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조선 초기 도학의 정립 - 벽불론(闢佛論)과 경학(經學) 1) 정도전의 저술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고려 말 급진적 개혁론의 도학자로서 조선왕조를 건립하는 혁명에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왕조의 통치체제를 도학이념 위에 정초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인 34세 때(1375) 정부의 친원(親元) 정책을 반대하다가 나주(羅州)로 유배를 갔었는데, 그 곳에서 「심문천답편(心問天答篇)」을 저술하였다. 1392년에 반혁명파의 공격을 받아 예천(醴泉)에 투옥이 되었으나 그 해 이방원(李芳遠)(태종)에 의해 정몽주가 제거되자 곧 풀려 나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세우는 개국공신이 되었다. 53세 때(1394)는 조선왕조의 체제를 설계하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었으며,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는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저술하였다. 이듬해 그는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그가 저술한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조선 초기의 도학적 경세론을 체계적으로 구상하였던 대표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1398년 8월에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직전인 그 해 4월에 체계적인 불교 비판서로서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였다. 2) 벽이단론(闢異端論)의 전통 정도전의 이단배척론을 검토하기에 앞서 유교사 속에서 나타나는 이단배척론의 전통을 살펴보자. 순임금을 상고대의 성왕(성인의 덕을 지닌 제왕)으로 들면서, 『중용』에서는 순이 성왕으로 받들어질 수 있는 덕을 표현하여, “양쪽 극단을 장악하고서 그 중용의 도를 백성들에게 쓴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두 극단(양단, 兩端)이란 유교의 참된 도(정도, 正道)인 ‘중용’의 원리에서 동떨어진 이단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곧 유교에서 말하는 ‘이단’이란 원래 지나친 것이나 모자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임금은 바로 이 양극단을 포용하여 종합한 ‘중용’ 정신을 발휘한 성인인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따름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이 말은 좀더 포용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인데, 도학의 전통적 해석은 “이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따름이다.”라고 하여 이단에 대한 거부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맹자는 전국 시대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으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들고 있다. 맹자는 양주의 개인주의 내지 자기중심주의적 입장인 ‘위아설(爲我說)’에 대해 자신만 있고 국가적 통치질서가 외면되어 임금의 존재가 무시된다 하여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무군(無君)’의 도(道)라 규정하고, 묵적(墨翟)의 사회 전체를 지향하는 입장인 ‘겸애설(兼愛說)’에 대해, 사회 전체만 강조되어 부모의 존재가 소외되는 것이라 하여 부모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무부(無父)’의 도(道)라 비판한다. 따라서 맹자는 “양주와 묵적의 도가 그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하여 적극적 배척 입장을 밝히고 있다. 또한 당대(唐代)에 한유(韓愈)는 819년에 「불골표(佛骨表)」라는 상소를 올려 당시 황제가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것을 비판하면서, 불교는 오랑캐의 법일 따름이라고 배척하였다. 송대(宋代)에 와서 정자와 주자에 의해 도학의 이단배척론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는데, 특히 그 시대의 사상을 주도하고 있던 불교와 노장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정명도(程明道)는 불교를 상달(上達, 근원적 세계에 통달)만을 추구하고 하학(下學, 현실적 문제에 대한 공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여, 불교가 관념적 문제나 내세(來世)의 문제만을 따지고 현실의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불교에서 내면의 경건성(경이직내, 敬以直內)은 있지만 반면에 사회적 정당성(의이방외, 義以方外)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주자는 불교가 인륜을 전멸시켰다 하고, 특히 선(禪)불교는 도덕성의 가치 근거인 의리를 다 소멸시킨다고 비판하였으며, 또한 불교의 논설은 ‘이치에 가까워 보이지만 진리를 어지럽힌다’고 하여 불교에 미혹되기 쉬움을 경계하여 비판하였다. 우리 나라의 유교전통에서도 불교 비판의 전통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삼국시대 신라의 강수(强首)는 “불교는 세상 바깥의 가르침이고 나는 세상에 있는 사람이므로, 세상 속의 가르침인 유교를 공부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불교가 현실의 세상을 벗어난 초월적 가르침임을 지적하였다. 고려 초기의 최승로(崔承老)는 「시무 28조(時務 28條)」의 상소에서, 불교를 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인데 이는 자기 덕을 닦아 다음 세계의 극락을 위한 것이라 하고, 유교를 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현실세계의 문제라 하여 대비시킴으로써 현실세계의 문제가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내세를 추구하는 불교의 비현실성을 비판하고 있다. 고려 말의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당시의 불교 교단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불교의 여러 종파인 오교양종(五敎兩宗)이 이익을 도모하는 소굴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부처가 큰 성인이라 인정하고, 따라서 부처가 좋아하고 싫어함이 우리 인간과 같을 것이므로 이처럼 타락한 불교 교단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하여 부처의 눈에도 당시 불교 교단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 비판하였다. 더 나아가 정몽주(鄭夢周)는 불교와 유교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도의 개념에서 찾았다. 유교의 도는 모두 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평상한 도이며 초월적이고 특이한 도가 아닌 반면에 불교의 도는 친척을 다 저버리고 남녀를 끊고 홀로 수행하며 육식을 하지 않는 것임을 지적하여, 이러한 불교는 일상인이 따를 수 없는 도라 규정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은 불교에서 논하는 심성의 이치는 모두 근본이 없으며, 궁극적 세계 또한 없다고 하여, 불교의 ‘공(空)’이나 ‘무(無)’의 근본개념을 공허한 것으로 비판하면서 불교를 진리에서 아주 멀어져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불교가 ‘이치에 가까워 보이지만 진리를 어지럽힌다’고 하여 이치에 가깝게 보이는 점을 인정한 비판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3) 정도전의 불교배척론과 『불씨잡변(佛氏雜辨)』 정도전의 이단배척론과 관련된 저술로는 『불씨잡변』과 더불어 「심문천답편」과 「심기리편」이 있다. 여기서 「심문천답편」은 본격적인 이단비판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불교와 도가의 대답과 구별되는 유교의 입장에서 천인(天人)관계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으며, 「심기리편」에서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불교의 중심개념을 ‘심(心)’으로, 도교의 중심 개념을 ‘기(氣)’로 규정하여 서로 상반된 모순을 들어 비판하면서 유교의 중심 개념인 ‘이(理)’에서 심과 기를 포괄하고 지양시킴으로써 유교의 우월성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불씨잡변』에서는 불교의 교리를 조목조목 따지며 비판하여 조선시대 불교비판이론의 가장 치밀한 체계를 제시하였다. 도학체계 속에서 ‘벽이단론’은 도학이 그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안으로는 도통(道統)을 정립하여 도학이념의 일관적 해석을 유지해 가고, 밖으로는 도학과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함으로써 자기 확립을 하는 논리이다. 정도전은 조선사회에 도학의 정통성을 정립하기 위해 정통론적 신념에서 고려시대를 주도해 왔던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데 가장 적극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불교비판이론을 체계화한 『불씨잡변』의 ‘벽불론(闢佛論)’은 크게 세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 첫번째는 호교론(護敎論)의 입장에서 이단에 대해 도학이념의 진리를 어지럽히고 도(道)를 해친다는 측면에서 배척하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윤리적인 문제로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죄목을 붙여 ‘부모를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반인륜적 사상이라 규정하여, 가족과 국가라는 유교적 기본 사회공동체의 윤리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비판하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중국 전통정신 속에서 ‘중화(中華)’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중화주의(中華主義) 입장에서 불교를 오랑캐로 규정하여 이단을 배척하는 것이다. 『불씨잡변』은 모두 19편[권말비설(卷末備說)을 합하면 20편]으로 되어 있는데, 정도전 자신은 19편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불교 교리에 대한 이론적 비판의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적 비판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그는 앞부분인 이론적 비판의 부분을 가리켜 『불씨잡변』(15편)이라 하고, 뒷부분인 역사적 사실의 비판은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 좀더 세분해 보면 근본교리의 비판, 윤리적 문제의 비판, 신앙적 문제의 비판, 유(儒) · 불(佛)의 비교와 이단론 및 역사적 사실을 통한 비판 등 다섯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근본교리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보면 인과론(因果論)의 문제, 심성론(心性論)의 문제 등을 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심성론적 문제를 보면 불교에서는 심(心)과 성(性)의 관계를 때로는 일치시키기도 하다가 때로는 분리시키기도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것은 심을 이원화시키는 것이라 본다. 또한 불교에서 진(眞)과 가(假)라는 두 개의 세계를 설정하는 것은 유교의 입장에서 보면 본체와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이 두 세계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세계로서 연결되고 소통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도전은 윤리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곧 작용과 성(性)의 문제, 도와 기(器)의 문제, 인륜에 대한 비판문제를 다루었다. 나아가 그는 불교의 ‘자비’ 개념을 비판하면서, 불교가 곤충 등 미물에 대한 자비는 이야기하면서 자기 부모에 대한 자비를 저버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유교는 가까운 데서 멀리 나가는 방법적 순서를 중시하고 있는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다음으로 신앙적 문제에 대한 비판을 보면 윤회(輪廻) · 수행(修行) · 지용(智勇) · 화복(禍福) · 선교(禪敎)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유 · 불의 비교 문제에서도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배척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 사실을 통한 비판에서도 어느 왕조에서 불교를 숭배했던 왕이 과연 복을 받았는지 재앙을 받았는지 고증함으로써 불교신앙이 국가나 군왕에게 복이 되지 못하였음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불씨잡변』는 크게 보면 세 가지의 논리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첫번째로 불교가 추구하는 근원적 세계는 허(虛) 내지 무(無)를 근본으로 하는 공허한 세계라는 것이다. 곧 그는 불교에서는 ‘허’와 ‘무’의 세계를 추구하여 허무에 빠지지만 유교에서는 ‘허’이면서 ‘유(有)’인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는 ‘적(寂)’을 추구하여 ‘멸(滅)’(적멸, 寂滅)의 공허함에로 나가는데, 유교에서는 ‘적’을 추구하면서도 ‘감(感)’(감응)하여 현상세계로 나오는 것이라 한다. 또한 불교는 근본적으로 ‘허’를 가르치지만, 유교는 ‘실(實)’을 가르치는 것이라 대비시키고 있다. 이처럼 그는 불교를 ‘허학(虛學)’이라 비판하면서, 유교를 ‘실학(實學)’이라고 밝하고 있다. 두 번째로 불교를 이원론으로 양극화시키거나 일원론으로 혼동시키는 것이라 규정하여 비판하고 있다. 먼저 불교의 이원론적 분별에 대한 비판이다. 곧 불교는 세계를 두 개의 영역으로 분할시켜 놓고 있는데, 그에 반해 유교는 하나로 연속시켜 놓고 있다고 밝힌다. 또 불교의 일원론적 융합의 입장에 대한 비판이다. 불교는 작용과 성품을 혼동시키고 심과 성의 개념을 혼동시키며,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말하는 경우처럼 ‘즉(卽)’이라고 하여 두 개의 상반된 존재를 완전히 혼합하여 하나로 만들지만, 이에 비해 유교에서는 그 둘 사이의 조화와 통일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정도전은 불교를 어느 쪽으로나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고, 배척의 입장이 전제되어 긍정적 이해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는 도학적 벽불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정도전의 불교비판론 자체는 도학의 벽이단론적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비판논리가 공정한 타당성이 있는지에는 문제점이 많으나 그가 도학적 정통론을 불교비판론으로 관철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불교비판이론은 주리론(主理論)의 성리학적 입장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리학이 벽불론으로도 연결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도전은 벽불론의 저술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는 혁명에 참여해서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의 전적인 신임을 받아 병권(兵權)을 잡고 사회개혁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천 년의 전통을 지닌 뿌리 깊은 불교 교단의 기반을 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통해서 전승되어 온 불교를 국가권력의 개혁정책으로 하루 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상 조선시대 전반기에는 도학자들의 강경한 불교 비판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부터 여전히 불교를 옹호하는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태조는 승려를 국사왕사(國師王師)로 모셨으며, 세종과 세조도 임금으로서 불교 옹호의 입장을 취하였다. 세종은 유신(儒臣)들과 태학생들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교 서적을 간행하였다. 더구나 임금이 직접 찬불가(讚佛歌)를 짓기도 하였던 일이 있을 만큼 조선왕조의 전반기에는 호불적(好佛的) 태도와 억불적(抑佛的) 태도가 병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도학의 불교비판론과 조선왕조의 왕실이 지닌 불교정책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도전은 자신의 벽불론적 신념을 관철하는 데 철저히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이 불교의 배척을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벽불론을 이론적으로 정립시켜 놓으면 그 이후로도 그 정신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전반기를 통해 도학자들에 의한 벽불론적 입장은 계속 강화되어 갔었다. 예를 들면 중종 때 왕실에서는 여전히 불교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학생들은 계속해서 상소를 올리거나 동맹휴학을 하는 등 불교배척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태학생들은 태조 왕비의 원찰(願刹)인 정릉사(貞陵寺)에 방화를 하는 등 극단적 행동까지 서슴없이 하였던 것이다. 중종 때를 고비로 하여 불교 비판은 일단 정리가 되었으니 정도전의 의도한 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불교의 승려들 속에서는 도학자의 불교비판론에 맞서서 불교옹호론, 곧 호불론(護佛論)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불교인의 입장은 유교에 대한 비판적 반박이 아니라 삼교합일(三敎合一) 내지 삼교융화(三敎融和)의 논리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함허당 득통(涵虛堂 得通)은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유 · 불 · 도 3교의 말은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 주장하여 서로 일치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도가에서 ‘무위이무부위(無爲而無不爲)’(함이 없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다)라 하고, 불교에서 ‘적이상조(寂而相照)’(고요하면서 항상 비춘다)라 하며, 유교에서 ‘적연부동, 감이수통(寂然不動, 感而遂通)’(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다가 감응하여 소통한다)이라 하는 말이 모두 같은 것이라 제시하고 있다. 함허당의 저작이라 전하는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에서도 3교의 도는 모두 마음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교는 자취(적, 迹)의 현상세계를 추구하고, 불교는 진리(진)의 초월적 세계와 합치하기를 추구하며, 도교는 그 중간에서 양쪽에 걸쳐 연결하는 것이라 하여 3교를 그 위상에서 계층화시켜 불교의 우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서산대사의 『삼가귀감(三家龜鑑)』에서도 삼가(유 · 불 · 도)의 도는 각각 견해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지만 깨닫게 되면 모두 다 이런 구분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고 진실에 있어서는 하나의 통일된 도라고 밝힘으로써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융화론은 정도전이 「심기리편」에서 유교의 이(理)를 통해서 불교의 심(心)개념과 도교의 기(氣)개념을 극복하고 통합한다는 지양(止揚)의 논리와는 좋은 대조를 보여 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