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陵府之南有大川 川之南有鼈淵寺 寺之後岡爲蓮花峯 故老傳周元公之母蓮花夫人居于此 故以名峯 而寺卽其故宅也 寺之前有石池 名曰養魚
강릉부(江陵府)의 남쪽에 큰 내가 있고 그 내의 남쪽에 별연사(鼈淵寺)가 있으며, 그 절의 뒤쪽 언덕은 연화봉(蓮花峯)이다. 노인들이 전하기를 주원공(周元公)의 어머니 연화부인(蓮花夫人)이 여기에 살았으므로, 이것을 따서 봉우리의 이름을 삼았으며 절은 곧 그 옛집이라고 한다. 절 앞에는 석지(石池)가 있는데 이름을 양어지(養魚池)라고 한다.
故老又言溟州時 有書生游學于此 與室女有約 其父母不知而將嫁之 女以書投池中 尺鯉致于生 得諧其緣 志輿地者信之 載諸古迹
노인들은 또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 때에 한 서생(書生)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처녀와 혼약을 했다. 그 부모는 알지 못하고 장차 시집을 보내려 하니 여자가 편지를 못 속에 던지자, 1자쯤 되는 잉어가 그것을 물어다가 서생에게 전하여, 그 인연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기록한 이가 이를 믿어 고적(古迹)조에 실어 놓았다.
箋曰 或云咸東原傳霖也 余竊疑之 峯旣以夫人名名之 則寺之爲夫人家明矣 寺構於新羅 則府尙爲東原京 安得曰溟州 而寺之中安有人率室女而居者乎 況咸公國初功臣 原係府籍人 亦安能及見麗初溟州時 而稱之曰游學到此耶 其誣罔之端不一 而訛以傳訛 恨不得博攷掌故 以破其惑也
그 전(箋)에,
“혹은 그 사람은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1이라 한다.”
했으나, 나는 속으로 이를 의심하였다. 봉우리가 이미 부인의 이름을 취하여 명칭을 삼았으니, 절은 부인의 집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절이 신라 시절에 건축되었으니, 부(府)는 오히려 동원경(東原京)이었을 터인데, 어찌 명주(溟州)라 했을까? 절 안에 어찌 사람이 처녀를 거느리고 살 수 있었을까? 하물며 함공(咸公)은 국초(國初)의 공신으로 원래 부(府)에 적을 둔 사람인데, 어찌 고려 초의 명주 시절까지 소급하여 그를 보았다고 하며, ‘이곳에 공부하러 왔다.’고 하는 것인가? 그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한둘이 아니지만, 거짓이 거짓으로 유전하여 왔는데도 널리 장고(掌故)를 살펴 그 미혹된 것을 타파하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歲丙申春 寒岡鄭先生以方伯巡到平昌郡 郡在東原京時屬于府 故郡人至今有言府之事者 先生詢問故牒 得古記於其首吏來示 余乃知府事 李居仁所述文甚多 其中載蓮花夫人事甚詳曰
병신년(1596, 선조29) 봄에 한강(寒岡) 정(鄭 정구(鄭逑))선생이 관찰사로서 순행하다 평창군(平昌郡)에 이르렀는데, 그 군이 동원경(東原京) 시절에는 부(府)에 속했으므로 군 사람 중에 지금토록 부의 일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옛 첩(牒)을 두루 물어 수리(首吏)에게서 고기(古記)를 얻었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었으므로, 마침내 부사(府事) 이거인(李居仁)이 쓴 글이 많은데 그 중에 연화부인의 사적이 매우 자세히 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적은 다음과 같다.
新羅時 溟州爲東原京 故留後官必以王子若宗戚將相大臣爲之 而凡事便宜行黜陟 所其隷郡縣有王弟無月郞者幼年來領其任 留務聽佐貳者代理 而率花郞徒 游戲於山水間
신라 때 명주는 동원경이었으므로 유후관(留後官)은 반드시 왕자 및 종척(宗戚)ㆍ장상(將相)ㆍ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맡게 하고 범사(凡事)에 그 예하 군현(郡縣)에는 편의대로 출척(黜陟)하게 하였다. 왕제(王弟) 무월랑(無月郞)이란 사람이 있어 어린 나이로 그 직을 맡았는데, 업무는 보좌관의 말을 좇아 대신 다스리게 하고, 자기는 화랑도를 이끌고 산수간에서 놀았다.
一日獨登於所謂蓮花峯 有處子貌甚殊 浣衣於石池 郞悅而挑之 處子曰 妾 士族也 不可以奔 郞若未婚 可行婚約 而六禮迎之未晩矣 妾已許身於郞 誓不他從也 郞許之 自是問遺不絶 瓜滿 郞歸鷄林 半載無耗 其父將嫁諸北坪家人子 已卜日矣 夫人不敢白父母而心竊憂 以死自定
하루는 혼자 소위 연화봉에 올랐더니 한 처녀가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뛰어났으며 석지(石池)에서 옷을 빨고 있었다. 낭(郞)은 기뻐하여 그 여자를 유혹하였더니, 처녀는,
“저는 사족(士族) 출신이라,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할 수는 없습니다. 낭께서 만약 미혼이시라면 혼약을 행할 수 있으니, 육례를 갖추어 맞이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낭께 몸을 허락하였으니, 다른 데로 시집가지 않을 것을 맹서합니다.”
했다. 낭은 이를 허락하고, 이후에 안부를 묻고 선물 보내기를 끊이지 않았다. 임기가 차서 낭이 계림(鷄林)으로 돌아가 반 년 동안 소식이 없자 그 아버지는 여자를 장차 북평(北坪) 집안 총각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하여 이미 날까지 받아놓았다. 여자는 감히 부모에게 사뢰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몰래 걱정하다가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一日 臨池想舊誓 語池中所養金鯉曰 古有雙鯉傳書之言 你受吾養多矣 不可致吾意郞所否 忽有尺半金鯉 跳出池側 口呀呷似有諾者 夫人異之 裂衫袖書曰 妾不敢背約 而父母之命 將不得違 郞若不棄盟好 趁某日至 則猶可及已 不然則妾當自盡以從郞也 納之魚口中 持以投大川 鯉悠然而逝
하루는 연못에 가서 옛날의 맹서를 생각하고, 기르던 연못 속의 황금 잉어에게,
“옛날에 잉어 한쌍이 서신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너는 내게서 양육을 받은 적이 많았으니 낭이 계신 곳에 나의 뜻을 전할 수는 없겠니?”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1자 반쯤 되는 황금 잉어가 못에서 튀어 올라와 입을 딱 벌리는데, 승낙한다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이를 이상스럽게 여기고, 옷소매를 찢어 글을 쓰기를,
“저는 감히 혼약을 위배하지 않을 것이나, 부모님의 명령을 장차 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낭께서 만약 맹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달려서 아무날까지 도착하시면 그래도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저는 마땅히 자살하여 낭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잉어의 입 속에 넣어 가지고 큰 내에 던졌더니, 잉어는 유유히 사라졌다.
其翌曉 無月郞送吏於閼川捉魚 官索膾魚 有金尺鯉在葦間 官以似郞 鯉挑擲振 迅若有訴者 俄吐沫涎升許 中有素書 異而讀之乃夫人手迹 郞卽携書及鯉 告于王
그 다음날 새벽에 무월랑은 관리를 알천(閼川)에 보내어 고기를 잡아오게 했는데, 관리가 횟거리 생선을 찾다보니 금빛 나는 1자짜리 잉어가 갈대 사이에 있었다. 관리가 낭에게 갖다 보였더니, 잉어는 펄쩍 뛰면서 재빨리 움직여 마치 호소하는 것이 있는 듯했으며 잠시 후 거품을 한 되쯤 토했는데 그 속에 흰 편지가 들어 있어, 이상히 여기고 읽어 보니 여자가 손수 쓴 것이었다. 낭은 즉시 그 편지와 잉어를 가지고 왕에게 아뢰었다.
王大異之 放鯉于宮池 亟命一員大臣具彩帛 偕郞馳往東京 卽倍日幷行 僅及其期 至則留後以下諸官州父老皆會 帟幕盤筵甚盛 守門吏怪郞來 傳叫曰 無月郞至矣 留後官出迓 則大臣從焉 遂告以具主人 北坪郞已至 大昌急人止之 夫人先一日稱疾不梳洗 母抑之不聽 譴誨方至 聞郞之來 倏起理粧 改服以出 克諧秦晉之好 一府人皆驚以爲神也
왕은 크게 놀라워 하면서 잉어를 궁중의 연못에 놓아주고 빨리 대신 한 사람에게 명하여 채색 비단을 갖추게 하고 낭과 함께 동원경으로 말을 달려가게 하므로, 즉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겨우 기약한 날짜에 대었다. 도착해 보니 유후(留後) 이하 여러 관리와 고을 노인들이 모두 장막에 모였는데 잔치가 무척이나 성대하였다. 문을 지키는 관리가 낭이 오는 것을 괴상히 여기고,
“무월랑이 옵니다.”
고 소리쳐 전하였다. 유후관(留後官)이 나와 맞이해 본즉 대신이 따라왔다. 드디어 사연을 갖추어 주인에게 알리었다. 북평의 신랑은 이미 도착하였으나, 대신이 사람을 시켜 멈추게 했다. 여자는 하루 앞서부터 병을 핑계대고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강요해도 듣지 않아 꾸지람과 가르침이 한창 더해지는데, 낭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아가, 양가의 혼인을 잘 이루었으므로 온 부중 사람이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었다.
夫人生二男 長卽周元公 季卽敬信王也 方羅王之殂 無嗣 國人皆屬望周元 其日大雨水 閼川卒漲 周元在川北 不得渡三日 國相曰天也 遂立敬信 以周元之當立不立 封于江陵 環六邑以奉之 爲溟原郡 王夫人就養于周元 以其家爲招提 王一年一來省焉 四代國除爲溟州 而新羅已焉
부인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곧 주원공3이고 차남은 경신왕(敬信王)이다. 바야흐로 신라의 왕이 죽으매 후사가 없자 나라 사람이 모두 주원을 촉망했으나, 그날 크게 비가 내려 알천에 갑자기 물이 불었다. 주원이 알천의 북쪽에 있으면서 건너지 못한 지가 3일이나 되자, 국상(國相)은,
“이것은 천명이다.”
하고, 마침내 경신을 들어세웠다. 이로써 주원은 마땅히 즉위해야 했음에도 즉위를 못하고, 강릉 땅에 봉(封)해져서 주변의 여섯 읍을 받아 명원군(溟原郡)의 왕이 되었다. 부인은 주원에게 가서 봉양을 받았는데, 그 집을 절로 만들었으며, 왕은 1년에 한 번씩 와서 뵈었다. 사대(四代)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지고 명주가 되면서 신라도 망했다.
余覩此 始悉養魚池故事 若披雲見日 益知府故老之簡而撰輿地者之陋也 余先妣乃周元之裔 則夫人亦余之祖先也 其敢久加以他人名而溷辱吾所自出乎 因備記 以爲府之掌故云 -『惺所覆瓿稿』 卷之七
나는 이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양어지(養魚池)의 고사를 남김 없이 알게 되어,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본 듯했다. 더욱이 부(府)의 노인들이 한 이야기가 간략한 것과 《여지승람》에 편찬된 것이 조잡함을 알게 되었다. 나의 돌아가신 어머님은 주원의 후예이시니, 곧 부인은 또한 나의 조상이 된다. 어찌 감히 오래도록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써 내가 나온 근원을 더럽히고 욕되게 할 것인가? 인하여 갖추어 기록해서 부(府)의 장고(掌故)로 삼는다.
첫댓글 《고려사》에서 단 몇 줄로 요약되어 있던 명주가의 짧은 ‘잉어 편지(신어, 神魚)’ 이야기는 허균(許筠)의《발연사고적기(發淵寺古蹟記)》를 통해 비로소 구체적이고 생생한 서사로 완성되어 전해지게 된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강릉 출신 문장가인 허균은 강릉의 금강산 발연사(또는 별연사)의 내력을 적은 《발연사고적기》에서 이 설화를 기록했다.
신라 경덕왕 때, 서라벌에서 온 화랑 무월랑(김유정)이 명주(강릉)에 사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연화봉 아래 못(發淵)에서 잉어에게 먹이를 주던 연화낭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훗날을 기약한다.
임기가 끝난 무월랑이 서라벌로 돌아간 뒤 소식이 끊기고, 연화낭자의 부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려 하자 낭자는 슬픔에 빠진다.
낭자는 안타까운 마음을 비단에 적어 못 속의 황금 잉어에게 주며 하소연했는데, 잉어가 이 편지를 물고 바다를 건너 서라벌의 양어장(또는 시장)까지 넘어간다.
서라벌에서 잡힌 잉어 배 속에서 비단 편지가 발견되고, 이 사연을 알게 된 신라 임금과 무월랑의 부모가 둘의 인연을 "신령스러운 물고기가 맺어준 천생연분"이라 여겨 혼인을 허락한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강릉 김씨의 시조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이다.
《고려사》 악지 등 국가 정사에는 사관들이 핵심 줄거리("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해 노래를 지었다")만 짧게 요약해 실었지만, 허균의 《발연사고적기》나 《동국여지승람》 같은 지역 고적기/읍지류 자료에는 백성들 사이에 전승되던 '잉어 배 속 편지'라는 기이하고 드라마틱한 소설적 서사가 완전한 형태로 담겨 있다.
오늘날 강릉의 명소인 월화거리와 월화정(月花亭) 역시 무월랑의 '월(月)'자와 연화낭자의 '화(花)'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결국 《고려사》 속 <명주가>의 짧은 기록 뒤에 숨어 있던 길고 아름다운 로맨스의 본체가 바로 허균의 《발연사고적기》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 셈이다.
허균은 원래 민간에 떠돌던 "잉어 편지" 이야기를 단순한 허구나 야사로 보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선조 29년(1596년) 한강 정구 선생이 가져온 옛 기록(이거인이 쓴 고적)을 접하고, 이것이 단순히 전설이 아니라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 무월랑(김유정)과 연화낭자(박씨)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드라마틱한 역사적 배경이자 강릉 김씨의 시조 김주원(명주군왕)의 탄생 설화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문헌 덕분에 《고려사》 악지에 단 2줄로 짧게만 전하던 <명주가>의 유래가 완전한 서사시 형태로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질 수 있었다.
발연사 / 별연사 (鼈淵寺·發淵寺)는
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현재 강릉시 노암동/강남동 일대)에 있던 절이다.
본래 신라 명주군왕 김주원의 어머니인 연화부인(박씨낭자)이 살던 집터였으나, 훗날 김주원이 부모의 명복과 인연을 기리기 위해 사찰(招提)로 바꾼 곳이라 한다.
본래 한자 표기는 자라/자라못을 뜻하는 별연사(鼈淵寺)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발음이 비슷한 발연사(發淵寺)로 와전되어 기록·전승되었다.
‘잉어 편지’를 뜻하는 잉어 전서(鯉魚傳書), 혹은 어서(魚書), 어중척소(魚中尺素)는 동양 고전 문학에서 "멀리 있는 그리운 사람에게 기적처럼 전해지는 편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고사이다.
강릉의 <명주가> 설화 속 연화낭자의 편지가 서라벌의 무월랑에게 닿은 배경에도 바로 이 '잉어 전서'라는 고대 문학적 모티브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중국 한나라 시절의 한악부(漢樂府) 시 《음마장성굴행(飲馬長城窟行)》은 잉어전서(鯉魚傳書)의 대표 유래라 할 수 있다.
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나그네 멀리서 찾아와 나에게 쌍리어를 전해주었네.)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
(아이 불러 잉어를 배 가르게 하니, 그 속에서 한 자 크기의 비단 편지가 나왔다네.)
長跪讀素書, 書中竟何如?
(무릎 꿇고 앉아 그 비단 편지를 읽으니, 그 편지에 과연 무슨 글이 쓰였던가?)
上言加餐飯, 下言長相憶.
(위에는 부디 '밥 잘 챙겨 드시오'라 하였고, 아래에는 '늘 그리워합니다'라 적혔었네.)
중국 한나라 시절, 만리장성을 쌓으러 부역을 떠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인 《음마장성굴행》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에서 '잉어의 배를 갈랐다(烹鯉魚)'는 표현은 물고기를 실제로 요리했다기보다, '잉어 모양으로 접거나 wooden 잉어 모양 함(魚盒)에 담아 끈으로 묶어 보낸 비밀 편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비단 편지(尺素)는 한 자(尺) 크기의 하얀 비단(素)에 적은 편지라는 뜻으로, 오늘날 편지를 뜻하는 '서신(書信)'이나 '척소(尺素)'라는 한자어의 유래가 되었다.
새(기러기)나 물고기가 편지를 전한다는 관용어는 한나라의 충신 소무(蘇武)의 고사에서도 등장한다.
한나라 신하 소무가 북방 흉노에게 사로잡혀 19년 동안 한파 속에서 절개를 지키며 갇혀 있었다.
한나라 사신이 흉노의 왕(선우)에게 소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흉노 왕은 "소무는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때 사신이 지혜를 내어 "우리 임금께서 사냥하시다가 상림원에서 기러기 한 마리를 잡으셨는데, 그 기러기 발에 소무가 살아있다는 편지(雁帛書)가 매여 있었다"라고 거짓을 고했다.
흉노 왕은 신의 기적에 놀라 속임수가 들통난 줄 알고 결국 소무를 풀어주었다.
이 일로 인해 한자어로 안서(雁書, 기러기 편지), 어서(魚書, 물고기 편지), 혹은 두 말을 합쳐 안서어신(雁書魚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처럼 동양 문화권에서 '잉어'는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라,
물속 깊은 곳과 세상 위를 연결하는 신령스러운 매개체이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극한 정성이 하늘에 닿아 기적적인 소식을 전해주는 상징으로 쓰였다.
따라서 강릉 김씨 문중과 허균의 기록에 등장하는 박연화 낭자가 "옛날에 기러기와 잉어가 편지를 전했다는 말이 있으니, 너도 나의 사연을 무월랑에게 전해다오"라고 기도하며 잉어를 남대천에 풀어준 장면은, 고대 동양의 아름다운 시적 관습과 기적을 향한 바램이 민담 형태로 형상화된 최고의 장면이다.
연화낭자가 잉어에게 한 그 말은 고사성어 '잉어전서(鯉魚傳書)'와 '안서(雁書)'의 전통적인 관용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발연사고적기》 원문 속 연화낭자의 대사를 보면 이 유래가 한문으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語池中所養金鯉曰: "古有雙鯉傳書之言。你受吾養多矣。不可致吾意郞所否。"
(연못 속에서 키우던 금빛 잉어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두 마리 잉어가 편지를 전했다는 말(雙鯉傳書)이 있다. 너는 나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으니, 나의 뜻을 무월랑 계신 곳에 전달해 줄 수 없겠느냐?" 하였다.)
원문의 '쌍리전서(雙鯉傳書)'라는 표현 자체가 중국 고시 《음마장성굴행》의 첫 구절인 "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나그네 멀리서 와 나에게 두 마리 잉어를 전해주었네)"에서 직접 온 말이다.
연화낭자는 단순히 동물에게 하소연을 한 것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던 고전고사('잉어가 편지를 전해 인연을 맺어주었다')를 떠올리며 "고전 속 이야기처럼 너도 기적을 일으켜 내 사연을 낭군에게 전해다오" 하고 절박하게 빌었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연화낭자의 모습은 단순히 구전 설화 속 요조숙녀를 넘어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시대의 엘리트 여성’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당대의 클래식 고전인 ‘쌍리전서(雙鯉傳書)’나 ‘안서(雁書)’ 같은 고사를 떠올리고, 이를 물고기에게 비유하여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정도로 문학적 소양이 깊었다.
당시는 한글이 없던 신라 시대라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고난도의 한문(漢文)과 이두/향찰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부모의 정혼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비단을 찢어 자신의 주체적인 의사와 절절한 마음을 직접 한문 편지로 적어 보낼 만큼 정교한 문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무월랑을 처음 만났을 때도 무작정 정을 통하려는 시도에 대해 "저는 토착 가문의 딸이니, 예의(六禮)를 갖추어 당당하게 맞이하십시오"라며 명확한 주관과 예법을 들어 타일렀다.
신라 시대 강릉(명주)이라는 지방에 살면서도 고전을 통달하고, 스스로 편지를 써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만큼 당차고 똑똑했던 고대의 문학적 지식인(인텔리) 여성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신어(神魚)가 맺어준 전설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옛 고사나 설화들은 단 몇 줄의 글자, 혹은 '잉어 배 속의 비단 편지' 같은 아련한 모티브 하나만 던져놓고는, 읽는 사람이 스스로 그 뒤의 서사와 감정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잉어가 편지를 물고 바다를 건넜다"라는 한 줄 뒤에, '연화낭자가 남대천가에서 보낸 수많은 밤들', '서라벌 시장 한복판에서 잉어를 마주친 무월랑의 놀라움' 같은 수많은 장면이 여백으로 남아 우리 마음을 흔든다.
잉어나 기러기처럼 자연물을 매개로 마음을 전한다는 설정 자체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이 감응하는 기적’ 같은 신비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뒤의 이야기'를 자꾸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고사를 읽고 나면 "두 사람은 그 뒤로 강릉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궁궐 연못으로 간 그 금빛 잉어는 오래도록 잘 살았을까?" 하고 그 뒷이야기를 혼자 상상해보는 즐거움이 남는다.
중국 한나라 때의 악부시(漢樂府詩)인 음마장성굴행(飲馬長城窟行)은 만리장성에 부역을 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마음을 담은 시이다.
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나그네 멀리서 찾아와 나에게 두 마리 잉어를 전해주었네.)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
(아이 불러 잉어 배를 가르게 하니, 그 속에서 한 자 크기의 비단 편지가 나왔다네[魚中尺素].)
長跪讀素書, 書中竟何如?
(무릎 꿇고 앉아 그 비단 편지를 읽으니, 편지에는 과연 무슨 글이 쓰였던가?)
上言加餐飯, 下言長相憶.
(위에는 부디 '밥 잘 챙겨 드시오'라 하였고, 아래에는 '늘 그리워합니다'라 적혔었네.)
鯉魚傳書 / 魚書는 이 시 전체의 내용(잉어가 편지를 전해준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편지'나 '소식'을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魚中尺素는 시 구절 중 "中有尺素書(그 속에 한 자 크기의 비단 편지가 있네)"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표현이다.
雁書魚信(안서어신)
은 기러기가 전하는 편지(雁書)와 물고기가 전하는 편지(魚信)가 합쳐진 말이다.
이 중 '안서(雁書)'의 직접적인 출전은 반고(班固)가 집필한 역사서《한서(漢書)》 권54 <소무전(蘇武傳)>이다.
흉노에 19년 동안 사로잡혀 있던 한나라의 충신 소무(蘇武)를 구하기 위해, 한나라 사신이 흉노의 왕(선우)에게 지혜를 내어 말하는 대목이다.
漢天子獵上林苑, 得白雁, 足有繫帛書, 言武等在某澤中.
(한나라 천자께서 상림원에서 사냥하시다가 흰 기러기를 잡으셨는데, 그 발에 비단 편지가 매여 있었소[雁足繫帛書]. 거기에는 소무 등이 아무 못가에 살아있다고 적혀 있었소.)
雁書 (안서)는 이 소무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기러기가 전하는 소식(편지)'을 뜻하게 되었다.
雁書魚信 (안서어신)은 소무전의 안서(雁書)와 음마장성굴행의 어신/어서(魚信/魚書)가 결합하여 '멀리서 주고받는 서신이나 아련한 소식'을 종합적으로 이르는 성어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