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불교계 '라디오 스타'
정목 스님
찬송가 트는 비구니 DJ 법정스님도 팬이었네 한국 최초 비구니 DJ… 크리스마스라며 캐럴송 틀고 성경 낭송
"항의 들어오면 관두겠다" 배짱 진행, 방송국선 난리… 세상은 박수 보내더라
김윤덕 기자/조선일보 : 2012.06.02.
성호스님·조계종 폭로전 보며…인간이니 실수할 수 있다? 고마운 말이지만 자발적으로 승려 됐으면 안 그러는 게 맞아 진흙서 연꽃 피듯, 열심히 더 열심히 살아야
수행자가 어디 먼 산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든 힘든 사람들 안아줄 수 있어야 매일 한 줄씩 트위터 공양, 살기 싫다며 약 쥔 아저씨, 트위터로 살렸죠
“부처 자리가 따로 있나요. 한송이 한송이 꽃 피어난 자리가 부처 자리지요.”유나방송이 자리한 서울 부암동 숲에서 정목 스님이 자신이 심은 미나리아재비꽃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허영한 기자
등심붓꽃 오붓조붓 피어난 초여름 숲에서 민둥머리 여승이 햇살처럼 웃었다. 산짐승들 마실 물이라며 돌확에 물을 가득 채우고 웃는 그녀의 '호사'에 살짝 시샘이 일었다. 시절은 어지럽고 살림살이 나날이 힘겨운데, 수행자의 미소가 저렇게 천진해도 되는 것인지. 종단 비리로 초파일 연등 수가 확연히 줄었다는데, 꽃나무 앞에 합장하며 이토록 즐거워해도 되는 것인지.
그런데 대중(大衆)은 이 철없는 비구니승을 사랑했다. 매일 밤 그녀가 라디오를 통해 들려주는 노래, 트위터에 올리는 사진 한 장, 글 한 줄에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 '하룻밤 사이 대나무에 새순이 자랐네요. 여러분 마음도 이처럼 쑥쑥 자라시길' '오늘 하루 고단하셨지요? 이 물확에 그 마음 다 내려놓고 가십시오' '함박꽃이 웃으며 말하네요. 마음을 새삼스레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부처라는 소식을 전하러 왔노라고'. 이 소박한 치유의 언어들을 모은 책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공감)는 서가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초파일에서 하루 지난 29일, 정목스님을 만났다. 속세 나이 쉰둘이라는데, 말씨며 행동이 키만 자란 동자승 같다. "이 미나리아재비꽃을 보세요. (노란 꽃잎이) 장판에 니스 칠한 것처럼 반짝이지요? 나 참,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냐고요. 덜 외로우라고 이 탑 옆에 심었지요. 탑이 할아버지고 얘가 손자예요. 탑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손자가 듣고 사는 거지요.(웃음)"
◇공양하듯 트위터에 한 줄
―쓰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왜 스님의 책을 읽을까요?
"빠르게만 달려가는 세상에서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해 실패했다고 좌절하는 분들에게 '달팽이 속도로 가도 괜찮다'고 하니 위로가 되나 봐요. 정말 힘든데, 누군가 '너 힘들었지?' 하고 알아주면 눈물이 왈칵 나잖아요. '괜찮아, 그만하면 잘했어' 하고 다독이면 용기가 불끈 솟고요. 초파일에 젊은 군인 한 분을 만났어요. 성격 괴팍한 중대장에게 이 책을 드렸더니 그분 말씨와 행동이 바뀌어서 부대원들이 편안해졌대요. 감사하대요.(웃음)"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프랑스 시(詩)에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섣불리 도우려 하지 말라, 성급한 도움이 그를 화나게 하거나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시구가 있지요. 달팽이의 속도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더디지만 우주의 시야에서 보면 지극히 합당한 속도라고요. 도와준답시고 달팽이를 집어 물가에 데려다 주는 것이 그를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지요. 저마다 자기 속도로 살아갑니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높게 우리는 무엇을 갈구하지만 실제로 그런 건 행복과 상관없는 경우가 많지요."
◀ ‘한국 중들에게 으뜸가는 덕은 겸손이 되어야 한다고 그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나 자신에게도 그런 덕이 모자라 늘 반성하고 있어요.’정목 스님이 생전의 법정 스님이 보낸 편지들을 읽고 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열여섯 살에 출가한 수행자가 어쩌면 이렇게 세인들 마음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절간의 사는 모양새가 속세와 다름없기 때문일까요.
"다를 바 없지요. 인간으로 겪는 갈등과 고통은 엇비슷하지요. 사람들 살아가는 풍경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내 몸에 일찌감치 늙은 중이 들어앉았기 때문이에요.(웃음) 사미니 지나 아직 비구니계도 받지 못한 스물한 살 때부터 노인들 고민을 들어 드렸으니 말 다했지요. '사랑의 전화'에서 상담봉사를 하면서는 완전히 애늙은이가 되었어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철야하며 전화상담을 받는데 별별 사연들이 다 있데요. 사찰 담장 너머에서 상상도 못할 고통을 안고 살아가더군요. 상담 마치고 새벽에 거리로 나서면 어질머리가 나요. 그때 알았지요. 신도들이 불단에 바치는 시줏돈 한 푼, 과일 한 알이 얼마나 고된 과정을 거쳐 오르는 것인지. 서울대 병원에서 5년간 지도법사 할 때는 병실과 영안실을 집 삼아 질병과 죽음의 사연들을 듣고 또 들었는데, 그러다 일찍 늙은 거예요.(웃음) 지금 드는 생각은 수행자의 유창한 법문도 중요하지만,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안아주는 것도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코끼리만 한 남자들도 등 한 번 두드려주면 금세 눈물을 뚝뚝 흘리니."
―수도승이 늘 대중 속에 있어야 합니까.
"기도라는 것이 대중의 삶 속에 있지 않으면 공염불이에요. 나 홀로 수행하는 것 또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자신을 위한 수행이니 견딜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람들을 만나 함께하는 것은 그의 우주와 나의 우주가 만나야 하니 몇 배의 정성이 필요해요."
―트위터를 즐겨 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절집에선 불자들만 만나지만 트위터로는 불특정다수를 만나지요. 남성들이 많고요.(웃음)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트위터를 통해 알았어요. 트위터에 공양 올리듯 글 한 줄, 사진 한 장씩 올립니다. 다른 분들 팔로(follow)도 해요. SNS의 폐해가 많다지만, 무엇이든 쓰는 자의 마음에 따라 다르지요. 같은 물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듯. 더 이상 살기 싫다고 손에 약을 쥐었던 40대 남성을 트위터로 알게 되었는데 그분을 트윗으로 매일 체크하면서 DM(다이렉트 메일)을 계속 보냈더니 지금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십니다.(웃음)"
◇나 자신의 허물부터 보라
―성호스님과 조계종단의 폭로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먹물옷 입고 있는 한 사람으로 입을 열어 할 말이 없습니다. 무슨 변명과 참회가 통할까요. 다만 승단에는 진리를 찾아 수행의 길을 가는 고귀한 분들이 더 많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님도 인간인데 그런 실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참 고마운 말인데요. 승려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어야 하는 게 맞지요. 승려의 삶을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성호스님의 행동은 어떻게 보십니까.
"선문답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어요. 댓돌 위에 신발을 벗을 때 고개를 숙이고 발아래를 내려다보라는 뜻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보기 전에 나 자신의 허물을 살펴야 해요."
―어차피 한 번은 터져야 했을 일이라고도 합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핍니다. 티베트불교의 수행법 중에 '샌드 만다라'라는 게 있어요. 스님 수십명이 모래에 만다라를 그립니다. 짧게는 석 달, 길게는 1년에 걸려 완성하는데 마지막엔 그렇게 공들여 새긴 만다라를 강물에 확 쓸어버립니다. 쌓았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허물면서 열심히, 더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우리 불교계는 비구승이 수적으로도 많고 영향력도 큽니다. 상대적으로 비구니승의 입지는 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도권에서 비구승들이 오랫동안 일해왔으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요즘처럼 치유를 원하는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 없이 수행하는 비구니승들의 역할이 큽니다. 비구다, 비구니다는 중요하지 않아요. 결국 자기 수행의 몫입니다."
―얼마 전 비구니계의 큰 어른 대행스님이 입적하셨습니다.
"공생공심(共生共心)이 그분의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사찰과 승려라는 존재가 어디 먼 산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퇴근길에, 혹은 시장바구니를 든 채로 언제든지 찾아와 자기 괴로움을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그래서 도심 한복판에 (한마음)선원을 만드셨고요."
―1988년 불교와 천주교, 원불교의 여성 성직자들로 구성된 삼소회를 만드셨지요.
"몇몇이 친하게 교류하던 중에 88 장애인올림픽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없을까 생각했어요. 자원봉사를 하려 했더니 유니폼을 입어야 한대서 그만두고, 대신 종교별로 30명씩 모두 90명 인원의 합창단을 구성해 음악회를 열고 그 수익금을 장애인올림픽 기금으로 보냈지요. 수녀가 찬불가를, 비구니가 성가를 부르니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하더군요. 교리와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 사이 절벽을 만들어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만큼 슬픈 일도 없지요. 연습을 하도 열심히 했더니 새벽 예불하러 올라가는데 입에서 '주찬미, 주찬미'가 나와 혼이 났답니다.(웃음)"
◇법당에 감춘 통기타 한 대 들고
'삼소회'는 우리 사회 종교 간 교류와 화합을 싹틔웠다. 정목이 그 중심에 있다. 1990년 불교방송 개국과 함께 '한국 최초의 비구니 DJ'가 되어 활약할 때에도 정목은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캐럴송을 틀고 성경구절을 낭송해 반향을 일으켰다. 요즘은 인터넷방송 '유나(una.or.kr)'를 통해 세계 35개국에 마음치유 방송을 내보낸다.
◀ “음악도 수행, 잘 노는 것도 수행.”정목스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DJ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허영한 기자
―팝은 물론 뉴에이지, 인디언음악까지 정통하시다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속상한 일 있으면 뒷동산에 올라가요. 나무 아래 서서 혼자 멋들어지게 노래 한 곡조 불러젖히면 나쁜 감정이 다 사라졌지요. 출가해도 그 습(習)이 남아 절집 청소하고 법당 걸레질할 때 노래를 흥얼거리면 큰스님이 '노래 말고 염불 좀 하라'고 꾸짖으셨어요.(웃음) 그래도 기타를 몰래 구해 법당 안에 숨겨놓고는 어른 스님들 외출 나가시고 안 계시면 혼자 교본 보고 연습했지요. 동국대 다닐 때인데, 간혹 최전방 부대 법사로 나가 법문을 해야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웃겨요. 내 또래 군인들을 앉혀놓고 법문을 하는 거잖아요? 민망도 하고, 군인들이 심심할 것 같아 기타로 찬불가를 연습해 들려줘야겠다 작정한 거지요."
―반응이 좋았습니까?
"무식이 용감하다고, 군인들 중에 기타 도사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데도 비구니가 최전방까지 와서 기타를 들고 연주하는 게 신기한지 엄청 좋아하데요. 그러다 큰스님한테 들켰지요. 중이 염불은 안 하고 어디 노래 연습질이냐며 기타를 마당에 내던지시는데, 꾸지람 때문이 아니라 마당에 부딪혀 끊어진 기타줄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데요.(웃음)"
―운명처럼 불교방송 DJ로 발탁되셨군요.
"살다 보니 그런 시대가 온 거지요.(웃음) 불교방송 개국하면서 클래식 음악 진행자로 와달라고 해요. 비구니 DJ라고 일본 NHK가 취재를 오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송이 찾아오고. 솔직히 내겐 고역이었어요. 음악사전 갖다놓고 밤새 공부하다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절에서 중노릇하는 것보다 어렵더라고요.(웃음)"
―종교를 떠나 애청자들이 많습니다.
"음악이 무슨 죄예요. 가끔 좋은 성경구절도 읽어드리고, 찬송가도 틀어요. 그때만 해도 파격이라 불교방송 높은 분들이 결사반대했는데, '항의 들어오면 내가 그만두겠다' 하고 진행해버렸지요. 그런데 세상은 불교의 관용정신에 박수를 보냅디다. 그 덕에 잘리지 않고 지금까지 DJ를 해요.(웃음)"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입니까?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라는 가수요. '인생이여 고맙습니다'라는 노래를 정말 좋아해요. 슬픔과 고뇌가 승화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활짝 열리지요. 우리나라 가수 중에는 장사익이 최고예요. 온몸이 소리통이지요. 모든 상념들을 노래에 실어 떠나보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요."
―음악은 포교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백 마디 법문보다 음악 한 소절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요. 1시간 내내 경전을 읊는 게 아니라, 경전은 3분만 읽고 나머지는 그와 관련된 음악을 들려주면 사람들 마음에 부처님 말씀이 그냥 젖어듭니다."
◇마음에 '사막'을 만들면
―법정스님도 정목스님 애청자였다고 들었습니다. 편지를 주고받으실 만큼 가까우셨다던데요.
"강원도 오두막 가시는 길에 제 방송을 들으시고 좋은 책들을 보내주셨어요. 저도 좋은 음반이랑 오두막에 필요한 물건들 구해 보내드렸는데, 모든 사물이 스님 손에만 들어가면 영혼이 깃든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인디언의 '레인 스틱(비내리는 나무)'을 보내드렸더니, '등잔 아래 앉아 레인 스틱을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이면 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네, 마음이 맑아지네' 라고 편지를 써 보내셨지요."
―법정스님의 성정이 급하고 까탈스러웠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가끔 필요한 물건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시려고 아랫마을까지 내려가 제게 전화를 하셨는데,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전화를 안 받으면 '수행자가 밤늦도록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것이냐''다시는 전화하지 않겠다'며 호통을 치시는 편지가 며칠 뒤 반드시 날아와요. 다른 스님들 같으면 권위를 위해서라도 속엣감정을 표현 안 하실 텐데 법정스님은 그렇게 불 같은 데가 있었어요. 천진하셨죠.(웃음)"
―임종을 앞둔 분들이 스님을 많이 찾는다 들었습니다.
"밤 12시에 택시를 타고 병원에 달려간 적이 있어요. 내 방송으로 위안받던 아내를 위해 그 남편이 의사에게 부탁해 3시간을 생명 연장했더라고요. 얼굴이 이미 흑색으로 변해버린 그 보살의 손을 잡고 속삭였어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이 이생에 살아 있을 때 했던 좋은 일들만 기억하라고,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은 다 여기 내려놓고 가라고, 당신이 이 세상에 와서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만 기억하고 가라고. 임종 후 얼마 지나 그 댁에서 좋은 일에 써달라고 큰돈을 보내오셨지요. 그 돈을 연평도 사건 터졌을 때 성금으로 보냈습니다. 자식 없던 그 부부가 평소 젊은 군인들 생활에 애정이 많았거든요."
―뜬금없습니다만, 스님은 어쩌다 수행길에 들어섰습니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요.(웃음) 아버지 싯다르타가 아들이 도시로 도망친 뒤 고통스러워 뱃사공에게 생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사공이 말하지요. '강물에게 물어보라'고.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 곤란한 것만 묻는다고 출석부로 맞았어요. 그 무렵 싯다르타를 읽은 건데, 강물에게 물어보라 하니 출가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웃음)"
―반세기 가까운 스님의 수행길을 지탱해주는 건 무엇입니까.
"물질의 풍요에서 종단의 사태가 오고 수행자의 구도가 흔들리지요. 내 마음이 물질로 가려 할 때, 나태해지려고 할 때 사막에서 극한의 수행을 했던 티베트 성자 밀라레파의 십만송을 읽습니다. 나의 마음에 사막을 만들고, 침묵과 기도 가운데 고독을 찾습니다."
―힐링, 치유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진정한 힐링이란, 감로와 같은 단비가 내려 나의 갈증뿐 아니라 내 옆에 심어진 꽃나무의 갈증까지도 함께 해결하는 것이지요. 나와 내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의 인생이 아름답게 완성되도록 칭찬과 지지를 아끼지 마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