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풍림화산이라는 다케다 신겐의 4자병법, '풍림화산'을 들어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빽빽하게 불처럼 격렬하게 태산처럼 무겁게'라는 뜻을 가지는 4자병법입니다.
참고로 한 번 변변치 않습니다만 다케다 가문에 대해서 써 보겠습니다. 약간이나마 센코쿠(전국)시대에 대한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다케다 가문의 시조는 겐지(原)씨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겐지씨는 원래 일본천황가의 일족이었지만 서기 814년경 당시 천황가의 재정이 매우 나빠지면서 황족을 신하로 격하시키면서 지방에 분산배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겐지씨를 황족계열에게 하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케다 가문의 실제 시조는 '신라사부로' 요시미쓰 공이 제 1대 시조입니다. '신라'사부로 라는 이름부터가 이 사람이 신라의 유신계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온 깃발이 미하타(일장기와 비슷하게 생긴 둥근 해에 흰 바탕의 깃발)와 다테나시(갑옷)입니다. 이 두 신물을 두고 다케다 가 당주가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 다케다 가문의 규칙으로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다케다 가문은 서기 928년부터 약 200년간 조용히 가이국(현 야마나시 현)의 소영주로 지내는데 미나모토 가문과 헤이지 가문간의 겐페이 핫센(원평태합전)기인 1165년경부터 역사에 조금씩 등장하게 됩니다.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를 지지한 대가로 고슈(가이의 다른 명칭)의 구니나카(國中) 영주가 됩니다. 이 때가 약 13세기 초반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호조가문으로 싯켄, 셋쇼 정치로 넘어가는 시점입니다.
이후 일본의 남북조 시대가 되면서 다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무로막치 막부를 지지한 이 가문은
'오닌(應仁)의 난' 때 다시 동군에 참가하여 싸웁니다. (참고로 오닌의 난은 동군 20개국 16만, 서군 16개국 11만으로 1443년부터 1467년까지 일어난 일본의 내전입니다.)
15세기 말 다케다 노부토라가 16대 다케다 가문의 당주가 되면서 마침내 가이국의 군나이(郡內) 정복에 성공하여 가이국의 단독 다이묘가 됩니다. 이 때 22만석까지 영지 생산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또한 구로카와 금광을 개발하고 스스지가사키 고쇼를 만들어 일본에서 몇 안 되는 소규모 행정전문도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542년 다케다 하루노부이 아버지인 노부토라를 이마가와 가문으로 추방해 버리고 제 17대 당주에 오릅니다. 밑의 사극의 주인공이 바로 이 다케다 하루노부입니다.(다케다 도쿠에이진 신겐이라 출가 후 받은 법명이 더 유명합니다.) 1543년부터 시나노(현 나가노 현) 공략전에 돌입한 하루노부는 야마모토 간스케라는 미카와 출신의 명군사를 얻었고 휘하에 야마가타 마사카케,마사토요, 사나다 유키무라, 고사카 마사노부(가스가 겐고로), 아키야마 신자에몬등의 군단장을 얻어서 1550년경까지 시나노 대부분을 공략합니다.
시나노 공략전을 벌이면서 에치고 국(현 니가타 현)의 나가오 가게토라와 정면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나가오 가케토라가 바로 후에 우에스기 겐신이 되는 사람으로 고즈케국의 우에스기 노리마사(관동관령)의 양자가 되어서 우에스기 씨의 당주가 되는 사람입니다.
시나노 공략전을 치르면서 스와 가문을 시작으로 오가사와라 가문 (시나노 슈고), 운노가문, 고사카가문, 그리고 무라카미 가문을 잇따라 무너뜨리면서 시나노 영지를 확보합니다. 다케다 가문이 그렇게 시나노에 집착한 이유는 가이국이 22만 석의 생산력밖에 없는 소국이었지만 시나노국은 최소 50만석에 육박하는 동국 지역 중에 히타치나 무사시국에 맞먹는 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나노국은 4개 이상의 가문이 있어서 분열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쉬운 상대로 보였기 때문도 있습니다.
시나노 대부분이 다케다 가문에 들어가면서 에치고의 우에스기 마사토라(후에 우에스기 겐신으로 출가)는 1553년부터 1567년까지 14년동안 5회에 걸쳐서 시나노 북부의 가와나카지마에 진격, 결전이나 대치를 하게 되는데 특히 4차전은 하치만바라 혈전이라 하여 전국시대 당시, 나가시노 철포전 이전 전투 중 최대규모의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자세한 것은 다시 올립니다.)
1560년 가이-스루가-사가미 3국동맹(다케다-이마가와-호조 가문)의 일원 중 하나이던 이마가와 요시토모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기습을 당해 패사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후 다케다 가문은 에치고, 관동방면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스루가 진출에 전력을 기울여서 1572년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 군을 격파하고 스루가 확보에 성공합니다. 다케다의 스루가 진출 의도는 바다로의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후, 다케다군은 총 2만 7천으로 이루어진 서정군을 편성, 미카와의 나가시노성까지 진격하였지만 다케다 신겐이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향년 50세로 병사합니다. 그 후 스와 가문의 공주가 낳은 서자인 스와 시로 가스요리(다케다 시로 가스요리로 개명)이 후계자가 되자만 적자인 요시노부를 스루가 정복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할복시킨 사건도 있어서 후계 승계에 아나야마 노부키미 같은 정통 다케다 가문의 일원들이 불만을 품습니다.
1573년부터 75년 초반까지 다케다 가문은 미노, 스루가, 도토미 등을 공격하면서 동 도토미의 다카텐진성을 함락시키는 쾌거를 올리지만 이미 다케다 가문이 자랑하는 구로카와 금광이 고갈되는 등 경제적으로는 이미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1575년에 있는 나가시노 철포전에서 오다 군의 철포 3천정을 3열로 나누어 사격하는 3단철포술에 기마군단 1만이 전멸하는 대패를 당합니다.
게다가 가스요리가 신겐 군단장들을 전혀 신임하지 않았고 지나치리만큼 무모한 정책을 펼치는데 대표적인 예가 신겐이 체결한 3국동맹을 우에스기측의 상속분쟁에 개입하면서 우에스기 가게카스를 지원하는 대가로 동 고즈케국을 받아서 호조가문의 우에스기 가게토라를 죽입니다. 이에 격분한 호조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대 다케다 공수동맹을 1581년에 체결하였고 오다측이 기소 요시나가(겐페이핫센기의 또 다른 미나모토 가문계열의 미나모토 노 요시다카의 후예)를 도쿠가와측이 아나야마 바이세스(아나야마 노부키미의 법명)을 끌어들이면서 1582년 2월 공격을 감행하였고 결국 4월이 채 못되어서 다케다 가스요리 가족이 할복자살하면서 다케다 가문은 끝이 납니다.
미하타, 다테나시가 다케다 가문의 양대 보물이었고 다케다 신겐 대에 와서야 풍림화산의 깃발이 쓰이고 또한 스와 대명신의 깃발도 채용합니다. 후에 다케다 가문이 패망한 직후에 오다 노부나가가 미하타, 다테나시에 욕심을 내었고 수색 하다가 '혼노지(本能寺)의 변'으로 인해 급사한 후, 도쿠가와 가문이 다시 재수색에 나섰지만 역시 실패, 대신 다케다 가문의 유신을 많이 채용해 줍니다. (다케다 신겐의 5번째 동생도 이 때 도쿠가와 가문의 하타모토가 됩니다.)
첫댓글 참고로 야마모토 간스케의 실존에 대해서는 1969년 북해도에서 야마모토 간스케가 받은 서장과 그가 쓴 글이 발견되어서 실존인물이었음이 확인 되었습니다. 또한 16세기 초, 미야모토 무사시의 선배 검객이라 할 수 있는 스카하라 보쿠덴(가시마, 가토리 신류 검술의 창시자, 가시마 지역 소영주)의 제자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첫댓글 참고로 야마모토 간스케의 실존에 대해서는 1969년 북해도에서 야마모토 간스케가 받은 서장과 그가 쓴 글이 발견되어서 실존인물이었음이 확인 되었습니다. 또한 16세기 초, 미야모토 무사시의 선배 검객이라 할 수 있는 스카하라 보쿠덴(가시마, 가토리 신류 검술의 창시자, 가시마 지역 소영주)의 제자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사부로 였기 때문에 신라의 후예는 아닙니다만 미나모토 요리요시의 아들 요시미쓰가 이름을 신라사부로로 바꾼 것은 그가 신라선신당에서 관례를 올렸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 신라라는 것이 붙인 것이지 그가 신라의 후예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닙니다 -_ -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전 9년의 전쟁(1051~1062년에 걸쳐 동북지방에서 일어난 아베安倍씨의 반란을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토벌한 것)'에서 승리한 이후 그의 셋째 아들인 요시미쓰가 13세가 되자 신라선신당에서 성인식을 올리고 그의 이름을 신라사부로로 개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