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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1941년이 저물고 1942년이 찾아왔다.
괌, 웨이크, 미드웨이를 습격했던 일본군은 강력한 요새와 우세한 화력, 잘 훈련된 미 해병대의 방어 덕분에 격퇴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손실도 컸다. 수많은 미 해군 수송함들이 어뢰와 함포사격의 먹이가 되었고, 구식 함선들은 그들이 침몰시킨 일본 해군 함선만큼의 대가를 치뤄야 했다. 당시 미국의 모든 산업은 전시체제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제 육지에서 포효할 육군을 만들어내느라 해군에 투자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간의 기술축적은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울 정도로 해군의 지위는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그렇게 해군을 얕잡아 보고 있지 않았다.
1차대전 당시, 윌슨 행정부에서 해군 차관보를 지냈던 그였다. 해군에 대한 애정이 식었을 리 없었고, 3면이 전부 바다였던 미국인지라 해군이 없이는 뭘 할 수도 없었다. 단지 그가 해군에 투자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시간 대비 효율' 때문이었다. 함선이 나오는 시간 동안, 해군작전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고 육군작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43년 4월 19일. 백악관. Map Room.
그곳에는 프랭클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당시 부통령이던 월리스가 있었다. 그는 1940년, 프랭클린이 3선에 도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농무부 장관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부통령 후보 경선 당시, 프랭클린이 교묘한 방법으로 그를 부통령으로 지목했었다. 이전 부통령이었던 존 가너보다는, 확실히 프랭클린의 측근이었기에 무언가 의논하기에도 수월했던 인물이다. 프랭클린은 그와 함께 상황실에 있었다. 태평양 지역을 바라보던 프랭클린은 긴 침묵을 깨고 입술을 뗐다.
"아직도 태평양 전선은 지지부진한겁니까."
"네, 각하. 아쉽게도…."
"아쉬울 것 없습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만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됩니다."
"네…."
"하지만, 그래도 일찍 끝났으면 합니다. 진행되는 시간만큼, 젊은이들의 소중한 목숨이 줄어들테니까요."
"…오늘은 보고를 하지 말까요, 각하?"
"아니, 그래도 하십시오. 슬프더라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네. 어제 괌에서 출발한 육군 항공대가 야마모토를 잡았답니다."
"그래요…. 아니, 잠깐만. 뭐라고? 지금 야마모토라고 했소?!"
"네, 각하. 일본 연합 함대의 해군 원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켰다고 합니다."
"맙소사. 이런 행운이! 그나마 지지부진한 전선에서 들려온 간만의 낭보로군!"
"그것 외에도 또 있습니다."
"다른 소식? 같은 전선에서 말입니까?"
"아뇨, 이번엔 유럽입니다."
프랭클린은 그제야 알아챘다. 2년 전, 자신이 마샬 원수에게 지시했던 해협횡단 작전을.
간간히 보고는 받았지만, 태평양 방면의 해전 결과들을 보고받고 대응하느라 그 작전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오, 그래요, 그래. 마샬 원수에게 맡겼던 프로젝트가 있었지! 어떻게 됐습니까?"
"오늘 그 작전이 완전히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이 11시니까, 조금 후면 보고하러 올 겁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피격. 그동안 골치 아팠던 일본 해군을 좌절시킨 최고의 기회였다.
이소로쿠의 전사 이후, 일본 해군은 지휘계통의 문제로 수많은 함선을 미국에게 잃었다.
11시 20분. 마샬 장군이 전쟁상황실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꽤 두꺼운 서류가 들려있었다. 그는 그 서류를 프랭클린의 탁자에 올려 놓았다.
"오, 이게 그 프로젝트입니까?"
"그렇습니다, 각하. 꽤 길었습니다만, 결국 완성했습니다."
"그간 '그 곳'의 동태는 어땠습니까?"
"예상대로입니다. 친나치 인사들이 급증했고, 정부와 의회 역시 친나치 인사들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렇군요. 작전개시일은 언제입니까?"
"5월 13일입니다, 각하."
"적절한 날짜로군! 작전에 차질이 없게끔 모든 지원을 하겠소."
"감사합니다, 각하. 작전명은 각하께서 명명하셨으면 하는데, 생각하신 게 있으십니까?"
"음…. '디딤돌(Stepstone)'은 어떻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각하."
프랭클린의 네이밍 센스에, 마샬은 꽤 놀랍다는 표정과 함께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이 그 어떤 수정도 없이 인정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마샬은 곧 중계지인 아이슬란드로 파견될 장군과 부대를 차출했다. 그 중에는 조지 패튼도 포함되어 있었다.
4월 27일.
미국은 영국에 대해 한 차례 무기대여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물자를 지원해도 이전 대여금과 똑같이 동결하되, '그 곳'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에 대해서는 영국에서는 일절 불문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처칠은 처음엔 난감해 했으나, 미국에서 제공하는 무기가 없으면 전선이 제대로 버틸 수 없다는 문제와 독일의 본토 상륙에 대한 위협 때문에 결국 마지못해 동의했다.
영국에 대한 6번째 무기대여. 이 6번째 무기대여는 영국이 '그 곳'에 대한 미국의 조치에 대해 묵인한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졌다.
1941년 4월 29일 밤 9시, 볼티모어 항.
마침 군수공장으로부터 막 배치된 신형 전차로 구성된 기갑사단들과 해병 8군단이 수송선에 몸을 맡겼다. 그들의 목적지는 레이캬비크 항. 그러나 작전이 개시되는 5월 13일까지도 병사들은 작전 대상지가 어딘지 알 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들은 이야기는 'Search and Destroy'였다. 그들이 모두 탑승한 후, 수송함대는 유유히 대서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기갑군단과 해병 8군단이 수송함대에 탑승했다. 그러나 그들은 레이캬비크로만 가는 줄 알았지, '그 곳'으로 가는 줄은 몰랐다.
한편 같은 해 5월 1일.
필리핀 전선은 꽤 급박했다. 민병대와 헌병대를 비롯한 7개 사단이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를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바탄 반도를 비롯, 라몬베이, 클라크 필드 등 필리핀의 주요 거점들이 전부 일본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래도 필리핀 군은 마닐라를 잘 지키고 있었다. 일본군의 수 차례 공격이 있었음에도, 필리핀 군은 그들을 막아냈다. 특히 이 날은 10번째 방어에 성공한 날이었다. 그 이후로 일본군은 마닐라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추었고, 필리핀 군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Stepstone 작전이 진행되는 통에, 별 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마닐라에서의 10번째 공방전. 결국 이 곳을 굳게 지키던 필리핀 군에게 10번째 승리가 찾아왔다.
하지만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서, 이 소식은 12일 뒤 벌어지는 Stepstone 작전에 의해 묻히고 말았다.
1941년 5월 13일 오전 9시 4분, 북부 해협.
미국의 순양함들과 수송함들이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이제 사령부로부터 신호만 하달되면 곧 공격할 태세였다. 오전 9시 35분, 미국에 있던 '그 곳' 대사관에는 선전포고문이 전달되었고 동시에 국무부와 전쟁부에도 전달되었다. 전쟁부에 하달된 선전포고문은 곧 해군부와 육군부에도 전달되었고, 오전 9시 58분에 북부 해협에 있던 모든 미군에게 전달되었다.
암호명은 '감자밭에 디딤돌을 놓아라'였다.
오전 10시 3분, 레이캬비크에 있던 '아일랜드 방면 사령부'는 레터케니(Letterkenny)에 대한 상륙을 지시했다. 미 해군 함포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12개의 기갑사단이 상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군은 그리 멍청하지 않았다.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그 시점에, 아일랜드 군 당국은 분명 레터케니 아니면 브레스트에 미군이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적중했고, 공격받자마자 지원병력을 급파했다. 결국 레터케니에 대한 아일랜드 1차 상륙은 실패로 끝났다.
레터케니에 대한 미군의 상륙. 수많은 함포사격과 전차들의 희생이 있었음에도, 이 해변은 뚫리지 않았다.
Lear 소장의 분투는 그저 아일랜드 군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첫 상륙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군 아일랜드 방면 사령부는 크게 당황했다.
대체 이 많은 부대로도, 수많은 함포사격으로도 그들을 뚫을 수 없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해병 8군단을 맡고 있던 반데그리프트(Vandegrift) 소장이 의견을 냈다. 상륙작전 훈련이 아예 되지 않은 기갑부대를 내세우지 말고 해병대를 먼저 선봉에 서게 해달라고. 그리고 이미 레터케니나 브레스트는 방어가 단단할 테니, 밑의 코크(Cork)를 들이치자는 의견을 냈다.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해병대를 믿기로 하고 아일랜드 방면 사령부는 코크게 대한 2차 상륙작전을 계획했다.
5월 24일 새벽 3시.
코크 항에 다다른 미군 함선들은 해변에 수많은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새벽에 기습공격을 받은 코크 방면 방어군은 허둥지둥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병 8군단을 앞세운 미군이 상륙을 개시했다. 더블린에서는 급하게 코크로 방어병력을 급파했지만, 이 역시 역부족이었다. 이미 코크 해안은 점령되었고, 해병대가 숨을 돌리는 새에 지원 온 아일랜드 군을 기갑부대가 격파하기 시작했다. 코크 전역에서 전투는 계속되었고, 상륙에 성공한 미군은 내륙으로 서서히 진격하기 시작했다.
5월 26일 오후 8시.
미군은 드디어 코크 전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들을 호위했던 수송함대는 다시금 레이캬비크 항으로 향했다. 후속부대를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 그 사이, 코크에 상륙한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패튼의 주도 하에, 아일랜드 전역에 대한 전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코크 전역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미군. 아일랜드는 어떻게든 이들을 바다로 몰아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이제 그들의 운명은 패튼과 그 휘하의 기갑사단에게 맡겨졌다.
6월 4일. 먼저 상륙한 부대가 전열을 완전히 가다듬었을 때, 후속부대가 도착했다. 패튼은 위임받은 권한으로 골웨이(Galway) 돌파를 시도했다. 기갑사단이 전진하자, 보병으로만 구성되었던 아일랜드 군은 지레 겁먹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어선이 돌파되었고, 결국 골웨이는 함락되었다. 그리고 그 주변 전역도 완전히 정리되었다.
6월 7일. 뒤에 도착한 후속부대가 더블린을 들이쳤다. 마침 골웨이를 방어하다가 실패해서 돌아왔던 아일랜드 군은 전열이 가다듬어져 있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미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고, 그날 밤 10시에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 시 청사에는 성조기가 펄럭이게 되었다.
6월 중순의 아일랜드 전선. 양 방면으로 진격한 미군 기갑사단의 약진으로, 아일랜드 군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해변에서 미군을 맞아 싸우던 그 기세는 이제 그들의 꺾인 깃발처럼 의미가 없어졌다.
1943년 6월 8일, 더블린.
레이캬비크에서 옮겨져 온 아일랜드 방면 사령부는 아일랜드 정부가 독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물론 그러기에는 독일로선 밑지는 장사였고, 개입할 가능성 역시 낮을거라고 판단했지만 이 전선이 빠르게 정리되지 않으면 독일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사령관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사령부는 2군단장인 엠빅(Embick) 소장에게는 레터케니를, 5군단장인 레어(Lear) 소장에게는 포터다운(portadown)을 공격,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6월 11일 정오.
레터케니 지방 청사에 성조기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블린의 사령부에는 갑자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감자밭. 암호는?"
"여기는 감자. 우편함(=레터케니)을 점령했다."
"수고했다! 이제 감자를 슬라이스 칩으로 만들도록 하겠다!"
레터케니와 포터다운에 진격한 미군. 이렇게 함으로써 아예 아일랜드 군의 퇴로망을 전부 차단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소탕작전 뿐. 아일랜드는 독일에게 한낱의 희망을 걸었지만, 그마저도 끊어져버렸다.
1943년 6월 11일 오후 3시.
골웨이에서 출발한 패튼의 부대는 슬라이고를 들이쳤다. 더블린에 주둔한 다른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패튼은 순조롭게 슬라이고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던 아일랜드 군은 무장해제 후 투항했다.
이튿날인 12일, 레어 소장은 중장으로 진급한 상태에서 벨파스트로 진격했다. 밤 8시. 벨파스트 내에 돌입한 레어의 기갑부대는 아일랜드 군의 저항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그리고 다음 날인 13일 오후 2시 23분, 벨파스트는 완전히 미군에게 장악되었다. 그리고 벨파스트에 있었던 아일랜드 정부 역시 완전히 진압되었고, 정부 고관들이 전부 체포되었다.
아일랜드의 운명을 결정한 벨파스트 공방전. 공방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일랜드 군은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벨파스트를 내주어야 했고, 그것으로 아일랜드의 운명은 끝을 맺었다.
1943년 6월 13일 오후 5시 14분.
아일랜드의 전역에 있던 라디오에서는 연설방송이 흘러나왔다. 정부 수반이었던 드 발레라(Eamon de Valera)의 육성이었다. 이 방송을 듣고 있던 아일랜드 국민들은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독일의 위협 혹은 협조를 하느니 차라리 미군의 통치가 낫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루즈벨트가 기만적인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발레라의 항복 선언에서처럼 아일랜드는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친애하는 아일랜드 국민 여러분. 우리 정부는 이제 미국 정부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 시간 이전까지 아일랜드 정부가 관리하던 모든 사회 제반 시설 및 제도는 미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운영되며, 아일랜드 전역의 치안은 미군 당국에서 지휘, 통제하게 됩니다. 이 방송을 듣는 국민 여러분들은 모두 미군의 치안 유지에 대해 전면적인 협조를 해 주실 것을 부탁하는 바입니다…."
미국의 아일랜드 합병 선언. 영국은 이를 약속대로 묵인했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독 성향의 아일랜드 정부가 있을 바에야 차라리 미국이 이곳을 점령해서 후방을 안정시켜주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그 날, 프랭클린은 이 사실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고했고, 노변정담을 통해서도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는 언론이든 노변정담이든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모든 통로에서 '나치의 만행에서 유럽을 지키려고 애쓰는 영국을 안심하게 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간의 아일랜드 정부가 친나치 성향을 보였고, 유럽에서 나치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에 미 군정의 아일랜드 통치도 끝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2일 뒤인 6월 15일 오후 5시.
하원에서 한 의원의 질타로 프랭클린은 잠시 당황해 했다. 아일랜드에서 미 군정을 '나치가 완전 소멸되는 때까지 진행한다'는 법안에 한 여성 의원이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2년 전, 대일 선전포고를 결의할 것을 요청했을 때 하원에 있던 단 한 명의 의원이 프랭클린의 요청을 거부했다. 389명의 의원들 중에서 반대표를 기꺼이 던졌던 사람은 몬태나 주 출신의 공화당 반전주의 성향 의원이었던 지넷 P. 랜킨이었다. 그 지넷 P. 랜킨이 이번에도 루즈벨트 행정부의 아일랜드 '침공'에 대해 질타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2년 전에 했던 그대로, 프랭클린을 향해 당당하게 소리쳤다.
"여성이기 때문에 저는 전쟁에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전쟁터에 보내는 일도 반대한다고 2년 전에 말했습니다. 저는 이번 행정부의 조치가 미국이 그동안 지켜왔던 평화의 원칙을 저버린 행동이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군정통치 법안에 대해 반대하는 바입니다."
수 분 간 논쟁이 오갔다. 그녀가 있었던 공화당 내에서도 논쟁이 있었고, 결국 수많은 논쟁 끝에 군정통치법은 통과되었다.
군정통치법이 통과되었지만, 이는 미국 내에서 일부 평화주의자들의 불평을 샀다.
몬태나 주에서도 반발의 움직임이 있었고, 일부에서는 파업 시위도 있었다.
그날 랜킨으로부터의 수많은 질타를 받아친 프랭클린은 밤 11시에나 되어서 백악관으로 향했다.
그는 타고 가는 차 안에서, 같이 타고 가던 홉킨스에게 지친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휴, 홉킨스. 난 그 의원이었기 때문에 지금 질타가 끝났다고 보네. 만약 엘레너였으면 1주일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있어야 했을 걸세."
- 7. 작전명 'Stepstone' 結 -
드디어 유럽전선입니다.
저번 편이 좀 지지부진했어서 걱정은 했었는데 다행히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회에서, 저는 '그 곳'이라고 표현하면서 여러분이 추측하게끔 여지를 열어두었는데, 나름 소기의 성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일랜드라는 답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답이 있었거든요. 스페인이라는 가능성 있는 오답도 있어서 꽤 기뻤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에 부응하도록, 다음 편도 최선을 다해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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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정말 명작이군요
41년이 저물고 42년이 찾아왔는데 41년에 보고받은 43년의 암살시도... 응?
필리핀 버티기쪽은... 묵념.
오타입니다. 항상 확인하는데, 잘못되어 있었네요..
미국은 삼면이 아니라 양면이 바다 아닌가요? 동부(대서양), 서부(태평양) 이렇게요.
새로운 환국이론 : 한반도미주설-미국반도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부해안도 있으니까요..
텍사스-플로리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도 왠지 3면이 바다라고 하면 반도 느낌이 나서...
스페인이 아니라 아일랜드였군요! 죄없는 아일랜드가 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지키는 병력이 별로 없길래 밀었다가 되려 당했죠.
역시 일본은 국력의 10%로 상대하는건가요(..)
5%로 상대중입니다ㅋㅋㅋ
기갑상륙; 그리고 어쩐지 주력함이 아닌 보조함으로 한것처럼 보인 함포사격? 민주주의 국가가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전포고 하는건 수치다라고 했던 그 의원님이신강...
그런 것 같네요.
함포사격 샷이 하필 샷 찍고 난 다음에 되버렸죠. 저는 항상 상륙전 때는 함포사격을 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