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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꽃망울이 만들어졌는데 이 날씨가 오락가락, 그래서 멈칫하고 있는가 봅니다. 주중에 피어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숨고르기 하고 있는가 싶습니다. 경칩에 혹 개구리가 나왔다면 행여 동사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루 이틀 잘 참고 이겨내기를 빕니다. 이제 중순이니 다시 영하의 날씨가 생기지는 않으리라 기대합니다. 사람 마음처럼 알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그렇다는 말이지요. 금년에는 벚꽃놀이도 한 주 정도 당겼답니다. 무슨 변덕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겨울이 짧아진다는 사실이 반갑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되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루 이틀에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냥 적응해가야지요. 걱정은 걱정입니다. ‘기후 변화’ 대책도 아직 신통치 않고요.
병원 출입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바라는 바는 아닌데 도리 없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이 몸 하나 속에 속한 부분과 기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따질 수도 없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건강해야 건강한 거죠. 아무리 속이 멀쩡해도 피부가 짜증부리면 남들 보이기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침 맞으랴, 물리치료 받으랴 여기저기 들락거려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겉은 멀쩡한데 속이 불편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놓은들 뭐 합니까? 다 그림의 떡이 됩니다. 참으로 가엾지요. 젊어서는 몰랐습니다. 몸 하나 건사하기가 이다지도 어려운 것을 말입니다. 수십 년 사용하였으니 A/S 받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몸 따라 맘까지 약해질까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건강할 때 잘 챙겨야지요. ㅎㅎ
계절은 좋은 봄으로 익어갑니다. 모두 건강하여 즐거운 봄을 맞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종종 만나서 함께 즐기는 시간도 가지면 좋겠지요. 건강하세요. ^)^
2024년 3월 9일 김종우 목사 드림
“음령들이 큰 물과 수족 밑에서 떠나니 하나님 앞에는 음부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욥기 26 : 5 - 8)
<듄>
오래 전에 배운 기억이 납니다. 서양문학을 알려면 성경을 읽어야 한답니다. 서구의 문화가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에 성경 속의 사상이나 내용이 은연중에 스며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신앙은 둘째 쳐도 성경의 내용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서구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으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사회와 문화를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속에 불교와 유교 의식이 스며들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작품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삶이요 문화이니까요.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메시야’ 대망입니다. 실제로 그는 이미 왔었고 또 다시 온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실제 기독교 신자들은 메시야의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온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가 오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이 비로소 본래의 자리를 찾아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세계, 신자의 표현으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쟁도 없고 아픔도 슬픔도 없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도 없는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망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약속되어 있으니 그렇게 이루어지리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이 존재한 이래 싸움과 전쟁이 있었고 살아남고자 하는 투쟁이 지속되었습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조금 더 오래 살아남고자 그리고 조금 더 편하게, 아니면 좀 더 즐겁게 살고자 쌈질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가지려고, 좀 더 나은 것을 가지려고 다툽니다. 개인들도 그렇고 나아가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나라도 결국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조직이니까요. 개인들의 욕망의 집합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고 나라들이 서로 으르렁대는 것입니다.
중세시대는 서구사회가 대부분 봉건사회였습니다. 왕권이 좀 강해지면 전제군주국이 됩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후들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굴복시켜야 합니다. 자신의 권익을 위해서 영주가 왕을 대적하여 싸우기도 합니다. 서로의 이익을 따져가며 제후들끼리도 연합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왕의 편에 서서 자기 이익을 추구합니다. 너무 강한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제후를 견제하고 그의 재산을 탐내면 왕은 그 제후를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서로 자기 영역을 확장하고 유지하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도 백성의 신망을 얻고 남다른 실력을 인정받은 왕이라면 나라를 통일하여 전제군주국으로 만들기도 수월할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을 움직이는 힘 가운데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역사상 훌륭한 지도자들에게는 뛰어난 지도력과 더불어 남다른 성품이 있기도 합니다. 백성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품어주는 도량입니다. 그리고 편애 없이 공정하게 처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품성에 더하여 뭔가 신탁을 받은 듯한 위엄을 지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황제들이 등장하곤 했나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에 불과한데 자꾸 신이 되려고 스스로를 부채질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황제로도 모자라 ‘천황’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하늘이 정해준 지도자라는 의미이겠지요. 그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요.
아무튼 신이 정해준 자라면, 그런 믿음이 심겨져 있다면, 사람들의 충성심이나 복종심은 특별해집니다. 그리고 때로 사람들은 그런 지도자를 원하고 기다립니다. 능력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이끌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야와 세상이 바라는 구원자하고는 차이가 큽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그 메시야라는 존재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잡아 죽였습니다. 기막힐 일이지요. 반대로 생각하면 무슨 메시야가 그렇게 힘없이 당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로서는 로마의 학정에서 구원해줄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전혀 다른 일을 한 것입니다.
사람 이름, 나라 이름 등등 알아듣기도 말하기도 힘든 용어들 속에서 복잡한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충 땅 차지하기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황제가 자신의 왕권을 확장 유지하고자 다른 제후를 시켜 경쟁자인 공작의 가문을 멸절시킵니다. 다행히 모자가 목숨을 건져 도피합니다. 남의 땅으로. 완전 사막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스파이스’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려 싸웁니다. 중세 유럽의 전쟁이 우주로 확장되어 벌어지는 느낌입니다. 그 규모가 그만큼 커집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백성에게는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마치 메시야가 태어나서 애굽으로 피신한 듯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빗대어 기막히게 만들었다 싶습니다. 영화 ‘듄’(Dune)을 보았습니다. 2021년 작입니다. 2편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듄 - 파트 2>
아트레이데스 가문, 하코넨 가문, 아라키스, 프레멘 종족, 베네 게세리트, 퀴사츠 해더락, 리산 알 가입 등등. 익숙한 것은 고사하고 참으로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이름들입니다. 이름들에 익숙해지려면 이야기를 따라잡기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야기를 따라잡기도 쉽지 않습니다. 속된 말로 환장하지요. 1편에서 기억하는 것은 웅장한 사막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지구촌에 이런 곳이 있는 모양이지요? 글쎄 소위 컴퓨터로 만든 가짜인가요? 아무튼 대단합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비행체, 하기야 영화 ‘스타트랙’에 등장하는 ‘엔터프라이즈’ 호도 대단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배경이 우주공간이 아니라 땅덩이 위가 되니 규모가 더 커 보입니다.
어쩌면 몰락한 가문 ‘아트레이데스’에서 살아남은 ‘폴’이 메시야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폴은 프레멘 종족과 함께 살며 그들과 하나가 되려 합니다. 하기야 그들의 힘을 빌어야 바라는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거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황제를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 주변에는 황제를 따르는 제후들이 둘러있습니다. 혼자서 할 일이 아니지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활용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그래도 프레멘 종족과 나란히 할 만한 능력을 지니려고 그 사막에서만 생산되는 ‘스파이스’를 복용합니다. 목숨을 거는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쩌면 죽어야 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 더욱 메시야로서의 입지도 확고해집니다.
복수는 하지만 목적이 복수는 아닙니다. 사실 평화입니다. 전 우주 제국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잔인한 성품의 통치자들은 제거하되 다른 대부분의 제후들과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조건입니다. 물론 그것마저 쉽지 않습니다. 각각 바라고 추구하는 욕구들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우선은 황제와의 유대관계를 화목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은 혼인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용되는 책략입니다. 소위 정략결혼입니다. 혈연을 맺으면 매우 탄탄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미 사랑하는 상대가 있을 때입니다. 어떻게 하지요?
폴은 이미 아라키스 행성의 토착민(프레멘) 중 ‘차니’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스파이스 때문에 황제의 식민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 통치자는 무자비하게 프레멘을 다룹니다. 당연히 원수지간이 됩니다. 폴은 그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합세하여 자신의 원수를 갚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비슷한 처지가 되어 있는 셈이지요. 그런 가운데 폴은 이미 꿈속에서 종종 차니를 보아 왔습니다. 이제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함께 살며 함께 전쟁도 수행하고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또 한편 프레멘 속에는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들어있고 폴을 그 대상으로 여깁니다. 시간이 흐르며 폴의 언행 속에서 그런 속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믿게 됩니다. 아무려나 차니는 믿지 않습니다. 그냥 연인일 뿐입니다.
타 종족이 껴들어 통치자가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한 특별한 점이 있어야 하겠지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다른 종족 사람의 통치를 받을 수 있답니까? 속된 말로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닙니까? 폴을 처음 만났을 때 프레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그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시하고 있습니다. 쉽게 믿고 따르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의심하며 따르지 않는 무리도 있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뢰를 받는 일이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메시야로 세상에 왔지만 따르는 사람은 몇 안 되었습니다. 막말로 겨우 12명 남겨놓고 떠나셨습니다. 물론 그 뒤에 따르는 사건들이 사람들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폴은 점점 능력을 나타냈고 프레멘은 더욱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사막의 무시무시한 벌레가 공포의 대상이지만 다룰 줄 아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무기가 되어줍니다. 그 힘을 이용하여 드디어 원수를 갚습니다. 그리고 황제와도 맞닥뜨립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실 목적은 복수만이 아니었습니다. 전 우주 제국의 평화입니다. 폴은 그럴 만한 자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막강했던 ‘레토’ 공작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묘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합니다. 신약성경의 시작을 상기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폴이 그 신비를 안고 있다고 비춥니다. 참으로 대단한 서사입니다.
황제까지 굴복시키지만 그렇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막강 제후들이 있습니다. 폴이 황제를 이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다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폴이 지니고 있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사랑하는 차니를 어찌 해야 합니까? 우주 평화를 위해 황제의 딸과 정략결혼을 선포했습니다. 그 광경을 차니가 보고는 뒤돌아 나갑니다.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고백하였지만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제후들과의 한판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뛰쳐나간 차니는 어디로 갈까요? 후속편을 다시 기다리게 만듭니다. 영화 ‘듄 - 파트2’(Dune: Part Two)를 보았습니다.
마침내 이를 곳
새해를 맞은 지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물론 점점 더 나타나겠지요. 지난 년말 새해부터 무엇이 달라지나 신문 한 면을 차지하며 소개된 적도 있습니다. 국가 사회적으로 달라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 서민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공공요금과 물가가 오르리라는 것이겠지요. 그런 우리들 사회 속에서 달라지는 것 말고 이 대자연 속에서 아니면 우주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태양은 여전히 동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질 것입니다. 겨울은 춥고 곧 봄이 올 것입니다. 창 8 : 22 말씀대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그러한 속에서 우리는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을 맞은 우리들 마음이 다릅니다. 그렇지요? 2023년의 하루가 아니라 2024년의 하루를 맞은 것입니다. 똑같은 하루인데 다릅니다. 어제 본 그 태양인데 다릅니다. 어제 본 그 집이고 그 학교이고 그 직장이고 그 사회, 그 교회입니다. 하지만 다릅니다. 왜 다르지요? 우리의 새 희망과 소망이 담겨지기 때문에 다릅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 우리의 희망을, 우리의 소망을, 우리의 꿈을 담게 해주셨습니다.
다시 시작한 1년 52주 속에도 우리의 꿈이 들어갑니다. 우리의 소망이 담깁니다. 일부 횡재한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지난 한해를 지나오며 탄식하고 가슴아파하며 지나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출발합니다. 비록 우리 앞이 아직도 캄캄하고 이렇다 할 분명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출발을 하였습니다. 여전히 불평과 원망만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일 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한 번도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는 백성하고는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나간 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전진을 막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아이 성으로 진격합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는 적들에게 패퇴합니다. 금방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교훈입니다. 그것 때문에 가나안 정복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아픈 패전에는 앞으로 승승장구해야 할 교훈이 있었습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2024년을 내주셨습니다. 지나가 버린 아픔을 다시 미리 쏟아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 : 34) 지난 한해 아팠으면 그것으로 끝냅시다. 그걸 새해까지 끌어올 필요가 무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아이 성 앞에 주저앉아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의 사명은 가나안을 향한 전진이지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은 그러한 이유를 말씀하시고 그 목적하신 바를 말씀하십니다. 듣는 자가 복이 있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1. 우리가 지나온 길은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봅니다. 출 1 :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한 마디로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는 작전까지 시행하였습니다. 15 - 16절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이 모든 육신의 괴로움과 마음의 아픔을 뭐라 표현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출 3 :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그래서 하나님은 한 지도자를 불러 세웁니다. 모세를 택하여 당신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십니다. 우리가 그 모든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애굽을 떠납니다. 게다가 빈손으로 떠납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당신 백성이 그 동안 수고한 대가를 다 받게 하십니다. 출 12 : 35 - 36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얼마나 신났을까요? 재물까지 취하여 자유의 몸이 되어 나옵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진다 생각한 애굽 사람들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홍해에 모두 수장시킵니다. 그 놀라운 광경까지 다 보았습니다. 백성이 바다를 건너 그 광경을 보고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출 15 : 1 - 2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아멘!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나온 곳이 어디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였습니까? 아닙니다. 그 땅에 대한 설명을 보겠습니다. 신 8 :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위험한 광야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 위험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물이 없어 갈증을 겪어야했고 불뱀에게 물려 많은 백성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요?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정탐하고 와서는 그 불평이 극에 달합니다. 민 14 :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뭐라 합니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옛날 종살이하는 것이 낫겠다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죽느니 차라리 돌아가서 노예생활이라도 해서 생명 부지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처음 교회 나오니 마음도 평안해지는 것 같고 사람들도 따뜻하게 대해주고 좋았습니다. 차츰 익숙해지니 번거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 저런 모임에 참석해라, 성경공부 해라, 봉사해라, 기도해라, 헌금해라 등등 왜 이렇게 교회는 하라는 것이 많은가 짜증스러워집니다. 더구나 뭔가 했는데 수고했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아니면 자기만 하나 시기합니다. 그러니 감사보다는 불평이 생기기 쉽습니다. 기쁨보다는 짜증이, 은혜보다는 원망이 생겨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까지 납니까? 교회 그만 다닐까? 아니면 조금 낫다면, 교회를 옮길까? 교회가 왜 이 모양이지? 마음이 상하고 귀찮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갈등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마음과 실제 당하는 아픔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서 분란이 생겨 선량한 성도들의 마음을 갈기 발기 찢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데리고 나오신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발을 디딘 곳은 가나안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먼저 광야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입니다.
2. 하나님의 목적
광야는 광야입니다. 우선 물이 없습니다. 그곳은 경작해서 식물을 생산해 내는 곳이 아닙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사막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도 없고 먹을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광야로 인도하셨는데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굶어 죽었습니까? 아니면 갈증으로 목이 타서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곳 광야에서 자기 수명대로 살았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을 도대체 어떻게 살 수 있었습니까? 물은 어디서 나고 먹을 양식은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신 8 : 15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 말씀 속에 우리 생명의 필수품인 물과 양식이 어떻게 공급되었는지 나옵니다. 어디서 나왔습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이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는 대단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광야에서 누구의 힘으로 살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요 생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할 수도 없거니와 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보내셔서 우리의 죄 값 곧 사망을 십자가에서 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뒤를 따라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았지만 그 다음의 삶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지 아니하시면 하루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로 가는 성도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사실은 두 사건이 하나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선 만나 사건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신 8 :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우리 육신에 양식이 필요하듯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반석인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반석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즉 예수께로부터 생명의 말씀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가 성 야곱의 우물곁에서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말씀합니다. 요 4 : 13 -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구원받았어도 하나님의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을 먹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애굽에서는 자기네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힘들기는 했어도 먹을 것은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불평한 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 16 : 2 - 3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렇지요? 애굽에서는 고기 가마 곁에 앉았었고 떡을 배불리 먹었답니다. 그런데 광야는 그렇지를 않다는 것이지요. 교회 생활이 힘들고 짜증나면 세상에서 멋대로 지내던 때가 생각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곳은 돌아가서는 안 될 곳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면 장래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영원한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3. 우리는 마침내 이루실 하나님의 복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고 소원하는 대로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애굽보다도 힘든 광야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왜 이런 과정을 지나가야 합니까?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신 8 : 15 - 16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첫째는 우리를 낮추고 시험하시는 과정이고 결과적으로는 복을 주려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광야를 지나며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마침내 주시려는 복을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때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다고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까지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 값인 사망을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부르짖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마지막 고통의 울부짖음조차 외면해야 하셨습니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이루신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팽개치고 다시 세상으로 가겠다고요? 그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정성스럽게 마련한 선물을 건네주었는데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그 선물을 쓰레기통에 쳐박는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박살을 내든지 아마도 철천지원수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모욕이 어디 있겠습니까? 히 2 :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우리가 지난 한해 어렵고 힘든 광야 같은 생활을 지나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요단을 건너야 할 때입니다. 힘든 여정을 지나왔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것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 요단을 믿음으로 건너야 합니다. 우리를 낮추고 시험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고 결과는 천국과 영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넌 것도 배를 만들어 타고 건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믿습니다. 마침내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이 광야 길이 된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바와 그 인도하심과 그 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신 말씀대로 이루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자신 있게 또 한 해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믿음의 승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구원과 영생이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시 133 :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이 복을 명하셨습니다. 그 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도, 그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도,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짊어지신 것도, 모두 무엇을 위함이라고요? 영생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영원하신 분인데 그 자식들은 와서 죽고, 또 와서 죽고 한다면 아버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은 빨리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 또한 그 날을 소망하며 살고 있는 줄 믿습니다. 단지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훈련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은 바로 천국입니다.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배워 알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7족을 싸워 물리치고 정복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 길을 막고 있는 사단 마귀의 훼방과 싸워 이겨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싸웁니까? 어떻게 정복하렵니까? 하나님 백성의 무기는 오직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거짓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말씀 가지고 싸울 수 있습니까? 무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더구나 그 무기를 사용할 줄도 모르면서 적과 싸울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대적의 힘을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살후 2 : 9 - 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리의 등불을 확실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진리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들 다 아는 해라 말라 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시고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 바르게 알고 믿고 그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대적하여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루려 하시는지도 모르고서야 어떻게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하나님 약속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시는지, 그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모세를 통하여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신 18 :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 보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거짓목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단의 종입니다. 그들과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그들을 쫓아내야 온전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목적지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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