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 문단에서는 이슬람공포증에 대한 학술/이론적인 접근을 하며, 가치판단 없이 이슬람공포증을 서술한다. |
Islamophobia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는 이슬람 + 포보스(Phobos: 그리스어로 공포)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한국어로 풀이하면 '이슬람 공포증' 혹은 '이슬람 혐오증'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슬람 문화권과 무슬림, 혹은 이슬람 그 자체에 공포를 느끼거나 그 공포심이 발전하여 혐오감까지 느끼는 것까지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학술적으로 이슬람공포증(이슬라모포비아)이 정확히 무엇인가, 인종차별, 반이슬람, 반무슬림, 반아랍인 등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단순한 인종주의에 불과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존재하며, 9.11 테러,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등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응하여 나타나는 심리, 유럽에서는 자국의 무슬림 인구 증가에 따른 경계 심리라는 세 의견이 가장 강세이다. 그 밖에 프레드 할리데이는 무슬림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를 포괄적으로 "반무슬림주의(Anti-Muslimism)"로, 롤랜드 임호프와 줄리아 레커는 편견과 정당한 비판을 구분하고자 "이슬람 편견(Islamoprejudice)"으로 명명하는 게 적합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또한 반이슬람적 성향이 있는 유럽과 북미에서 전국으로 이슬람 포비아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는 가운데, 실제 이슬람공포증은 비이슬람국가의 정상인들의 의미 없는 행동을 이슬람의 무슬림들이 음탕한 말과 행동 그리고 반종교적인 행동이라고 착각하며 극심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극히 보통 인간과는 다른 성향의 사상과 행동에 대해 정상인들이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거부감과 혐오감을 이슬람에 느끼는 것과 이슬람에 대한 불통과 여러 가지 국제 사건에 어울려 이슬람 공포증으로 굳어진다는 주장이 있다.[1]
일례로 1996년 러니메이드 트러스트는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시각을 '개방적 관점'과 '폐쇄적 관점'으로 구분하여, 이 중 폐쇄적 관점을 이슬라모포비아로 정의하였다.[2] 요약하자면 미디어나 일상적 대화로부터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생성되고, 고용, 의료, 교육 등 사회 서비스 제공에 있어 무슬림을 차별하고 배제하며, 나아가 물리적 또는 언어적 폭력에 이르는 전반적 과정 모두가 이슬람공포증에 해당한다.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원리주의자들과 달리 이슬람 종교법에 바탕한 국가나 사회에 이념적으로 열성적이지 않고,[3] 법 체계상으로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샤리아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적용하지 않는다.[4] 하지만 무슬림들이 샤리아를 정의로운 것으로 여기는 성향은 존재한다. # 일단 이성적인 측에서는 "만들어진 시대를 감안하고 취지를 생각하면 정의로운 것이지만 현대사회에는 맞지 않는 옛법"으로 인식하고 비이성적인 측에서는 "무조건 따라야할 정의"로 인식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학술적으로는 이슬라모포비아는 근본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공포심과 더 나아가서는 혐오심이 정의이며, '단순한 포비아' 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차별 등의 행위'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 롤랜드 임호프와 줄리아 레커의 주장대로 쿠란의 교리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자들이나 샤리아를 개정할 수 있음에도 밀어붙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국가 무슬림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이슬라모포비아에 포함되지 않는다.
ECRI(유럽 인종주의 및 불관용 인권위원회)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비판을 제외한 나머지 이슬라모포비아를 그 형태 및 강도와 무관하게 반인권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유럽인권위에서도 2011년 ECRI의 2010년 연례보고를 인용, 유럽에서의 이슬라모포비아 증가 추세에 대해 경고하였다. 2015년 4월 21일 UN에서 개최한 관용과 화해를 위한 고위 주제 토론 개회 선언에서도 "반유대주의, 이슬라모포비아, 인종차별 등 모든 불관용의 형태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을 규탄해야 한다"고 경계했다.
2. 근대 이전의 이슬람공포증
이슬라모포비아라는 용어는 심리학의 발전과 민족주의의 대두 이후인 1918년에 생긴 것이지만, 개념 자체는 역사상에서 여러 가지 유례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이슬라모포비아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 "한 손엔 칼, 한 손엔 쿠란"인데, 이는 이슬람의 전파가 전쟁을 통한 정복 행위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속설이다. 즉, 이슬람 제국이 세력을 키울 때마다 유럽에서는 이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첫 유럽 진출은 우마이야 왕조 시대로, 771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현재 프랑스 남부 지역까지 쳐들어가 유럽을 위협했다. 농담이 아닌 것이, 만약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슬람군을 막지 못했다면 지금 유럽은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5] 1096년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어 1099년 일시적으로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이슬람으로부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듯 했으나, 살라딘이 이끄는 아이유브 왕조가 일어나 1187년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트 2세 하에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발칸반도 일대를 점령, 이후 오랜 시간 유럽과의 대치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슬람권은 정복 전쟁을 통한 세력 확장 과정에서 점령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학살이나 추방 대신 기존 거주민의 종교를 인정하되 차별을 두고 세금을 더 거두는 정책(이른바 '지즈야')을 취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1831년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1/3 가량이 그리스 정교회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이슬람과 인접한 유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유럽, 이베리아 반도 등 이슬람권과 상대적으로 많은 접촉이 있었던 지역에서는 전쟁의 위협은 있었어도 이슬람 자체에 대한 반발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무슬림 지배하 비무슬림이 병존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슬람과 타 종교의 병존 흔적은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레반트 지역 기독교 등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이슬람 해적들에게 습격당하던 중부 유럽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공포가 크게 자리잡았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만 해도 100만명 이상의 유럽인들이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노예로 끌려갔다. # 이슬람 해적들의 습격은 8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8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얼마나 많이 노예로 끌려갔을지 파악하기도 힘들다. 이슬람 해적의 주요 습격지는 남부 프랑스와 남이탈리아였는데, 동유럽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니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힘든 데다가, 동로마 제국 멸망 뒤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이베리아 반도는 오랜 기간 무어인이 지배했으므로 만만한 상대였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집중되었던 것. 프랑스는 중앙집권이 확립되지 않아 왕과 귀족 간의 다툼과 분쟁이 잦았고, 이탈리아는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힘이 없었다. 또한 16세기 후에는 해상 활동을 활발히 했던 영국인들도 많이 노예로 끌려갔다. 참고로 정말로 이슬람과 마주할 기회가 없었던 스칸디나비아 같은 북해 쪽의 유럽인들은 아예 20세기 이전까지 이슬람에 대해 관심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럼 독일은? 실제로 십자군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나라는 항상 프랑스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었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바르바리 해적이라면 치를 떨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 무렵 장편 서사시인 무훈시(chansons de geste)들이 일반인 사이에 유행하였는데, 일부애서는 이를 이슬람을 상대로 무기를 들도록 기독교도들을 독려하는 프로파간다로[6] 해석한다. 예루살렘 재함락 위기가 감돌던 1145년에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까지 유럽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발단이 단순히 비가톨릭을 배제하려는 중세 교회의 배타성과 기독교도들의 종교적 광기가 원인인 것으로 보던 이전 세대와 달리, 현재 학계는 십자군 전쟁이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배경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7] 예루살렘 성지의 수복은 십자군 원정에 순례의 성격을 더해주기 위해 추가된 것이었지, 십자군의 본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슬람의 공격으로 심각하게 수세에 몰린 동로마 제국의 원군 요청에 의한 응답이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동로마 제국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 지배되던 일반인들과는 달리 학자들은 이슬람권과 비무슬림권 모두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이슬람권에서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라는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인종을 불문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고, 중세 교회법과 스콜라 철학에서도 관용(tolerantia)에 대한 관심이 커서 이슬람권의 철학과 학문을 배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 결과 아바스 왕조에서 꽃을 피운 당대 최고 수준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각지에서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유입되었고, 이러한 학술적인 교류를 통한 상호 이해는 이후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의외로 근세 시절 개신교는 가톨릭과의 사이에 비하면 이슬람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편이었다. 교리 면에서 약간 비슷한 것도 있었고 오스만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도들을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마틴 루터도 오스만 제국에 대해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우상 숭배 금지 등에 대해서는 은근히 칭찬하기도 하며 교황보다는 쟤네들이 낫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독일은 지중해와 접하고 있지 않아서
3. 현대의 이슬람공포증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슬람권과 서방세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는데, 오스만 제국이 참여했던 동맹군이 패전함에 따라 영토의 대부분이 연합군에 편입되면서 서방세계가 무슬림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915년 맥마흔 선언에서 전후 아랍인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했으나, 1916년 사이크스 피코 협정으로 프랑스, 러시아와 중동을 분할 통치하기로 밀약하였고,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17년 밸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이를 현재 중동 문제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고,[8] "서구로부터의 독립과 이슬람 문화의 부흥"을 내세운 무슬림 형제단이 1928년 결성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나타났다.
다수의 무슬림들이 연합군 국민으로 유입되면서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등을 거쳐 근대화된 사고방식을 갖게 된 유럽인들과의 가치관 차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슬라모포비아"라는 어휘 자체도 이 무렵 발생하였으며, 문학,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아랍인에 대해 테러리스트(bomber), 졸부(billionaire), 윤락녀(belly dancer) 등 3B라는 부정적 이미지의 묘사가 시작되었다.[9]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들의 우경화 및 배타적 민족주의로 인해 이슬람권에서의 유럽 이민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전후 복원을 위해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였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아프리카 식민지를 독립시키며 해당 국가 출신 혼혈들의 이민을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식민지가 없었던 독일의 경우도 초청노동자라는 개념으로 터키, 폴란드, 이탈리아, 아시아계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유치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유럽으로의 이민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당시 유입된 문화는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지역사회에 흡수되고 융합되었다. 유럽에서의 이슬라모포비아는 이러한 이문화간 융합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 계층에서 주로 발생한다.
한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이 건국됨에 따라 중동 문제는 크게 악화되었으며, 그 외에도 중동의 각국은 미국과 소련이 서로 친미/친소 정권을 심으려 하는 정치적 영토 싸움 대상이 되었다.[10] 파키스탄에서는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 친소 성향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1977년 실각시키고 1979년 사형시켰다. 이로 인해 우파 이슬람 정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키스탄 인민당이 추진하던 세속주의, 사회적, 경제적 개혁은 무산되었고, 그 결과 현재 파키스탄은 악명 높은 이슬람 광신 국가에 거의 무정부 상태로 탈레반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친미 성향인 팔라비 왕조의 전제군주제를 탈피하려 노력한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자헤디 장군의 쿠데타 지원을 통해 실각시켰고, 이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팔라비에게 갖은 지원을 하였으나 결국 반미, 반서방 성향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하여 이슬람 신정 국가가 되었다. 특히 반미, 반서방 정책을 추구하자, 미국과 유럽은 이란에게 경제 제재를 날려 이란 경제가 그 전보다 더 악화되게 만들었다. 이란의 경제 제재는 2016년 이란이 핵포기를 하기로 합의하여 해제될 때까지 가해졌다. 경제 제재가 해제되었다 해도 군사 분야의 제재는 여전히 해제되지 않아 이란은 군사력 강화를 못하는 형편이다. 2017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새로운 경제 제재를 했다.
그 후로도 중동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자,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3,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 지원을 받은 사담 후세인은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된 후 쿠웨이트를 침공하였고, 결국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이 걸프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후세인 세력을 강력하게 공격하여 쿠웨이트에서 쫓아내었다. 이는 그간 미국의 각종 개입으로 말미암아 싹튼 반미 감정이 팽배했던 중동권의 입장에서 "이슬람에 대한 전쟁 선포"로 해석될 여지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중동권에는 미국을 상대할 힘이 없다 보니[11] 분노만 삭히다 결국 폭발하는데, 이로써 발생한 사건이 바로 9.11 테러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구체적인 실체가 없는 "테러"라는 개념을 적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의 이슬람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을 계속하였다. 미국과 비 이슬람권 친미 국가들에서의 이슬라모포비아는 유럽과 달리 전쟁 상대에 대한 적대감 및 잠재적 테러 집단에 대한 공포감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서방국의 "테러와의 전쟁" 일환으로 이슬람 국가의 침략에 대한 반발로 이슬람 극단주의가 부각되었다. 이들은 마드리드 열차 테러 참사,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많은 사상자를 발생하였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반이슬람 분위기가 고조되어 무슬림에 대한 무차별 폭행, 사회 참여 거부 및 탄압, 차별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다. 유럽 내 무슬림 비중이 적지 않고 사회 일각의 화해와 동반자의 관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에 대한 테러는 자행되었다. 2005년 프랑스 시 외곽에서는 경찰의 검문에 불응하여 도주하던 무슬림 청소년들이 변압기에 감전되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무슬림과 아프리카 저소득 계층에 대한 괄시를 받던 이들은 무슬림의 탄압을 금지라는 구호하에 시위, 폭동으로 번졌다.[12] 이후 프랑스 사회 내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고, 무슬림의 화해와 협력이라는 기조를 보였다. 물론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여전하며, 이슬람 무장 단체들과 광신도들의 테러 때문에 이게 더 심해지고 있어 프랑스 내의 골칫거리다.
2008년에 미국 금융 위기가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유럽 지역의 경제도 둔화되었고, 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경제가 붕괴 수준으로 넘어가면서 유로존 붕괴 위험이 높아지고,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실업률도 높아져갔다. 이에 저소득 직업군을 무슬림과 같은 제3국에서 유입된 민족이 차지하고 있고, 이들이 자국의 부를 유출시킨다는 편향된 논리가 퍼져 나왔다. 자국 경제의 회복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의 화살을 무슬림과 같은 취약 계층에게 돌린 것이다.[13] 더불어 무슬림=이슬람 극단주의자라는 논리로 혐오감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는 고스란히 무슬림에 대한 탄압으로 진행되었고, 탄압에 못 이겨 스스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되는 사람도 발생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14]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사건으로 인해 중동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리비아에 대한 서방 국가의 개입으로 개혁이 앞당겨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서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면서 중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기대도 하였다. 하지만 비이슬람권에서 무슬림에 대한 탄압과 혐오는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으로 남고 있다.
2014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의 칼리파 국가 수립 선포는 일개 이슬람 무장 단체의 행위를 전체 이슬람의 본질인 것인 양 매도하는 세력들에게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슬람 내부에서는 종파를 불문하고 이들을 반이슬람적이라고 규탄하고 있으나, 일부 석유 재벌들에 의한 물질적 지원이 있다는 의심이 제기되고 있다.[15] 이슬람권 내부적으로 이러한 반인도적인 행위를 지속적으로 견제하여 국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한편,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극우 세력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반발로 반대 시위가 커지고 있다. 이슬람공포증이 이슬람에 대한 피해망상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이슬람의 문화에 대한 부정의 근거 또한 고유 문화를 해치는 이유를 근거로 들고 있다. 테러와 여성억압과 이교도 참수는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다 해당 국가에서도 표현하다시피 해당 트렌드는 그릇된 시점에 그릇된 대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사실, 프랑스의 이슬람 이민자 반대를 주도하는 극우파의 대표격인 르 펜의 국민전선은 악시옹 프랑세즈로 대표되는 구 왕당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당연히 자유, 평등, 박애를 핵심으로 삼는 대혁명 이래 프랑스 공화국의 보편주의에 대한 반대를 기본에 깔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서방 쪽으로 무슬림 난민들이 유입되는 상황에 오히려 문제만 일으키는 건 기본이고 동화는커녕 오히려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16] 특히나 인구수가 대폭 증가하고 있는 상황인데, 대부분 선진국 인구수는 무슬림에 비해 매우 낮다는 점 때문에 자칫 무슬림이 인구수로 밀어붙여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바꾸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진다는 것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가 바로 하레디다. 실제로 하레디 인구수가 너무 불어나서 이스라엘 정부조차 못 건드리는 상태다. 민주주의 방식으로 상대하자니 오히려 친하레디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폭력 및 테러를 많이 일으키는 종교가 이슬람으로,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할 때 반대 시위가 나온 건 좋지만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고 아예 간접 테러를 일으키는 상태. 폭력과 테러를 많이 일으킨 건 최근 일이 아니다. 이러한 난폭한 수단들 때문에 이슬람공포증이 많이 생긴 건 물론 여러 국가의 언론들조차 무슬림의 폭력 및 테러에 대해 매우 비판한다는 점이다.[17] 결론적으로 대화로 해결하기는커녕 오로지 폭력과 테러로 해결하려는 모습 때문에 좋지 않은 시선을 늘 받고 있다.
3.1. 배경
이슬라모포비아는 일부 극단주의 무슬림들의 테러 등의 행패와[18] 그로 인한 비무슬림[19]의 피해의식에서 근원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슬람공포증인 사람들의 '포비아'적인 논리적 배경은 실질적인 이슬람에 대한 본인의 직접적인 자유 침해가 아니라[20]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9.11 테러, 2015년 11월 파리 테러 등의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는 테러 행위로 자신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다. 게다가 몇 몇 무슬림들은 이슬람 국가 외에서도 현대 민주주의, 인권 의식과는 한참 먼 샤리아 도입을 강요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확실히 미운 털 박힐만하다.[21]
상당수의 비무슬림들은 무슬림과의 화합과 공존을 요구하고 있으나, 특정 종교나 지역에 기반한 세력들이 이슬라모포비아를 조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월요시위"이다. 이들은 "독일의 유대 및 기독교·서방 문화의 보존을 원한다"라는 주장과 함께 동조자들을 규합해 세를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본인들은 애국이라고 표방하고 있으나 명백한 종교적 배타적인 이기심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 반면 기독교 사회당(CSU)의 메르켈 총리는 이러한 편협한 사회 불만 세력에 대하여 "독일을 찾는 모든 이들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피력하며 화합을 내세웠다. # 그러나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범죄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메르켈 총리의 화합은 날이 갈수록 빛을 잃고 있다.
이슬람공포증을 외치면서 테러리즘으로 일관하는 세력은 상당수가 종교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슬람만큼 신자들의 삶에 구속에 가까울 만큼 영향을 주는 종교가 없고 그에 따름 자살 테러나 강간, 명예살인 등 범죄들을 보면 이슬람포비아의 동인의 상당수가 종교적 논리이기에 극단적이므로 부정적이라는 서술은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1980년 이후 기독계를 비롯한 종교계의 정치세력화로 인해 본인들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1/3은 무교라고 대답하고 있고, 1990년대의 1/5에서 1/3으로 무교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 다만 미국에서 무교의 증가가 특정 종교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한 결과이고 그 중 하나를 예로 든다면 현대 사회가 산업화, 정보화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종교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슬라모포비아는 전세계적인 국제 정세 변화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 이슬람 자체의 종교적인 특징 내지는 문제점을 그 원인으로 보는 데에서 비롯된다. 거기에 2000년대 후반부터 세력을 키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행동이 미디어의 발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도 결정적이다. 더불어 서방 국가들의 경제에 이민족들의 세력화와 부의 증가를 견제에서 시작하여 증오로 변모하게 됨을 보인다.
이슬람에 대한 포비아의 주요 배경은 2차대전 이후, 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시아를 비롯한 제3국가들의 성장과 교류가 늘어나면서 상호간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지역에서 여러 인권신장운동[22]이 발생하면서 인식의 개선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으나, 상대적으로 중동 지역은 신정일치라는 특유의 문화로 개선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짐에 의해서 대립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신정일치의 문화는 중동의 발전을 막는 걸림돌이 되어 중동 지역은 어떤 지역보다 낙후되어 있어 오일머니 외엔 별 볼 일 없고 테러와 폭력, 광신이 난무하는 막장 동네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물론 중동의 막장스러운 현실을 보면 이게 틀린 것만은 아니다. 중동 외에도 다른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몰디브도 이슬람 극단주의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3.1.1. 국제정세 변화
냉전 시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중동의 각국은 미국과 소련이 서로 친미/친소 정권을 심으려 하는 정치적 영토 싸움 대상이 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 친소 성향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1977년 실각시키고 1979년 사형시켰다. 이로 인해 우파 이슬람 정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키스탄 인민당이 추진하던 사회적, 경제적 개혁은 무산되었고, 그 결과 현재 파키스탄은 거의 무정부 상태로 탈레반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친미 성향인 팔라비 왕조의 전제군주제를 탈피하려 노력한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를 자헤디 장군의 쿠데타 지원을 통해 실각시켰고, 이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팔라비에게 갖은 지원을 하였으나, 결국 반미 성향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하였다. 그 뒤 미국은 이란 견제를 위해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그 지원을 받은 사담 후세인은 이후 중동 정세를 크게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냉전 체제 종식
자유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진영 논리가 소련의 붕괴로 무의미해지면서 진영간의 벽이 허물어진 대신, 개별 국가 또는 지역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세계 정치 흐름이 변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발생하였고, 미국이 걸프 전쟁에 참전하면서 이를 "이슬람에 대한 전쟁 선포"로 해석한 이슬람 극단주의의 주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럽 내 이슬람권 노동자와 이민, 난민의 유입 증가
한편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전후 복원에 있어 남성 노동자의 필요로 인해 제3세계 국가의 노동 수입을 하였는데, 상당수가 동유럽/이슬람 사람들이었다. 이후 냉전 체제 종식으로 인해 구 소련의 제어에서 벗어난 동유럽 및 중동에서 서유럽으로 이민이 급증하였고, 중동 지역의 연이은 내전으로 이를 가속시켰다.[24] 이 과정에서 다수의 이민자들이 특정 지역에 밀집하여 거주하면서 이슬람 문화를 지역 사회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25] 이에 대해 기존 지역민들이 반발함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각국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이민자들에 의한 문제는 이슬람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민자들은 서로 모여 살기 때문에 게토가 형성되며, 선진국의 경우 이민자들은 기존 국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소득 수준을 가지기 때문에 빈민가 형태로 나타나 주변 지역과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1세대 이민자가 받아들여진 지 반 세기가 지난 현재 이민자 2세대, 3세대로 넘어감에 따라 초기 이민자의 소수 민족에서 뚜렷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는 미국, 한국 등 선진국에서는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문제로 각국은 이민법 개정 등을 통해 기존 국민과 이민자 사이의 갈등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시 이주한 노동자들은 본국에 비해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이유로 다소의 차별을 감내하였으나, 2세/3세의 경우 비교 대상이 부모의 모국에 살고 있는 또래가 아닌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또래이기 때문에 민족간 소득 격차와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절감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권 소수민족 젊은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취하는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1990년 이후 냉전 체제 종식과, 이슬람권에서는 국지전 및 내전으로 인한 난민 발생으로 인해 다시 유럽으로의 이민이 증가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난민 외에도 이슬람권의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발생하는 빈부격차, 빈곤, 실업으로 인해 유럽으로 이주하는 이민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동, 아프리카, 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의 이주자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일상적 만행과 각종 테러의 위협이 이러한 이슬람 이민자 및 2세/3세들을 서방세계에서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국가들과 사회가 다른 종교들과 달리 이런 극단주의자들을 통제를 못하고 아예 지지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보니 서방세계와 비이슬람권 국가들은 갈수록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적대가 커지고 있다.
3.1.2. 이슬람 문화적 특징
사실 이슬람이 이러는 이유는 기독교, 불교, 유대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최근에 등장한 종교인 탓도 있다.[26] 당장 이들도 500년전만해도 원리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인권수준도 이슬람권 하고 비슷했다.
정교일치와 원리주의
이슬람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따로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이 그대로 실생활을 다스리는 법 중에서도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존재한다. 즉 과거에도 현재에도 세속적 인권보다 전근대적이고 반인권적인 종교 규범이 우선하는 정교일치 성향이 대단히 심한 종교라는 것. 다른 종교는 경전을 어겨도 처벌받지는 않으나, 이슬람에서는 경전을 어기는 것이 현대에도 상당수 지역에서 엄청난 권위를 갖는 샤리아법에 의거해 실질적 처벌이나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타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27] 더구나 이는 샤리아 법이 실정법으로서 유효하지 않은 국가에 거주하는 무슬림들도 마찬가지여서, 간혹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명예살인이라며 떳떳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28]
기존 거주 비무슬림들의 높은 실업률과 패배주의의 반발심리
대다수 선진국에서 겪고 있는 제노포비아들의 주된 논리는 이들 후진국에서 유입된 이민 계층이 자국내 하위 계층을 형성하면서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직업군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높은 청년 실업률[29], 기존 청년계층의 취업에 대한 불안감과 좌절감을 심어주었다. 저임금 기반 직업을 선택하려고 해도 하위 계층과 동등한 수준을 선택하기는 힘들다 보니 실업률은 지속적으로 높아져만 가는 것이다. 이에 반발 심리로 인해 유입된 하위 계층에 대한 저항 심리가 나타나게 된다. SNS 등 소셜 네트워크를 통하여 이슬라모포비아를 비롯한 제노포비아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유이다.[30]
전근대적 인권 의식
이슬람 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 등의 세 가지의 불평등을 경전 상에서 공인하고 있으며, 이 중 불신자의 경우는 개종을 통해 극복 가능한 관계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세 이슬람이 모든 종교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전파된 원동력은 "신자에게는 법적 혜택을, 불신자에게는 법적 불이익을" 줌으로써 피정복민들의 자발적인 개종을 유도한 것이었다.[31] 하지만 이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규정이며, 오늘날의 완전한 개인의 종교 선택의 자유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이 부분에서 이슬라모포비아가 이슬람을 비난/비판하는 가장 큰 논지가 이슬람을 버리고 타 종교로 개종하는, 이른바 배교 행위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보복이 따라온다는 점이다. 일례로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임산부에게 수단 정부가 사형을 선고한 것을 국제 사회가 구한 사건이 2014년에 있었다. 특히 이슬람 국가들의 인권 탄압은 엄청난 악명을 자랑한다. 심지어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 국가들조차 종교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관대하지 않아 이슬람 비판을 금지하고 이를 탄압하는 등 인권탄압이 심각한 상황이다. 무슬림 이민자들도 인권 의식이 낮다 보니 이민 와서도 장소를 구분 못하고 인권침해 범죄 저질러서 처벌당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교리에 근거한 범죄
가장 심각한 것은 교리를 빙자한 남녀차별, 비무슬림 차별 및 그에 기반한 명예살인, 섹스 지하드, 여성할례 등의 비인도적인 범죄이다. 하지만 여성 인권 문제가 대두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20세기 초중반에 불과했고, 세속국가인 터키 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인 이란, 파키스탄 등에서도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32] 하지만 20세기 말부터 21세기까지는 이슬람권만은 세속주의의 후퇴와 함께 계속해서, 여성 인권이 실질적으로 악화되어 국제사회의 우려를 낳고 있다. 이슬람 자체의 개선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슬람계 이민자 여성에 대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여 계몽하는 등 서방 세계의 도움도 필요하다 할 수 있다. 문제는 세속주의 정권이 잡고 있을 때는 그나마 이런 도움과 캠페인을 하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근본주의나 부족주의에 기대는 정부가 집권하거나 아예 군웅할거하는 나라가 많은 지금은 그런 게 없다 보니 매우 비관적이라는 것이다.
유일신교 특성 및 타 종교 배척
종교적인 견해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데, 이는 같은 유일신교인 기독교, 유대교[33]보다는 아시아권의 다신교인 불교, 힌두교 등과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슬람은 불교, 힌두교를 우상숭배 종교로 보고 철저하게 박해하기 때문에 공통분모를 찾기 어렵다.[34] 불교의 경우 당장 눈에 보이는 불상 문제를 제외하고 최대한 원시불교적인 교리로 간다고 해도, 이슬람 측에서는 불교가 인간의 가르침만을 숭배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이슬람 대 타 종교 대립 구도가 서구만큼 빈발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교 자체에 내재한 문제라기보다 이슬람권 국가들의 정치 사회가 아직 덜 개인주의화되었고 덜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가지 종교의 뿌리가 깊은 나라에서는 종교가 개인의 것이라는 명제를 인정하지 못한다. 무신론자를 신을 잃은 사람이라며 불쌍히 여기거나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것은 중동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즉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그 종교가 유일신교냐 아니냐에 있지 않고 국가 및 사회가 얼마나 세속화되었느냐에 있다.
이슬람만의 특징적인 문화
인간의 공감 능력이 단순히 개개인에 따라 높거나 낮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외모, 인종, 성별, 복장, 연령, 행동거지 등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감 정도를 결정한다.[35][36] 이슬람 교도들은 남성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여성의 경우 히잡으로 머리를 가리는 등 아주 특징적인 외형을 가진다. 음식도 할랄과 하람으로 나누어 철저히 가려 먹고 생활 방식도 외부인들과 매우 다르므로, 외부인들은 무슬림들에게 동질감을 갖기가 매우 힘들다. 이는 역으로 무슬림 역시 외부인과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데에도 똑같이 작용한다. 특히 식사는 인간 본능과 굉장히 깊게 연관되어 있는데, 인간이 타인과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 서로의 친밀감과 신뢰도, 협동력이 상승한다고 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과 어울릴 때 드레스 코드를 맞추거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이러한 본능적 이유 때문인데, 무슬림들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외부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무슬림들을 향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 데다, 이 배타 심리는 생존과 직결된 인간의 본능이므로 절제할 수는 있어도 제거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부 무슬림이 사회적 분란거리를 야기하면 내재되어 있던 배타심리가 폭발하면서 이슬람공포증이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슬람만의 특징적인 문화라기 보기는 이슬람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이슬람 극단주의가 80년대부터 세계화된 이후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슬람주의자들은 히잡, 부르키니, 턱수염, 피부노출금지, 터번이라는 의상과 샤리아, 할랄푸드를 이슬람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불신자라는 인식을 퍼트리고 있다. 이슬람주의자의 정체성 정치가 비이슬람과 이슬람 간의 간극을 더 넓힌 셈이다.
3.1.3. 이슬람 급진 단체의 테러범죄와 여파
이슬람 급진 단체의 테러
2004년 스페인 열차 테러, 2005년 런던 지하철 테러 등 타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여러 테러로 인해 이슬람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공포 심리는 극대화되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외국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자국내에서 행해지는 이슬람 급진 단체들과 급진주의 성향을 추종하는 이슬람 신도들의 테러, 범죄 행각으로 인하여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아주 크게 악화되었다.
대표적인 국가가 프랑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2015년 11월 파리 테러, 2016년 니스 테러, 2016년 프랑스 성당 테러, 2017년 프랑스 마르세유 흉기 테러, 사뮈엘 파티 피살 사건. 2020년 니스 테러등 이슬람 급진 단체들과 급진주의를 추종하는 이슬람 신도들의 연이은 테러, 범죄행각으로 인해서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나락으로 치닫았다. 오죽하면 마크롱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에서 대놓고 이슬람을 대상으로 하는 공화국 가치 강화 법을 추진하여 하원에 통과된 상태.
이슬람인에 대한 규제와 공포
테러범죄의 여파로 인하여 각국 정부는 자국 내 테러 위협에 대하여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대대적인 조사 및 파악에 들어갔으며 이슬람 급진 단체에 대한 정상적인 수사와 조사, 처벌, 감시를 넘어서 이슬람인 전체에 대하여 인권침해 소지가 높은 행동들이 자행되었다. 아랍어를 비롯한 이슬람권의 언어들의 경우, 아직 서방 세계에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비이슬람권 시민들이 모르는 데다 이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편이다.[37] 언어적, 문화적 장벽과 함께 테러라는 공포감으로 인해 시민 사회의 접근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4. 이슬람공포증의 현황
본 단락은 앞선 이슬람공포증이 바깥으로 표출되어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나 배척이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에 걸쳐 진행된 각종 갤럽 설문조사 결과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확인되었다.
편견이 있다는 의견
"서방세계가 무슬림 사회를 존중하는가"라는 질문에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많았다. 단, 독일의 경우 예외적으로 2008년 조사 결과에 비해 2011년 조사 결과 9% 정도 긍정적 답변이 감소하였다.
"서방세계와 무슬림 사이의 긴장은 어떤 요인으로 인해 초래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남아프리카에서는 종교적 문제라는 답변이, 유럽에서는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으며, 중동 및 북아프리카, 북미, 아시아에서는 두 답변이 비슷한 비율로 나왔다. 정치적 이해관계는 상황에 따라 변화할 가능성이 있지만, 종교 및 문화적 문제는 변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 큰 우려 요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에서 절반 이상이 "미국인이 무슬림 미국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고 응답하였고, 특히 유대교도와 무슬림의 경우 각각 66%, 60%로 편견을 더 높게 체감하고 있다.
차별이 있다는 의견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5개 차별 금지 행동의 중요성 중 "무슬림 상징에 대한 훼손 금지"에 대해 약 80%가 매우 중요하다고 답변하여, 약 60%가 매우 중요하다고 답변한 다른 행동들인 동등한 대우, 미디어에서의 정확한 묘사 등에 비해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동 지역의 무슬림 국가들에서는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서방세계의 무슬림이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했고, 중동 이외의 무슬림 국가들에서는 미국, 프랑스, 영국, 중국 등에서 무슬림이 차별받느냐는 질문에 대해 약 1/4의 응답자가,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약 1/3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미국 내 무슬림 중 48%가 인종차별이나 종교차별을 경험하였다고 응답하여 타 종교의 20~30%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그렇지 않다는 의견
2009년 스위스에서 가결된 이슬람식 첨탑 건축 금지 법안과 관련하여, 대다수의 스위스 국민들은 종교적 자유가 중요함에 동의하면서도, 응답자의 약 2/3은 "해당 법안으로 인해 스위스 내의 무슬림이 차별받는다고 생각할까"라는 질문에 부정하였고, 응답자 대다수가 첨탑 금지 법안이 무슬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스위스의 국제적 위상을 격하시키지 않는다고 답했다.[38]
4.1. 정파별 현황
고보수주의는 WASP적 가치를 옹호하기 때문에 이슬람뿐만 아니라 가톨릭도 미국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이 가톨릭에서 유래되었다는 알베르토 리베라의 음모론을 믿고 있다. 주로 미국 동남부의 바이블 벨트에서 개신교 이외에 타종교와 타종파에 대한 배타성이 심하다.
비이슬람 종교적 우파는 이슬람 이외에도 자신의 종교가 아니라면 다 배척하지만 특히 이슬람을 지구 문명을 위협하는 절대악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슬람과 동성애, 공산주의, 페미니즘은 모조리 한 패라는 반지성주의적인 설교를 하고 있고 이슬람의 테러리즘만은 기억력이 생생한 선택적 기억이 심하다.
대안우파 강경파는 대개 세속적이지만 자신의 이슬람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독교팔이를 하는 일부가 있으며 원래 그들이 이슬람혐오를 하는 것은 사회적 불만을 이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이슬람 말고도 유대교도 화이트 제노사이드 공범이라고 간주하고 있지만 네오나치즘을 내세우는 아랍인은 오히려 같은 백인이라고 간주하고 있다.[39] 다만 일부 대안우파 강경파들은 적의 적 논리로 이슬람에 우호적이기도 하다
신보수주의는 세속주의를 극혐하고 기독교 가치를 내세우지만 유대교에 공개적으로 호의적이고 이슬람에 비공개적으로 호의적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이유는 두 국가는 미국에 충성하고 있으며 미국적 세계화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보수주의자중 한 사람인 조지 W. 부시는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발언했고 로널드 레이건은 공산진영을 물리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알카에다와 친했다. 물론 조지 부시가 알카에다, 탈레반을 주적으로 간주한 것은 이슬람혐오때문이 아니라 9.11 테러를 자행해서 반미적인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안우파 온건파는 이슬람혐오를 하게 된 계기가 거의 이슬람주의 성향의 무슬림들이 서양 문화를 배척하고 리버럴이 그런 모습을 문화상대주의라고 착각하며 지지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슬람 자유주의에 호의적이기 때문에 마지드 나와즈, 마시흐 알리네자드를 지지하며 서양, 동아시아의 페미니즘을 암으로 간주해도 대(大)중동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지지하고 있는데 친시오니즘 기독교 우파와 달리 이스라엘은 예수의 고향이고 예언이 실현되는 곳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대(大)중동에서 유일하게 란제리, 비키니 입은 커머셜 모델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모습을 지지하기 때문이다.[40]
주류 사회자유주의, 신트로츠키주의 계열은 언더도그마 심리때문에 이슬람주의 수사를 무슬림의 하소연으로 착각하지만 좌파 중에서도 이슬람혐오자가 존재한다.
프랑스, 터키의 사회자유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모토인 라이시테를 지지하기 때문에 이슬람도 가톨릭과 다를 바가 없는 반자유주의로 간주하지만 무슬림, 중동인에게는 인종주의적 인식은 없다. 오해하지 말 것은 마지드 나와즈같은 이슬람 자유주의자들은 이슬람혐오자가 아니라 이슬람개혁가이고 주류 다문화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계열부터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겨왔고 이슬람도 그런 아편 중 하나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들은 언더도그마에 빠져 이슬람주의에 세뇌된 무슬림을 지지하는 것은 퇴행적 좌파라고 정의했고 이슬람도 기독교처럼 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우민화 수단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렇고 해서 이슬람혐오때문에 핍박당하는 무슬림의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우파와 우파 간의 갈등이라고 해면서 이런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요점은 이슬람주의에 세뇌된 모습이 무슬림의 선천적인 특징이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비합리적인 상부구조때문에 생겨난 후천적인 특징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샘 해리스, 이븐 워라크를 위시로 한 무신론자의 이슬람 비판이 퇴행적 좌파, SJW로부터 이슬람공포증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의 이슬람 비판은 반종교주의 일부이며 다른 정파와 달리 실증적인 근거로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들은 무슬림에 대한 인종주의가 없으며 이슬람 자유주의에는 어느 정도 호의적이다.
다만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아얀 히르시 알리는 대안우파 온건파적 주장을 하기 때문에 이슬람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친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받고 있다.[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