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집 제7권 = 잡저(雜著)-퇴계 선생 묘지 서〔退溪先生墓誌敍〕
황명(皇明) 융경(隆慶) 4년(1570, 선조3) 경오 12월 8일 조선국 퇴도 이 선생께서 퇴계 한서암(寒棲菴)에서 돌아가셨다. 묘표에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는 훈계를 남기고, 또 다음과 같이 스스로 명(銘)을 지었다.
태어나선 몹시도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해선 몸에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 즐겼고 / 中何嗜學
늙어서는 어찌하여 벼슬하였나 / 晚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아득하기만 했고 / 學求愈邈
벼슬은 사양하면 더욱 내려졌네 / 爵辭愈嬰
벼슬길에 나아가선 넘어졌었고 / 進行之跲
물러나 은거할 뜻 굳기도 했네 / 退藏之貞
나라 은혜 몹시도 부끄러웠고 / 深慙國恩
성인 말씀 참으로 두려웠었네 / 亶畏聖言
산은 높이 솟아 있고 / 有山嶷嶷
물은 졸졸졸 흘러가누나 / 有水源源
벼슬하기 전으로 되돌아가서 / 婆娑初服
뭇사람들의 비방을 줄였도다 / 脫略衆訕
나의 회포 여기에서 막히었으니 / 我懷伊阻
나의 패옥 그 누가 어루만지랴 / 我珮誰玩
옛사람들 모습을 떠올려 보니 / 我思古人
실로 이런 나의 맘을 먼저 얻었네 / 實獲我心
그러나 어찌 알리, 후세 사람들 / 寧知來世
오늘의 이내 마음 알지 못할 걸 / 不獲今兮
근심스러운 가운데도 즐거움 있고 / 憂中有樂
즐거움 속에서도 걱정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따라서 돌아가노니 / 乘化歸盡
다시 또 그 무엇을 구하겠는가 / 復何求兮
대사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다음과 같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선생의 휘는 모(某)요, 자는 모(某)이며, 예안(禮安)에 살았고 선대는 진보(眞寶)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70에 한가로이 은거하였다. 아, 선생은 벼슬이 높았으나 스스로 구한 것이 아니요, 학문에 힘썼으나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머리 숙여 부지런히 하여 거의 허물이 없었다. 옛날 선현과 비교하니 누구와 낫고 못한가. 산이 평지 되고 돌이 썩는다 하더라도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함께 오래 갈 것을 나는 아노라. 선생의 옷과 신발이 이 언덕에 묻혀 있으니, 천추만세에 혹시라도 짓밟는 일이 없을지어다.”
덕홍이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6세조 휘 석(碩)은 밀직부사이고, 5세조 휘 자수(子脩)는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고조의 휘는 운후(云侯)인데 벼슬이 군기시 부정으로 통훈대부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정(禎)인데 벼슬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祖)의 휘는 계양(繼陽)인데 성균 진사로 자헌대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예안(禮安) 온계리(溫溪里)에 이거하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식(埴)이고 자는 기지(器之)인데 신유년(1501, 연산군7)에 진사가 되었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춘천 박씨(春川朴氏)인데 홍치(弘治) 신유년에 온계리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스스로 성리(性理)를 이해하였다. 성품은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고 온화하게 도를 체득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고 예(藝)를 모두 통달하였다. 무자년(1528, 중종23)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갑오년(153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도산(道山) - 독서당 - 에서 독서하고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경전을 논하였다. 두 번 고을 수령으로 나아가 - 풍기(豐基)와 단양(丹陽) - 베푼 은덕이 백성들 뼈에 사무쳤고, 한 번 초빙하는 소명(召命)을 받고 - 무진년(1568, 선조1) -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린 뒤 - 기사년(1569) - 기미를 살피고 돌아와 도산(陶山)에 은둔하였다.
주 선생(朱先生)의 〈경의재기(敬義齋記)〉에서 ‘완락(玩樂)’이라는 말을 취하여 서재(書齋)에 편액하고, 〈경재잠(敬齋箴)〉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그려 벽에 걸었다. 그 가운데 단정히 앉아 즐기며 완상하고 완상하며 즐기면서 항상 귀신과 부모ㆍ스승이 위에 임하고 범의 꼬리를 밟는 듯, 봄날 얼음에 발을 붙이듯이 하였다. 고요하여 이(理)의 본체(本體)가 보존되지 않음이 없었고 감응(感應)하여 이의 작용이 행하여지지 않음이 없었다. 동(動)과 정(靜)이 서로 함양되고 체(體)와 용(用)이 떨어지지 않아 주자(朱子)의 태극의 이론에 부합되기 충분하였다.
학문을 요약하면, 경(敬)을 지켜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지극히 하였으며 자신의 몸에 돌이켜 실천하였다. 수레의 두 바퀴와 새의 두 날개처럼 양쪽이 모두 조화를 이루었고, 안팎의 덕스런 모습은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왔다.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여 하나의 소상(塑像)처럼 엄숙하였고, 가까이서 보면 온화하여 한줄기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하였다. 도에 나아간 깊이는 감히 가볍게 의론할 수 없으나 근심하면서 즐거워하고 공손하면서 편안한 것은 거의 도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 평생 모여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공부가 중단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하였으니, 이 앞서 하던 것이 ‘경(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시에 이르기를,
가파른 벼랑에 꽃이 피고 봄은 적적한데 / 花發巖崖春寂寂
시내 숲에 새가 울고 물은 잔잔하네 / 鳥鳴澗樹水潺潺
우연히 산 뒤에서 제자들을 대동하고 / 偶從山後携童冠
한가로이 산 앞에서 고반을 찾아보네 / 閒到山前看考槃
하였으니, 일상생활의 도리를 즐기며 위아래와 더불어 유행(流行)하는 것을 또한 볼 수 있다.
아, 학통이 끊어진 뒤에 태어나 전해지지 않는 도통을 얻었도다. 나아가고 물러남이 시종일관 법도에 맞는 이를 주자(朱子) 후에 찾는다면 선생 한 사람뿐일 것이다. 뜻밖에 얻은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연세 70에 병환으로 세상을 마쳤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해를 넘겨 올해 신미년(1571, 선조4) 봄에 현의 동북쪽 건지산(搴芝山) 남쪽 퇴계촌(退溪村) 동암(東巖) 위 자좌오향에 국장으로 장례를 지냈으며, 원근에서 참석한 이가 천여 명이었다.
저술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이학통록(理學通錄)》, 《천명도설(天命圖說)》, 《계몽전의(啓蒙傳疑)》와 문집 약간 권이 세상에 전한다. 중국의 문사(文士)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읽고 종일 완미(玩味)하고 이르기를 “동국(東國)에도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학문은 정자(程子), 주자와 다름이 없다.” 하였다. 이는 사신 홍천민(洪天民)이 남경(南京)에서 와서 전했다고 한다.
아들 둘이 있으니 준(寯)과 채(寀)이다. 채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준은 벼슬이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이르렀다. 현령의 아들 안도(安道)는 신유년(1561, 명종16)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이 사온서 직장에 이르렀다. 다음은 순도(純道)이고, 다음 영도(詠道)는 충주(忠州) 판관이며, 적(寂)은 선생의 측실 아들이다.
만력 22년(1594, 선조27) 갑오 겨울 10월 어느 날 문인 영천 이덕홍은 참람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주사(朱砂)로 두 명(銘)을 써서 무덤의 남쪽에 묻고, 그 뒤에 간략하게 서술하여 작자를 기다릴 뿐이다. - 융경 6년(1572, 선조5) 임신에 안동부에서 지석(誌石)을 구웠다. -
[주-D001] 한서암(寒棲菴) :
현재 안동시 도산면 퇴계 종택에서 시내를 건너 동편 산록(山麓)에 위치한 건물로, 이황이 50세 때에 터를 잡아 지은 방 둘, 부엌 한 칸의 집이다. 방(房)인 정습당(靜習堂)과 유정문(幽貞門)이 있다.
[주-D002] 모(某) :
기대승이 지은 묘지(墓誌)에는 “퇴계 선생의 휘는 황(滉)이요, 자는 경호(景浩)이다.”라고 하여 모두 실지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덕홍은 스승의 휘나 자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피휘(避諱)하여 ‘모(某)’라고 적었다.
[주-D003] 도산(道山) :
궁중에 있는 문고인 동관(東觀)을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동호(東湖)에 있던 독서당을 지칭한다. 세종 8년(1426)에 사가독서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때에는 집이나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그 뒤 성종 때 마포(麻浦)의 한강 가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고, 중종 때에는 동대문 근처의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다가 중종 12년(1517)에 두모포의 정자를 고쳐서 독서당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한강의 별영(別營)을 독서당으로 삼았다.
[주-D004] 경의재기(敬義齋記) :
《주자대전》 권78에 나오는 〈명당실기(名堂室記)〉를 말한다.
[주-D005] 경재잠(敬齋箴) :
주희가 장식(張栻)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그 빠뜨린 뜻을 보충하여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주자대전》 권85에 수록되어 있으며, 《심경(心經)》에도 수록되어 있다.
[주-D006] 백록동규(白鹿洞規) :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그 내용은 첫째는 부자유친 등 오륜의 조목, 둘째는 널리 배운다는 ‘박학지(博學之)’ 등 학문하는 순서, 셋째는 말을 충직하고 진실되게 하라는 ‘언충신(言忠信)’ 등 수신(修身)의 요결, 넷째는 의리를 지키고 이익을 꾀하지 말라는 ‘정기의 불모기리(正其義 不謀其利)’ 등 사무 처리의 요결, 다섯째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등 대인 관계의 요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朱子大全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주-D007] 범의 …… 하였다 :
두려워하며 조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말이다. 《서경》 〈군아(君牙)〉에 “내 마음의 근심되고 위태로운 것이 마치 범의 꼬리를 밟은 듯, 봄날의 얼음 위를 걷는 듯하다.[心之憂危, 若蹈虎尾, 涉于春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 멀리서 …… 듯하였다 :
사양좌(謝良佐)가 정호(程顥)의 인품을 평하기를 “종일토록 반듯이 앉아 있는 모습이 흙인형과 같았으나, 사람을 접할 때는 온전히 한 덩어리의 화기였으니, 이른바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그 앞에 나아가면 온화하다.’라는 것이다.[終日坐如泥塑人, 然接人, 則渾是一團和氣, 所謂望之儼然卽之也溫.]”라고 하였다. 《上蔡語錄 卷2》
[주-D009] 가파른 …… 찾아보네 :
《퇴계집》 권3에 〈계상에서부터 걸어서 산을 넘어 서당에 이르다[步自溪上, 踰山至書堂]〉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간재집》 권6 〈계산기선록 하〉에도 보인다.
[주-D010] 홍천민(洪天民) :
1526~1574.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달가(達可), 호는 율정(栗亭)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이조 참의, 대사간,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관(官)에서는 교지(敎旨) 작성에 뛰어나 여러 번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청렴하였다.
[주-D011] 주사(朱砂)로 …… 써서 :
자식의 마음으로 묘지명을 쓴다는 말이다. 정호(程顥)가 지은 아들 정단각(程端愨)의 묘지(墓誌)에 “장례의 기일이 촉박하여 지석을 새길 겨를이 없었으므로 벽돌에다 주사(朱砂)로 써서 광중에 지석을 넣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二程文集 卷4 程邵君墓誌》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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