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 단상 44/신문편집]“동학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젊은 시절(20대 후반∼40대 중반) ‘잉크밥(신문사 종사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약간 자조적으로 일컫는 단어)’만을 먹은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맨먼저 조간신문을 들고 화장실을 가던 습관이 오랫동안 몸에 배어 있었다. 화악 풍기던 잉크냄새가 코를 자극하던 아련한 기억이 사라진 것도 10년이 더 된 듯하다. 한때 200만부를 넘게 찍던 중앙 일간지들의 발행부수가 100만부에도 훨씬 못미친다는 통계숫자를 본 일이 있다. 그만큼 신문(언론)의 영향력이 없다고 할까. 말로만 듣던, 신문이나 책을 보지도 읽지도 않은 세상이 된 것이다.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이 ‘노릇(세태世態)’을 어찌 하랴 한탄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세상 따라 살아가는 것이거늘. 더구나 ‘기레기(기자쓰레기)’ 어쩌고하며 언론의 정도正道인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잊은 지 오래라는 흉흉한 말들이 이 사회에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가끔은 아침 화장실에서 맡던 잉크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다.
나로선 신문을 구독하지 않은지 오래이나, 가끔 1부씩 사보거나(1000원), 어디서든 신문이 눈에 띄기만 하면 맨먼저 집어들고 코를 박는다. 신문을 보지 않는다고 안달복달할 일은 없어도 ‘사람들’면을 보지 못하는 게 답답하다(주로 부음소식). 몇 달 전 주워 읽은 신문에 내가 존경하는 분의 부음기사가 실려 깜짝 놀라며 자신을 탓했다. 문익환 목사와 북한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난 정경모 선생이 그 예이다. 『찢겨진 산하』(일본으로 망명한 정경모 선생의 쾌저快著로, 김구-여운형-장준하 선생의 가상의 대담집. 2002년 한겨레신문사에서 20년만에 재발간했다)를 읽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그런데 그분의 부음소식을 몇 달만에 알다니, 속이 상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진정한 애국자’였던 정 선생은 끝내 사랑하는 조국을 방문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엊그제는 쓰레기장에서 주운 며칠 전 신문에서 소설가 송기숙宋基淑(1935∼2021.12.5.) 선생(전남대 명예교수)의 부음 단신短信기사를 보았다. 『녹두장군』 『암태도』 『자랏골의 비가』 등을 쓰신 분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알거나 뵌 적은 없지만, 그분의 작품을 여러 편 읽으면서 시대의 아픔을 같이해 온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낮은 탄식에 이어 ‘나홀로 조의’를 표했다. 엄혹한 1978년에 ‘교육지표선언’을 발표하는 등 민주화운동과 광주항쟁때 시민수습위원을 한 후 진상규명에 헌신하면서도 좋은 소설을 많이 썼다. 요즘 팔십의 나이는 결코 호상일 수 없는 일. 제대로 된 오비추어리Obituary(조의문 등의 부음기사) 몇 편은 실릴 인물이시다. 송선생님 단신 부음기사 아래엔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아들로 알려진 원경스님(1941년생)의 입적소식도 있었다. 그는 2004년 『이정 박헌영전집』9권을 펴내기도 한 인물이었다.
송 선생님 이름이 내 머리에 각인된 것은 대하소설 『녹두장군』 9권을 모두 읽어서다. 90년대초였을 게다. 일간지 편집기자 시절, 명사들이 직접 쓰는 <나의 삶, 나의 길>이라는 시리즈(주1회 한 면 전체 할애. 200자 원고지 25장)가 있었는데, 당시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 시리즈 편집을 도맡아하던 나의 ‘절친’이 후가를 가는 바람에 두 편이 나에게 맡겨졌다. 작가가 직접 쓴 옥고玉稿를 여러 번 읽으며 제목headline을 어떻게 달까, 내공 깊은 절친(친구는 그 시리즈의 돋보이는 편집으로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의 편집에 누를 끼치지 않고 내 자신도 만족을 해야 하기에 엄청 고심을 했다. 『녹두장군』 9권을 통독한 후에 단 제목이 <동학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였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것이다’ 싶었다. 신문을 펼치자마자 한 눈에 들어오는 제목(컷)을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일본말로 ‘뻬다시로’라고 한다)로 했다. 데스크(편집부장)이 컷을 고칠까봐 “고심참담해 달았으니 제발 고치지 말라”며 신신당부해 그대로 햇빛을 봤을 때 내 자신을 신통해하며 얼마나 흐뭇하고 뿌듯했던지.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 면面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볼 때 ‘그 제목 내가 달았다’고 말해주고 싶기까지 했었다.
그런 기회는 또 한번 있었다. 가곡 <향수>를 이동원과 함께 부른 테너 박인수 교수의 <나의 삶, 나의 길>이 그것이다. 음악 문외한이지만, 박교수가 직접 쓴 원고를 여러 번 읽은 후 단 제목이 <귀 있는 자, 내 노래를 들으라> 였다. 제목 잘 달았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다. 글쓴이의 생각을 13자 이내(한눈에 들어오는 글자수가 8-13자인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이론)로 요약해 단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내공이 있어야 한다. 듣는 귀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명곡이래도 무슨 소용일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잘 달았다고 생각한다. 신문사 2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제목이다. 이 시리즈의 편집을 도맡은 절친의 제목은 매번 화제가 되었고 나중에 책으로도 나와다. 당연히 내가 단 두 편의 제목도 고대로 실렸다. 시인 김지하편의 제목이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였다. 오죽했으면 시인이 편집기자에게 자기 생각(사상)을 잘 압축, 요약해줘 고맙다는 전화를 직접 했을까. 편집기자는 이럴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아무튼 친구의 휴가 덕분에 50여편 중에 2편의 편집을 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두 개의 지면을 아무리 검색을 해도 못찾았다. 털끝만큼 거짓말이 아닌데. 흐흐.
편집기자의 역할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 중요하다. 신문사 기자는 외근外勤과 내근內勤기자로 나뉜다. 모두 글 쓰는 기자가 아니고, 편집, 교열, 조사부기자가 전체 기자의 절반에 해당한다. 글은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외근기자들이 취재를 하여 쓴다. 내근기자들의 이름은 지면에 안나오지만 그들 역시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 잘 모르시겠지만, 어느 신문이든 편집부가 편집국의 수석부서인 까닭은 편집editing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외근기자들은 육하원칙六何原則(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when, where, who, what, how, why)에 바탕하여 쓴 기사로 기자 생명의 ‘승부’를 걸지만, 편집기자들은 고작 8자에서 13자 이내로 요약 압축하여 ‘승부’를 건다. 물론 layout이라는 기사와 사진의 지면 배치도 중요하다. 그래서 편집기자들을 ‘언어의 조탁사彫琢師’라 하는 것이다. YS와 DJ, 거물 정치인의 경쟁때 다른 신문사 선배 편집기자가 만든 말이 동교동과 상교동의 생각이 다르다는 ‘동상이몽東上異夢’이었다. 사자성어 동상이몽同床異夢에 빗댄 절묘한 조어造語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개구리주차(인도와 차도에 걸쳐 엉거주춤하게 주차해 놓는 것)’라는 말도 편집기자의 작품이었다. 편집기자가 제목을 어떻게 다느냐에 따라 독자들의 판단이 영향을 받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 일개 편집기자가 외근부서의 기자가 아닌 부장과 일대일로 상대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면이든 경제면이든 그 면의 지면배치와 제목을 책임지기 때문에 ‘면짱面長’이라고까지 불렀다.
송기숙 선생의 별세 기사를 보고 떠오른 옛생각의 일단이다. 지금이라고 어찌 편집(제목)이 중요하지 않을 것인가. 작금의 대통령 후보들의 언행을 맨처음 어떤 시각으로 보도하거나 활자화하는 따라 유권자들의 판단이 오락가락할 것이다. 어느 후보의 말을 인용하면서 논평하기를 “행동하는 욕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 판단의 결과는 천지차이일 것이 불문가지이지 않은가. 한때 어느 일간지의 편집기자를 십수년 하면서 많이 배우고, 많이 힘들고, 많이 괴로웠던 나의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 무단시 씁쓸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