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 14일은 한산대첩 432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혹은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으로 불린다.
이 전쟁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통영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수군이 학익진을 펼쳐 왜수군 을 크게 무찌르고 대승한 해전이다.
한산대첩은 임진왜란기 첫 번째의 대첩이며, 조선수군이 이룬 쾌거였다.
다음은 육전에서 이룬 1592년 10월의 진주대첩(晉州大捷)이 있고, 1593년 2월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이 있다.
이 셋을 임진왜란 3대첩이라 하며, 한산해전은 명량해전, 노량해전과 함께 이순신이 이룬 3대첩이라 부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쟁사의 3대첩에 속하며, 기원전 492년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 1588년의 ’칼레(Calais) 해전‘, 1805년의 ’트라팔가르(Trafalgar) ‘ 해전과 함께 1592년의 ’한산도 대첩‘을 ‘세계 4대 해전’이라 한다. 이 해전들은 세계 해전사에 가장 위대한 승리로 평가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순신장군께서 왜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한산도 바다까지 가게 되었으며, 왜적들은 어찌하여 수십 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이끌고 견내량까지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고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한산대첩하면 이순신, 이순신하면 학익진 전법 그리고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북선과 판옥선의 활약으로 왜수군 을 섬멸하였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는 정보를 알려주었던 미륵산 목동 김천손을 아느냐고 물어 보면 모른다고 한다.
영화 ‘한산’에서도 김천손은 나오지 않는다.
김천손은 적어도 한산대첩에 있어서는 분명 이순신 다음으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그러나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목동 한사람을 기억할 역사가 있었겠는가.
이순신장군이 1592년 6월 10일 제2차 출전을 마치고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와 다음해전을 위하여 전선을 정비하며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점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서 일본군선 10~30척이 출몰한다는 첩보를 받게 된다.
이에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일본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억기의 전라우수군과 7월 4일 합류하여 작전계획을 논의한 다음 6일에 제3차 출전을 감행하였다.
이날 전라도 함대가 남해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군과 합류하였는데, 여기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연합함대가 결성되었다.
연합함대의 전선은 판옥선 55척과 거북선 2척 등 57척이었다.
한편 초기 해전에서 연패 소식을 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육전에 참전하고 있던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히루, 쿠키요시타카, 가토오시아키 등에게 육전에서 내려와 해전을 준비하고, 해상보급로 확보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제거를 위해 일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와키자카는 이들과 합류하지 아니하고 먼저 전투태세를 갖추어 7월 6일 단독으로 웅천에서 출전을 감행하였다.
이때 그가 거느린 전함은 총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으로 해전에 참가한 일본함대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이순신 연합함대는 출전을 감행한 6일에는 진주 창선도에서 밤을 지세우고, 이튿날인 7월 7일에는 동풍이 크게 불어 항해를 하지 못하다가 저녁 무렵에야 통영 미륵도에 있는 당포(당시에는 고성에 속하였다)에 머물렀다.
이때 미륵산 목동 김천손이 뛰어 내려와 이순신에게 “적의 대. 중. 소선을 합하여 70여척이 오늘 하오 2시쯤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천금 같은 귀중한 정보였다.
이순신이 주둔하고 있던 당포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거제도의 견내량과는 정반대편에 있어 일본수군의 출현을 전혀 알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곳이다.
일본수군 역시 우리조선수군의 동태를 알 리가 없었다.
결국 한산해전은 가덕도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수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출전한 이순신 연합함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제거하기 위해 출전한 와키자카 야스히루의 왜 수군이 우연 찬케 이곳 통영 일대에서 마주치어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펼친 해전이라 할 수 있다.
한산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목동 김천손의 제보에 의하여 조선수군이 왜 수군의 함선세력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에 왜 수군은 조선수군의 존재조차 전혀 알고 있지 못한데 있었다. 당시 김천손의 첩보가 없었다면 우리역사에 ‘한산대첩’이란 세계 4대해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야 말로 천우신조라고 할 것이다.
김천손의 정보에 힘입어 이순신은 밤새워 작전 계획을 수립하게 되고,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저 유명한 학익진법은 이날 밤 계획된 비장의 묘책이었다.
7월 8일 이른 아침에 왜 수군이 정박하고 있는 견내량으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이순신은 조선수군의 주력함대는 숨기고 먼저 대여섯 척을 내 보내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결국 학익진을 펼쳐 왜 수군을 대파 하였다.
완벽한 승첩이었다.
한산대첩으로 이순신은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으므로 써 왜적들의 사기를 꺾고 전선을 후퇴시켰다.
우리는 박지성을 세계적 축구스타라고 극찬한다.
그러나 그를 스타로 만든 숨은 주역은 다른 아닌 박지성이 골을 잘 넣을 수 있도록 그에게 멋진 패스를 해준 선수들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박지성의 이름도 인구에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박지성을 도운 패스맨 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일등만을 기억하면 그만이다.
어느 개그 프로에서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 일갈하지만, 우리에게는 2등을 기억 할 여력이 없는 것 같다.
이 세상 역사를 돌아보면 크고 작은 성공에는 언제나 그를 도운 2등이 있다.
한산대첩의 영웅 이순신을 도운 미륵산 양치기 김천손의 숨은 공적은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 실려 길이 전해 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첫댓글 네~~
참 좋으신 말씀입니다,,
아침에 좋은 글 접하게 되어
제 마음도 참 좋슴다ㅎ
(앞에 나타나지 않고,,보이지않은,,숨은 공로(자)가 우리에게 힘을 주지요)
고맙습니다^^*
답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