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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3
#중생 #회심 #성화
내생각에 탁월한 신앙개혁가나 청교도들 중에서 적잖은 선생들은 중생이나 회심의 신앙의 시작단계의 수준을 지나치게 높게 잡는것같다.그러나 성화의 원리로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로나 내개인의 경험에 비춰봐도 그러한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어쩌면 중생이나 회심은 단번에 삶의방향을 역행하는것이 아니라 차가 유턴하듯이 조금씩 꺾기 시작하는 순간이고,성화는 유턴해가는 궤적과 과정이 아닐까 싶다.
#요한계시록 #Revelation 17:15
15 또 天使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淫女가 앉아 있는 물은 百姓과 무리와 列國과 方言들이니라
Then the angel said to me, "The waters you saw, where the prostitute sits, are peoples, multitudes, nations and languages.
Et dixit mihi : Aquæ, quas vidisti ubi meretrix sedet, populi sunt, et gentes, et linguæ.
Καὶ λέγει μοι Τὰ ὕδατα ἃ εἶδες, οὗ ἡ πόρνη κάθηται, λαοὶ καὶ ὄχλοι εἰσὶν καὶ ἔθνη καὶ γλῶσσαι.
모든 육체의 생명은 전적으로 물에 의존하기 때문에 물이 있는 곳에는 생태계와 인류의 문명이 형성되어왔다. 따라서 천사가 물을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 한 것은 참으로 그러하다. 그런데 그 물 위에 음녀가 앉아 있다고 한 것은 음녀가 짐승의 권세를 힘입어 물을 장악함으로써 물 주변에 형성된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물 위에 앉은 음녀는 참된 교회인 광야의 여자를 모방한 거짓 교회를 상징하므로 음녀가 물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부터 교회가 형성되어 온 이래로 교회가 속해 있는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에 거짓 교회도 세워져서 열국의 힘을 빌려 참된 교회를 대적해 왔다는 것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다섯 교회를 책망하신 내용들이 교회를 오염시키는 음녀의 악영향이다. 성경과 성령보다 특정 정치이념을 더 우선시하고 그것에 매몰되어 복음이 아니라 정치이념을 가지고 구원여부를 판단하며, 정치이념과 합하는 정부에는 성경과 성령과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추종 및 결탁하고, 반하는 정부에는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참소하고 투쟁집회를 일삼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은 음녀의 이념주의에 지배된 것이다.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영원하신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과학이 주장하는 진화의 방식으로 하셨다고 하는 유신 진화론을 추종하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음녀의 유물론적 과학주의에 지배된 것이다. 개혁주의를 추구한다면서 합의되고 통일된 신앙고백과 교리에 만족하지 않고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숨겨진 지식만을 지나치게 추구함으로써 교회의 하나됨보다는 분쟁과 분란 조장을 자주 일으키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은 음녀의 지성주의에 지배된 것이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것이라 주장하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은 음녀의 세속주의에 지배된 것이다. 교회의 예배와 봉헌과 섬김과 봉사만 열심히 하면 가정과 일터와 학업 등 개인의 일상에는 소홀해도 된다고 하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은 음녀의 성속이원주의에 지배된 것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만 알면 충분하고 그보다 더 깊은 성경지식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은 음녀의 반지성주의에 지배된 것이다.
#20210723
#신명기 #Deuteronomy 26:16-19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
16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17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
18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와 법도들은 비록 장차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몽학선생과 같고 복음의 초보적인 도와 같지만 그들은 오직 여호와께서 부여하신 율법과 규례와 법도들을 준수함으로써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드러낼 수가 있었다. 사람이 자기들의 본성과 유익을 따라 임의로 만든 종교들과는 달리 여호와의 율법과 규례와 법도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죄악된 본성과 탐욕을 거스르고 여호와의 선을 추구하게 되어 있으므로 이스라엘로서는 거슬리고 내키지 않으며 심지어 번폐스럽다고 느낄수도 있는 것들이다. 이방 종교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도 아니셔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고, 이방 종교처럼 웅장하고 화려하며 흥을 돋우는 제사가 아니라 수수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는 대신에 절차들은 까다롭고 자기들이 직접 참여하지도 못하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통해서 대리로 행하는 제사를 드려야 하며, 이방 문화처럼 육체의 정욕을 따라 마음껏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하고, 탐욕을 따라 자기 소유를 악착 같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기적으로 소출의 십일조를 드리며 일부러 밭의 한 부분을 남겨놓기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방 족속들로서는 자기들의 본성에 거스르는 이런 터무니 없는 규례를 지키는 이스라엘인들이 이상하고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의아한 것은 저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민족이 이상한 규례를 지킬수록 어떤 보이지 않는 신비한 능력이 저들을 감싸서 자기네들보다 더 흥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 족속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라는 신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애굽을 열가지 재앙으로 초토화 시킨 것과 오합지졸의 군사로 아말렉 정예군을 격파한 것과 단 1만 2천 명의 군사로 모압 연합군을 전멸 시킨 것들을 듣고서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자기네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정욕과 탐욕대로 행하면 자기네들보다 현저하게 약해져서 손쉽게 정복할 수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스라엘이 자기 죄악을 뉘우치고 여호와께 회개하면 또 그 즉시 희한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서 한쪽 팔을 못쓰는 장애인이 정복민을 무찌르고 소몰이꾼이 수백명의 적군을 혼자서 무찌르며 수만의 군대가 단 3백명의 오합지졸에게 박살나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초인적인 괴력을 가진 사나이가 혼자서 1천 명을 쳐죽이고 건물의 기둥을 무너뜨려 수많은 적국인들을 죽이는 것도 경험하게 되었다. 여호와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다윗은 자기 치세 40년 동안 끊임없이 승승장구 하였고 이를 이어받은 솔로몬의 치세 전반 20년 동안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주변국들이 이스라엘과 어떻게든 교류를 맺고자 혈안이 되었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후반 20년 동안에 우상숭배를 저지르게 되자 자기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급기야 나라가 분열되어 열 개 지파는 유다 왕조를 배반하고 떨어져 나가고 유다 왕조는 베냐민 지파와 레위 지파만 남은 초라한 규모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유다 왕조의 몇몇 왕들이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따랐을 때 그 왕들의 시대를 강력하게 하셔서 아무도 건들지 못하게 하셨다. 심지어 당시 최강 군사력을 자랑하던 앗수르 조차도 히스기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했다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단 한 명의 천사에 의해 하룻밤만에 18만 5천 명의 앗수르 군사들이 싸그리 찢겨죽는 재앙을 당하기도 하였다. 유다 왕조의 죄악이 관영하여서 결국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을 당하였어도 여호와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비롯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 에스더와 모르드개 등의 신실한 백성들을 바벨론의 왕궁에서 존귀함을 얻게 하셨다.
여호와의 율법과 규례와 법도들의 본체이시며 제정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달아 죽임으로써 여호와의 율법을 폐기해버렸으므로 그로부터 수 십 년 만에 로마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멸 당하는 심판을 받아야 했고 거의 2천 년 가까이 세계 각국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독일 나치에 의해 수 백 만 명이 학살 당하는 심판도 당해야 했다. 지금은 어찌어찌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이루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언제 어떻게 무슨 심판을 당하게 될 지 모르는 처지에 있다. 반면에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령을 받아 기이한 능력을 행하고 갖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 유리하며 떠돌아 다니고 배척을 당하고 끔찍한 고문과 처형을 당하더라도 죽음 이후 주어질 천국에서의 참된 안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풍성한 상급을 믿음으로 바라보고서 절대로 자기들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등학생들처럼 신앙이 어렸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순종의 대가로 이 땅에서의 번영을 약속하시기도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신 지금에는 복음을 받아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마치 장성한 자들과도 같아서 순종의 대가로 육적이고 현세적인 번영보다는 내세에서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찬란한 상급을 약속하시기 때문에 사도들과 제자들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육적인 고난과 핍박을 견고하게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면서 각각 잘한 것은 칭찬과 격려를 주시며 그에 따른 상급을 약속하시고 잘못한 것은 책망하시며 심판을 경고하셨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은 대체로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표면적으로 잘 준수하는 반면에,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같은 교회 중심의 예식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치신 바 이웃 사랑이 연합되어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유효한 것인데, 이웃들에게는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어쩌면 더 못하게 대하면서도 교회에서의 주일성수와 십일조만 잘 하면 된다는 보상심리가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교회생활에 전념하는 것만큼 자기 일상에도 충실하고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일터 등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상과 이웃들은 뒷전인채 오로지 교회생활에만 올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서는 자기가 교회생활 하느라 일상에서도 손해를 보고 사람들에게서도 배척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30배 60배 100배로 이 땅의 것으로 갚아주실 것을 요구한다. 교회가 어떤 사역을 할 때 의도치 않게 주변에 피해를 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양해를 구한다거나 사과를 한다거나 적절한 보상을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일텐데 그러기보다는 교회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일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오는 교인들이 주변의 주거용 주차장에 무분별하게 차를 대놓고도 예배 중이라고 차 빼달라는 연락도 받지 않는 것이 그러하다. 게다가 작년부터 이어지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세계적인 비상시국에는 교회가 이웃의 생명과 건강을 위하는 차원에서 예배를 비롯한 어느 정도의 사역에 제한이 따르더라도 정부의 정당한 방역활동에 적극적으로 모범적으로 협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지고 타협할 수 있느냐면서 조금도 내려놓지 않고 도리어 악다구니를 쓰는 것을 보면 그만큼 지금의 한국 교회가 얼마나 이웃 사랑이 메말라있고 철저히 이기적인지를 알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다섯 교회에 책망하신 잘못들을 지금의 한국 교회들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다. 이렇게 사회에 악영향만을 끼치는 교회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차지해버린 사탄의 회당이 되어 마지막 날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철저히 파괴될 것이다. 또한 교회 신자라 하면서 외형적인 교회생활은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가정도 돌보지 않고 일상도 소홀히 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도무지 1원도 구제하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주님의 왼편의 염소처럼, 알곡 없는 가라지처럼 분류되어 바깥 어두운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신명기 #Deuteronomy 27:1-10
돌 위에 기록한 율법
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께로부터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한 모든 율법을 큰 돌들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여 에발 산 위에 세우라고 명한다. 율법을 돌에 기록하라는 것은 그 행위 자체로 무언가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돌이 시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처럼 여호와의 율법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대로 일점일획도 떨어진다거나 폐지된다거나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이 천지보다 더 견고하며 영원무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율법을 새긴 돌을 높은 산 꼭대기에 세움으로써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영원불멸의 언약의 증거를 삼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거나 저주를 주신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게다가 단지 율법을 돌에 새기고 세우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만족해서는 안되고 율법을 돌에 새기듯이 각자의 심령에 지워지지 않게 새기며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율법을 새긴 돌들은 그저 하나의 기념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기 영혼에도 새겼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지상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에는 우리에게 두가지 증표를 주셨는데 외적으로는 사람의 문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고 내적으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우리 영에 보혜사로서 보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과거처럼 커다란 돌들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높은 산에 세울 필요가 없이 성경과 성령으로써 율법과 복음을 우리 심령에 새기고 순종하여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돌이 단단해 보여도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풍화되어 닳아버리거나 인위적으로 부서지게 마련인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영혼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소멸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영원불멸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한 번 신자의 영혼에 거하시면 영원히 계시고 성령께서 신자의 영혼에 성경을 각인하시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여호와의 율례를 새긴 돌들은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 산 꼭대기에 세워졌는데, 이는 사람의 본성이 스스로 여호와의 선을 추구하기 보다는 여호와를 거슬러 죄악을 행하는데 발이 빠르기 때문에, 상급으로써 순종을 독려하는 것보다 징계로써 불순종을 경고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즉,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억지로라도 벌받을까봐 겁나서라도 해야할 것은 반드시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반드시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서 자원하는 심령이 충만한 지도자가 하자는대로 그저 별 생각없이 따라주기만 해도 여호와께서는 순종한 것으로 여기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백성 한 명 한 명의 경건보다는 사사들이나 왕들의 경건에 의해서 복이나 저주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님 이후 사도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사도들과 직계 제자들에게 중점적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교회가 움직였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에게와는 달리 예수님 이후에는 성령께서 직접 성도 한 명 한 명에게 보혜사로서 보내심을 받으시기 때문에 성도 각자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인정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동적 신앙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사사들과 왕들처럼 스스로 적극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지금의 우리는 저주의 에발 산에 세워진 율법이 두려워서 억지로 마지못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심 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세워진 복음을 자원하는 심령으로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순종해 나아가는 것이다.
율법을 새긴 비석을 세운 곳에는 여호와께 드릴 제사를 위한 제단을 세워야 했는데 이 제단은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다듬은 돌이 아니라 자연적인 돌들을 쌓아서 세워야 했다. 다듬은 돌을 금하신 이유는 행여나 백성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다듬은 수고를 가지고 공로로 삼을 여지를 차단함으로써 제사의 모든 권한은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다는 것과 이 제단을 보면서 그들이 광야를 떠돌던 하찮은 민족으로서 여호와의 돌보심을 받았다는 것을 백성들로 알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은 이 투박한 돌제단에서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죄를 자복하고 죄사함을 얻어야 했다. 또한 이 돌제단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거의 무너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사사시대에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는 여호와의 사자께 제물을 평범한 돌 위에 드렸고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그 제물을 받으셨는데,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저버리고 한창 우상숭배를 저지르다가 이방 족속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던 때였다. 다윗은 교만함으로 백성을 계수하였다가 백성들이 3일 동안 여호와께서 보내신 전염병으로 죽어나갈 때 천사가 머무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여호와를 믿는 신앙이 거의 씨가 말라버렸던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과 대결하기 위해서 주변의 돌들을 주워다가 제단을 쌓았다. 이처럼 사람이 만든 제단이 아무리 휘황찬란 하더라도 정작 그 신앙이 바닥을 치고 있었을 때에는 여호와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세우셔서 주위의 굴러다니는 돌들로 제단을 쌓게 하셨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스럽게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그 모든 영광을 내려 놓으시고 건축자가 쓸모없다 하여 버린 돌처럼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으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로 삼는 영광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사람이 제 아무리 크고 멋진 돌을 다듬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하나님께 아무런 공로도 되지 못하고 도리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못하고 철저히 파괴될 뿐이다. 사도시대 교회들의 예배와 세례와 성찬 등의 예식들은 마치 자연의 돌들로 쌓은 제단처럼 수수하고 투박하였으나 복음의 역사는 가장 찬란하게 빛났었다. 오늘날 교회의 사역이나 예식이 아무리 사람들 보기에 멋지고 좋아보여도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있으면 우상의 제단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회다움을 드러내는 표지인 복음사역과 성례와 권징은 너무나 평범해보여서 마치 돌들을 쌓아 만든 제단과도 같다. 그러나 사람이 이를 소홀히 하고 교인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현란한 이벤트만을 표지로 삼는다면 멋들어진 우상 제단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증진시키는데는 에배를 잘 드리고 성경을 꾸준히 읽고 배우고 수시로 기도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평범한 것들로서 이는 돌로 만든 제단과도 같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앞날을 예언한다거나 귀신을 쫓아낸다거나 불치병을 고친다거나 환상을 본다거나 하는 등의 이적과 기사에 지나치게 파묻혀서 이런 것들로 자기들의 신앙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게 되면 거의 전부 교회를 저버리고 자기들이 교주가 되어버리는데, 이는 휘황찬란한 우상 제단과도 같은 것이다.
#20200723
#레위기 #Leviticus 13:38-46
38 남자나 여자의 피부에 색점 곧 흰 색점이 있으면
39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피부의 색점이 부유스름하면 이는 피부에 발생한 어루러기라 그는 정하니라
40 누구든지 그 머리털이 빠지면 그는 대머리니 정하고
41 앞머리가 빠져도 그는 이마 대머리니 정하니라
42 그러나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는 나병이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발생함이라
43 제사장은 그를 진찰할지니 그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돋은 색점이 희고 불그스름하여 피부에 발생한 나병과 같으면
44 이는 나병 환자라 부정하니 제사장이 그를 확실히 부정하다고 할 것은 그 환부가 그 머리에 있음이니라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예나 지금이나 머리숱이 없는 것은 외모적으로 큰 단점이어서 선지자 엘리사는 길을 지나가다가도 잡혀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없는 짐승 같은 불량배 청소년 떼거지들에게 대머리는 꺼지라는 모욕을 받기도 하였고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탈모에 많은 신경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백성 중에 머리숱이 없어서 주위로부터 놀림이나 거리낌이나 멸시를 받는 이들에 대해서는 외모의 단점 대신에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정결하다는 신령한 판단을 주신 것일지도 모른다. 머리숱이 없는 백성은 마치 나실인과 같아서 평상시에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의 외모가 볼품 없다고 해도 아무든지 그의 외모를 두고 멸시하거나 조롱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그것이 바로 그를 정결하다 하신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과 방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비롯하여 낮고 천하여 멸시 받는 자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 하셔서 그들을 대하는 것이 곧 예수님 당신을 대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어떤 모임에서 부귀한 자들을 존대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존대하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갇힌 자와 쫓겨난 자와 빼앗긴 자와 떠도는 자들을 교회와 성도들이 마땅히 보살피고 돌봐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이 가르침은 여전히 교회에서 잘 지켜지고 있지는 않다. 모든 교회들이 낮고 천한 교인들을 예수님 섬기듯이 하기보다는 세속의 여느 단체들처럼 재력이나 권력이나 영향력이 많은 교인들을 예수님처럼 섬긴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맡고 점점 더 강한 입김을 불어넣어 교회를 세속화 시킨다. 그렇게 세상에서 잘나가는 교인들이 주죽이 된 교회가 바로 예수님께서 책망만 하신 라오디게아 교회인 것이다. 세속화 된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물질적으로 부귀할지는 몰라도 정작 보이지 않는 복음의 신령한 것에는 헐벗고 가난해서 주님의 안타까움만 자아내게 할 뿐이다.
반면에 남들보다 머리숱이 풍성한 자들은 그것으로 자기 외모를 더 드러내며 자랑하기 마련이다. 사사 삼손은 나면서부터 성령을 입은 나실인이어서 머리숱을 일곱 가닥으로 땋아야 할만큼 풍성했지만 그의 성품은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을 담을만큼 풍성하지 않아서 자기의 탁월한 외모와 육체적 능력만을 믿고 서슴없이 방탕한 죄악을 일삼았다. 결국 그는 한 창녀에게 푹 빠져서 나실인의 비밀을 토설함으로써 성령을 자기에게서 쫓아내버려서 아름다운 머리도 밀리고 두 눈도 뽑히게 된다. 한마디로 삼손은 성령으로 창대하게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비참하게 끝나버린 것이었다.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도 탁월한 외모에다가 풍성한 머리숱까지 받은 아름다운 자였다. 그의 머리숱이 얼마나 풍성했던지 매년 날을 정해 많은 양의 머리를 깎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압살롬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아버지 다윗에게 반억하였다가 자기 자랑인 풍성한 머리숱이 나무에 걸려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성령의 지혜와 부귀영화를 선물로 받았으나 자기 인격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한동안 하나님을 저버리는 죄악의 길로 떠나게 되었다. 최고의 지혜자가 그 지혜로 말미암아 도리어 최악의 미련한 자가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역설적 모순의 파라독스가 발생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신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 중에 그 능력을 악용하여 하나님을 떠나 이단의 괴수가 되어버린 경우가 종종 있어오기도 했고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한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나병이라는 재앙은 머리숱이 없는 정결한 사람이라 해서 피해가지 않는다. 아무리 하나님께 정결하다고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머리숱이 없는 것에 대한 컴플렉스 자체는 없애지 못한다. 그런데다 최악의 질병이라는 나병까지 걸리게 된다면 그의 심령은 더욱 바닥까지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여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 하나 밖에 없다. 나병과 같은 사탄의 시험을 연달아 받아 자녀 모두와 전 재산을 잃고 아내도 떠나고 건강까지 잃은 욥이 그러하였고 예수님께서 극찬하신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러하였다. 욥은 그런 밑바닥 상황에서도 가장 친한 세 친구로부터 온갖 독설을 들어야 했고 두 교회는 지금까지도 힘겹게 고난을 견인해 왔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열흘 동안의 극렬한 사탄의 시험을 더 견디며 죽도록 충성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머리숱이 없는 백성처럼 남들보다 받은 것이 적거나 없는 자들이다. 게다가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좁고 협착한 길을 가야하며 가면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외적인 상황이 나아지기보다는 계속 산넘어 산이 생기기 마련이다. 때문에 교회와 성도는 이 세상에서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믿음으로 천상의 것을 바라보며 견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머리숱이 없는 백성이 나병에 걸리는 경우는 어쩌면 그가 하나님께 정결한 자라는 영적 우월감 또는 영적 교만에 빠져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자기는 비록 외모로는 볼품없어도 정결하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마치 삼손처럼 함부로 지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가 더 교만해지지 않도록 나병으로 징계를 내리신 것일수도 있다. 이러한 영적 교만은 남들보다 별로 가진 것이 없는 신자라고 해서 안생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자가 집안도 외모도 소득도 지성도 감성도 재력도 중간 이하인데 단지 성경에 대해서만은 남들보다 특심한 사모함이 있어 성령의 조명하심을 많이 받았다고 치자. 그럼 대체로 그는 어느 때는 자기에게 성경을 아는 지혜와 지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자기의 외적인 부족함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해서 그의 성경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덧 교만함으로 나아가게 되어 교회의 다른 신자들을 업신여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목회자들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별로 가진 것이 없는데도 이렇게 성경을 아는 지혜와 지식을 많기 얻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냐고 걸핏하면 정죄한다. 이런 신자가 자기의 영적 교만을 스스로 꺾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영원히 살리시려고 그에게 영적 나병을 주실지도 모른다. 따라서 머리숱이 풍성한 자들이건 없는 자들이건 영으로나 육으로나 모든 교만의 싹을 잘라버려야 영적인 나병을 피해갈 수 있다.
나병에 걸렸다고 진단받은 백성은 스스로 나병에 걸렸음을 주위에 선포하여 부정함이 퍼지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었다. 한편 이스라엘 공동체는 비록 어떤 백성이 나병에 걸렸다고 해서 그를 진영 바깥으로 격리는 시킬지언정 그를 백성 공동체에서 끊어낼 수는 없었다. 그가 나병 환자라 해도 끝까지 백성의 일원으로서 같이 데리고 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어떤 신자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나병과 같은 심각한 죄 또는 질병에 빠져 있다면 그는 교회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여야 한다. 아울러 교회는 그 신자가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서 그를 외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이 회복되도록 여러가지로 돌볼 수 있어야 한다.
#20190723
#이세벨 #아합
교회가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우선 그 가르침이 '여자'에 의해 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세벨은 왕비였으므로, 교회의 이세벨이라 하면 교회 내에사 그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높은 지위와 신분의 여자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이세벨이 음녀의 대명사라 해도 교회가 육체의 음란을 조장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데는 그저 처음부터 패역한 이단/이교일 뿐이다. 이세벨은 왕비였으나 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가 왕을 미혹하고 홀려서 왕국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였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이세벨은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남편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여러 사람들을 미혹하고 홀려서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좌지우지 하려는 여자일 것이다. 또한 이세벨은 남편인 아합의 욕심을 채워주려고 의인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여 죽인다. 교회의 이세벨은 참되게 복음 사역을 하는 부교역자들을 모함하고 핍박하여 결국에는 교회에서 쫓아내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1인 담임목사 체제인 한국 교회에서 왕비 같은 이세벨의 역할을 할만한 여자는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세벨이 장악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는 당연히 아합이 될 수 밖에 없다. 실제 아합은 소심하나 탐욕스러운 악인이다. 자기 주관이 없고 아내 이세벨의 홀리는 말에 미혹되어 스스로 악에 팔린 자가 바로 아합이다. 아합과 같은 담임목사는 복음 사역에 자기 주관이 없이 자기 탐욕 채우기에만 급급하다. 또한 교회의 이세벨에게 미혹되고 휘둘려서 이세벨의 뜻을 따라 교회를 운영한다. 자기의 소심함과 연약함을 빌미로 해서 교회에서 스스로 팔려 악을 행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하며 합리화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의 연이은 패착은 자기의 연약하고 소심한 본성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악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자기 욕심을 이세벨과 합작하여 채운다.
실제 이세벨은 악행을 참다 못한 반란군에 의해 높은 성에서 내던져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고, 아합은 적군이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불결한 연못에서 더럽게 죽는다. 잠시 그리스도의 교회를 장악한 아합과 이세벨이 당할 최후란 이에 비해 얼마나 더 처참할 것인가.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능멸했기 때문이다.
#매일성경 #에스겔 9:1-11
어떤 심령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영계를 보는 주인공이 지나가는 사람들 위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내용이 있다. 그런 자들은 겉으로는 살아있으나 조만간 죽을 운명이어서 실상은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와 매우 유사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수행할 자를 큰 소리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만큼 패역한 백성들의 죄악이 극심하여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 성읍의 인간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성읍에 관찰자로 보내신 천사들을 의미한다. 그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보냄을 받은 곳에서 사람들의 행위를 낱낱이 관찰하여 하나님께 보고 드린다. 그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불성실하게 할 수 없으므로 오로지 자기들이 관찰한대로 가감없이 정직하게 보고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자신의 천사들을 교회에 관찰자로 보내셔서 보고를 받으실지도 모른다. 관찰자들은 자의적으로 교회의 형편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잘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나 그대로 하나님께 보고드릴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면서 죄에 둔감하고 안일하게 생각해 온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큰 착각을 해 온 것인가.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 천사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극심한 심판을 내리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신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심판을 수행할 천사의 수가 여섯이라는 것에 어떤 신비한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일곱이라는 수를 축복하시고 소위 완전수라고 하는 여섯은 사탄과 짐승의 수, 인간의 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천사의 수 여섯은 사망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정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여섯 명의 천사 중에서 한 명은 전투복 대신에 하늘하늘한 비단 옷을, 칼이나 창 같은 무기 대신에 필기도구를 지참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천사가 무관이라면, 이 천사는 문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 문으로 오셔서 서기관 모습의 천사에게는 백성들의 가증한 우상숭배에 대해 탄식하며 애통해 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 이마에 먹으로 문자표를 그리라 하시고 나머지 다섯 천사들에게는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죽이라 하신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죽이실 때, 백성들에게는 문지방과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신 것과 같다. 백성들이 그 바른 피로 말미암아 죽음을 피하였듯이, 우상숭배를 미워하여 신앙을 지킨 자들은 이마에 받은 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죽음의 심판을 면한다. 하나님의 표를 받지 못한 나머지 백성들은 그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다. 심판을 수행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표를 받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만을 찾아 사형을 집행한다. 이것이 비록 환상이어서 실제로 백성들이 당장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해도, 짐승의 표를 받은 그들에게는 반드시 전염병과 칼과 기근의 재앙이 내려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우리 교회에 심판하는 천사들을 보내신다면, 우리 중에 하나님의 표를 받을 자는 누구이며 짐승의 표를 받을 자는 누가 될 것인가. 나는 과연 하나님의 표를 받을 자인지 짐승의 표를 받을 자인지 각자 자기들의 행위를 깊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중에서 나이가 많은 자들을 먼저 심판하신다. 이는 문자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나이가 많을수록 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는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많은 나이를 먹고도 신앙을 잘 유지한 자들은 그만큼 긴 세월동안 복음을 위해 인내를 잘 해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신앙과 그에 따른 책무를 저버린 자들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이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한편으로는 육신의 나이 뿐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연수나 교회 내에서의 직분의 크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교회 내에서 맡은 직분이 크고 중요할수록 그에 해당되는 책무도 당연히 크다. 자기에게 주어진 복음 사역의 책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하는 자들은 외적인 직분과는 상관없이 가장 먼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로서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큰 직분을 맡은대로 사역을 성실하게 바르게 수행하는 자들은 우리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의 표를 받은 자로서 재앙의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늙은 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서 늙은 자만 심판받았다고 보면 안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수행될 것이다. 젊고 어리다고 해서 심판을 면할 수는 없다. 교회에서 각자 맡겨진 은사와 사역의 분량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 교회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담임목사에 의해 자행되는 불의와 불법에 동참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로서 죽음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힘들고 외롭더라도 그에 저항하며 애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표를 받은 자로서 죽음의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짐승의 표를 받아 죽이신 자들의 시체를 성전 뜰에 채우라 하신다. 여섯 천사들은 날카로운 낫으로 포도송이를 거둬들이듯이 자기들의 무기로 하나님의 표를 받지 못한 자들의 생명을 거둬들여 그 시체를 성전 뜰로 옮긴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 넣어 그 시체의 피를 짜내어 죽임 당한 자들의 피가 반경 1600 스다디온(대략 300킬로미터)에 달하고 높이가 사람 키만큼 차고 흘러 넘치게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나 처절하고 끔찍하며 피할 수 없다. 우리 교회는 과연 이 중에서 얼마만큼의 피를 흘릴 것인가.
하나님의 명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기관 모양의 천사가 완수하였다고 보고한다. 하나님의 표를 받은 자들이 얼마나 적었으면 그렇게 순식간에 완수할 수 있었을까. 이 천사는 과연 우리 교회에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인가.
#소명 #배교 #타락
모든 복음 사역자는 두 번의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는 개인의 구원을 위한 부르심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 사역을 위한 부르심이다. 이 두 번의 부르심은 서로 다르면서도 분리할 수 없는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부르심의 관계는 둘 다 참이어야 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즉, 둘 중 하나라도 거짓일 경우 둘 다 거짓이 되어버린다.개인의 구원에 대한 부르심이 없이 복음 사역을 하는 경우,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에 따라서 교회에 얼마간의 유익을 줄 수는 있가. 그러나 교회가 받는 유익에서 담임목사 자신은 제외된다.담임목사의 불성실한 목회로 인해 복음 사역에 대한 부르심이 거짓으로 드러난 경우, 그의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부르심 또한 거짓이라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담임목사는 불성실한 목회로 인해 성령의 뜻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대적한 것이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복음 사역자의 배교 또한 두 단계를 거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개인으로서 잠시 성령의 빛을 받았다가 저버린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맡겨진 복음 사역을 제멋대로 저버린 경우이다. 이 또한 뗄 수 없이 맞물려 있으되, 어느 한쪽이 배교로 드러나면 다른 한쪽도 함께 배교하게 되는 것이다. 담임목사가 복음 사역지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중간에 자기 마음대로 저버리는 것은 결국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다. 사역을 하게 하시는 분도, 멈추게 하시는 분도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제 욕심을 따라 그만두는 것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식으로 복음 사역을 배교하는 담임목사는 결국 자기 개인의 신앙마저도 저버리는, 회개할 기회가 두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성령모독죄, 성령훼방죄를 지은 배교자라고 판단할 수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였다 하여 죽은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분수를 넘어 교회를 섬기겠다고 헛된 맹세를 했다가 안되겠다 싶어 저버려서 그런 것이 아니던가? 담임목사가 교회를 섬기겠노라고 그리스도 앞에서 맹세하고서도 그리스도의 허가도 받지 않고 저버리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을 속인 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0150723
#히스기야 #놋뱀 #느후스단
히스기야 왕이 모세의 놋뱀을 부순 것은, 어쩌면 자기의 왕직을 걸고 행한 일일 수도 있다. 거의 천 년 가까이 보존되어 내려온 국보급 유물을,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로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순다는 것은, 자칫하면 모든 백성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극도로 위험하고 민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놋뱀을 부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은 일임을 굳게 확신하고 과감히 행한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놋뱀'이 한 두 개가 아닐텐데..
강대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 피지배 국가는 지배국의 종교까지도 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일제 신사 참배, 십자군 전쟁 등). 당시 초강대국이자 지배국이었던 앗수르 또한 자기들이 지배하는 국가들에게 앗수르의 종교를 강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앗수르의 지배를 받던 유다 왕국이 히스기야 왕 때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은, 한 편으로는 앗수르의 종교를 배척함으로써 앗수르의 지배를 벗어나겠다는 의미도 유추할 수 있다. 때문에 앗수르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 자기들에 대한 배신과 도전이라 판단하고 유다를 점령하러 나아온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왕하 18: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