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젓국
장석주
윗집 태정이네 어머니가 애호박 두 덩이를 안고
어둑어둑한 길 밟으며 내려와 놓고 간다.
오늘 저녁엔 저걸로 호박젓국을 끓이자.
싸락눈이 창호지 문을 싸락싸락 때리는 초겨울 저녁나절,
어머니는 쌀뜨물 받아 호박젓국을 끓이셨다.
그 호박젓국이 어느덧 내 피와 뼈가 되었을 터다.
썬 호박과 다진 마늘과 새우젓과 고춧가루들이 뒤엉켜
냄비 속에서 호박젓국이 끓는다.
애호박이 제 속에 품은 향긋한 흙냄새와
진국을 기어코 토해낸다.
이 슴슴하고 간맞은 것들을 앞에 놓고
뜨거운 밥 한 공기를 거뜬하게 비우고 나니 속이 든든하다.
배 부르자 멀리 있는 늙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밤하늘엔 집 나온 별들이 아까보다 더 많아졌다.
된똥 누는 미운 일곱 살짜리 아들 하나를 슬하에 거느리고
밤의 적요가 사방에 꽉 차 있다.
일곱 살짜리 아들이라니,
가망 없는 희망이다!
오, 나는 적요의 문중이다, 새초롬한 앵두나무 두 그루와
어여쁜 시냇물 소리나 키우는 수밖에 없다.
신흥사 저녁예불 알리는 범종 운 뒤
설악산 화채봉 능선 위로
지금쯤 보름 지난 둥근 달 불끈 떠올랐을 게다.
절벽저자장석주출판21세기북스발매미등록
『절벽』(세계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