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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분들과 인사 나눕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네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시작한 종교 개혁 하늘소망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몇 주년을 맞이했죠?
9주년을 맞이했으니까 종교 개혁은 몇 년째예요?
509년 우리는 종교 개혁에 참 밀접한 교회니까 요 정도는 좀 기억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종교 개혁의 5가지의 고백을 중심 고백이 있죠?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한번 같이 그 고백들을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오직 성경 시작,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우리가 이제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오직 시리즈.
근데 이게 굉장히 긴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치 박물관에 걸어둔 어떤 표와 문구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종교 개혁주의를 맞이하면서 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이 표어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길 원합니다.
정말 나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가?
우리는 정말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 가운데 우리의 신앙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가?
우리의 예배와 섬김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여러분 이 질문은 결코 가볍게 우리가 여길 수 없습니다.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건강해진다. 그렇지 않죠? 예배가 잘 갖춰져 있고 세션이 갖춰지면 예배 교회가 건강해진다.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교회는 본질을 저절로 지키게 될까요?
역시 그것도 아닙니다. 교회는요 신앙인들은 날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의 신앙이 무엇으로 서 있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 2장은 그 근원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한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교회가 다시 서는 출발점은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어요.
교회가 다시 서는 출발점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 속에 좀 지친 분들이 계십니까? 아니면 오랫동안 상처받은 그런 분들이 계십니까?
교회를 위해 수고한 여러분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처음 사랑과 감사가 회복되는 귀한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그래서 제목을 은혜로 다시 서는 교회라 이름 지었습니다. 먼저 이 본문의 배경이 되는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면 이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쓴 건데요. 이 편지는 에베소가 어떤 곳이냐면 지금 트리키의 서쪽 당시의 소아시아의 가장 큰 항구 도시가 에베소입니다.
물자와 사람이 굉장히 많이 오고 가는 상업 도시로서 아주 큰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있어서 종교, 경제 다양한 것들이 얽혀 있는 아주 큰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사도 바울은 3년이라는 시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에베소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교회를 세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의 지금 위치는 어디에 있냐면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다. 편지 안에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 된 나, 주 안에서 갇힌 내가 쇠사슬의 메인 사신 이렇게 자신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옥에 갇혀 있는 그런 사람이 자유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이 자기가 지금 억울하고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하는 불평이나 불만이나 뭔가 하소연을 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첫머리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신 일을 찬양하고 있어요. 지금 바울의 상황은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서 정말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는데 에베소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1장에서 3장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뭘 했는가라고 하는 내용이 중점적입니다. 1장에서 3장까지 그리고 후반부를 보면 4장에서 6장까지는 그러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뭘 했는데 그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고 하는 걸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함께 읽은 오늘 2장 말씀은 전반부에 해당하는 말씀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원래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0절 안에 엑기스같이 모아놨어요.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10절 말씀을 작은 복음서라고 별명을 지어줄 정도로 아주 복음의 핵심이 담겨져 있는 구절입니다. 종교개혁 주일인 오늘 이 핵심적인 구절을 다시 한 번 깊이 살펴보길 원합니다.
말씀의 순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고 먼저 말하지 않아요. 너희는 하나님이 이렇게 너희에게 행하셨어라는 걸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순서가 왜 중요하냐면 먼저 명령을 하고 이야기를 할 은혜를 경험케 하는 게 아니라 은혜를 먼저 이야기한 다음에 그 은혜를 누리는 자로서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순서이고 종교개혁 당시 붙들게 된 순서입니다. 먼저 첫 번째 우리는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은 사람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죽었던 여러분들을 향해서 여러분들은 조금 아쉬운 또는 부족한 좀 쉴 수가 있는 이 정도 수준으로 노력하면 좀 더 나아질 사람 이 정도로 여러분들에게 지칭하지 않아요. 그 모든 대상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입니다.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 죽었다고 하는 걸 육체적으로 표현 했다라고 하기보다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이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잖아요.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죽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내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 대한 진단이에요. 지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육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들이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2절과 3절에 그 죽은 모습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다고 말을 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3절에 보면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고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그런데 여기 2절 3절에서 보면 2절에서는 너희가라고 말을 했다가 3절에 보면 우리도 다라고 말을 합니다. 자기도 포함시켜서 지금 이 대상자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한마디로 자기 이 말을 하고 있는 바울도 또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도 또 교회를 세운 사람들도 모두가 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도 장로님도 안수 집사님들도, 권사님들도 집사님들도 성도님들도, 우리 청년들도 학생들도 모두가 다 필요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 우리의 직분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수가 우리의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하지 않아요. 어쩌면 우리는 반복적으로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좀 거북스러움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도 나는 신앙 안에서 좀, 그래도 나는 신앙 밖에 있었어도 나는 그래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인데 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마다 신앙이 있든 없든 성품의 차이가 다들 있어요. 성경도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만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여러분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정확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냥 어느 정도 아프면 내가 진단하고 내가 그냥 약을 찾아가지고 먹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그렇게 간단한 것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되도록이면 전문가에게 의뢰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으면 정확한 진단을 잃어버린 채 신앙을 한다면 어떠한 위험이 우리에게 찾아오느냐 우리가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았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내가 이 교회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여러분 그 순간 우리는 은혜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공로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공로자들이 생길 가능성이 있어요. 역사가 오래된 교회일수록 더 그러합니다. 내가 예전에 뭘 했는데
물론 교회를 위한 수고는 너무 귀하죠.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눈물 흘린 여러분들의 그 모든 것들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수고의 대가가 구원이 아니라 수고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감사의 응답으로 헌신하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볼까요?
우리는 죽은 사람 이었다는 사실 그런데 4절을 보면 이제 전환이 이루어져요.
4절의 말씀에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 개혁 개정 성경에서는 이렇게 돼 있는데 원문을 보면 그러나 하나님은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에 3절까지의 말씀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굉장히 어둡고 죽었고 끌려 다녔고 노예와 같은 그러한 존재들이었는데 4절 말씀에서 주어가 이제 바뀌는 거예요.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는 이랬는데 이제 4절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우리는 여전히 죽어 있는 상태였고 죄의 노예였는데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지금 이런 은혜를 누리는 삶은 우리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먼저 행하셨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도 이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충분히 뭔가 선해지고 뭐 어떤 상태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아무것도 우리가 드릴 것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잘해주고 뭔가 나에게 은혜를 끼치는 사람에게 우리가 그 은혜를 갚는 건 당연하게도 여기고,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러분 아직 원수 되어 있는 그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사랑한다.
먼저 은혜를 베푼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포인트가 복음의 시작이에요. 복음은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죽어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5절 말씀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은혜가 바로 복음입니다. 여러분 나사로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면 요한복음 11장에 베다니에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지났어요.
예수님이 그 무덤에 이르러서 돌 문을 열어놓으라고 말을 할 때 옆에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음에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사람으로서는 이건 불가능. 그가 아파서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예수님이 오시면 뭔가 살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숨을 거두고 이제 육신이 썩어 들어가는 그 상황 가운데는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다라고 확정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이 큰 소리로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와라 그랬더니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의 배를 쌓인 채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때 나사로가 한 건 뭘까요? 이때 나사로는 그냥 무덤에 누워 있다가 예수님이 나와라 했을 때 나온 거예요. 나사로가 결심을 했습니까? 노력을 했습니까? 나서라는 그저 죽어 있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고 일어나 걸어 나온 것 그게 바로 나사로가 한 역할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상태와 똑같아요. 우리가 그런 존재였다는 것이죠. 여기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죽어서 그렇게 걸어나온 나사로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한마디를 더 하시죠.
사람들에게 풀어주어서 다니게 하라.
살리시고 나오게 하는 일은 주님이 하신 일이지만, 그것을 풀어주는 일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지금 현재 교회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일입니다. 죽음에서 살리신 사람들의 수의를 함께 풀어주는 공동체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이따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은혜가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하는 말씀을 실제 역사에서 확인케 한 한 인물을 소개합니다.
바로 존 뉴턴이라는 사람입니다. 존 뉴토는 신앙 교육을 어렸을 때 받으면서 자랐지만, 6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11살 때부터 배를 타기 시작합니다. 배에서 아주 거친 삶을 경험하게 되고, 해군에서 타령하고 붙잡혀 벌을 받기도 했고, 또 서아프리카에서 한때에는 노예와 같은 아주 비참한 삶을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 시절을 자신을 회고하는데 하나님을 멸시하며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회고합니다. 1748년에 뉴턴이 탄 배가 대서양에서 폭풍을 만나서 침몰하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때 밤새 그 폭풍 속에서 배에 물을 퍼내던 존 뉴턴이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 날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시작된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존 뉴턴이 이날부터 이제 신앙이 확 바뀌어가지고 신앙적으로 살았다고 말하지 않아요. 존 뉴턴의 신앙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도 몇 해 동안 노예 무역선의 선장으로 그는 살아갑니다. 신앙을 가진 뒤에도 자기가 가담한 일에 무게를 오랫동안 걸쳐서 깨달아 가게 돼요. 훗날 그가 목회자가 되고 1788년 노예 무역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그가 지금까지 가담했던 그런 나쁜 일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은혜를 경험했지만 그 은혜가 과거 자체를 완전히 깨끗하게 씻어줬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보다 오히려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할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돌이키기 위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이 존 뉴턴이 나중에 올리라고 하는 영국의 올리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목회를 하면서 찬송을 작사 작곡하게 되는데요. 그 작곡한 곡 중에 하나가 어메이징 그레이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찬양을 작곡했습니다.
존 유천의 말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억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것이 둘이 있습니다.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큰 구주시라는 것,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때 믿음 없던 방탕한 사람, 아프리카에서 노예 거래에서 종사했던 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자비로 보존되고 회복되고 용서받아 전에 파괴하려 했던 믿음을 전하는 자로 세움 받았다.
묘비에 이렇게 자신의 삶을 요약 정리해 새겼다고 합니다.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훌륭해서 그를 통하여 아주 우리가 즐겨 부르는 그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끝까지 기억하고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삶의 고백으로 그 찬송이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도요.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지금 이렇게 가고 있는데 과거의 어떤 상처에 매어 있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한 번 터지면 해결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밖에서 좀 싸우면 술 한잔하면서 야 하고 그냥 풀어버리면 끝나는데 교회 안에서 싸우면 아주 끝장을 본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기도했는데 이렇다고 하면서 막 자기 주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합니다. 무서워요. 신앙으로 이게 자기의 뜻을 만들어버리는 순간 끝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멀리 왔습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는데 내 신앙은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을 짓누르고 있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은혜, 이미 그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들의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은혜가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인정해야 해야죠. 그리고 돌이키고 필요한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있으면 책임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롭게 하셨다면 그 새로운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존 뉴턴이 그러했듯 은혜는 책임을 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질 힘을 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과거가 아무리 무거워도 십자가보다 무겁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연약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연약함보다 부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기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펼치십시오. 끊어야 할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바로잡아야 할 관계가 있습니까?
책임감 있게 한 걸음을 내딛어보시기 바랍니다. 어쩔 수 없어 포기하지 마세요. 무엇보다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완벽하니까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렇게 지속된다가 아니죠.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복음을 계속 붙드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서로 인정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보호해 주고, 그리고 책임질 일이 있다면 서로 책임지고 멈추지 않고 끝까지 복음의 그 안에서 회복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은혜로 다시 서는 교회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한번 따라 해볼까요?
다시 서는 교회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아멘 예,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자랑하기를 원해요. 이어지는 이제 5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는 말씀 뒤에 6절 말씀을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살리셨고, 그리고 일으키셨고 앉히셨다 이렇게 세 가지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게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무덤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무덤에서 살아나셨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앉히셨다는 말에 시제가 과거형인데요.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이 땅 가운데 좌충우돌하고 연약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이미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스도 안에 앉혀진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부는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고 내가 뭔가를 이루었을 때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우리는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지치고 낙심된 날에도 흔들리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힌 바 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이에요. 또한 이 말씀에 함께라는 말을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나를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우리를이라고 표현했어요.
여러분 은혜는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개인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살리신 사람들을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앉히십니다. 구원은 혼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받는 관계이지만 신앙은 결코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7절에서 그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7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이 7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 목적은 오는 여러 세대의 하나님의 풍성함을 보여주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로만 자랑하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은혜를 자랑하는 전시장이 아니라 은혜를 실제 은혜가 실제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 증거가 되는 장소임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이어지는 말씀 8절 9절은 종교 개혁의 심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한번 8절 9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너희는 그 은혜를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멘 예. 우리는 구원을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조차도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선물은 값을 치르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나는 자격이 이렇게 있습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9절에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오래 믿은 사람도 그리고 많이 섬긴 사람도 직분이 있는 사람도 자랑거리가 없는 거예요. 그저 은혜이고 우리는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죠. 이 진리를 온몸으로 붙든 사람이 바로 루터입니다.
루터가 1505년 길을 걸어가다가 벼락을 경험하죠. 그 죽음의 위기 속에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하게 되고, 그리고 그는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고 고해하며 살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때로 고해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열심히 회개하고 날마다 날마다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그럴수록 자신의 안에 평안함이 오지가 않는 거예요. 말씀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심판하는 두려운 기준으로 막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발견해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한마디 말씀 속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내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야 이렇게 제공되는 것이다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구나라고 하는 걸 깨닫게 돼요. 훗날 그때 그 상황을 낙원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종교 개혁이 한참 진행되는 과정 속에 루터는 보름스 제국 의회에 끌려가서 자신의 가르침,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철회해라 라고 하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말을 합니다. 성경과 분명한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는 한 철회할 수 없으며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고 하는 말씀을 한마디로 이 바울은 그 당시에 어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권력자들이 아니라 오직 말씀 위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나기 전 했던 한마디가 굉장히 중요한 핵심적인 메시지로 남아 있는데요. 그는 종이에 마지막 글을 남깁니다. 그 글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거지다. 이것은 참되다. 여러분 우리가 볼 때 지금 509년이 된 이 시기에도 종교 개혁을 기념을 할 정도로 우리가 참 이 종교개혁자들이 얼마나 큰 일들을 행했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행했다.
나는 종교개혁자다 이런 표현이 아니라 그가 생애 마지막 남긴 말이 나는 거지다 한마디로 나는 빈손으로 온 사람이고 나는 은혜를 구하는 사람, 오직 믿음, 오직 믿음의 자리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우리 안에 살아만 있으면요. 교회 공동체 안에 오늘날 많은 문제는 풀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거지라고 고백하는 순간 다른 사람이 거지 같은 모습을 보여도 그 사람을 정제할 수 없어요. 근데 내가 거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주변에 거지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신의 기준으로 정제하고 업신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한 가족이 된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도 허물어지셨다는 거예요. 은혜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뒤에 이어지는 11절 이하는 은혜의 공동체에 어떤 열매가 맺어지는지에 대해서 좀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제가 간단하게 읽어드리면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지금 에베소 교회 안에는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 신앙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모였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너무 담을 쌓고 살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생활적인 문화적인 모습은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 그들의 문화도 배경도 신앙의 경험도 달랐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가운데 일어나는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멀리 있었던 사람들이 가까워졌고, 은혜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씀이죠. 여러분들 가운데는 살아온 환경이 같은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사랑 환경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성격이 다릅니다. 처음 개척할 때부터 계신 분들도 계시고 중간에 들어온 분들도 계십니다. 근데 여러분 이런 차이가 교회 안에 갈등을 일으키는 씨앗들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를 한 몸으로 먹는 것은 우리가 다 똑같은 생각을 한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같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같은 구원을 받았고 같은 주님을 예배하고 같은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9절에 이렇게 선포해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오. 낙은 해도 아니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권소 가족입니다. 가족 안에서 이제는 함께 살아가는 자들 가족 구성원이 완벽하지 않다고 야 너는 완벽하지 않으니까 너는 가족에서 제거 이 가족은 별로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주지 못하네. 나는 이 가족에서 난 떠날 거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잖아요. 물론 가정이라고 해서 완전하고 또 그곳이 서로의 상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세우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가족 공동체지만 이 안에서 갈등의 요소는 늘 존재해요. 초대교회에서도 갈등의 요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를 인정했고,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적합한 사람을 세우고 함께 그 문제를 풀어갔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건강한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 안에 다양한 문제는 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다음 세대 아이들과 생각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요?
자녀들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이게 세대 차이가 얼마나 느껴지는지 몰라요. 아니 지금 이렇게 20년 30년 차이 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세대 차이가 5년, 10년만 나도 세대 차이를 느낍니다.
교회는 갈등이 없을 수 없어요. 갈등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겼을 때 숨기지 않고 복음으로 다루는 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진리를 훼손하거나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사랑이라는 말로 침묵하고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말하고 바로잡고 보호하고 회복하게 하는 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갈등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여러분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갈등의 요소는 늘 존재해요. 근데 갈등이 존재할 때 이 갈등이 있다고 건강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이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고 복음 안에 해결하고 함께 풀어나간 그게 건강한 교회라는 거예요. 나사로를 살리시고 난 이후에 그의 묶여 있는 것을 풀어주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했잖아요.
여러분 주님이 살리시고 우리는 수의를 풀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질문이 달라지는 거예요.
왜 저 사람들은 나처럼 같이 이렇게 열심히 예배하고 헌신하지 않을까?
혹시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로 바뀌길 바랍니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라는 마음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부딪히십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흘려보낼 수 있을까로 바뀌길 바랍니다.
저 사람은 왜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 혹시 여러분들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나는 말씀 앞에서 무엇을 먼저 바꾸어야 할까 로 바뀌길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끝나면요. 한번 이 말씀을 적용해서 평상시에 한마디 말 붙이지 않은 분들이 여기 계실 거예요. 지금 우리 여기에 같이 계신 분들이 인원이 우리가 한정되어 있는데 이 인원 안에서도요. 끼리끼리가 있어요. 아시죠? 지금 오늘은 그래도 좀 좌석이 몇 분이 바뀐 분이 계신데 거의 자기 자리도 딱 정해져 있고요. 밥 먹는 사람들도 정해져 있고요. 이야기 나누는 사람도 정해져 있어요. 지금 9년이 지났는데 어쩌면 한 번도 이 말을 맞춰보지 않은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한번 평상시 대화가 부족했던 그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한마디 말을 건네보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지쳐 보이는 분이 계시면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시고 함께 기도하겠다고 제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누군가가 보이십니까?
다가가셔서 감사합니다고 표현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이런 작은 걸음, 작은 우리의 수고가 모여져서 하나님의 온전한 가족 됨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로 다시 사는 교회는 우리 따라 해 볼까요?
모두가 빈손으로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공동체,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공동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한 가족으로 사는 교회. 네 그게 바로 은혜로 다시 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보면 우리 같이 읽습니다. 시작
아멘 아까 종교 개혁의 핵심 구절이 8 9절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8절과 구절만 읽고 멈추면 믿기만 하면 되고 삶은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 이런 식으로 오해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10절 말씀만 읽으면 열심히 선을 행해야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또 오해에 빠질 수 있어요.
바울은요. 이 8절부터 10절까지를 한 호흡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말하고 있어요.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고 선행을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순서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만드신 바라 저 부분이 바로 작품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성들여서 만든 작품이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작품의 가치는 작품 자체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작품을 누가 만들었느냐가 그 작품의 가치, 그 솜씨에서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며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때로 자랑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작품이라고요?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포이의 마음 여기에서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선한 일이 왜 필요할까요?
우리가 선한 일을 우리 스스로 뭔가 맺어보겠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이 그림을 보면 정확하게 이미지가 나오죠. 나무가 열매를 맺어서 살아 있는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그 나무에서 열매가 맺어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로서 삶을 살다 보면 선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정받기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굉장히 당연한 것 같고 이게 우리가 너무 쉽게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계산이 되어 버립니다.
나는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지?
나는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가? 오래 섬겼지만 혹시 기쁨을 잃어버린 채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 마음에 서운한 마음이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더 자신을 몰아붙이지 마시고 은혜의 자리로 먼저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지금 이 사역을 시작했지, 내가 지금 왜 이러한 예배 생활을 하고 있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먼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정리해 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모든 짐을 혼자 지는 사람이 아니라 주신 자리에서 지혜롭게 섬기고 다른 사람도 함께 세우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10절 하반절을 보면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비하사 미리 정해두었다는 것이죠. 선한 일은 우리가 뭔가를 해서 만들어내야 할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두신 일이고 그 길을 우리는 걸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말도요. 잘 되새겨보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동시에 담대하게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은 내가 내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맡아야 할 그런 일이라고만 여기지 마시고, 이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은 거창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삶의 작은 일들, 그 하나하나,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여러분들 손에 쥐어진 작은 일들을 하나하나 해 나아가다 보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이루시고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이 이 하나의 이미지 속에 정리가 되어 있죠. 첫 번째 은혜는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였다고요?
죽었던 사람이었다. 두 번째 은혜는 우리를 선물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세우셨다고 하는 거,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라고 하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은혜는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지으셨다는 것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세우고 살리고 일으키는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시고 봉사가 경쟁이 되지 않고 헌신이 인정받는 수단이 되지 않고, 직분이 권리를 주장하는 자리가 되지 않고, 신앙의 지식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종교개혁주일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신앙이 힘겹게 느껴지십니까? 기쁨을 상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었습니까? 과거의 실패 속에 용서하기가 어렵습니까?
교회를 위해 수고하면서도 한편 서운함과 외로움에 쌓여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스스로 강하게 해서 다시 와라라 말하지 않습니다. 다 상처를 해결하고 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 그대로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고 말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그 은혜 가운데 다시 시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