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의 생몰년도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녀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주변 인물로부터 그녀의 나이를 유추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되는 원나라 순제(혜종)는 1320년 출생해 14세가 되는 1333년에 등극 합니다.
기황후는 순제의 등극 기념 공물로 원나라에 간 듯 합니다.
왜냐하면 고려출신 원나라 환관 고용보에 의해 1333년 궁녀로서 순제에게 첫 선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나이가 어렸던 만큼 공녀 역시 그에 맞춰 선발 되었을 것을 감안한다면, 공녀로 갈 때 기황후의 나이는 15~18세 사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황후는 그야말로 공녀로 원에 가자마자 황제에게 선을 보였고, 첫눈에 황제를 사로잡아 총애를 받습니다.
1335년 당시 황후였던 타나시리가 역모에 연루되어 죽자 순제는 총애하던 후궁인 기씨를 황후에 삼고자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권신들의 반대로 기씨는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기씨의 다음 기회는 1339년 출산한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으면서 찾아왔습니다.
아이유시리다라는 순제의 첫번째 아들 이었습니다.
아들을 출산한 다음해 기씨는 고대하던 황후의 위에 오르게 됩니다.
1340년 순제의 나이 21세, 기씨의 나이 22~25세로 추정 됩니다.
아이유시리다라는 1339년에 태어나 1353년에 황태자가 되었고, 그 뒤 주색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 하는 순제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아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기황후는 오로지 아들을 위해 원나라가 강해지길 원했고, 무너져 가는 원나라를 위한 개혁의 의지도 불태웠습니다..
순제의 성적 탐욕에 황실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조정을 움직여 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권하였다가 실패 하기도 하였습니다.
1366년 원나라 수도 연경이 주원장에게 함락되자 몽골 내륙으로 아들과 쫓겨나는데 그곳에서 아유시리다라는 1370년 북원 소종으로 등극 했으며, 1378년 사망합니다.
아이유시리다라는 후사를 두지 못했으며 제위는 순제의 네번째 아들인 토구스 테무르에게로 이어집니다.
기황후의 사망 년도와 어떻게 사망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아들의 북원 건국을 도운 후 사망하지 않았는가 추측됩니다.
기황후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는 친인척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이동생이 대국의 황후에 오르자 기황후의 오빠 기철은 안하 무인이 되버립니다.
원나라로부터 높은 관직을 받았고, 더불어 고려로부터도 덕성부원군에 책봉 되면서, 고려 제1의 귀족이 된 기철은 공민왕 2년(1353) 기황후의 모친 이씨를 위한 연회에 조카인 원나라 태자가 참석하고, 그 태자에게 공민왕이 무릎을 꿇고 잔을 올리고, 태자가 공민왕에 앞서 이씨에게 먼저 잔을 권하는 것을 본 기철은 기고 만장해 집니다.
이후 그는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하며 걸어가려다 호위군사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하고, 공민왕에게 글을 적어 보내면서 신하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며, 기씨 일족들이 관직에 올라 정권을 농단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등 원성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1356년 기철은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공민왕에게 주살을 당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태자에게 "이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원수를 갚아주지 않느냐”고 원망했다고 합니다.
1364년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한 후 충선왕의 3자 덕흥군(德興君)을 왕에 책봉하고 최유에게 1만 여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하였으나,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에게 전멸 당하면서 친정 복권계획은 무위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2년 뒤 대원이 망하게 된 것이지요.
고려사에 기록된 기황후와 기황후 일족에 대한 기록은 이렇듯 비난 일색이지만.
원사(元史)의 기록에는 그녀를 찬양한 글 일색입니다.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의 사당에 올린후 먹었다고 되어 있어, 그녀의 공덕과 지혜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가 원나라에서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고려에서 공녀를 차출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그녀의 정신이 망하가는 아들의 나라에 치우치긴 했지만, 고려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아들의 나라 원나라의 멸망을 지켜 보았고, 조국인 고려의 국운이 쇠하여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여인 기황후.
그녀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한국사와 유교관념을 통한 평가였기에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몸으로 시대의 거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용기와 신념으로 스스로 몸을 일으켰던 인간 승리의 역사로서 기황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져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 원순제(혜종) 가족관계 >
원순제는 원비와 후궁으로부터 모두 6남 5녀를 낳았는데, 그중 장남인 아유르시리다르 만이 기황후 소생입니다.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북원 소종>
오왕(吳王) 바얀 테무르 [伯顔帖木兒]
촉왕(蜀王) 투센 테무르 [都先帖木兒]
익왕(益王) 토구스 테무르 [塔古思帖木兒]<북원 평종>
제왕(齊王) 옌타이 [燕台]
초왕(楚王) 코타이라 [和台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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