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만 받아들고 서울 연남동 작업실을 찾아갔다가 한참을 헤맸다. 따닥따닥 다가구 주택이 밀집한 동네, 그중에서도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1층 안무 연습실이 작가의 작업실이었다. 월세 80만원을 예술가 서넛이 쪼개 낸다. 교체할 때가 다 돼 깜빡거리는 형광등이 연습실 거울을 힘없이 비췄다. 그 사이로 짝 달라붙는 헬스복 차림의 그녀가 나타났다. 제16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받은 작가 정금형(35)이다.
프랑스 브랜드 에르메스의 예술재단이 해마다 주는 이 미술상은 젊은 작가를 대상으로 한 국내 미술상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힌다. 서도호·박찬경·구정아·양아치 등이 수상하면서 '스타작가 등용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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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금형 작가가 작업실 옆 놀이터에 있는 운동 기구 위에 올랐다. 작품‘휘트니스 가이드’에서 사용한 운동 기구다.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야릇한 몸짓을 해보였다. 즉석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고운호 객원기자
"무용제에서 주로 공연했는데 요즘은 미술관에서 많이 섭외가 오네요. 저는 그대로인데 말이죠. 왜 상을 탔는지 정말 궁금해요." 미술상을 탔다는 사실에 작가 스스로도 꽤 놀란 눈치다. 안무 연습실이 작업실이란 사실이 말하듯 정금형은 몸을 활용한 예술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작가다. 혹자는 '육체 예술가'(미술평론가 임근준)라 부른다. 퍼포먼스 작가가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다.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퍼포먼스가 미술 영역으로 편입되는 추세를 반영한 수상이다.
정금형은 인형·운동기계·굴착기 같은 소품과 뒤엉켜 야릇하고 발칙한 몸짓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휘트니스 가이드'(2011년)는 체력단련장으로 꾸민 무대에서 의학용 뇌 모형을 올려놓은 벨트 마사지기와 애무하듯 몸 풀고, 러닝 머신을 향해 질주하다 그 품에 안긴다. 진공청소기에 늙은 남자 가면을 달고 성교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거나('7가지 방법', 2008년), 굴착기의 상하 운동을 성애('유압진동기', 2008년)에 접목하기도 한다. 기계를 의인화하고, 사랑을 나눈다.
작가는 말한다. "무대의 주인공은 내 몸이 아니라 사물(오브제)"이라고. "내 몸은 사물을 움직이는 오퍼레이터(작동자)일 뿐입니다. 도르래나 와이어 로프 같은 무대 기계 역할인데 생김새가 사람인 거지요." 이 지점이 수상의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심사위원을 맡은 안소연 플라토미술관 부관장은 "정금형의 작품은 몸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소품과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용을 넘어 시각예술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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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7가지 방법’중 한 장면. 진공청소기 호스에 붙인 가면이 작가의 몸 구석구석을 훑는다. /정금형 제공
작가의 흡인력은 가히 폭발적이다. 한 시간이 넘는 공연 내내 관객은 흐트러지지 않고 작품에 몰입한다. 작가가 지닌 에너지도 대단하지만 에로틱한 작품이 뿜어내는 분위기 덕도 크다. 작가는 "의도적인 몸짓이 아니라 몸에 나를 맡기고 자유롭게 움직이다 보니 나오는 결과일 뿐"이라고 했다. 고저가 없이 나직한 말투다.
정금형은 호서대 연극영화학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예술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 연출을 공부하기도 했다. "여고생 때 손드는 것도 쭈뼛쭈뼛했어요. 몸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까 늘 고민이었지요." 연극학도에서 무용학도가 된 것도 몸에 대한 탐구 과정이었다고 한다.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꼭 현장을 체험하는 프로다. 인체를 이해하기 위해 헬스장에서도 아르바이트하고 굴착기 운전기능사 국가기술자격증도 땄다. 전문가 대상 심폐소생술 과정(ACLS)도 이수했다.
'금형'(金型·물건을 만들 때 쓰는 거푸집)이라는 자기 이름의 동음이의어를 사랑하는 작가, 그래서 자신의 몸이 예술을 위한 거푸집이길 바라는 작가는 "관객이 객석에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