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내게는 많은 별명들이 있다.
어렸을 적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별명들을 열거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순동이' '책벌레' '존슨 대통령' '채플린' '거지(巨知)' '피상(皮箱)' '밀대' '리박사' '각설이' '
초허자(超虛子)' '주선사(酒仙師)' '마음의 산책' '사색려행(思索旅行)' '갈대의 스침' '수을선생(水乙先生)' 등이다.
이 밖에도 듣기 안 좋은 별명들이 몇 개 더 있지만 여기서는 적지 않기로 한다.
내게도 약간의 사적(私的)인 생활의 비밀이 있으니까.
그럼 내가 최초로 얻은 별명부터 나의 별명에 대한 리유(理由)들을 잠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첫 번 째 별명 '순동이'. 진서(眞書:참 글)로 쓰면 '順童伊'다.
얼마나 順하였으면 사람들이 '순동이'라 했을까?
조금은 부끄러운 우리 집 안의 얘기지만 우리 어머니는 몰락한 우리 집안의 실질적인 장남(長男)인 아버지의 두 번 째
부인으로 개가(改家)하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주벽과 노름 탓이었는지 어머닌 내가 세 살이 되던 해 봄 집을 나가셨다.
나가실 때의 풍경을 당시 주변 사람들의 얘기로 옮기자면 이렇다.
그 날도 아버진 동네 사랑방에서 노름에 열중이셨고 이를 참지 못한 어머니는 두 번 째 부인(첩살이)이라는 사실이
싫어 새벽녘에 잠 자는 나의 머리 맡에 꽈베기 세 개를 놓아 두고 집을 나가셨는데 아침에 잠에서 깬 나는 그 어린
나이임에도 꽈베기를 먹으며 혼자서 잘 놀았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진 내가 일곱 살이었던 가을 새 어머닐 얻으셨는데 그 분은 내게 참 잘 해 주셨다.
거의 매일 용돈을 주셨다. 그러나 나는 나이 열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 갔다.
그 것도 1 개월 정도 다녔을 뿐 더 이상 학업을 할 수 없었다.
당시 행상을 하셨던 새 어머니 대신 집안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밥하기, 나무하기, 집 지키기, 어린 동생들 돌보기 등...
아래 이야기는 그 시절 내가 겪었던 이야기다.
'§참새밭-재잘재잚§' 방 '286' 번 글이다.
정말 나는 '순동이'였을까? 아님 조금은 '멍청이'였을까?
★ §참새밭-재잘재잚§ '286'번 글에서
'水乙'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두 가지 일을 한 꺼번에 하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水乙에게 말했다.
.
"얘야, 이웃집아주머니와 함께 냇가로 빨래하러 간다.요즘 좀도둑이 많이 다니니 문을 잘
지켜야 한다."
'水乙'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문을 지켰다. 이때 옆 동네에 사는 외삼촌이 왔다.
"얘, '水乙'아! 저녁에 외삼촌이 다시 올테니 엄마에게 말씀드려라."
외삼촌이 돌아간 잠시 후 '水乙'은 문을 잘 지키라는 어머니 말씀도 잘 듣고 어떻게 해야 외삼촌
부탁도 어머니께 잘 전할 수 있겠는가를 궁리해 보았다. '水乙'은 생각다 못해 집 문을 뜯어 등에
들러메고 냇가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水乙'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얘야, 너 이게 어찌된 일이냐?"
'水乙'은 숨을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엄마가 나보고 문을 잘 지키라고 하셨는데 외삼촌이 또 나한테 엄마한테 저녁에 온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하니...,두 가지 일을 동시에 다 들으려면 이렇게 하는 수 밖에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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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째 나의 별명은 '책벌레'인데 그것이 사실은 지금 읽고있는 량서(良書)가 아니라 당시엔 별로
내 수준(초등학교 1 개월 밖에 다니지 못해서)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없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란
만화 책 밖에 없었다. 새 어머니께선 용돈을 자주 주셨는데 다른 아이들 처럼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용돈을 받으면 곧장 가게로 가서 만화책을 사들고 오곤 했다. 그렇게 하여 모은 만화책들은 나의 집
방에 2,3 년 사이 수 백 권이 되었다. 동네 친구들은 밖에서 뛰어 놀다가 재미가 없어지면 줄곧 우리 집으로
들려 만화를 보고 참 재미있어 했다.
세 번 째 별명은 '존슨 대통령'인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 일 것이다.
1961년 부터 미국의 제 35 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오스왈드'에 의해 저격되어
살해되자 당시 부통령으로 러닝 메이트였던 '존슨(Johnson. Lyndon Baines 재임 1963~1969)'이 대통령
으로 승계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이름 '존승'과 발음이 비슷하다 하여 주변의 친구들이 붙혀준 벌명이다.
당시 미국의 정치를 잘 몰랐던 나로선 미국의 대통령 이름으로 별명을 갖는다는 게 썩 그리 싫지 않았으나
지금 와서 '존슨'의 행적을 알고나선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
그 때가 아마 내가 '백석 초등학교'로 전학 아닌 입교(入校)했을 때의 일일 것이다.
1966년 까지도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밥하기, 땔 나무하기, 동생들 돌보기 등의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나의 생모는 날 외가(外家)가 있었던 '김제군 백산면 하정리 학당부락' 불러 들였고
나는 그 곳에서 초등학교 5~6학년(1967,4~1968,1968,12) 시절을 지내며 잠시 동안의 추억을 만들었다.
아마 '존슨' 대통령의 림기(臨期) 마감과 함께 말이다.
내가 순 번을 정한 나의 별명 중 네 번 째가 '채플린'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
나의 유년(幼年)의 시절은 지극히 '순동이' 시절이다.
중학교 시절 평범하지만 착실히 책과의 대화를 나누었고 같이 다녔던 교내의 도서관에서 '김 완식'친구를
자주 보곤 했다. 나 역시 그 친구에게 선뜻 다가 갈 수 없지만 도서관에서 난 그 친구의 책 읽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아마도 그것은 당시 열차로 통학하던 우리들에게 열차 시간을 기다리던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 여유가 없어서 너무나 여유로웠던 시절. 그 시절로 다시 갈 수는 없을까?
여하튼 나의 네 번 째 별명인 '채플린'으로 돌아가자.
1972년 드디어 나는 입경(入京)했다. 아니 상경(上京)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좋다. 초라한 학교도 아니고 울적한 나만의 세계를 지녔던 유년의 암울한 것은 찾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활기 찼었다.
고교에 입학한지 며칠이 되지 않아 '개교 20주년' 행사로 연극공연을 캐스팅을 한댄다.
평소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즉각 참여를 했고 수 십대(?)의 경쟁률을 뚫고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
으로 출연 교내의 힛터가 되었다.
가을, 전국 '고교 연극공연 경시대'회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나는 연극으로 나의 인생 종점으로 잡고 일로 매진.
연극을 말렸던 나의 어머니와 숨바꼭질. 결국 또 다시 찾아 온 어머니의 재가(再家). 나는 연극 판 속으로 뛰어
들고 친구들은 코미디 연기를 꿈꾸던 내게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jr. 1889년 4월 16일 - 1977년 12월
25일 '찰리 채플린'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 출신의 미국 코미디언이다)'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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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재가로 난 갈 곳을 잃고 친구의 자취방을 전전하는 '알 거지(巨知)'가 되었다.
할 수없이 내가 틈틈이 써 두었던 詩 30 여 편을 모아 서울 종로 모 백화점에서 그림에 솜씨있는 친구들과
함께 시화전을 열어 그 시화(詩畵)들을 팔아 '알 거지' 신세를 면하고 고교시절을 면 할 수 있었으나 1년간의
그 시절, 나는 젓가락 한 벌로 점심 시간에 친구들의 도시락을 구걸하는 '거지(巨知)' 신세였다.
그래서 붙혀진 별명이 '거지(巨知)'이기도 하지만, 그 뜻 속에는 크게 알고 있는 놈이라고 내게 별명을 지어 준
친구는 지금도 말하고 있다. 지금도 어쩌면 난 '알 거지'인 줄 모르겠다.
피상(皮箱:가죽 상자)?
'피골상접(皮骨相接)'이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가죽과 뼈가 맞 붙어 있다는 뜻으로 매우 깡말라 비틀어진 나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 일 것이다.
1974년 가을 이 후로 나는 너무 말라서 가까운 친구가 부쳐준 별명이다.
그러나 몸이 말라서 지어 준 별명이라기 보다는 내가 文學 속에서 사랑했던 20세기 최고의 '모더니스트'
'리상(李箱)'과 나를 비교하여 지어 준 친구의 별명이다.
그(李箱)의 괴퍅하고 불우했던 생애와 나의 어려웠던 시절들이 어우러져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게 안겨줬던 별명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지금 잘 나간다.
서울의 모 대학교 '응용 미술학과' 교수니 말이다. 역시 내가 고교시절 '巨知'였을 때, 내 詩에 그림을 보태 나를
도와 준 친구다. 항상 그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만 난 그를 바라 볼 때 마다 그가 '巨知' 같아 보인다.
그 친구는 모든 가족을 해외(海外)에 두고 있는 '기러기' 녀석이니까.
어느 친구가 내게 "어이! '밀대'!" 라고 부른다.
나는 금새 알아차리고 얼른, 날 부른 그 친구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그런데 '밀대'가 뭘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뜻인지 몰라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으나 나와 있지 않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마도 '멀대 같다'는 말을 잘 못 알고 쓰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다. 난 참 '멀대(장대처럼 멀쑥하게 크기만 하고 싱거운 상태)'다.
그래서 부쳐진 별명 같다. 위 글에서 보았지만 난 너무 굶어서 창자(腸)가 오그라졌나 보다.
다른 사람들 량(量)의 반 쯤도 못 되는 음식을 먹고도 식사를 그만 두는 게 허다하다.
그러니 자연히 살이 찌지 않을 수 밖에.
그러나 자세히 새겨보니 '밀대'란 말은 우리의 순수한 말 '밀'의 기둥 혹은 가지를 뜻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어렸을 적 '胡麥(호밀)'. 키는 크지만 가느다랗던 그 줄기들. 세 찬 바람 속에서도 그냥 쓰러지지 않았던
'호밀 대'들, 어쩌면 '갈대'를 연상케 한다.
그래 나는 '밀대'다. 생각하는... 멀대... ㅎㅎㅎ...
'각설이(却設-)' 또 다른 나의 별명이다. 옛날 장을 따라 다니며 흥을 돋구던 장타령꾼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즉 거지들 혹은 장사치들이 생계의 수단으로 동냥 혹은 장사를 위하여 장에 온 손님들에게 흥을 돋구어 주고 거지들의 동냥이나
장사치들의 물건을 팔기 위한 하나의 상술 행위를 하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내가 '노가다' 막일꾼으로 들어선지가 벌써 23 년 째다. 평소 굿거리패나 연희패 그리고 연극관람을 좋아했던 나는 그들의 삶 속
에서 인간이란 어쩌면 본시 크고 작은 빈 걸통과 사랑만을 갖고 태어났을뿐 그 외 아무런 것도 없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난 거지들이 부르는 각설이 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열심히... 아침 공사현장에서 일을 시작하긴 전에 한 곡,
쉬는 시간에 한 곡, 점심 시간이 끝나고 오후 일 시작 전에 또 한 곡, 그리고 또 쉬는 시간에 한 곡, 마지막 일 끝내고 한 곡 등.
그래서 공사현장 동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부쳐진 별명이다.
아래는 내가 공사판에서 자주 불렀던 '팔도 장타령'이다. 재미삼아 여기 실어봤다.
*八道 場打令 (팔도 장타령)
떠르르르...르르르 돌아왔소
팔도 강산을 돌아왔소
반 만년의 긴 세월을 똘똘 몰아서 장타령
전라도라 진도장은 아리랑 서리랑에 돌아들고
파랑새 우는 정읍장은 사연이 서러워서 못 간다
(전라도라 남원장은 춘향이 그리워 돌아들고
눈물 많은 광주장 사연이 서러워 못 간다)
후렴: 품바바 품바바 바리밥바
에헤라~ 품바가 잘도 논다
충청도라 논산장은 계백의 충정에 돌아들고
능수버들 천안장은 삼거리 리별에 못 간다
경기도라 이천장은 진상미 맛 보러 돌아들고
얼쑤 좋다 양주장 말뚝이 못 사궈 못 간다
경상도라 경주장은 불국사 못 잊어 돌아들고
애절쿠나 밀양장 아랑의 설움에 못 간다
황해도라 봉산장은 봉산 탈춤에 돌아들고
경계좋은 해주장 나래가 없어서 못 간다
평안도라 영변장은 약산 진달래로 돌아들고
유서 깊은 평양장 길이 막혀서 못 간다
함경도라 온성장 세종이 그리워 돌아들고
눈물 많은 흥남장 파도가 높아서 못 간다
강원도라 강릉장 경포대 못 잊어 돌아들고
아리아리아리 정선장 가락이 구슬퍼 못 간다
제주라 제주장은 삼별초 정신에 돌아들고
욱일승천 성산장 눈이 부셔서 못 간다.
부르다 보니까 '팔도 장타령'이 아니라 '구도(九道) 장타령'이 돼버렸네.
에라~이 모르겄다 인심 좋은 대한민국 '각설이' 제주장은 덤으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