠지는 것도 막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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