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아....!
이 목소리는...?
"그만둬. 은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수빈이 열려진 문에 서서 은결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다, 다가오지마!! 오면.. 내려칠거야!!"
말을 더듬으며 나를 향해 다시 방망이를 들어올리는 은결.
"은결...넌 못해... 난 알아.. 넌 절대 은율이를 다치게 하지 못해."
수빈이 녀석을 향해 계속 말하고 있다.
"왜? 왜 내가 못해?"
"난 알아. 은결아... 내 말 들어.
네가 뭔가 크게 잘못 알고 있는거야."
"웃기지마 그런 거 없어... 난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이 계집애와 너! 둘 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왜..? 도데체 뭘 용서할 수 없다는 거야? 은율이가 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죄?"
은결이 비웃는 얼굴로 나를 힐끗 돌아다본다.
"지금 죄라고 물었어?
영원히 함께 하자고 약속한 큰 형을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버린 여동생을
잊어버린 형이 죄를 몰라서 물어?"
어...?
큰 형...? 여동생?
그, 그건 또 무슨 소리...?
"죽여버릴테야! 이 계집애...
진짜 은율이도 아니잖아.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잖아?
은율이의 심장을 가져가고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뻔뻔스럽게 혼자 잘났다고 살고 있는 이년에게서 은율이를 되찾을테야!!
은율이의 심장을 되찾을테야!!"
심장...?
기억...?
대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구의 심장을 가지고 무엇을 기억해내야 한다는 거야?
"남궁 은결!! 정신차려!!
여기 한 은율은 아무 상관이 없어!!
니가 잘못 알고 있는거야!!"
수빈이 외치면서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한 은율이 우리 은율이 심장을 이식받은 게 아니야!
한 은율은 그 수술을 집도한 의사 선생님의 딸일 뿐이라구.."
뭐..라..구..?
"선생님이 간경화로 수술 받으시러 미국에 가시면서
은율이를 부탁해오신것 뿐이야..."
뭐? 간경화...? 수술...? 아버지가..?
"전에 내가 수술 받았던 학교의 전문 병원에 입원하셨구..."
나를 향한 수빈의 말에 느닷없이 벼락을 맞은 듯 내가 휘청인다.
"괜찮아 선생님은... 생각만큼 심각한게 아니어서 약물치료만으로도 나으신대.
어쨌든 너, 고3인데 영향받으실까봐 두 분만 치료차 떠나신거야.
나한테 간곡히 부탁하셨어. 너 잘 좀 부탁한다고..."
그게... 정말......?
"시끄러워!!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그럼, 내 동생 은율이는 뭐야?
은율이는, 은율이 심장은 어디 갔어?"
전혀 납득하지 않은 은결이 다시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다 들었다고! 수녀님들이 이녀석 아버지랑 숨어서 떠드는 소리 들었단 말이야!
고맙다고, 은율이도 자기 땜에 한 생명이 살수 있어서 행복할 거라고!! 개뿔!
대체 누가 누구땜에 행복하단 말이야!!"
숨도 쉬지 않는듯 부르짓는 은결,
그 눈에 번득이는 안광이 너무나 무서운데,
"그게 아냐..."
"그때, 두분이 하신 말씀은 여기 은율이를 지칭한 게 아냐..."
수빈이 중얼거렸다.
"은율이의 심장은...
심장은, 여기 들어있다구!!"
수빈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자신의 셔츠를 풀어 헤쳤다.
번쩍!
창밖의 번개에 수술자욱이 도드라진 맨 가슴이 번쩍인다.
"여기 상처 보이지?
이 수술자국이 보이지?
이 안쪽에 은율이의 심장이 들어있단 말이야!!"
뭐, 뭐라고...?
은결이 방망이를 떨어 뜨린다.
충격적인 사실에 넋을 잃은 듯한 은결이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선채
부르짖었다.
"뭐.... 라...구..?"
"거짓말!! 믿을 수 없어! 형이 하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
울부짖던 녀석이 서서히 자리에서 무너진다.
"그럴리가 없어! 내가 분명히 봤어.
이 녀석이 아버지와 함께 매년 은율이를 찾아오는 걸 봤단 말이야!"
거세게 부정하던 은결이 거의 울기 시작했다.
"절대 헤어지지 말자고 했잖아? 금방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잖아?
은율이는 다 죽어가는데 전화 한통도 하지 않고는...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들려줄려고 가까스로 건 전화에
형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끊어 버렸잖아?
은율이가 얼마나 슬프게 죽었는지 알아?
은율이가 사고전에 형을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알아?
근데 형은 돌아와서는 고작 저런 계집애한테나 빠져가지구는?
저런게 이름빼고 은율이랑 뭐가 닮았어?
웃는게 약간 닮았다구 저게 은율이가 될수있어?
죽어버린 은별이가, 그토록 서럽게 죽어버린 은율이가 다시 돌아올수 있냐고...!!"
은결의 부르짓음이 꺼이 꺼이 통곡으로 변한다.
모두 형 잘못이야. 형 잘못이야...
방망이를 놓고 울고 있는 은결을 향해 녀석이 다가간다.
"그래.. 은결아.. 내가...내가 잘못했다. 은결아... 형이, 형이 정말 잘못했어.
다, 형 잘못이야... 다 내가 못났던 탓이야..
건강하지 못하고 나약해서 너희들을 지켜주지 못한 전부... 내 탓이야.
은율이가 그렇게 된지 정말 몰랐어..
네가 전화 걸어왔을 때, 형도 전화를 받을 수 없었어...
두번째 수술마저 실패했었거든.
그땐 형도 다 죽어가고 있었어. 정말이야.
내가 전화를 받을 수 있었으면 왜 받지 않았겠니... "
말을 하는 수빈도 거의 울고있다.
"나중에, 나중에 은율이 소식을 알았다.
이식 수술 마치고 회복기 지난 다음에... 은율이가 뇌사로 죽고
그 심장이 비행기로 공수되어 세번째 수술을 통해 내 몸에 심어졌다는 것도
회복기간이 끝난 다음에야 알았어..."
꼼짝도 않고 듣고 있는 내 뺨 위로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수빈이 목숨보다 사랑했다는 여자애는 사실 그들의 여동생이고
그리고 그 여동생의 심장이 수빈에게 이식되었다...
그리고 그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우리 아버지였다...
그제야, 그동안의 의문이 조금씩 풀린다.
왜 그렇게 은결이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문득, 그 신문기사...
내가 수빈과 친 남매라는...
내가 동생의 심장을 이식받았다고 믿고있던 은율의 짓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잊혀졌던 어린시절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마치 오래된 드라마에서나 본것같던 장면들이
사실은 아주 어린시절 기억속에 남겨진 진짜 기억이었다.
녀석이 데려간 고아원에서 꾸었던 꿈에서 만난 작은 소녀...
이제야 그 아이가 누구였는지 생각이 난다.
어린시절 아빠를 쫓아 찾아가던 작은 고아원에서 만난,
친구하자고 손을 잡고 뒷터로 뛰어 나가던 커다란 눈의 검은머리,
작은 소녀...
'큰 오빠가 그러는데.. 우리 엄마, 아빠는 우주여행갔대...'
속삭이던 작은 소녀...
그리고 이후 어렴풋한 기억 속에 아빠의 손을 잡고 찾아가던 작은 공원..
중학교 들어갈 무렵까지 찾아가던 작은 항아리가 가득했던 집이 있는 공원이
아마도 납골공원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몰래 뒤를 밟아 집에 찾아와
무언가를 내 놓으라고 떼를 쓰고 울며 눕던 낯설지 않던 남자아이.
데릴러 온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가며
내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울부짖던 그 남자아이가...
남궁 은결이었구나....
"근데.. .왜 돌아와서 날 찾지 않았어..? 응, 왜 날 찾지 않았어?"
은결이 울면서 수빈을 향해 다그치고 있다.
"은결아... 난 네가 날 기억 못하는 줄 알았어.
천사의 집에 찾아가서 제일 먼저 너를 찾았어.
근데 수녀님이 그러시더라.
너 나 미국가고 바로 나영이네 아버지가 데리고 가셔서 다 잊고 산다고
은율이 죽고나서 이상해져서 병원에 입원하고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좀 괜찮아져서 정말로 다 잊고 새집에서 잘 사는 모양이라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찾아가냐?
은율이 땜에 미쳐서 자살시도하고 그랬다는데
이제 다 괜찮아졌다는데 널 어떻게 찾아 가냐구?"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빈의 목소리도 꺽꺽 막힌다.
"그러니, 제발 이 형을 용서해다오.. 모두 내 잘못이야.
제발... 은결아.
아니, 날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이겨다오.. 응?
내가 이렇게 빌께.. 제발 지난 상처를 이기고 행복해지면 안되겠니?
제발..."
주저앉아 우는 은결을 끌어안은 수빈이 운다.
눈을 크게 뜨고 넋이 나간든 바라보고만 있던 내가 비척비척 그들을 향해 걸어간다.
마치 오랜 기억속에 남겨져 있는 그 슬퍼보이는 어린 소녀가
은결과 수빈이 목숨보다 사랑했던 누이가
마치 그들을 향해 나를 이끄는 것처럼...
"은율아.. 은율아.."
하고 오열하는 은결의 등에 내 팔을 두른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은율아.. 은율아.."
울부짖는 소리가 수빈의 목소리인지 은결의 목소리인지...
그들이 나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사랑했던 여동생을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사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가엾은 이 두 형제를 안아주고 싶을 뿐이었다.
오열하는 은결과 수빈을 향해 팔을 뻗고
마치 내가 오래 전에 죽었다 되살아온 그들의 누이인 것처럼
아니 그 오랜 옛날 어린 소녀가 되어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오래오래 안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래 오래...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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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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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0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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