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72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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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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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yHLQSHRuUg (김한솔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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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러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1)긴 터널을 지나 맞이한 인생의 봄날>
인간을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의 축복 속에 완전한 인간으로 건강하게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질병이란 혹독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요? 중환자실에라도 들를라치면,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환우들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그 모습이 혹독하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하소연을 합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숨 한번 제대로 쉬어봤으면, 시원한 물 한 모금 벌컥벌컥 마셔봤으면, 밥 한 그릇 뚝뚝 해치워봤으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우의 삶 역시 기구했습니다. 중풍이 얼마나 도졌으면 자기 스스로는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가족들은 들것에 환우를 실어 예수님 계시는 곳까지 운반해왔습니다. 물론 처음 자리에 드러누울 때만 해도 친구며, 친척들이며 자주 찾아와서 말 동무도 해주고 용기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병세가 점점 깊어가면서 그는 점점 철저한 왕따, 천덕꾸러기가 되어 갔습니다.
그는 하루 온종일 드러누워 천장 바라보는 것이 다였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모든 문제를 누군가의 손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고질병이 오래가다보니 가산도 다 탕진했겠습니다. 식구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빨리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으면 하는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만이 전부였던 중풍병자가 은혜롭게도 치유자 예수님과 대면하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환우를 향한 가족들의 큰 측은지심, 그리고 반드시 일어나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치유를 향한 환우의 강한 의지가 마침내 기적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춥고 어두운 긴 죽음의 터널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평화로이 구원의 창가에 앉아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생명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비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죽음 같은 오랜 병고, 그것이 한평생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까지 잘 견딘 결과 이제 참 하느님의 부드러운 구원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외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 총체적 치유, 완전한 자유와 해방감, 구원을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질병,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마침내 은혜로운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투병생활 뿐이었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끔찍한 고통을 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고통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 끝도 없을 것 같은 고통 같지만, 그래서 쉽게 체념하고 쉽게 포기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십니다.
하느님 편의 예고 없는 방문, 성령께서 주시는 뜻밖의 선물인 치유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을 활짝 열 필요가 있습니다.
내 병세가 너무 심각해서, 의사도 내놓은 사람이어서,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내게 좋은 일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십니다. 눈물을 거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내면과 외면 모두, 육체와 영혼 모두 온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상처가 덧나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데, 부끄럽다고, 창피스럽다고 상처를 꽁꽁 동여매고 감춰두면 되겠습니까? 빨리 상처를 의사에게 보여 정확한 진단을 받고 치료에 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밥 먹듯이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 갖은 병고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들이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지속적인 치유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매일의 자기 비움, 성령께 마음을 여는 작업, 우리의 상처 나고 곪은 부위를 감추지 말고 보여드리는 솔직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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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애야, 고생 많았다. 그 모진 세월 견디고 기다리느라 애썼다!>
평상에 뉘어’라는 표현을 통해 중풍 병자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잘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웬만한 중풍 병자들은 힘겹지만, 안간힘을 다해 홀로 걷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병자는 병세가 깊을 데로 깊어진 말기 중풍 환자였음이 확실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고장 나고 AS를 받으러 부지런히 병원을 다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초기 증세라든지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으면 대체로 스스로의 힘으로, 아니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가는데,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병자의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워 보입니다.
중증 중풍 병자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보통의 사람들은 기상 알람이 울리면 힘겹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기상 알람이 울려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워서 떡 먹기인 화장실 한번 가는 것이 세상 어렵습니다.
세수를 할 수 있나, 샤워를 할 수 있나? 매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도움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도우미의 짜증이 하늘을 찌릅니다. 누군가가 밥 한 숟갈이라도 떠먹여 주면 감지덕지한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쫄쫄 굶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어 백방으로 노력해 보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런 중풍 병자가 기적적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습니다. 측은지심의 주님께서 세상 가련한 그를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눈여겨보시며 격려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오 복음 9장 2절)
이어서 놀라운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일어나 내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오 복음 9장 6절)
우리도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중증 중풍병자 못지않은 심각한 고통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앞에 서게 됩니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그물에 걸린 가련한 한 마리 물고기처럼 참혹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벽 앞에 서게 됩니다. 다 때려치고 싶은 순간, 모두 포기하고 싶은 순간...
그러나 결코 때려치거나 포기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하느님의 시계는 우리 인간의 시계보다 훨씬 더디게 때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충분히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기적처럼 따스한 예수님의 손길이 내 혹독했던 삶을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상 따뜻한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애야, 고생 많았다. 그 모진 세월 견디고 기다리느라 애썼다. 이제 고생 끝이니 안심하거라. 이제 나와 함께 새 삶을 한번 멋지게 살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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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33YFOkuq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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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를 부정하는 것이 어째서 “악한 생각”일까?>
오늘 복음은 죄의 용서에 대한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만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라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치는 힘도 성령이시고 죄를 용서하는 힘도 성령께서 하십니다. 러니 병에 대한 치유가 일어난다면 또한 죄 용서의 권한도 주셨다고 믿어야 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실 때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만 싹 빼고 주셨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모든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자기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믿으면 엄마는 아이를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실수하며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74회에 약한 엄마에게는 화를 내고 싫어하며 강한 아빠에게는 순종하는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아빠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당연히 아빠 편이기 때문에 금쪽이는 가족에서 왕따인 엄마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존 욕구보다 더 컸던 것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릴 때 할머니와 아빠가 너무 무서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엄마는 금쪽이와 함께 있어 주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쪽이는 원망스러운 엄마를 뒤로하고 살기 위해 두려운 아빠와 할머니 편에 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건 아빠가 엄마에게 자기 권한을 다 주지 않으면 아이는 비뚤어지게 됩니다. 순종할 수 없고 질서도 모르는 아이로 자라는 것입니다. 아빠에게 순종한다고 엄마를 막 대하는 이 아이가 커서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요?
일단 자녀를 낳았으면 아내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남편은 빠져주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를 무시하고 계속 아빠에게만 갈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이것 자체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고해성사의 목적은 ‘순종’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순종할 줄 알면 성장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 모든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그 권한을 ‘성령’을 통해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만 싹 빼고 성령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런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빠의 파견자입니다. 파견할 때는 자신의 권한도 함께 줍니다. 엄마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어서 아빠에게 직접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라 아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자녀에 대한 자신의 모든 권한을 다 내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는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아버지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마태 9,4)라고 말씀하십니다.
‘개훌륭’에서 주인에게 입질하고 현관문까지 물어뜯는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보호자보다 자신이 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인제 와서 보호자가 영구를 길들이려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먼저 자신이 영구를 제압합니다. 그리고 주인 옆에서 영구를 제압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영구도 조금씩 주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누군가를 순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강 훈련사에게 있습니다. 강 훈련사는 자신의 이 권한을 주인들에게 줍니다. 주인들은 그 권한으로 개를 훈련시킵니다. 그렇게 영구는 순종하는 개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이양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시기에 당신께 순종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는 순종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할 때 진정으로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이를 위한 하나의 권한입니다. 가르칠 때 한 번 정도 물렸을 때 그 개를 몰아붙일 수 있겠지만 또 용서하며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개가 성장합니다. 강 훈련사의 권위를 등에 업어야 순종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등에 업고 신자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며 순종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부인 교회에게 다 내어주지 않는 비정한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녀가 진정한 순종을 배울 수 없게 됩니다. 권한이 이양된 이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진정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아빠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부정하는 우리 안의 나쁜 생각을 빼어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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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중풍 병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왔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이웃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절) 하신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들을 부르듯이 말씀하신다. 사지의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있는 그가 주님 앞으로 들려왔다. 그분의 자비로 우선 마음이 치유되면 그 육체는 곧바로 자기 침상을 들고 갈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얻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치유 받을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어서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4절)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따진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읽으시고 당신이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5절) 이것은 어떤 행위가 더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께서 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6절). 이 행위로써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병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찬양을 드렸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하늘로 돌아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병자의 치유행위는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혼과 육신의 마비를 모두 고쳐주셨다. 영혼의 치유는 육신의 치유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주님께 우리 이웃도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오늘의 환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그들과 같이 우리 이웃의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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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2-8)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에서 ‘그들’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병자 자신을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보시고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을 먼저 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을 ‘그들의 회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에 초점을 맞추면, 지금 이 상황에서는 병자 자신의 믿음과 회개가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회개보다 더 중요합니다. 남이 회개를 대신 해 줄 수 없고, 회개는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겉으로만 보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은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병자 자신이 치유보다 용서를 먼저 간청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치유보다 용서가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병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에게 병과 죄는 상관이 없습니다. 죄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은 아닌데, 병을 계기로 해서 자신의 죄를 더 잘 의식하게 되고, 더 잘 회개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영혼과 몸이 모두 병들어 있음을 보시고 우선 먼저 영혼부터 치료해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영혼의 치유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사람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들이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한 것은,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자체는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것은, 또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안 믿는 것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일’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일’입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라는 말씀은,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요즘에도 중풍은 고치기 어려운 병인데, 당시에는 하느님만이 고치실 수 있는 병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라는 질문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는 말씀은, “내가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되면,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있음을 믿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만 보면, 율법 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려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이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목격한 제자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만으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니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하기 위해서이고, 이야기 속에 율법 학자들을 등장시킨 것은, 그 증언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배경 설정’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만으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본 군중이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나타내는데, 그 ‘인정’이 ‘믿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이라는 말은, 군중이 여전히 예수님을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치유 기적 이야기를 대할 때, ‘믿음’만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만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면, “믿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구원을 받는다.)”로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회개’해야 하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도 하지 않고, 실천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자동 응답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발해도 안 됩니다. 믿고 청하면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다 하는 것, 그리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 그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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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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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교구 사제모임을 했습니다. 선교사제 6명, 교포사목 사제 12명, 유학사제 1명,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인 사제 1명, 주교님 포함해서 21명이 모였습니다. 첫날 저녁기도를 마치고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치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신부님들은 모두 저마다의 소임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해외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고, 기뻤습니다. 페루, 콜롬비아,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복음의 기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공소가 20개 있는 성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열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10월부터 눈이 오고 5월에야 꽃이 피는 알라스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용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멈추게 했던 코로나의 팬데믹도 신부님들에게는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것처럼 주교님께서도 각자의 소임지로 돌아가는 사제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신부님들은 내년의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하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는 것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사목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저는 본당 사목도 신문을 만드는 것도 다 좋은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은 신경 쓸 일이 많지만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사목의 기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것은 홍보를 다니는 부담은 있지만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보람이 있어서 좋습니다. 마치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비가 오면 짚신장수 아들이 걱정되고, 해가 나면 우산장수 아들이 걱정됩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모두 기쁨입니다.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어서 기분이 좋고, 해가 나면 짚신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아서 좋습니다. 본당 사목도, 신문을 만드는 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감사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병자들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구름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도,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것도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도,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것도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는 혼자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들고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작은 수고와 노력은 중풍 병자가 치유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봉사자들의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중풍 병자를 평상에 들고 왔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착한 이웃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이들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밭과 같고, 그릇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몸은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들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악한 기운에 의해서 이끌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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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갈망(渴望)과 집착(執着)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갈망은 본인은 물론, 이웃들에게도 희망과 보람의 결과로 드러납니다. 집착은 본인은 물론, 이웃들에게도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결과로 드러납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영적으로 기쁨을 주고, 그 행위로 인해서 이웃이 기뻐한다면 갈망이 드러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영적으로 고독하고, 그 행위로 인해서 이웃이 괴로워한다면 집착이 드러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들을 사랑해서 많은 것을 해 주는데도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점점 반항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는 자진의 욕망을 아들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집착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랑을 주어서 자식이 성공했지만, 자식들이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몰라주고, 무관심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둥지에서 날아간 새는 다시 어미 새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미 새도 이제는 먹이를 주지 않고,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자식의 무심함에 괴롭다면 그것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집착일 수 있습니다.
내가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된다면 갈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내주신 것은 하느님의 갈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예수님의 갈망입니다. 예수님의 갈망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목적이 되고 상대방이 수단이 된다면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이는 집착입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아기를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는 집착입니다.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흑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경관이 있습니다. 이는 집착입니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서, 억울하게 사망한 흑인을 위해서 거리로 나선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갈망입니다.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외친 아모스의 외침은 갈망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를 잊지 말라고 외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외침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듣기 싫은 외침일지라도, 외면하고 싶은 외침일지라도 아모스의 말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이익과 권위를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위정자들의 선동은 집착입니다. 듣기에는 좋을지라도, 기득권을 지킬지라도 그러한 선동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갈망과 집착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고통을 주는 집착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위로와 기쁨을 주는 갈망을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마음은 갈망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이웃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표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율법학자들의 마음은 집착입니다. 치유와 표징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다면 치유와 표징은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강림의 교회입니다. 갈망은 드러날수록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집착은 드러날수록 상처와 아픔이 됩니다.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말씀은 갈망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가 평상을 들고 일어나서 걸어간 것은 갈망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2020년 절반이 지났습니다. 지난 6개월 나의 삶은 갈망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혹 그렇지 않다면 남은 6개월 하느님의 큰 영광이 드러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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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몸소 행하시면서 하늘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시고 ‘메시아’로서 당신의 정체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늘나라의 구원과 기쁨을 이 땅에 실현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질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졌고(레위 26,16; 신명 28,22.35 참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었기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마음속으로 단죄합니다.
이에 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와 치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운지 물으십니다. 사실 가치론적으로 본다면 육체의 치유가 죄의 용서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신 다음,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시니, 그가 치유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를 본 군중은 몹시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이 같은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신 기적 사건으로 우리는 죄와 질병, 고통과 죽음까지도 모두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며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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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일>
마태오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사람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땅의 사람에게
맡기셨으니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땅의 사람에게는
권한이요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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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중풍병자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음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생명과 활력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의 근원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견지망월)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모두는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만남을 위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과 사랑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내가 죄인이라서 벌을 받는구나. 또는 내가 못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외부에서 오는 위기인지 아니면 연약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마음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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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
<그들의 믿음인 나의 믿음!>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중풍 병자는 쉽게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죄의 결과가 병이라고 생각했던 율법 학자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이라는 율법 학자들의 중얼거림에서 알 수 있듯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권한입니다. 그러니 중풍 병자의 치유사화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선언, 곧 예수님의 하느님 (신성)이 드러난 선언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아니 매순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너의 구원을 위한 믿음의 행위들(희생.봉사.나눔)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9,8)
오늘도 나의 구원과 너의 구원을 위한 믿음을 키워갑시다! 나를 위한 믿음이 되고, 그들을 위한 믿음이 되어봅시다.
일 년의 절반인 6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을 잘 마무리하시고, 더 따뜻한 7월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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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이 실험했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서 첫 번째 그룹은 ‘일을 좋아한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의 긍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허풍이 심하다.’, ‘거만하다’ 등의 부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문장들을 다 외웠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만 들어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시하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평가하게 했습니다.
긍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긍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가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를 손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는 신부 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아마 늘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신부를 대부분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쳐 달라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다른 것을 보십니다. 바로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중풍 병자이지만, 예수님만은 고쳐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뿐인데도 이를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긍정적으로 보시고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병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과 정반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이 자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이지요.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을 가지고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확대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가져왔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믿음 없는 자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지요. 그래서 이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확실한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계속하면, 주님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계속된 의심과 불평불만만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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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믿음, 회개, 용서, 영적건강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엊그제 “믿음의 청송(靑松;푸른솔)”이란 강론 제목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전 유명한 ‘고건’(1938-) 총리의 부친이 저명한 청송 고형곤(1906-2004) 철학자였습니다. 청송(靑松) 푸른솔과 같은 호인가 했더니 “청송(聽松;듣는 솔)” 참 특이한 호였습니다.
전에 읽을 때는 못봤다가 지금서야 발견했습니다.
침묵의 듣는 소나무,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한다 싶었습니다. 청송 선생에 대한 마지막 일화와 미리 써놨다는 비문을 소개합니다.
-“나 죽거든 슬퍼하지 말고 묘 앞에서 한번 흐드러지게 놀아라.” 자주 북한강 건너 강가 음식점에 갈 때면 말씀하셨고, “용마타고 왔다가 철마타고 간다.”가 마지막 말씀이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연잎에 구르는 아침이슬 같이 청명淸明하게 산 청송은 이렇게 떠났다. 청송이 쓰게 한 비문을 우리말로 옮겨 본다.
“산은 첩첩하고 물은 겹겹으로 갈 길을 막는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고?
산비둘기 한 번 울고 석양바람에 날아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강산이 적막하다.
나머지 일은 말하지 마라.
천지는 현황玄黃하고
우주는 홍황洪荒하다”-(청송의 생애와 선철학210쪽;소광희)
흡사 크게 깨달은 고승의 열반송涅槃頌같은 비문과 생애 마지막 모습도 참 인상적이라 오래전 읽은 내용이지만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늘서야 발견한 푸른솔 “청송靑松”이 아닌 침묵의 듣는솔이란 “청송聽松”의 호가 더욱 마음에 끌립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제1독서 아모스서의 아모스와 아마츠야의 대조가 흡사합니다. 진짜와 가짜의 삶, 하느님 중심의 삶과 자기 중심의 삶, 지혜의 삶과 무지의 삶, 온전한 삶과 병든 삶의 대조같습니다.
예수님과 아모스야 말로 영적건강의 온전한 삶의 모범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예전에 자주 인용했던 팬티끈과 팬티천의 예화와 더불어, 특히 요즘 영혼에 대해 강조한 경우가 생각납니다.
“속옷인 팬티는 끈만 튼튼하면 천은 낡고 떨어져도 끝까지 입을 수 있으나, 팬티끈이 헐거워지거나 끊어지면 팬티천이 아무리 새것이고 튼튼해도 입지 못한다. 팬티끈이 영혼을 상징한다면 팬티끈은 육신이다.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지, 결코 육신에 영혼이 끌려가지 않도록 하라. 영혼 건강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영혼이 튼튼해야 육신도 영혼을 따른다.
우선 영혼이 건강해야. 멘탈이 강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영양식에 보약, 운동만으로는 건강을 확보하지 못한다. 영혼에 최고 보약이 무엇이겠는가!
사랑, 기쁨, 찬양, 감사. 평화. 희망이다.”
참 많이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때로 고백성사 보속으로는 말씀 처방전과 더불어 의식적으로 기쁨과 평화, 찬양과 감사, 사랑과 희망으로 충일한 오늘 하루를 지내라는 보속도 드리곤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드려다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중풍병자 치유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예수님의 삶인지 직관直觀할 수 있습니다. 다음 대목의 장면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래서 믿음 좋은 공동체 형제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주님이 보시는 바. 주님이 감동하시는 바 믿음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 덕분에 주님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물론 중풍병자도 믿음은 있었겠지만 개인의 믿음은 약합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천국입장도 개인입장이 아닌 단체입장입니다. 더불어 미사시 영성체 예식중 제 좋아하는 기도문도 생각납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2000년 전통의 교회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계승되는 믿음이요 믿음의 DNA입니다.
우선적으로 죄의 용서가 선행됩니다. 이미 이들의 믿음에는 회개가 전제됨을 봅니다.
이런 회개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심으로 영혼부터 치유하십니다. 몸과 마음은,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대부분 육신의 병은 영혼의 무질서와 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대로 자애로운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요즘 장마철에 자주 내리는 빗소리가 하늘 음성처럼 들립니다. 어제 써놨던 단상이 생각납니다.
“빗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참 좋다. 자연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 침묵과 조화된 소리다. 영혼에 평화와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어찌 이런 자연의 소리에 견줄 수 있겠는지요! 예수성심은 하느님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성심성월 마지막날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 마음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대로 자애로우신 하느님 말씀입니다.
이어 율법학자들의 무지를 꾸짖으시며 결정적 육신의 치유를 이루십니다. 믿음으로 인한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입니다. 육신의 치유에 앞서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 치유의 고백성사가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흡사 오늘 복음이 미사장면 같고 미사가 끝난후 치유받고 파견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군중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영혼의 상비常備 건강식健康食이자 약藥은 새삼 하느님 찬미와 찬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화답송 후렴과 오늘의 영성체송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영혼 건강에 주님 찬미와 찬양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온갖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1)
오늘 아모스 예언자의 무지와 불신의 아마츠야를 꾸짖는 거칠 것 없는 천의무봉한 모습은 얼마나 통쾌한지요! 그대로 아모스 예언자의 육성을 듣는 듯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나온 확신에 넘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나 아모스 예언자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난 분들입니다. 아모스의 성소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은 얼마나 자유자재自由自在하신 은총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목자이자 농부인 아모스가 주님께 붙잡혔듯이 저는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가 주님께 붙잡혀 수도원에 와서 살게 되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다시 살라해도 이처럼 살 수뿐이 없겠다 생각이 듭니다.
영혼 건강이 우선입니다. 믿음의 회개와 더불어 용서받음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튼튼히 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쁨과 평화, 찬양과 감사. 사랑과 희망으로 충일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제일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영육을 건강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19,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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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쉬우냐?” 어느 쪽이 쉬운 것일까요.
죄를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께만 있는 권한으로 다른 이에게는 불가능하지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은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로 일어나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결과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말하기에는 더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시며 당신 자신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풍 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갑니다. 오늘 복음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권한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하는 더 어려운 일을, 실제로 그가 병이 나아서 걸어가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받았다.” 하신 말씀 역시 이루어질 수 있고, 예수님께도 하느님처럼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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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충수 보니파시오 신부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죄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좋은 계기를 마련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예수님께 어떤 중풍병자 한 사람이 들것에 실려 왔는데 치유를 받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 환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가상히 여기시며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라고 수군거렸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반박하신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셨다.
자! 여기서 우리도 각자의 생각을 말해보자! 과연 어느 편이 더 쉬울까요? (거수로 대답하기!) 여기서 어느 한 편도 인간으로서는 할 수가 없는 말이며 똑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게 어느 한 편이 가능해지면 다른 한 편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죄의 사함을 선언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고, 중풍 환자를 말 한 마디로 고칠 수 있다는 것도 역시 하느님밖에는 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증명되고 따라서 율법학자들이 시비하던 죄를 사하는 신적 권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 중풍 환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화제를 바꿔서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죄를 사하는 신적인 권능을 인정하고 나서도 또다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봐야겠다.
그것은 중품 환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의리와 믿음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을 믿고 어렵사리 들것을 만들어서 중풍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이다. 이것은 남을 위한 대리 신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이것은 또한 진정한 우정 즉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친구들의 신앙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훌륭한 기사이다. 우리는 여기서 남을 위한 신앙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선교이며 사랑의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대세를 받고 죽은 사람의 집에 가서 모든 장례 절차와 상가 일을 돌보아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선교가 되는지 활동을 해 보신 분을 알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반드시 입교하게 되고, 또 훌륭한 신자가 될 것이다.
남을 위한 신앙, 즉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하느님께 가지고 가서 낫게 해 달라고 청원을 드린다는 것은 사랑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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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Fpi6VnaD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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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 2)
용서가
우리 삶을
지켜주고 있다.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용서이다.
뜨겁게 삶의
용서를 주시는
주님이시다.
용서로 닫힌
삶의 문을
우리들에게
열어주신다.
모든 생활의
길에는 용서가
있다.
참된 용서는
죄의 용서와
일어나 다시
걸어가는
것의 구분이 없다.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마음 속의
악한 생각을
봉헌하는
시간이다.
용서에는
아파하고
다시 시작하는
인격이 있다.
따뜻한 삶이
되는 순간
용서는 우리
일상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을 닮은
용서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자신을
보게하는
용서이다.
용서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실천할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 생활이
마비되어
있는 것은
용서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용서로
나아가게 하는
용기이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생활이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서를
받아들이는
용서와 붙어있는
우리들 삶이다.
용서의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쁜 날이다.
용서로
우리의 생활을
건져 올리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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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 6)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자신의
평상입니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내적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기다림 뒤에
찾아오는
치유의 기쁨입니다.
아픈 과거를
떠날 수 있는
예수님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죄의
용서입니다.
모든 용서는
하느님을 향해
있습니다.
치유와 용서를 통해
우리가 사람임을
받아들이듯
사람의 여정을
다시 걷게 됩니다.
치유의 여정과
용서의 여정은
생명의 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치유의 관계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듯
용서의 관계또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역사안에
용서의 하느님이
계십니다.
용서의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평상을 들고
삶의 자리로
기쁘게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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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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