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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계몽>
-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2021)
1부 계몽
- “우리는 왜 살아야 하죠?”
- 신념의 이유 찾기,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알아내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성에 호소하는 것. 활짝 피어날 잠재력. 자연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감상. 공감으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도와주고 친절을 베푸는 능력을 주고받을 수 있음. 타인을 동정하고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일에 우리의 재능을 쓸 때 우리는 진보.
- 80년 이상 수명, 식량이 넘쳐흐르는 시장, 손가락 까닥거리면 나오는 정수와 또 한 번 까닥거리면 사라지는 오수, 고통스러운 감염병을 치료 알약,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는 아들, 안전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딸, 권력자를 비판하고도 감방에 가거나 총을 맞지 않는 평론가, 휴대하면서 쓸 수 있는 세계의 지식과 문화. 이 모든 것은 우주적 생득권이 아니라 인간이 이룬 업적이다.
- 경제학자 하이에크, “오래된 진리가 인간의 마음에 붙박여 있으려면 후세들의 언어와 개념으로 새롭게 진술되어 한다.” 나는 이 책에서 21세기의 언어와 개념으로 계몽주의의 이념을 지금 다시 기술하고자 한다.
1장 감히 알려고 하라!
- 계몽이란 무엇인가? 1784년 에세이 칸트 왈. 계몽은 인류가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나 종교적 권위나 정치적 권위의 도그마와 인습에 나태하고 소심하게 복종하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 계몽주의의 모토는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이며, 여기에 기본적 필요한 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이다. (호라티우스 시 :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용기를 가져라)
-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공식적 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4가지 주제. 이성, 과학, 휴머니즘, 진보.
- 이성은 비타협적이다. 논쟁(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서 당신의 답변이 이성적이거나 정당하거나 참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 당신은 이성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이고 당신의 믿음을 객관적 기준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계몽 사상가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성이라는 기준만을 적용했을 뿐, 신앙, 도그마, 계시, 권위, 카리스마, 신비, 점, 환상, 직감, 신성한 문헌 해석 같은 망상의 원천에 기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이성을 승인하는 계몽주의의 태도와 인간이 완벽하게 합리적인 행위자라는 황당한 주장은 분명 다르지만, 오늘날 많은 저술가가 이 둘을 혼동한다. 칸트, 스피노자, 토머스 홉스,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같은 사상가들은 탐구심이 강한 심리학자로 우리의 불합리한 감정과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불합리성을 극복하길 바란다면 어리석음의 원천을 경계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성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은 필수였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 습관이 그다지 이성적이기 않기 때문이다.
- 과학혁명은 그 발견들이 우리에게 제2의 본성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지금에도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만큼 혁명적이었다. 과학혁명은 무지로부터의 탈출만이 아니라 공포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했다. 무지와 미신에서 탈출한 계몽 사상가들은 우리의 통념이 얼마나 심하게 오류에 빠질 수 있는지, 과학적 방법 - 회의주의, 가류주의, 열린 토론, 경험적 검증 - 이 믿을 만한 지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패러다임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 휴머니즘. 이성의 시대와 계몽의 시대의 사상가들은 도덕의 세속적 토대를 확립하는 게 시급하다고 보았다. 사상가들은 우리가 현재 휴머니즘이라 부르는 것으로 계몽주의의 기초를 다졌다. 휴머니즘은 부족, 인종, 국가, 종교의 영광이 아닌 남자와 여자, 아이 개개인의 안녕과 복리에 특권을 부여한다. 쾌감과 통증, 만족과 고통을 느끼는 지각 있는 존재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다. 기본 틀이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이라는 목표로 주어지든,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취급하라는 정언 명령으로 주어지든 간에,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진 기뻐하고 괴로워할 줄 아는 능력이 우리의 도덕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인간 본성이 공감이라는 정서를 타고 났기 때문에, 계몽 사상가들은 그것을 박애, 연민, 동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공감 확대를 통해 우리는 세계주의를 받아들여 우리가 세계 시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진보. 노예제와 잔인한 형벌의 폐지가 진보가 아니라면 어떤 것도 진보일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두텁게 하고 이성과 세계주의가 공감의 범위를 넓혀 준 덕분에 인류는 지적, 도덕적으로 진보할 수 있었다.
- 계몽주의적 진보 이념을 기술 관료와 사회 설계자의 편의에 따라 사회를 개조하려는 20세기의 운동, 즉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이 권위주의적 하이 모더니즘이라고 부른 운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운동은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거기에 딸린 아름다움, 자연, 전통, 사회적 친밀감 같은 것과 관련된 번잡한 요구를 부정했다. 깨끗한 식탁보로 시작해서 모더니스트들은 활력이 넘치는 동네를 자동차 전용도로, 고층 건물, 휑한 광장, 브루탈리즘 건축으로 대체하는 도시 재생 사업을 설계했다. 이런 식의 개발은 가끔 진보라는 말과 연결되기도 했지만 이 용법은 반어적이었다. 휴머니즘에 기초하지 않은 ‘진보’는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 진보를 향한 계몽주의의 바람은 인간 본성의 개조가 아니라 인간의 제도를 다시 빚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 이 사고방식에서 정부는 신이 부여한 통치권을 가진 존재도 아니고 사회의 동의어도 아니며 민족, 종교, 인종의 정신이 구현된 신비한 몸통도 아니다. 정부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회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의 발명품으로, 시민들의 행동을 조율하고 또 모든 개인이 하고 싶어 하지만 모든 사람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는 이기적인 행동들을 저지해서 시민의 복리를 증진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 정부의 권한 중에는 형벌을 주는 권한이 있다. 몽테스키외, 체사레 베카리아, 미국의 건국자들 같은 저술가들은 시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정부에 권한에 관해 새로운 생각을 제시했다. 정부가 가진 형사처벌의 권한은 우주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위임된 권리가 아니라, 필요 이상의 고통을 주지 않고서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하기 위한 동기 부여 시스템의 일부라고 말이다.
- 계몽주의 또 다른 이념, 평화와 번영. 인간 역사는 전쟁으로 가득해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전쟁을 인간 조건의 영속적 부분으로 보고 평화를 메시아 시대에나 누릴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참고 견디면서 한탄만 해야 하는 신의 형벌이나, 어떻게든 승리하고 축하해야 할 영광스러운 시련이 아니라, 줄이고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로 본다. <영구 평화론>에서 칸트는 지도자들이 자기 나라를 전쟁으로 끌고 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했다. 칸트는 국제적인 자유 교역과 함께 대의 공화 체제, 상호 투명성, 정복과 내정 간섭을 막는 규범, 여행과 이민의 자유, 국가 간의 분쟁을 해결할 연맹체를 꼽았다.
- 우리가 이성을 찬양한다면 중요한 것은 사상가들의 개성이 아니라 그 사이의 정합성이다. 또한 우리가 진보에 종사한다고 하면, 진보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남김없이 알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2장 엔트로피, 진화, 정보
- 인간 조건을 이해할 수 있는 첫 번째 초석은 엔트로피 혹은 무질서도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19세기 물리학에서 출현, 볼츠만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의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고립된 계(Isolated System : 주변환경과 상호작용 하지 않는 계) 안에서 엔트로피는 절대 감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닫힌계(Closed System: 물질 교환불가, 에너지 교환 가능. ex. 밀폐된 물통)는 그 구조와 질서가 불가역적으로 흐트러지고, 흥미롭고 유용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가능성도 줄어들고, 결국 창백하고 미지근하고 지루한 균질의 평형 상태에 도달해 거기 머무르게 된다.
- 과학자들은 열역학 제2법칙이 일상생활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주와 그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원리인 것이다.
- 얼핏 엔트로피 법칙은 실망스러운 역사와 암울한 미래만 허락하는 듯 보이지만, 아직 우주는 수많은 은하, 행성, 산, 구름, 눈송이, 울긋불긋한 동식물상으로 활기가 넘친다. 우주에 그렇게 흥미로운 물질이 많은 이유는 제한된 구역들 안에서 질서를 출현시키는 자기 조직화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 도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일리아 프리고진, 이사벨 스텐저스(자유아카데미, 2011)) 어떤 계에 에너지가 쏟아져 들어오면 계는 그 에너지를 안에 흩뜨리면서 엔트로피 (증가) 감소 쪽으로 서서히 미끌어진다. 그때 계는 원, 나선, 방사상 폭발, 소용돌이, 물결, 결정 혹은 프랙털같이 질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 창조론자들은 대개 열역학 제2법칙을 갖고 생물학적 진화, 즉 시간에 따른 질서 증가는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법칙에서 창조론자들이 빼먹은 부분은 ‘닫힌 계 안에서’라는 핵심 조건이다. 유기체는 열린 계이다. 태양, 음식, 해저 열수공 등으로부터 에너지를 포획해서 몸 안에서 일시적인 질서를 빚고 동시에 열과 폐기물을 환경에다 내버려서 세계 전체의 무질서를 증가시킨다.
- 세 번째 초석인 정보. 정보란 수없이 많은 쓸모없는 무작위적 계로부터 질서와 조직을 갖춘 계를 구분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패턴에 어떤 정보가 담겨 있는지는 세계를 보는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조잡한지 혹은 얼마나 정교하고 세밀한지에 달려 있다. 우주가 무작위적이지 않고 질서 정연하다는 말은 우주에 이런 의미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기본 요소로 물질, 에너지, 정보라고 생각한다. (참고 도서 :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 (승산, 2007년), <아인슈타인의 베일 -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세계> 안톤 차일링거 (승산, 2007년), <인포메이션> 제임스 글릭 (동아시아, 2017))
- [참고] 엔트로피 개념에 대한 볼츠만의 해석(S=klogW).(S는 엔트로피, k는 볼츠만 상수 10의-23제곱, W는 계의 ‘알려진’ 성질들을 변화시키지 않는 배열들의 수) 여기서 바로 W의 의미에서 추론되는 엔트로피는 계의 절대적인 성질이 아니라 관찰자가 가진 정보력, 관찰력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요소를 갖는다는 것.
- 세 개념(엔트로피, 진화, 정보)이 일러주는 지혜는 불행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혁명이 이룬 약진 중 하나는 우주는 목적으로 충만하다는 직관을 논박한 것. 원시적인 관점에 따르면 모든 것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고, 따라서 나쁜 일(사고, 질병, 기근, 가난)이 일어나면 어느 행위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생각 때문에 한 개인을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를 처벌하거나 재산을 쥐어짜서 피해를 보상하려고 한다. 만일 누구도 지목할 수가 없으며, 근처에 있는 종족적, 종교적 소수자 탓으로 돌려서 린치를 가하거나 학살을 자행한다.
- 사람에게는 당연히 목표가 있지만, 그런 목표를 자연의 작용으로 투사하는 것은 착각이다. 진화에 대한 이해는 우주가 인간에 무관심하다는 깨달음을 한층 더 깊게 해 주었다. (cf. 이해력 없는 능력 vs 이해력 있는 능력 at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다시 박테리아로>)
3장 반계몽
- 누가 이성, 과학, 휴머니즘, 진보에 반대할 수 있을까? 달콤하고,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 다시 이 이념들을 옹호할 필요가 있을까?
- 분명히 있다. 1960년대부터 근대적인 제도에 대한 믿음이 침몰하더니, 2010년대에는 계몽주의의 이상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대중 운동이 출현했다. 이 운동들은 세계주의가 아니라 부족주의를 내걸고,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칭송하며, 지식을 존중하기보다는 전문가를 경멸하고, 더 나은 미래를 바라기보다는 목가적인 과거를 그리워한다. 이들의 경멸은 민중들 사이에서 싹터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문화 속에 오랜 계보를 갖고 있다.
- 낭만주의 운동은 계몽주의의 이상에 특히 강하게 저항했다. 루소, 셸링 등은 이성은 감정과 분리될 수 있고, 개인을 문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제시해야 하고,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적용되는 가치가 있으며, 평화와 번영은 바람직한 목표라는 점들을 부정했다. 개인은 유기체 전체(문화, 인종, 국가, 종교, 성신 혹은 역사의 힘)의 일부분이고,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통일체를 초월적 조화로 이끌기 위해 창조적으로 길을 터야 한다. 문제 해결이 아니라 영웅적 투쟁이 최고선이며, 폭력은 자연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억누르면 삶은 활력을 잃고 만다.
- 21세기에도 이 반계몽주의 이념은 엘리트 문화와 지식인들 사이에 의외로 넓게 퍼져 있다. 번영을 확대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집단 이성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둔하고 순진하고 고리타분하다는 취급을 당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종교적 신앙, 민족주의, 낭만적 녹색운동, 쇠퇴주의(i.우리가 프로메테우스처럼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과학기술에 손을 댔다고 한탄 ii. 안락하고 속물적 삶은 맥빠진 휴머니즘이며 진실하고 영웅적이고 전일론적이고 생기 넘치는 권력에의 의지, 귀족적 폭력을 옹호하는 영웅주의).
2부 진보
4장 진보 공포증
- 진보를 싫어하는 지식인 독설. 지식이 문제 해결에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공약으로 그친 필연적 진보의 일방적 전진이라는 신화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유사 종교적 신앙을 품은 사람이 된다.
- 사회학자 니스벳은 서양의 진보에 관한 회의주의는 19세기에는 아주 적은 수의 지식인에게 국한되어 있었지만, 금세기의 마지막 4분기에는 대다수 지식인을 넘어 서양 수많은 일반인으로 퍼지고 확산.
- 비관주의가 옳은 것일까? 이 세계의 상태는 계속 아래로 침몰하고 있을까? 전쟁, 테러, 오염, 불평등, 약물 남용, 압제가 날마다 뉴스를 가득 채운다. 잡지의 표지들은 무정부 상태, 역병, 유행병, 붕괴, 수많은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는데, 카피라이터들은 강조의 수위를 높이다가 급기야 “심각한 위기”라는 제목을 붙인다.
- 저널리즘의 습성과 인지 편향이 서로 맞물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우리가 세계의 상태를 믿을 만하게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답은 숫자에 있다. 정량적 사고방식은 일견 촌스러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실은 도덕적이고 개화된 사고방식이다. 우리와 가장 가깝거나 가장 유명한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지 않고, 모든 인간의 생명을 동등한 가치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고, 그 후에는 어떤 수단이 고통을 줄이는데 가장 유용할지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것이 내가 2011년에 펴낸 <우리 본선의 선한 천사>의 목표였다.
- 그 책은 그래프와 지도 100개를 통해 폭력이 그것을 조장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감소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감소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원인으로 일어났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 과정들에 이름을 붙였다. (1) 평화화 과정: 부족의 약탈과 반목으로 인한 사망률 1/5로 감소시킨 유력한 국가의 영토지배 (2) 문명화 과정: 근대 초기 유럽에서 법률과 자제의 규범이 정착된 뒤에 살인과 폭력 범죄가 1/40로 감소 (3) 인도주의 혁명: 계몽주의 시대에 노예제, 종교적 박해, 잔인한 형벌이 폐지된 과정 (4) 긴 평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 간의 전쟁과 국가 간 전쟁이 감소한 것 (5) 새로운 평화: 냉전이 끝난 후 세계는 내전, 대량 학살, 독재가 줄어듬 (6) 권리 혁명: 1950년대 이래로 시민권, 여성 권리, 아동 권리,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 학계를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나가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감소를 뜻밖의 일로 여긴다. 나는 시간을 수평축으로, 사망자 수나 여타 폭력 지표를 수직축으로 해서,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떨어지는 그래프를 나열하면 독자들의 가용성 휴리스틱 편향을 치료하고 최소한 이 영역에서만큼은 세계가 진보해 왔다고 설득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질문과 반대를 접하면서, 진보 개념에 대한 거부감이 통계적 오류보다 더 깊은 곳에 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부딪힌 반대들은 데이터에 대한 회의를 드러냈을뿐더러, 인간 조건이 향상되어 왔을 가능성 자체에 대한 불신도 포함하고 있었다.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을 보고 나는 사람들이 진보에 대해 회의적이 되는 것은 가용성 휴리스틱 편향 때문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진보 공포증의 심리적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다.
가장 깊은 편향을 보여주는 것이 “악이 선보다 더 강하다”라는 슬로건(부정 편향). 심리학 문헌에 따르면, 사람들은 수익을 기대하기 보다는 손실을 더 많이 두려워하고, 칭찬을 듣고 기운이 나기보다는 비판에 더 괴로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