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 16 - 시스키공원을 지나 바르샤바 구시가지 짐코비 광장에 왕궁을 구경하다!
2022년 5월 11일 아침에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의 호텔에서 주는 뷔페식 아침을 먹고는 호텔을 나서 도로
를 건너 20여분을 걸어서 민중봉기 박물관을 보고는 다시 10여분을 걸어서 시스키 공원 을 구경합니다.
민중봉기 박물관을 지나 유대인들의 거주지인 게토는 지나서 구시가지 로 향하는데..... 대로변에 보이는 건물
들은 거의 100% 현대적인 빌딩들이며 10여분을 걸어 도착하니 시스키 공원 이라고 큰 녹지공간이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도심 한복판에는 공원이 드물고 산쪽에 많지만 유럽은 산이라고는 없는 평야
지대이고 또 왕의 사냥터나 대주교의 성당 전용지 등이 보존돼 온 관계로 도심
한복판 에서 이처럼 좋은 공원으로 변했으니 시민들의 휴식처로서는 안성맞춤인가 합니다.
그런데 여기 넓은 도로에는 자전거 전용도로 가 있는데 별 생각없이 보행자 도로가 아닌 자전거 도로를 걷다
보면 뒤쪽에서 위험이 느껴지는데.... 자전거들이 정말 쏜살같이 달려 오니 여기를 걷는 것은 위험합니다!
바르샤바 시내에 오래된 옛 건물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독일군에 점령당한
2차 세계대전 때인 1944년 8월에 독일군이 밀리면서 소련군이 다가 옵니다.
폴란드는 소련 치하에서 살아본 쓰라린 경험이 있는지라 폴란드 독립에 호의적이지 않은 소련군이 바르샤바
를 점령 하기 전에 독일군에서 자력으로 탈환코자 영국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 정부가 궐기를 명령합니다.
그러자 40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저항군인 국내군 (Armia Krajowa) 은 바르샤바 봉기 를
일으켰다가 식량과 무기가 부족한 바람에 고전하니..... 연합군과 소련군이 공수를 해주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2달간 전투에서 도시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수도이며 냉전시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 있었던 도시로.....
폴란드의 젖줄이자 큰 강인 비스와 강 (1,069km) 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바르샤바의 인구는 171만명 으로 공업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충지로 영어명이 'Warsaw(워르소)'
로 현지어와는 차이가 있는데..... 폴란드인에게 "바르샤바" 라고 말해주면 좋아한답니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들이 코리아 라고 말하는 것 보다 대한민국이라고 말해주면 더 좋은 것 처럼....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의 지하철은 2개 노선 (M1, M2) 이며 1920년 착공했는데 여러
전쟁등으로 75년 후인 1995년 개통했으며 노면전차는 꾸준히 노선망을 보수했습니다.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노선망이 25개에 132km 길이를 지닐 정도로 상당하다 보니 바르샤바
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며,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은 2016년 부터 LOT
폴란드 항공이 인천에 취항 했는데..... 내일 우리는 이 폴란드 항공으로 귀국할 예정 입니다.
지하철이나 트램 또는 택시 아니면 20분을 도보로 천천히 걸어서 구시가지 Stare Miasto 에 가면
바르샤바의 옛모습을 볼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전부터 전해 내려온 건물들은 아니고.... 독일의 아우구스부르크 처럼 2차세계
대전과 1944년 바르샤바 봉기때 완벽하게 파괴된 자리에 전후 바르샤바
시민들이 복구 하여 전통식당과 카페가 즐비한 편안하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구시가지의 입구인 짐코바(잠코비) 광장 Pl. Zamkowy 에 도착하는데
옛날에는 아마도 성문이 있었지 싶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광장에 있는 어느 극장 건물로 들어가니 홀에 많은 전시물이 보이는데.... 이 극장
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상연할 극을 선전 하는 것 같습니다?
극장을 나와 폴란드의 왕궁 Zamek Krolewski 으로 가는데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인지라
어떨지 매우 궁금한데.... 마눌은 오늘이 수요일이라 무료 라고 해서 기뻐했지만
막상 들어가니 표를 끊어라고 하는데 입장료는 다행히 20즐루티가 아니고 10즐루티 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표를 보이지 않고 그냥 들어가는데..... 직원은 울 마눌이 멘 작은 가방도
지하에 보관소에 맡기라고 하는데, 나중에 보니 관람객의 90% 는 오디오 를 들고
다니며 들으니 그럼 오늘 입장료는 무료 이고 우리가 낸 10즐루티는 오디오 값인 모양일까요?
내부에는 그림과 사진은 많지만 값비씬 보석과 금붙이며 왕관등이 보이지 않는 것은 2차대전때
나치에 의해 모두 약탈당했고 전후에 새로 지은 때문 이라 여겨지는데... 그러고 보면
태국 방콕의 왕궁이 화려한 것은 나라가 망한적이 없기 때문이고, 대만의 고궁
박물관이 엄청난 것은 장개석이 도망올 때 1개 연대 병력 대신에 유물들을 싣고 온 때문 입니다?
왕궁 Zamek Krolewski 은13세기에 마조비아 공작의 요새로 건립 되었으며 그후 탑과 붉은벽돌로 고딕
양식의 왕궁이 추가되었는데.... 스웨덴의 침략으로 남쪽에 있는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의
왕궁이 불타자 1596년 수도를 이곳으로 천도하였다는데 현재는 박물관이며 입장료는 20즐루티 입니다.
중세에 폴란드는 대국이었으니 그다니스크를 점령하고 이반 뇌제의 러시아 군대와 싸워 승리 했으며, 1683년
에는 이슬람 오스만 터키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을 포위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폴란드 기병인 윙드
후사르는 오스만 터키군에 돌격해 대승리를 거두어 유럽을 구출했으니 기독교 세계를 지킨 수호천사 였습니다.
1507년 왕으로 즉위한 지그문트 1세 는 1499년 화재로 파괴된 수도 크라쿠프의 바벨성 을 기존의 토대
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고, 피렌체의 건축가였던 바르톨로메오 베레치의 지휘 하에
30년에 걸쳐 성을 아름답게 다시 지었으니..... 성에는 17세기 중반 바로크 양식의 궁전도 들어섰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을 구한 윙드 후사르는 1503년 ~ 1775년에 폴란드 기병으로 5 m 짜리 랜스 와 윙드 후사르의
상징인 날개 장식 을 달고 있으니... 오스만 터키에 패망한 세르비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헝가리 왕국의
후사르들은 용병으로 떠돌았는데 일부가 폴란드 왕국에 고용되었으니 3개 부대 폴란드식 후사르가 생깁니다.
윙드 후사르 는 1605년 키르홀름 전투에서 2,600명이 기마 돌격을 하여 칼 9세가 지휘
하는 스웨덴군 기병 2,500명과 보병 8,300명 중에서 무려 7,800명을 전사
시켰으며.... 6만 러시아군을 상대로 돌격해서는 2만명을 전사 시키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또 윙드 후사르 300명이 오스만 터키군 1만 5천명에 돌격 하여 터키군 천여명을 전사시켰고,
다른 전투에서는 윙드 후사르의 돌격으로 오스만터키군 3만 5천명이 붕괴됐으며
코사크 - 타타르군 14만 을 향해 돌격했는데 폴란드군의 손실은 불과 700명이었다고 합니다?
1683년에 이슬람 오스만 터키군의 제2차 빈 포위전에서 터키(투르크)군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20만
으로 추정되는 대병력으로 포위하자, 윙드 후사르 1만 8천명 이 후대 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기병 돌격' 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돌격으로 빈의 포위를 풀고 유럽 기독교 세계를 구해냈습니다.
폴란드 지배를 받던 카자크 Cossack (러시아 남부 자유농민) 가 반란을 일으키자 1651년 베레스테츠코
에서 63,000명 폴란드군은 140,000명 카자크 - 타타르 연합군에 대승 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 피해도 엄청 심한데다가..... 국력이 소모되어 대홍수(Potop) 시기에 쇠퇴 하게 됩니다.
카자크는 코사크 라고도 하는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서 준군사적인 자치 공동체 를 이루며 살았던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으로, 드니프로강 하류와 돈강과 우랄강 유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14세기에 드니프로강의 자포리자 카자크와 돈강의 돈 카자크가 생겼으니 자포리자 카자크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봉신이었는데, 1962년 율부린너 주연 대장 부리바 Taras Bulba 라는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동쪽의 카자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이후 러시아군의 침공 을 받아
폴란드는 국토의 절반이 점령당하자, 북쪽의 스웨덴도 브란덴부르크군 과 함께 침공해
와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들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 를 일으켰고, 타타르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이 결성되었을 때, 크라쿠프는 남쪽으로 치우쳐 있었으니 바사 가문의
지그문트 3세가 왕이었던 시기, 1592년부터 1599년까지 스웨덴과 동군연합 을 이뤘는데, 폴란드
공주였던 어머니 카타르치나 야기엘론카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로 자란 지그문트 3세 는 루터파 국가
였던 스웨덴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서 스웨덴 왕위를 위협받습니다.
바르샤바 는 크라쿠프와 동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사이에 있어 연방 내 주요도시들과 연결성이 좋았고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의 상황에도 재빨리 대처해야 되었기에, 1595년 바벨 성에 불이 난 것을
계기로 1596년 지그문트 3세는 왕궁을 바르샤바로 옮겼고 1611년 부터 계속 바르샤바에 거주합니다.
정부기관들도 모두 왕궁을 따라 바르샤바로 이전하면서 크라쿠프는 실질적인 수도로서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었는데.... 하지만 공식적인 수도는 폴란드 2차 분할 (1793년) 때까지
크라쿠프였고 왕의 대관, 장례식 등 각종 왕사(王事) 는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수도의 기능을 빼앗긴 뒤, 크라쿠프는 천천히 쇠락하기 시작했으니 1652년 도시에선 페스트가
번져 수천명이 사망했고 같은 해 큰 홍수까지 발생해 도시를 파괴했는데, '대홍수'
시기 폴란드 상당부분이 루스 차르국군과 스웨덴군에게 점령 당할 때, 크라쿠프도
1655년 스웨덴군에게 함락되어 약탈 당했고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바벨 성도 무느집니다.
폴란드를 침략해 점령한 스웨덴은 과거 바이킹 이었으니 문득 실크로드학 권위자 정수일 박사가 쓴
“탐험과 지배착취의 역사... 유럽 문명의 민낯” 이라는 조봉권 기자의 기사가 떠오릅니다.
- 덴마크·노르웨이 등 4개국 탐사, - 유럽의 허와 실 찾아가는 여정, - “서양 우월 의식은 억측과 착시”
코로나19 탓에 길이 막힌, 여행 좋아하는 인문주의자들의 마음이 설레고 피가 끓게 할 만한 책이다. 정수일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 연구소장이 새 저서 ‘문명의 모자이크 유럽을 가다 1 북유럽’ 을 펴냈다.
저자 정수일 박사는 ‘바이킹’ 이라는 이름 대신 ‘비크’ 또는 ‘비크족’ 이라는 원래 이름을 돌려줘야 한다고 책
에서 역설한다. 덴마크 여행 중 들른 비크족 집단거주지의 전통 공방. 저자 정수일 박사의 이력을
설명할 방법은 여럿 있는데 방대하고 곡절이 많아, 그가 지금껏 받은 주요한 상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실크로드학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저서 ‘실크로드 사전’ 으로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학술 부문·
2013년) 을 받았다. 역주서 ‘이븐 바투타 여행기’ 로 제42회 한국백상출판 문화상을
수상했다. ‘실크로드와 경주’ 로 제5회 세계실크로드학회 국제학술대회 최우수논문상
(2019년) 을 받았다. 제1회 문무대왕 해양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1934년생으로 올해 87세이다.
저자는 세계 문명교류사 연구와 저술에서 높은 경지를 개척한 학자로 꼽힌다. 이번에는 유럽을 여행했다. “이
답사는 경상북도의 선견지명으로 추진된 ‘코리아 실크로드 프로젝트’ 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 투어블릭
강상훈 대표와 함께 우리 일행은 총 48일간(2017. 5. 19~7.7) 15개국에 대한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 고 밝혔다.
‘문명의 모자이크 유럽 을 가다 1 북유럽’ 에는 이 가운데 5월 19일부터 6월 2일까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를 답사한 여정을 담았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여러 가지 가림색으로 켜켜이 덧칠해져 진위와
허실이 뒤범벅이 된 유럽문명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려는 시도였다” 고 유럽 답사 동기를 밝혔다.
그러면서 “흔히들 민낯이라고 하면 허구나 위작을 함께 연상하고 부정적으로만 이해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민낯은 왜상(歪像) 이나 허상이 아닌, 실상이나 본연 이라는 긍정적
함의를 지닌 보통명사다. 필자의 졸문에서 그 함의야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관계없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사실에 한해서는 일괄 ‘민낯’ 이란 표현을 쓰려 한다” 고 했다.
침몰된지 333년만인 1961년 인양된 스웨덴의 바사호 모형. 실크로드학과 문명교류 연구의 석학
인 저자는 이 책을 마치 태평양을 항해하는 탐험선처럼 몰고 간다. 책 서술의 낙폭은
크고 리듬감은 굉장하다. 어떤 곳에서는 선명한 일인칭 여행자 관점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고, 어떤 대목에서는 사전을 방불케 할 만큼 건조하고 냉정하게 자료만 제시한다.
그러다 주저 없이 자기 사상을 펼치고 판단 을 내린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는다.
거장 특유의 단순함이 행간에서 느껴진다. 노르웨이에 들어섰을 때 만난 저명한 탐험가 토르
헤위에르달 (1914~2002년) 의 놀라운 생애·성취 그리고 한계를 들려주는 글에서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다.
유럽은 애초 ‘탐험과 발견’ 이라는 명목을 앞세워 다른 세계를 착취하고 파괴하고 지배 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탐험 영웅 헤위에르달은 지극히 드물게 탐험 그 자체에 충실했고 탐험을 통한
탐구, 지구와 자연 사랑을 실천 했다. 그러나 일종의 학술적 독단을 고집하면서 소외
되기도 했다. 헤위에르달 대목을 이 책에서 읽고 나니, 어쩐지 유럽의 민낯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17세기 스웨덴에서 일어난 놀랍고 끔찍했던 바사호 침몰 사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저자가 설명하는
항로를 따라 바사호의 운명 을 살피고 나면, 선진 해양 세력으로서 유럽의 잘난 점 뿐만 아니라 가려져 잘
안 보이던 그림자도 눈에 들어온다. 일관되게 “유럽문명은 그 생성 과정에서 각양각색의 이질적인 외래
문명 요소들을 그때그때 받아들여 고유의 정체성을 확보해온 모자이크식 융합 문명” 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
유럽 자신의 억측과 다른 지역의 착시 탓에 마치 유럽이 원래 수준이 지극히 높고 다른 지역
보다 우월했다는 인식은 널리 퍼지고 오래 지속됐다. 저자는 그런 억측과 착시를 걷어
내면서 북유럽을 여행했다. 코로나 시절에 어울리는, 마냥 쉽지만은 않은 인문학자의 여행기다.
18세기초 대북방전쟁 때 크라쿠프는 1702년에 다시 스웨덴에 함락 되었고 1707~1710년까지 역병이 발생해
수만명이 죽었으며 1768년 폴란드 왕위 계승전쟁 때는 러시아군에게 점령 당했는데, 17~18세기 동안
크라쿠프 보더 더 쟁탈의 장이 되었던 바르샤바 는 수도로 기능했기에 다행히 재건의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1794년, 폴란드 민족에게 크라쿠프가 가지는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프로이센
(독일) 과 러시아에 의한 2차 폴란드 분할 로 절망에 빠졌을 때,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와
연방군의 중장으로 재직 중이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Tadeusz Kościuszko) 는
러시아군이 잠시 빠져나가자 3월 23일 크라쿠프 중앙 광장의 직물회관 앞에서 봉기를 선언 합니다.
곧 6,000여명의 봉기군 을 모집한 그는 바르샤바로 진격 을 개시했고 4월 4일 크라쿠프 근방 라크와비체
(Racławice) 에서 4,000명의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 를 거두었으니, 봉기는 연방 전역으로 퍼져
나갔지만 러시아군이 빠르게 대처하고 프로이센(독일) 의 지원까지 이어지면서 봉기는 실패 하고 맙니다.
코시치우슈코 본인도 마치에요비체 전투 (Battle of Maciejowice) 에서 패해 러시아군에 사로잡혔고
봉기가 진압된 뒤 1794년 6월 15일 프로이센군이 도시로 들어왔으니... 이들은 곧 바벨성의 왕실
보물고도 점령했고 보물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지시하에 비밀리에 베를린 성 으로 옮겨집니다.
180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폴란드 왕들의 리갈리아를 모두 녹여 금화 로 만들어 폴란드의 보물을 훼손
했으니 현재 남아있는 폴란드의 리갈리아는 모두 복원품 이며, 봉기에 놀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3국은 3차 폴란드 분할 을 통해 폴란드를 지도에서 지웠고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귀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