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열매가 익으면...추수때 - 이 구절은 욜 3:13의 인용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때 곧 세상의 종말이 이르는 때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익으면은 제2단순 과거 가정법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열매가 '스스로 영글어 익어갈 때면'으로서 결실의 상황을 가정한 단순한 설명적 해석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가 스스로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열매들이 완전히 영글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앞절의 '충실한 열매'와 같이 긍정적인 완성에 대한 그림같은 표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28절의 표현과 함께 생각하여 미세한 하나의 씨앗이 뿌려져서 충실한 곡식이 되고 그것이 익어지는 신비한 과정을 전개함으로써,
씨뿌릴 때 과연 이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 하는 의아심 혹은 확실성이 없는 기대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씨앗을 뿌린 뒤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곡식이 결실할 때가 오듯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은 모호하고 숨겨져 있으나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른다.
그런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면서 현재적 과정이다. 낫을 대나니...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 이는 종말적 최후 심판을 표현한다. 이처럼 종말적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특별히 여기서 '낫을 댄다'는 것은 '낫을 가져 간다'는 뜻으로
씨를 뿌린 후 자기 일에 열중하던 농부가 추수의 시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밭에 보내지는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 무서운 심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 '낫'은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한 환유적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추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추수를 하는 것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일은 농부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의 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추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추수의 주체자는 하나님이다. 즉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며 추수에 투입되지만 그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하고 잘 익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땅, 곧 신비한 자연의 힘이다 하나님의 이면적인 섭리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빠지는 일이 없이 해석되어야 한다.
[막 4: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여기서 또 다른 비유가 시작된다. 주제는 앞에 나오는 비유에 이어 계속 하나님 나라이며 소재는 겨자씨이다. 역시 청중과 장소변동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 13:31, 32과 눅 13:18, 19에는 공히 바로 이어서 누룩 비유를 첨가하고 있으나
본문은 그에 대해 침묵한다. 어쨌든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사람이 보기에는 미약하고 보잘것없으나 그것이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크게 나타날 때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 이 비유의 시작은 다른 비유와 달리 어떻게, 무엇으로 비유할 것인가 하는 이중적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는 주로 히브리인들이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서 생생한 물음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고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한다.
[막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겨자씨 한 알 - 겨자씨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이며, '사람이 땅에 심는 가장 작은 씨앗'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아주 작은 씨앗으로 비유되는 겨자씨를 '한 알'이라 한정함으로 그 작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는 설명구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 같은 표현은 조금 과장된 듯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의 실체는 마치 겨자씨의 성장 과정과 같다는 사실이다. 즉 천국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작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미미한 시초성과 현재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미미함은 능력있고 흥왕한 모습으로서의 천국의 미래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겨자씨의 생명력 넘치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실로 가장 작은 것 속에는 이미 가장 큰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큰 가지를 내니 - 이 구절은 '가장 작은 것'을 강조한 31절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 구체적 표현을 살펴보면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새들이...깃들일 만큼'이라는 비교 문구를 각각 사용한다. 여기서 '모든 나물'을 공동번역에는 '어떤 푸성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겨자씨의 본질 나물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변화 나무로서의를 암시한 것이라 본다. 즉 겨자씨는, 그 실제는 '나물'이지만, 그 키가 3-4m 심어어 7m까지 자라는 경우도 있다고 함까지 성장하며 그 줄기의 굵기가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라므로가히 '나무'라 봄직하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참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변화와 성장을 이뤄놓는 것이다. 실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확장성과 현재와 미래의 대조적인 모습을 적절히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가장 큰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된 천국 비밀처럼
지금은 보이지 않는듯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그 작은 것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며 반드시 완성된 형태로 성장할 것이라 확신을 갖게 하는 가능태이다. 따라서 천국을 대망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어야 하며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완성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할 때 욥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마 25:21, 23의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를 생각나게 한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 여기서 '공중의 새'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기 보다 오히려 자라난 겨자나무의 크기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
혹자는 성경에서 흔히 '새'가 사단의 대리인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확장되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해치기 위해 힘쓰는 존재들로 이해하기도 하나 본 문맥에서는 적합치 못한 해석이라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영적으로 이 '공중의 새'는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이방인들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여기서 '깃들인다는 말은 단순히 비나 바람을 피해 잠깐 쉬어간다는 의미이기보다 거주지로 정하고 장막을 세우듯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도처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평안히 그리고 영원히 깃들일 수 있는 보금자리인 것이다.
[막 4: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로...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 비유들은 예수께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즉 예수 자신의 인격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사용하신 방법 중 가장 탁월한 교수법이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진리를 비유로 말씀함으로써 무리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셨다. 즉 비유란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예로 들어 전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영적 지각력을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진리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비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즉 듣는 이의 영적 감지력과 진리에 대한 이해력 여부에 따라 쉽게 또는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막 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 이 말은 비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비유를 통해 가르쳤다는 말이다. 혼자 계실때에...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 이 문구는 10절의 시작과 비슷하다.
다만 질문을 했다는 언급이 없고 10절에서는 청중이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하고 있다. 결국은 앞에서 가르친 여러가지의 비유들은 일반 청중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비유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조차로 예수의 거듭되는 설명과 상세한 해설이 필요했었다. 사실 본문의 '해석하시더라가 미완료 시상으로서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 설명해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진정 예수께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진지하고도 쉽게 가르쳤지만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비유는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고적 격언구와 내용의 일치를 갖는다.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제자들조차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들은 예수를 배신하거나 십자가 처형에 침묵으로써 간접 동조했던 것이다(114:50).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으로써 사람들은 예수를 비로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의 잘못이다. 이것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